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연도진은 구멍 난 스타킹과 속옷을 벗겼다.김시연은 쿵쾅거리는 가슴과 함께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연도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그리고 그녀는 욕실로 향하는 연도진의 발소리를 들었고 바로 물소리도 들려왔다.‘생각보다 깨끗하네.’2분 후 물소리가 멎고 연도진이 욕실에서 나왔다.다시 숨을 죽인 김시연은 조마조마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문득 차가운 촉감이 하체에서 느껴졌고 예상못한 상황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김시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뒤늦게 그녀는 연도진이 수건으로 자신을 닦아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다 닦고 나니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드디어 옷을 벗는 건가?’기대와 달리 연도진은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힌 후 잠옷을 집어 들고 앞뒷면을 확인하고선 입혀주었다.그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이불까지 덮어줬다.‘뭐야? 이게 끝이야? 뭘 기대했던 거지?’허무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자 김시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발가벗고 있는데도 그냥 간다고? 내 몸매가 그렇게 별로인가? 기분이 너무 불쾌하네. 설마 지금 날 갖고 노는 거야?’김시연은 화를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그 사이 욕실로 갔던 연도진은 클렌징 티슈를 들고나오더니 김시연의 화장을 지워줬다.그 시각 김시연은 이불 밑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애써 분노를 삼켰다.화장을 지운 후 연도진은 그녀의 얼굴에 에센스를 발라주고선 조용히 안방을 나갔고 순간 방안은 조용해지며 정적이 흘렀다.그제야 실눈을 뜬 김시연은 연도진이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고선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던 중 갑자기 방문이 다시 열렸다.김시연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눈을 감은 채 자는척했다.‘왜 또 들어온 거야.’발소리와 함께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는 쿵 하며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다시 나갔다.눈을 뜨고 보니 옆에는 텀블러가 놓여있었다.‘센스는 있네.’김시연도 마침 목이 말랐다.다음 날 아침 일찍
김웅은 연도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며칠 뒤 회식 자리에서 네츠인 식품공장 담당자는 대표의 지시를 받았고 앞으로 계속 협력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그 소식을 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김웅은 곧바로 연도진과 김시연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식사 전 김연자와 김시연은 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또 여행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그럼 콘서트 일은 이제 다 끝난 거지? 너희는 언제 여행 갈 거야?”김시연은 곧바로 답했다.“도진이가 요즘에 많이 바빠요. 그래서 내년 봄쯤에 가기로 결정했어요.”“괜찮네.”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걱정되었던 김시연은 기회를 엿봐서 연도진에게 말했다.“엄마가 물어보면 요즘 바쁘다고 답해. 내가 엄마한테 내년 봄쯤에 여행 갈 거라고 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고.”연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역시나 예상대로 식사 자리에서 김연자는 연도진의 일에 대해 물었다.“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어서 시간이 아예 없네요. 나중에 여유가 될 때 가야죠.”김시연은 연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연도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현지 답사하러 다움시로 출장 갈 거예요.”며칠 전에는 김시연이 콘서트 때문에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연도진이 또 출장을 간다고 하니 김연자는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답답했다.김연자는 기분이 언짢은 듯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시연이랑 같이 가는 건 별로야?”“안 그래도 얘기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고요.”김시연은 테이블 밑으로 그의 다리를 세게 꼬집었다.‘언제 나한테 얘기했어!’김연자는 곧바로 김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요즘 스케줄도 없잖아. 왜 싫다고 했어?”신혼부부라면 같이 붙어있고 싶기 마련이다.“저... 며칠 뒤에 제의시로 출장 가요.”김시연은 머리를 쥐어짜 내 그럴듯한 변명을 얘기했다.“다움에서 바로 가도 되잖아?”“메이크업 박스랑 옷도 챙겨야 해서 번거로워요.”“어시스턴트랑 같이 가면 되겠네.”
