“왜? 각방 쓰기 싫어졌어?”연도진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자뻑.”김시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다이닝룸으로 향했다.부엌 밖에 있는 다이닝룸은 정말 넓었다. 바닥에는 정교한 문양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거대하고 둥그런 식탁에 열 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있었다.지형 때문에 남쪽에서 들어오는 문은 1층에 위치해 있었고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는 어두운 밤 경치가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보일 듯 말 듯 한 강물의 물결이 고요한 달빛에 비쳐 반짝였다.역시 돈 많은 사람이 뭘 좀 즐길 줄 아네.저녁 메뉴는 죽과 반찬 고기 요리와 채소 요리 두 가지였다.소고기 요리와 버섯요리였다.소고기가 육질이 좋은 것이 신선한 게 느껴졌다. 청양고추와 함께 요리한 덕에 강렬한 고추 냄새와 매운맛이 김시연의 입맛을 확 자극했다.그녀는 곧바로 젓가락을 옮겨 옆에 있는 버섯요리를 집어 들어 입안에 넣었다.연도진이 물었다.“맛있어?”김시연이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안에 있던 음식물을 삼키고 말했다.“괜찮네. 네 요리실력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맛있으면 됐어.”김시연은 또 버섯 한 가닥을 집어 집 안에 넣었다.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고개를 들어 맞은 편에 앉은 연도진을 노려보았다.김시연은 연도진이 자신에게 다른 목적을 품고 있는 것이라 의심했지만 딱히 증거는 없었다.“왜?”연도진이 젓가락질을 멈추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김시연은 평온한 연도진을 표정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식사를 마치자 연도진은 몸을 일으켜 젓가락과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김시연이 그 모습에 미안한 듯 말했다.“설거지는 내가 할게.”“괜찮아, 내가 하면 돼. 넌 가서 쉬어.”“그래, 그럼 부탁할게.”“...”주방 정리를 마친 연도진이 나와 김시연에게 물었다.“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래?”“좋아.”김시연은 아직 이 동네를 돌아
예를 들면 김웅의 입가에 물집이 생겼는데 이게 다 회사에서 잘 돼가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든가 같은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회사는 대형 식품공장과 협업해 직원들의 작업복을 제공해주기로 했지만 공장에 보낸 샘플이 화학 성분에서 기준 미달 판정을 받아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공장 측에서는 회사가 원가 절감을 위해 저급한 원단을 사용했다며 엄청난 불만을 표출하고는 협업을 중단하려고 들었다.계약 금액이 상당했던 만큼 이 엄청난 바이어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김웅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김웅은 거실에서 사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 일을 언급했다.“혹시 C도에 있는 네츠인 식품공장인가요?”연도진이 물었다.“맞아, 거기야. 여러 브랜드가 그 공장이랑 협업 중이라 규모가 꽤 커.”그래서인지 위생 관련해서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고 엄격했다.“거기 대표님 성씨가 주 씨였죠, 아마?”“맞아.”김웅의 눈빛이 반짝였다.“혹시 알아?”“그 대표님한테 주현우라고 하는 아들이 있거든요. 제 대학교 친구예요.”연도진이 말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내일 제가 그 친구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어떤 말이라도 전해볼 수 있는지 알아볼까요?”“그래, 그래. 도진아. 부탁 좀 할게.”김웅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연도진이 자신의 사위로 들어온 것이 더욱 만족스러웠다.“같이 나가만 준다면 그 모든 금액은 내가 책임질게.”“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김시연이 김연자와 함께 방에서 나오며 둘의 대화를 엿듣고 무심코 물었다.“무슨 일이야?”“그러니까 그게...”김웅이 김시연에게 간단히 설명해주며 연도진을 마치 친아들 대하듯 바라보며 말했다.“도진이 좀 봐라, 인맥 얼마나 좋니.”김시연이 눈썹을 들썩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보았다.이런 우연이 다 있다고?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연도진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짓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점심 식사를 마치자 김연자는 신혼부부인 두
김시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정색하며 물었다.“남 보기 부끄러운 물건이 뭔데?”“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연도진은 안경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정교하고 디자인이 예쁜 상자인 걸 보니까 결혼 축하 선물인 것 같은데 이것만 별장으로 옮기지 않은 게 이상하단 말이야. 설마...”“설마 뭐?”김시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다른 남자가 준 선물인데 내가 볼까 봐 숨겼던 거야?”할 말을 잃은 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도진을 째려봤다.“맞아. 다른 남자가 준 거야.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서 넌 절대 보면 안 되거든.”연도진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편지에 뭐라고 적혔어? 결혼한 걸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연락하자는 그런 식상한 말이겠지? 그래도 눈치있는 남자네.”김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내 매력이 엄청난 걸 모르는구나? 결혼해도 연락 끊지 말자고 나한테 애원하는 편지야.”김시연은 옷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평생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내연남으로 살아도 좋으니 한 달에 두 번만 만나달라고 하네? 그거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는데?”