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뒤, 호숫가를 달리기로 한 넷이기에 임유환은 하얀색 벤틀리를 몰아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았다.드라이브를 하다가 내려서 풍경도 좀 감상하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시원한 공기를 마시다 보니 긴장돼있던 마음도 한껏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유환 씨, 나랑 서우 사진 좀 찍어줘요.”조명주는 최서우를 끌고 호숫가 앞에 있는 정자로 향하며 말했다.한평생을 작전 지역에 있다 보니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 푹 놓고 쉬여본 지도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았다.더욱이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인 최서우까지 옆에 있었으니 조명주는 이 기회에 제대로 힐링하며 사진도 많이 찍어갈 생각이었다.“좋아요.”임유환이 조명주와 최서우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걸 본 윤여진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임유환에게 말했다.“오빠, 우리도 같이 사진 찍어요!”“그래.”윤여진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임유환은 이내 윤여진과 함께 나무 아래에 가서 햇빛이 비친 호수를 등지고 섰다.임유환과 이렇게 가까이 선 건 오랜만인 윤여진은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그의 남성스러운 향기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햇빛을 온종일 쬔 풀마냥 싱그러운 냄새와 햇빛의 그 따가움이 어우러져 나는 향기였다.그 향기에 윤여진이 예쁘게 웃어 보일 때 조명주는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그러자 윤여진은 빠르게 조금 더 친밀해 보이는 자세로 바꾸며 임유환의 팔을 꼭 안은 채 하얀 구두를 신은 발은 바깥쪽으로 보내며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포즈를 취했다.갑자기 제 팔에 닿아오는 그것의 말캉한 촉감에 임유환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는 신사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 조명주는 그들을 위해 햇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사진을 남겨주었다.“다 찍었어요.”“저 보여주세요!”다 찍었다는 조명주의 말에 윤여진은 잔뜩 흥분해서 사진들부터 살펴보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한참을 풍경을 감상하던 그들은 민박집을 찾아 대충 점심을 해결한 뒤 쇼핑몰이나 들어가서 차 한잔하면서 온종일 걷느라 고생한 발도 좀 쉬게 해 주려고 했다.
윤서린이라면 설마 윤씨 집안에서 나간 그분인가.“윤서린 씨 알아?”“아니에요, 그냥 동명이인인 것 같아요.”윤여진의 놀라는 표정을 본 임유환이 묻자 괜히 그와 있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던 윤여진이 대충 둘러댔다.“동명이인? 신기하네.”하나는 연경 윤씨 집안이고 또 하나는 S 시의 윤씨 집안이었기에 임유환은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윤서린이 연경 윤씨 집안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고 하니 별 상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이었다.“그러게요.”애초에 임유환 말고는 동명이인이든 윤씨 집안에서 나간 사람이든 윤여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기에 윤여진은 그냥 대충 대답하고 얘기를 끝냈다.카페에 앉아서 조금 쉬던 그들은 이제 다 쉬었는지 또 백화점 구경을 나섰다.그러다가 “고금”이라는 속옷매장을 발견한 조명주와 최서우가 임유환을 보며 말했다.“유환 씨, 나랑 서우는 여기서 속옷 좀 사서 갈게요.”갑자기 같이 살게 된 탓에 조명주와 최서우는 갈아입을 속옷이 한 세트밖에 없었는데 이왕 속옷매장을 지나치는 김에 몇 세트 더 사갈 생각이었다.“그래요,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그에 임유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유환 오빠, 밖에 서 있으면 힘들잖아요. 우리도 같이 들어가요.”“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남정네가 여자 속옷 매장에 발을 들인다는 게 어색했던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윤여진은 매장 안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시대가 어느 땐데요 오빠, 지금은 남자들도 다 여자랑 같이 속옷 봐주고 그래요.”물론 윤여진은 이렇게 생각보다 보수적인 임유환이 더 좋긴 했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더 잡아끌었다.“어... 그래도 그건 좀 그렇잖아. 나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도 명주 씨 서우 씨랑 같이 보고 와.”임유환의 계속되는 거절에도 윤여진은 애교를 부리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디.“같이 들어가요 오빠, 가서 나랑 얘기도 하고 그래요.”임유환이 윤여진의 애교에 못 당하는 것도 있지만