온하랑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래? 생긴 게 비슷할 수도 있지.”부시아의 외삼촌 측 이엘리아의 오빠는 분명히 혼혈이다. 연도진은 코가 높고 눈망울이 깊어 외국인과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두 사람의 눈매가 닮아있으니 부시아가 오해할 만도 하다.부시아는 외삼촌도 어차피 한국에 계시니 시간을 내어 다 같이 밥이라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외삼촌이 온하랑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를 저었다.“뭐가 비슷한데?”통화 중이던 부승민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물었다.부시아는 그가 외삼촌을 만난 적 있고 김시연의 결혼식에 직접 갔으니 분명히 알 거라고 생각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빠, 외삼촌이랑 시연 이모 남편분이 엄청 닮은 것 같지 않아요?”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닮은 것 같다니? 그냥 연도진이잖아.’그는 온하랑과 부시아를 번갈아 봤다. 답을 기다리는 듯 나란히 앉아 눈을 반짝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닮아있어 부승민은 부시아가 그들의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아빠?”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의자를 끌어당기며 온하랑의 옆에 앉았다.“많이 비슷해.”말하면서 그는 온하랑과 부시아의 표정을 관찰했다.혼자만의 착각인 줄 알았는데 부승민의 답을 듣자 확신이 생겼다.“전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온하랑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생각에 차분한 표정이었다.두 사람은 김시연의 남편인 연도진이 이엘리아의 오빠인 카이사르와 동일 인물임을 모르고 있었다.온하랑은 ‘카이사르’를 만난 적이 없고 부시아는 ‘연도진’을 만난 적이 없다.그렇게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불러봤다.‘설마 의도적으로 숨긴 건 아니겠지?’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부승민은 연도진이 일부러 숨겼을 거라고 확신했다.김시연의 성격상 이엘리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싫어했을 텐데 그녀의 오빠와 결혼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순간 첫 만남에 연도진의 혼혈 여부를 의심했을 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던 김시연의 모습이 떠올랐
정체가 폭로되는 건 시간문제이기에 이 거래가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부승민은 연도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시아가 먼저 이 일을 알게 된다 한들 도진 씨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도진 씨는 리스크를 최소화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잖아요. 전 이 타이밍에 공교롭게 출장 가는 게 우연이 아닌 것 같거든요. 시연 씨가 도진 씨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하죠?”김시연의 성격상 단번에 계약을 파기하여 ‘이혼’을 할 것이고 본인을 속였다는 이유로 평생 원망하고 증오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부승민의 예상대로 이번 출장은 연도진이 계획한 일이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 김시연이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그런데 이 계획을 부승민이 알아차릴 줄 몰랐다. 듣기 좋은 말로 거래지 실제로는 협박이나 다름없다.연도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역시 대표님은 대단하시네요.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이죠.”“약속한 대로 꼭 해주셨으면 좋겠네요.”“대표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출장 간 일주일 사이에 그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최악의 상황은 부시아가 우연히 김시연 남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외삼촌의 한국 이름과 똑같은 게 너무 신기하여 온하랑에게 털어놓는 순간 김시연까지 바로 알게 된다.“당연하죠. 그럼 잘해봅시다.”“좋아요.”...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다움시에 도착한 연도진과 김시연은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했다.김시연은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고 연도진은 협력사 프로젝트 리더의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했다.점심을 먹은 후 김시연은 소파에 누워 이것저것 여행 가이드를 찾아봤다.이왕 온 김에 제대로 놀고 싶었던 김시연은 어젯밤 밤새 계획을 짰고 오늘은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자연 명소 관광지를 둘러볼 생각이었다.예정대로라면 오늘 연도진도 스케줄이 없어서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런데 협력사의 담당자가 계속 서두르는 바람에 갑자기 약속이 생겼고 호텔에서
“궁금해하지 말고 얼른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안 나갈 거야?”김시연은 연도진의 등을 밀쳤고 어쩔 수 없이 침실로 들어간 그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나한테 준 선물인데 그걸 못 보게 하는 게 말이 되냐?”김시연은 선물 상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쓰레기인 척 실수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티가 났다.외출이 더 급급했던 김시연은 돌아와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혹시라도 연도진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을까 싶어 재빨리 선물 상자를 방에 숨겼고 기회를 엿봐서 저녁에 버리려고 했다.연도진이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서 나왔을 땐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고 김시연은 소파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연도진도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선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가자.”“응.”김시연은 핸드폰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이미 쌀쌀해진 강남과 달리 겨울의 휴양지라고 불리는 다움시는 여전히 봄처럼 따뜻했다.두 사람은 계획대로 일단 자연 명소로 향했다. 도심에 위치한 곳인데도 작은 뜰과 건물이 매우 고풍스러웠고 옛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한옥은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있어서 길가 곳곳에 조용히 관광하라는 팻말로 놓여있었다.연휴가 지나서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고 다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들은 이곳에서 웨딩촬영하는 커플도 만났다.김시연은 핸드폰으로 수십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는 자연 풍경과 셀카도 있었는데 연도진이 찍어준 사진들도 꽤 있었다.촬영 스폿에 도착하자 연도진은 길가는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연도진의 손에서 반지를 포착한 아주머니는 너스레웃음을 지으며 칭찬을 퍼부었다.“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이네요. 자, 웃어볼까요?”곧바로 미소를 짓는 연도진과 달리 김시연은 본능적으로 잘못된 말을 바로잡고 싶었다.“저희는 그런 사이가...”말하다가 문득 연도진과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짜여서 그런지 아직 익숙하