연도진이 아무 말 하지 않자 김시연은 개어 놓은 옷들을 트렁크에 넣고선 캐비넷 앞에 서서 도발하는 눈빛을 보냈다.그러자 연도진은 곧바로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달에 두번? 그럼 남편은 한 달에 몇 번씩 만족시켜 줄 거야?”뼛속까지 파고드는 간지러움에 김시연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뭐라는 거야...”“한 달에 몇 번씩 할 거냐고 물어보잖아.”“우리 각방 쓰기로 약속했잖아... 나한테 접근하지 마...”김시연은 심장이 너무 뛰어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그러나 연도진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김시연의 손목을 꽉 잡고선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혹했다.“계약서에 관계를 가지면 안된다는 조건은 없었어.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함부로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만 규정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김시연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며 핑계를 생각했다.“그게... 방에 있는 이불도 잊지 말고 빨아달라고요.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잘 거예요.”“그걸 말이라고 하니?”“신혼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모르죠? 그러지 말고 같이 별장에 들어가서 사실래요?”“그런 건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신혼인데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지.”“뭐 어때요. 별장에 방이 엄청 많아요.”“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너도 이제는 결혼했으니까 제멋대로 굴면 안 돼. 뭔가를 결정할 때는 도진이의 입장도 고려해 봐. 도진이는 분명히 너와 단둘이 살고 싶어 할 거야.”김시연은 죄책감에 시선을 돌렸다.그렇게 한참 동안 자질구레한 일을 캐물으며 시간을 끌다가 김연자가 귀찮은 듯 밖으로 내쫓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방으로 돌아온 김시연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리더니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안쪽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 연도진은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팔을 올린 채 웃으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도둑인 줄 알겠어.”김시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남은 옷마저 정리했다.오후 4시쯤 두 사람은 별장으로 돌아왔다.이것저것 정리하던 김시연은 친구 허윤진이 보내온 카톡을 받았는데 친구들이랑 클럽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허윤진이 바로 토끼와 당근세트를 선물해 준 신부 들러리중 한 명이었고 아버지 친구의 딸이라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다.저택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 김시연은 연도진이 또 함부로 할까 봐 걱정되어 별장에 머물고 싶지 않았고 말 한마디만 남기고선 클럽으로 향했다.클럽에 도착한 김시연은 허윤진의 집중 공격을 당했다.“시연이 왔네? 결혼 생활은 어때? 관계에는 문제없지? 아참, 내가 준 선물은 써봤어?”허윤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밝고 활기찬 허윤진은 평소 일에만 몰두하여 남자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다. 외로움을 느낄 때는 주로 파트너를 찾아서 해결했고 달마다 사람을 바꿔가며 만났기에 그쪽으로는 경험이 아주
허윤진도 입을 열었다.“에이, 말도 안 돼. 도진 씨 엄청 신사적인 사람으로 보이던데?”“밖에서는 다 그렇지. 시연이가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그걸 참을만한 남편이 어디 있냐.”친구 한 명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난 두 사람이 오늘 관계를 가진다에 시계를 건다.”유명 브랜드거나 한정판 시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억의 가치는 있었다.“난 오늘 밤 안한다에 가방을 걸게.”허윤진은 오늘 들고온 아기자기한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난 잔다에 한 표.”또 누군가는 목걸이와 시계를 함께 걸었다.“난 안 잔다에 한 표.”그렇게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기에 참여하게 되었다.그 시각 술 취한 척 소파에 누워있던 김시연은 모든 대화를 듣게 되었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처음부터 작정하고 술이 먹이는 친구들의 모습에 차라리 취한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껏 연기를 했던 것인데, 친구라는 인간들은 시답잖은 일로 내기를 하고 있으니 참 어이가 없었다.허윤진은 김시연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수다 떨며 술을 마쳤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연도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네. 들어오세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연도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허윤진은 피곤함에 찌든 연도진의 얼굴을 보고선 웃음이 나왔다.“죄송해요. 오랜만에 시연이를 만났더니 다들 기분이 좋은지 술을 많이 마셨어요.”“괜찮아요.”연도진은 소파에 누워있는 김시연에게 다가가더니 단숨에 그녀를 번쩍 안았다.“그럼 시연이랑 먼저 가보겠습니다.”“조심히 가세요.”그가 룸에 나서기 전에 두 사람이 오늘 밤 관계를 가진다에 한 표를 걸었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아참, 시연이가 실수로 옷에 술을 쏟았어요. 많이 끈적일 텐데 이제 꼭 갈아입혀 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연도진이 답했다.‘이것들이 다음에 걸리기만 해봐...’김시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친구들은