임유환도 물론 질투의 눈길을 보내며 이를 갈아대는 남자들이 득실댄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속옷에 쑥스러워져 있어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유환이 고개만 떨구고 있을 때 조명주가 직원을 향해 말했다.“저희끼리 먼저 보고 있을게요.”“네.”직원이 예의 바르게 웃고는 자리를 비켜주자 조명주와 최서우는 바로 속옷들을 들어보며 살피기 시작했다.“여진아, 그... 우린 일단 저기에 좀 앉아있을까?”얼굴을 붉힌 채 소파를 가리키며 말하는 임유환을 본 윤여진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빠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어요?”“어...”여전히 어색해하는 임유환에게 윤여진이 격려하듯 말했다.“괜찮아요 오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요.”“여진아, 너 설마 나 격려해주는 거야?”“당연하죠.”임유환이 실소를 흘리며 말하자 윤여진은 초롱초롱한 눈을 임유환에게 고정시킨 채 부끄러워하는 임유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손님은 혹시 속옷 안 필요하세요? 몇 가지 추천해드릴까요?”“어떤 거 있어요?”그때 열정적으로 영업을 하는 직원에 윤여진은 대충 맞춰주며 물었다.사실 속옷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 그저 조명주와 최서우를 따라 들어온 건데 그래도 예쁜 게 있다면 살 의향은 있었다.“이게 이번에 새로 나온 것들인데, 혹시 마음에 드는 거 있으세요?”말을 하며 윤여진의 몸을 훑어보던 점원은 입을 살짝 벌리며 놀랐다.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었음에도 굴욕 없는 몸매에 점원은 옆에 앉은 임유환을 복 받았다는 듯이 부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그에 임유환의 입꼬리가 떨려왔다.자신이 윤여진 남자 친구도 아니고 같이 속옷 고르러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눈으로 보냐는 뜻이었지만 이 말들을 굳이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윤여진도 점원의 안내에 따라 새로 나왔다는 속옷들을 몇 벌 봤지만 딱히 시선을 사로잡는 건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요.
마네킹 몸에 입혀져 있는 검은색 레이스의 속옷을 보던 윤여진은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밤에 저 속옷에 얇은 잠옷까지 입으면 임유환도 좋아할 것 같았다.연애 수첩에서도 남자는 특히 검은색 레이스로 된 속옷이나 슬립에 환장한다고 했으니 그게 임유환에게도 통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오빠,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요. 나 맘에 드는 거 발견했어요.”“응.”윤여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임유환은 여전히 어색한지 뚝딱거리며 말했다.한편 윤여진은 바로 아까 그 점원에게로 향했다.“언니, 나 저거 좀 입어 봐도 돼요?”“이거 말씀하시는 거예요?”윤여진의 손끝을 따라가 본 점원이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발견하고는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물었다.“네.”“알겠습니다.”윤여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은 마네킹 몸에 입혀진 속옷의 사이즈를 보다가 다시 윤여진의 가슴 사이즈를 가늠하더니 곤란한 듯 말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이 디자인은 지금 D컵 사이즈 밖에 없는데 손님은 E컵이시죠?”“그래요?”살짝 실망한 듯한 윤여진의 목소리에 점원이 바로 한마디 덧붙였다.“근데 이 디자인이 다른 것들보다 좀 크게 나와서 괜찮으시다면 입어 보시겠어요?”“네, 그럴게요.”“피팅룸은 이쪽입니다.”윤여진이 눈을 반짝이자 점원이 매장 끝쪽에 있는 피팅룸을 가리키며 속옷을 벗겨냈다.“네, 감사합니다.”속옷을 받아들고 피팅룸으로 가는 길에 하필 임유환이 앉아있어서 그도 의도치 않게 윤여진의 손에 들린 속옷을 보게 되었는데 임유환은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냥 보통 남자로서 여자가 저렇게 섹시한 속옷을 고른다는 것에 놀랐을 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임유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보고 있었다.사실 여자 속옷매장에서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린다면 변태로 오해받기 십상이었기에 임유환은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그리고 윤여진이 피팅룸에 들어간 사이 속옷을 다 고른 조명주와 최서우는 또 잠옷과 슬립을 둘러보며 다시 그것