김시연은 부시아의 귀여운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넌 시아가 얼마나 귀엽고 똑똑한 아이인지 모를 거야. 그런데 부승민 씨와 다른 여자의 아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휴... 한숨만 나오네. 하랑이가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이 가서 나도 너무 고통스러워. 다른 여자면 모를까 하필 이엘리아잖아...”연도진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내가 봐온 하랑 씨는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야. 힘들면 너한테 털어놨을 거야.”“네가 만약에 시아만한 딸이 있다고 하면 난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말을 이어가던 김시연은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봤다.“해외에서 7년을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연도진은 헛웃음이 나왔다.“갑자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딸이 있다고 한들 그건 너랑 낳은 아이일 거야.”갑작스러운 멘트에 귀가 빨개진 김시연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그건 모르지...”“내가 숨겨둔 자식이 없다면 날 용서해 줄 거야?”“그럼 얘기해 봐. 7년 전에 왜 갑자기 떠났는지.”김시연은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예전부터 너무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었고 연도진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기 싫은 듯 늘 얼렁뚱땅 넘기려고만 했다.김시연은 연도진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7년이 지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에 그럴수록 아무 말 없이 떠난 연도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연도진은 피하는 게 아닌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얘기하기 싫은 거면 됐어.”김시연은 소주병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개의치 않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기억하겠지만 우리 아빠가 많이 아팠어. 투석으로 연명해야 할 만큼 상황이 점점 나빠졌는데 한창 수능 준비하고 있는 나한테 영향 주고 싶지 않은지 의사 선생님이랑 같이 숨겼어.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외국인이 날 찾아왔고 그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 아빠를 치료해 줄 최고의 의료진을 구해준다고 했
과일소주는 도수가 낮았기에 그걸 마시고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하지만 김시연은 조금 취한 듯 머리가 어지러웠고 저도 모르게 연도진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뜨거운 키스와 함께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연도진의 가슴으로 향했고 그 역시 싫지 않은 듯 가만히 있었다.다만 쓰고 있는 안경이 너무 거슬렸다.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길가에서 입을 맞추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봤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연도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나올 때와 별다를 바 없이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그러나 김시연은 알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형언할 수 없는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김시연이 연도진을 바라보자 연도진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몸 둘 바를 몰랐던 김시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덤덤한 척하며 머리를 쓸어내렸다.호텔로 돌아온 후, 연도진은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김시연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김시연은 갑자기 긴장된 듯 입술을 깨물었다.‘설마 오늘...’애써 태연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간 김시연은 포트 쪽으로 방향을 털었다.“앉아 있어. 따뜻한 물 끓여줄게.”“잠깐만.”연도진은 김시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어느새 연도진의 손에 이끌려 벽에 기댔고 그는 몸을 숙이더니 또다시 입을 맞췄다.김시연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그의 뜨거운 손은 어느 순간 그녀의 허리에 닿았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 치마를 파고들었다.깜짝 놀란 김시연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나... 먼저 씻을게...”김시연은 말을 마치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직행했다.당황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도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후 거실로 걸어간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정교한 선물 상자를 보게 되었다.상자를 열어보고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다
방안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어느새 힘이 풀린 채 침대에 축 늘어진 김시연은 발그레 달아오른 볼과 함께 유혹적인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봤고 그에게 몸을 맡기는 듯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긴장한 마음으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연도진은 애를 태웠다.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불과 1분 만에 다시 돌아왔다.콘돔을 챙긴 줄 알고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김시연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뭐지. 촉감이 별로인데?’눈을 뜬 김시연은 그제야 연도진의 손에 들린 그것을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연도진. 너 지금...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도진은 스위치를 켰다.김시연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너... 설마 거기에 문제 있는 건 아니지?”뒤늦게야 그녀는 연도진이 여전히 멀쩡하게 잠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이미 안경을 벗은 연도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문제 있는지 없는지는 곧 알게 될 거야.”김시연이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연도진은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쉿. 얘기하지 말고 느껴봐.”뭐가 됐든 즐기는 사람은 김시연이기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눈을 감은 그녀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즐겼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이 당근은 패턴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그때 화장실 간 연도진이 젖은 수건을 들고나왔다.지난번 술에 취했던 그 상황과 매우 흡사한 광경에 김시연은 그가 뭘 하려는지 예상한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뭐야? 설마 끝이야?’‘내 몸매가 별로인가? 이렇게 끝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니, 이럴 거면 왜 건드리고 난리야.’김시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연도진. 연기할 필요 없으니까 나랑 하는 게 싫은 거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연도진은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끝까지 연기하네?”연도진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