“밖에서는 다 그렇지. 시연이가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그걸 참을만한 남편이 어디 있냐.”“아참, 시연이가 실수로 옷에 술을 쏟았어요. 많이 끈적일 텐데 이제 꼭 갈아입혀 주세요.”김시연은 순간 연도진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정말로 그가 신사적인 남자인지 아니면 보통 남자와 다를 바가 없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지만 호기심이 이미 이성을 지배해버렸다.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연도진은 어느새 그린 빌리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멈췄고 뒷좌석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김시연은 안방 침대 위에 눕혀졌고 곧이어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간거야? 윤진이의 말이 맞았네.’김시연은 실눈을 뜨고 재빨리 방안을 훑어보았다.‘정말 갔어?’서운함과 안도감의 동시에 밀려온 김시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바로 그때 옷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김시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뭐지? 설마 옷 찾는 거야? 갈아입혀 주려는 건 아니겠지?’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발소리가 다가오자 재빨리 눈을 감았다.날씨가 쌀쌀해진 10월 중순. 김시연은 롱스커트와 코트를 입고 나갔고 아래에는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연도진은 잠옷을 옆에 내려놓더니 침대 끝에 앉아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그 후 침대에 다리 한쪽을 걸치고선 김시연의 코트를 벗겨주었고 곧이어 스커트의 단추를 풀었다.김시연은 심란한 마음에 온몸이 경직되었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연도진의 행동에 호기심을 가진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아니야... 분명히 나한테 옷 입혀줄 거야.’‘연도진, 얼른 입혀주지 않고 뭐 하는 거야!’김시연은 발가벗겨진 듯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도진의 시선이 느껴졌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부 벗겨진 게 맞았다.지금 눈을 뜬다면 더욱 난처한 상황이기에 김시연은 계속 잠든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연도진이 옷을 입혀주는 걸 기다리는수밖에...그런데 그때 쇄골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며
곧이어 연도진은 구멍 난 스타킹과 속옷을 벗겼다.김시연은 쿵쾅거리는 가슴과 함께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연도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그리고 그녀는 욕실로 향하는 연도진의 발소리를 들었고 바로 물소리도 들려왔다.‘생각보다 깨끗하네.’2분 후 물소리가 멎고 연도진이 욕실에서 나왔다.다시 숨을 죽인 김시연은 조마조마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문득 차가운 촉감이 하체에서 느껴졌고 예상못한 상황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김시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뒤늦게 그녀는 연도진이 수건으로 자신을 닦아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다 닦고 나니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드디어 옷을 벗는 건가?’기대와 달리 연도진은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힌 후 잠옷을 집어 들고 앞뒷면을 확인하고선 입혀주었다.그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이불까지 덮어줬다.‘뭐야? 이게 끝이야? 뭘 기대했던 거지?’허무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자 김시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발가벗고 있는데도 그냥 간다고? 내 몸매가 그렇게 별로인가? 기분이 너무 불쾌하네. 설마 지금 날 갖고 노는 거야?’김시연은 화를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그 사이 욕실로 갔던 연도진은 클렌징 티슈를 들고나오더니 김시연의 화장을 지워줬다.그 시각 김시연은 이불 밑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애써 분노를 삼켰다.화장을 지운 후 연도진은 그녀의 얼굴에 에센스를 발라주고선 조용히 안방을 나갔고 순간 방안은 조용해지며 정적이 흘렀다.그제야 실눈을 뜬 김시연은 연도진이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고선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던 중 갑자기 방문이 다시 열렸다.김시연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눈을 감은 채 자는척했다.‘왜 또 들어온 거야.’발소리와 함께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는 쿵 하며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다시 나갔다.눈을 뜨고 보니 옆에는 텀블러가 놓여있었다.‘센스는 있네.’김시연도 마침 목이 말랐다.다음 날 아침 일찍
김웅은 연도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며칠 뒤 회식 자리에서 네츠인 식품공장 담당자는 대표의 지시를 받았고 앞으로 계속 협력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그 소식을 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김웅은 곧바로 연도진과 김시연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식사 전 김연자와 김시연은 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또 여행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그럼 콘서트 일은 이제 다 끝난 거지? 너희는 언제 여행 갈 거야?”김시연은 곧바로 답했다.“도진이가 요즘에 많이 바빠요. 그래서 내년 봄쯤에 가기로 결정했어요.”“괜찮네.”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걱정되었던 김시연은 기회를 엿봐서 연도진에게 말했다.“엄마가 물어보면 요즘 바쁘다고 답해. 