“나 들어오라고?”여자피팅룸 앞에서 자신더러 들어오라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본인을 가리키며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윤여진까지 안에 있는 이 피팅룸에 멀쩡한 남자가 들어가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네.”그러자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을 한 윤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여진아, 너 왜 그래? 또 무슨 짓을 하려고?”당연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던 임유환이 골이 당겨오는 것 같은 느낌에 무슨 상황인지 묻기 시작했다.“그게... 이게 사이즈가 좀 작아서 나 혼자서는 못 잠그겠어서... 도와달라고 부른 거예요.”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윤여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물론 전에 임유환을 대할 때에는 누구보다 대담했던 윤여진이지만 그런 쪽으론 전혀 경험이 없었고 또 남자한테 속옷을 잠가 달라는 부탁은 처음 하는 그녀였기에 본인도 마음이 쑥스러웠다.“그게...”윤여진의 부탁을 들은 임유환도 눈을 파르르 떨며 놀랐다.“여진아, 그럼 좀 있다 서우 씨 나오면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때?”“아직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냥 오빠가 해줘요.”보다 못한 임유환이 다른 방법을 제안해 봤지만 윤여진은 눈을 빛내며 딱 잘라 거절했다.그들과 친하지 않기도 했고 또 윤여진이 고른 게 검은색 레이스의 섹시한 속옷이라 그걸 입은 모습을 아무리 여자라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근데... 진짜 들어가도 돼?”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은 느낌에 임유환이 재차 물었지만 윤여진은 불쌍한 눈을 하고 애원했다.“유환 오빠, 나 한 번만 도와줘요.”빨개진 얼굴과 반달 모양의 눈으로 애원하는 윤여진은 누가 봐도 매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못 버틸 것 같았던 임유환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물었다.“여기 여성 속옷 매장인데 내가 들어가면 변태로 오해받을 것 같아.”“아니에요, 그리고 잠깐일 뿐이데요 뭐.”“알... 알겠어.”윤여진의 거듭되는 부탁에 임유환도 어쩔 수 없이 알겠다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사람들이 안
정신이 아득해진 임유환은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며 그 윤곽을 눈에 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하지만 피팅룸의 공간이 커봤자 거기서 거기인지라 아무리 시선을 피해도 임유환 눈에 보이는 건 윤여진의 하얀 등이 아니면 봉긋 솟은 그 윤곽이었다.두 사람의 몸도 딱 달라붙어 버린 이 공간에선 숨쉬기조차 버거웠던 임유환은 빨리할 일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여진아, 뒤에 잠가 달라고 그러는 거지?”“네.”말을 더듬으며 묻는 임유환에 윤여진도 부끄러운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온 게 그나마 편한 임유환이라 해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그럼... 그 끈 좀 뒤로 해볼래? 내가 잠가줄게.”“네.”임유환이 침을 삼키며 마른 목을 달래자 윤여진도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며 조심스레 검은색 속옷의 끈을 뒤로 보내주었다.연신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진정하려 애쓰던 임유환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그렇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참이나 사투를 벌인 끝에 임유환은 간신히 속옷 제일 바깥쪽에 고리를 맞춰 넣을 수 있었다.겨우겨우 입긴 했지만 그래도 속옷의 효과는 아주 좋았다.가슴이 아주 제대로 올라온 것을 본 윤여진은 임유환도 좋아할 것 같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한편 윤여진의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임유환은 겨우 임무를 마쳤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피팅을 끝낸 윤여진도 이제 피팅룸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순간 발을 잘못 디딘 탓에 몸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는데 하도 작은 피팅룸인지라 뒤로 한 발짝 물러난 것뿐인데도 윤여진의 몸이 임유환의 가슴팍에 닿아버렸다.여자 피부의 특유의 매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느껴지자 임유환은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아버렸다.“미안해요 오빠, 중심을 잘 못 잡아서...”“괜... 괜찮아.”