내가 엄마한테 내년 봄쯤에 여행 갈 거라고 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고.”연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역시나 예상대로 식사 자리에서 김연자는 연도진의 일에 대해 물었다.“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어서 시간이 아예 없네요. 나중에 여유가 될 때 가야죠.”김시연은 연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연도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현지 답사하러 다움시로 출장 갈 거예요.”며칠 전에는 김시연이 콘서트 때문에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연도진이 또 출장을 간다고 하니 김연자는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답답했다.김연자는 기분이 언짢은 듯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시연이랑 같이 가는 건 별로야?”“안 그래도 얘기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고요.”김시연은 테이블 밑으로 그의 다리를 세게 꼬집었다.‘언제 나한테 얘기했어!’김연자는 곧바로 김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요즘 스케줄도 없잖아. 왜 싫다고 했어?”신혼부부라면 같이 붙어있고 싶기 마련이다.“저... 며칠 뒤에 제의시로 출장 가요.”김시연은 머리를 쥐어짜 내 그럴듯한 변명을 얘기했다.“다움에서 바로 가도 되잖아?”“메이크업 박스랑 옷도 챙겨야 해서 번거로워요.”“어시스턴트랑 같이 가면 되겠네.”
최동철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 내일 아이가 도착하면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요.” “하랑아, 아직 아이 이름까지는 모르지? 메이슨이래.” “메이슨? 좋은 이름은 아니네요.” “응. 나중에 경계심이 조금 풀리면 이름부터 바꿔야지. 일단은 메이슨이라고 부르자.” “알겠어요.” “하랑아, 잘 자.” 온하랑이 답을 하기 도전에 부승민은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온하랑은 부승민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선 웃으며 물었다. “화가 나? 마음이 아파?” “넌 웃음이 나오냐?” 온하랑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하면 이제 안 아플 거야.” 깃털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몸에 닿자 마치 고양이가 꾹꾹이를 하는 듯 간질거렸다. 온하랑의 얼굴은 유난히 차분하고 청순해 보였는데 살짝 찌푸린 인상마저 매혹적이었다. 부승민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만으로는 안돼.” 온하랑은 재빨리 손을 빼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안 할게.” 그러자 부승민은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이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다른 위로도 필요해.” “뭐?” 온하랑을 마주 보던 그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부승민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온하랑은 괘씸함에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부승민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5분만.” 뜨거운 숨결이 닿자 온하랑은 온몸이 간질거렸다. “3분.” “그럼 10분.” “내가 졌다. 5분이야.” “콜.” “잠깐만.” 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타이머를 설정했다. “이제 됐어.” 그녀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파에 기댄 채 두 손을 부승민의 어깨에 올렸다. “그냥 먹기만 해. 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응.” 온하랑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분... 2분... 3분...” “이제 마지막이야. 5, 4, 3, 2, 1... 됐어, 이제 일어나.” 부승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분노의 불길이 강렬하게 타오를수록 부승민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때의 온하랑이 최동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면 고통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로 인해 생긴 우발적인 사고였다. 온하랑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부승민을 바라보고선 부드럽게 그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온하랑은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최동철이 ‘너’가 아닌 ‘하랑’이라고 얘기하니 마치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방관하는듯한 느낌이었다. 대학교 3학년때의 온하랑을 대입하지 않아서인지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때의 온하랑이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부승민이 당사자가 된 듯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는 온하랑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승민의 질책에도 최동철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때는 나도 술을 마셨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알아. 다음날 하랑이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어. 내가 소개해준 방도 빼고 한순간에 사라진 거지. 모든 게 내 업보라고 생각했어.” “임신한 얘기는 나한테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 나도 며칠 전에 알았거든. 하랑이가 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누군가 사진을 보내왔어.” “누군데?” “몰라. 낯선 번호여서 다시 걸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뜨더라고.” 최동철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을 보내 조사했는데 사실이었던 거야. 하랑아, 왜 나한테 임신했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저도 몰라요.” 온하랑도 본인이 왜 아이를 낳았는지 몰랐다. 최동철의 말에 따르면 짝사랑 상대에게 상처를 받아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 ‘부승민이랑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나 보네.
가식적이다. 온하랑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아참, 얘기 못한 게 있는데 얼마 전 아이를 낳았어요. 예쁜 딸이에요.” “정말? 축하해.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정도 남았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낳았네. 조카는 건강하지?” ‘조카?’ 듣도 보도 못한 호칭에 부승민은 어이가 없었다. ‘조카 같은 소리 하네.’ “조산이다 보니 다른 신생아에 비해서 많이 약해요. 두어 달은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하거든요.” “아이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자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 돌잔치 때 꼭 연락해 줘. 시간 내서 우리 조카 보러 가야지.” 부승민은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딸 보러 온다고? X랄하네.’ “알겠어요. 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연락 기다릴게.” 겉치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온하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필라시에서 아이를 데려갔다면서요?” 최동철은 당황한 듯 흠칫하더니 무기력함과 허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 “네.”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아?” 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제가 알기론... 제 아이입니다.” “우리의 아이지.” 부승민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보고선 재빨리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동철 씨,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요.” “정말 알고 싶어?” “네.” 최동철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부 대표도 옆에 있지?”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말해.” “솔직하게 말할게.” 최동철은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랑이가 필라시에 왔을 때 마침 내가 휴가였어. 그래서 시간도 많았고 마침 도움이 필요한 것 같길래 한몫 거들었지.” “중점만 얘기해.” 부승민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최동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승민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어가 온하랑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하랑아, 내가 그 아이를 찾으려고 필라시에 사람을 보냈거든? 찾은 것 같아.” 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말?” “응.” “아이 데려오라고 하면 안 돼?” 부승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어. 다른 사람이 먼저 데려갔대.” “누구?” 온하랑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최동철...” 충격받은 온하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양부모의 말에 따르면 최동철이 그 아이의 아빠래.” 곧이어 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의 눈을 마주한 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 벨라한테 물어봤는데 그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크대.” “가능성?” “응... 필라시에서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동철 씨랑 가깝게 지냈다고 벨라가 얘기해 줬어.” “동철 씨?” “최동철.” 부승민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빠?” 온하랑은 부승민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승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고 소파 팔걸이에 놓은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처음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최동철이 떠오르긴 했지만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지 결코 믿지 않았다. “아니라고?” 온하랑은 그의 손을 잡고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장난을 쳤다. “뭔가 질투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부승민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을 돌렸다. “아이가 몇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건 최동철도 이 일에 대해 몰랐다는 얘기인데... 갑자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러니까. 그 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궁금해. 뭐 좀 알아낸 거 없어?” “연 비서가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네가 필라시에 처음 갔을 때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대. 그래서 직접 요리할 생각으로 방을 알아봤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최동철