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로 사과를 해오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벌렁거려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본능을 열심히 잠재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1번 피팅룸으로 향했고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곧 벌어질 아름다운 행동을 기대하며 남다른 소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피팅룸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마에 식은땀이 잔뜩 배어있는 임유환이 한숨을 쉬며 피팅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아까 그런 소리가 났을 때는 정말 식겁했었다.누가 들어도 오해하기 딱 좋은 소리였기에 옆 피팅룸에 있던 사람이 들었으면 어쩌지 싶다가도 어차피 이 속옷매장만 나서면 임유환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임유환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아까의 그 대담한 행보 때문인지 임유환은 잠깐 사이에 꽤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셔츠의 가슴 부분에는 아까 윤여진과 닿았던 탓에 그녀의 잔향이 남아있었다.그때의 떨리는 마음을 다시 되뇌어보던 임유환은 저를 미친 새끼라고 욕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으려 했는데 한 걸음 내딛자마자 느껴지는 이상한 분위기에 임유환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소파 쪽에 앉아있던 남자들이 조롱 섞인 이상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리니 휴게 코너 끝쪽에서 한 남자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진짜 다 합쳐서 3초밖에 안 되는 거야?”“아 씨, 나는 영화 한 편 보나 했는데.”“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3초짜리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그러니까, 차라리 그 기회를 나한테 줬으면 적어도 3분은 버텼다.”“아이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우리 와이프한테 저런 몸매를 줬으면 난 매일 밤 힘들어 죽어도 좋아.”“몸은 건장해 보였는데, 이렇게까지 비실비실할 줄은...”다들 임유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정말 코앞에 차려준 밥상을 제 손으로 엎어버린 것 같은 상황에 남자들은 제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몸매도 좋고 성격도 이리 개방적인 여자친구를 뒀으면 잘 좀 할 것이지, 고작 3초 만에 끝난 임유환을 보며 남자들은 윤여진을 대신해 아쉬워하고 있었다.남자들의 울분 섞인
“유환 오빠, 왜 그래요?”곤란한 듯한 임유환의 표정에 윤여진이 조심스레 묻자 임유환은 더 멋쩍게 웃어 보였다.“아니야...”“무슨 일 있죠!”그러자 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매섭게 뜨고 뭐든 끝까지 물어볼 기세로 저를 바라보는 윤여진에 한숨을 한 번 내쉰 임유환은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그 말을 듣던 윤여진은 처음에는 얼굴이 빨개지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임유환이 이 일 때문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귀여워서 웃긴 했는데 다른 남자들도 3초의 남자로 오해받게 되면 기분 나쁘긴 매한가지일 것 같았다.연애 수첩에도 남자는 그런 쪽으로의 평가에는 극도로 민감하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그러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윤여진이 임유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나는 알아요, 오빠가 그런 사람 아니란 거. 그래도 증명하고 싶으면... 오늘 밤에 한 번 해볼래요?”억울해하고 있던 임유환은 윤여진의 당돌한 말을 듣자마자 본인의 침에 사레가 들릴뻔했다.이제 좀 컸다고 자신에게까지 이런 장난을 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여진아, 그만해...”“그럼 오빠는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피팅룸 안에서의 일이 있은 뒤 묘하게 더 대담해진 윤여진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임유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쪼끄만 게, 그런 장난은 누구한테 배웠어.”하지만 임유환은 그녀의 말을 단순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손을 들어 윤여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정말 저를 15년 전 어린애처럼 대하는 임유환에 윤여진은 못마땅한지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나이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성장한 저는 안 보이는지 한결같은 임유환의 태도에 윤여진은 야속하기만 했다.그때 조명주와 최서우도 피팅룸에서 나오다가 마침 피팅룸 앞에 서 있던 임유환과 윤여진을 보며 반가움에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유환 씨랑 여진 씨도 여기 있었네요?”“아, 저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