왜 하필 최동철일까?비록 온하랑과 만나고 있고 둘 사람 사이에는 딸까지 생겼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질투가 났다.그는 다른 사람과 나눈 게 아닌 온하랑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하지만 부승민을 알고 있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그 아이의 존재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부승민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아이를 찾아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만드는 건데...부승민은 현명한 선택을 내리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온하랑은 부씨 가문에 온 이후로 줄곧 부승민만을 바라봤다. 유학할 때도 변함없이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그런 사람이 필라시에서 최동철과 가까워진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중 하나를 차지하는 게 부승민과 닮은 최동철의 외모일지도 모른다.짝사랑하는 사람과 꼭 닮은 얼굴이라면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동철이 수작을 부렸다면...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이는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고 최동철은 이제서야 아이를 데려갔다. 그 말인즉 최동철은 온하랑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하다.만약 온하랑이 정말로 최동철과 만났던 사이라면 어떻게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수가 있냐는 말이다.남녀 사이에 아이가 생긴 순간 두 사람은 평생 엮여야 하는 운명이다. 게다가 양측 모두 아이를 향한 책임감이 있다면 감정이 다시 생기는 건 시간문제다.현재 상황에서는 최동철이 아이를 데려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아이가 눈앞에 없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온하랑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하지만 온하랑이 그걸 원할까?과연 순순히 아이의 양육권을 최동철에게 넘길까?부승민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 부승민은 얼떨결에 악몽을 꾼듯한데 깨어나 보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다음날, 부승민은 아침 일찍 회사로 향했다.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
부승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랑 얘기는 해봤어? 성격은 어때?” “얘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아예 입을 열지 않습니다.” “양부모랑 협의해서 아이 데리고 와.” 온하랑과 약속한 게 있으니 절대 어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은 내려놓은 부승민은 착잡함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참을 고민한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19층, 부시아는 거실에서 그림 숙제를 하고 있었다. 부승민이 안으로 들어오자 부시아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아빠, 갑자기 왜 왔어요?” “내일 출근해야 돼서 일찍 들어왔어.”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다니, 너무 불쌍하네요. 그럼 시아가 내일 병원에 가서 숙모랑 놀게요.” “그래.” “아빠, 어때요? 그림 엄청 잘 그렸죠?” 부시아는 펜을 내려놓고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부승민에게 도화지를 내밀었다. 부승민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웃으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박을 그린 거야? 시아 엄청 대단하네.” “아빠... 이건 사과예요.” 부시아는 서운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못생겼어요?” “아니야... 아빠가 피곤해서 잘 안 보였어.” 부승민은 목을 가다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시아야, 며칠 후에 남동생 한 명이 올 거야.” “여동생 아니에요?” “병원에는 있는 동생 말고, 시아랑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아이가 올 거야.” 시아는 5월생이다. 온하랑의 기억에 따르면 그 아이는 6월 말에 태어났으니 부시아 보다 한 달 정도 어린 셈이다. 고작 한 달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을 봤을 땐 심각한 영양실조로 말라있어 적어도 한두 살은 어려 보였다. 부시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군데요?” “숙모의 아이인데 예전에 좀 힘들게 지내서 데려오기로 했어. 남동생이랑 잘 지낼 수 있지?” ‘숙모의 아이라면 아빠의 아이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럼 나랑 똑같네? 난
병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유정화는 온하랑과 부승민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 명은 핸드폰, 다른 한 명은 노트북.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유정화가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부승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분... 싸웠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침묵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온하랑의 산후조리를 돌봐주기 위해 이곳에 왔고, 산후조리가 끝나는 동시에 계약도 종료이니 굳이 이런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유정화는 알지 못했다. 부승민의 노트북 화면은 온하랑과의 채팅창에 멈춰있다는 것을. [읽씹? 왜 갑자기 답장 안 해.] 답장할 생각이 없었던 온하랑은 실수로 메시지를 눌렀고 ‘1’이 사라지니 답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맛볼 기회가 또 있을까?] [나중에 모유 짜내면 먹던가...] [그럼 그 맛이 안 날 텐데?] 콜록. 온하랑의 기침소리가 병실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부승민을 바라봤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부승민은 고개를 들고선 희미롭다는 듯이 온하랑을 바라봤다.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아주머니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회사도 며칠이나 비웠잖아. 푹 쉬고 출근해서 일 봐야지.”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하랑아, 내일 토요일이야. 난 며칠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은 여기서 해도 돼.” “평소 토요일에도 출근했잖아? 얼른 일해서 우리 아이 분유값 벌어야지. 그리고 겸사겸사 인테리어 공사가 잘되는지도 확인해 줘.” 이때 유정화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들어가세요.” 사실 유정화는 부승민이 병실에 있는 게 많이 불편했다. “알겠어요.” 부승민은 마지못해 한발 물러섰다. “퇴근하고 보러 올게.” “응.” 부승민은 대충 물건을 챙긴 뒤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아쉬운 눈빛을 보냈
부승민은 젖병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손바닥만 한 애가 이걸 다 마실 수 있을까?” 온하랑은 그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기면 간호사가 따로 보관하니까 이상한 걱정 좀 하지 마.” 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 “보통은 아이가 분유에 적응할 수 있게 간호사들이 모유랑 번갈아 가면서 먹이잖아. 그럼 너무 낭비 아닌가?”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유를 냉장 보관하면 3,4개월까지 가능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온하랑은 단번에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네.” “부승민!” “알았어. 지금 바로 주고 올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은 병실로 돌아왔고 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놀고 있었다. 이를 본 부승민은 노트북을 꺼내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그러던 중 노트북 바로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화면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침대에 있는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 시각 온하랑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초집중했는데 반응만 봤을 땐 카톡을 보낸 사람이 온하랑은 아닌듯했다. ‘바로 앞에 있는데 그냥 말하면 될걸 왜 카톡을 보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은 뭔가 재밌는 내용을 공유한 것 같지도 않았다. 부승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카톡을 클릭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하랑이 보내온 메시지였는데 고작 세 글자가 담겨있었다. [맛있어?] 앞뒤 주어를 잘랐지만 부승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았다. [응. 또 먹고 싶어.] 메시지를 전송한 후 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 여전히 핸드폰 화면만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귀는 점점 빨개졌다. 온하랑은 타이핑을 하는 듯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행동에 부승민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고 곧이어 카톡 알림 창이 떠올랐다. [내가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비릿한 맛이래.] [살짝 비리긴 한데 맛있어.] 부승민은 그 맛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카톡
2분 뒤 부승민이 수건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온하랑과 눈이 마주친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사지하기 전에 온찜질을 하는 게 좋대.” “생각보다 능숙한데?” 부승민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온하랑에게 건네주고선 큰 손을 뻗어 천천히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그 후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했고 잠깐 사이에 온하랑은 가슴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부승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도 묘했다. “얼마동안 해야 돼?” “십분.” 그 말을 끝으로 부승민은 다시 화장실로 가서 따뜻한 수건 하나를 더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두 수건을 맞바꾸며 찜질을 했다. 10분 후, 수건을 거두었다. 뭉친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으슬으슬한 서늘함이 찾아왔다. “조금 춥네? 이불 덮을래.” 온하랑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러면 마사지가 잘 안돼.” 부승민은 푹신한 담요를 두 번 접어 온하랑에게 덮어주었다. “그럼... 시작할게.” “응...” 그는 담요 밑으로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운뒤 네 손가락으로 가볍게 주물 었다. “아주머니가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적당한 힘으로 천천히 눌러야 된다고 했어.” 부승민의 움직임에 따라 담요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모호한 분위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지 마.” “아주머니가 이렇게 열 번 반복하면 된대. 하루에는 적어도 두세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해.” “느낌이 어때?” “조금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온하랑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맞아. 그런 느낌이래. 금방 나오겠는데? 이번이 열 번째야. 됐어.” “끝난 거야?” “그리고...” 부승민은 손가락을 살살 비틀며 말했다. “이렇게 유방을 자극하면 모유가 훨씬 더 많이 나온댔어.” “그게... 사실이야? 네가 지어낸 건 아니지?” 온하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못 믿겠으면 직접 아주머니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