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정씨 집안에서는 정서진이 임유환에게 맞아 누운 정우빈을 구겨진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증기단까지 먹인 아들이 임유환에게 밀려나 허리까지 다쳐 이렇게 앓아누우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정서진이다.아까 신의를 불러 상태를 물었었는데 허리가 골절되고 증기단의 부작용까지 더해져 한동안은 누워서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상처가 다 낫는다 해도 전처럼 격렬한 수련은 못 할 거라 덧붙였다.“임유환 이 개자식, 내가 꼭 이 두 손으로 그놈을 죽일 거야, 그런 놈도 안 죽이면 내가 정서진이 아니지.”음침한 표정 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깔려있었다.“아버지, 꼭 저 대신 그놈 죽여주세요!”오늘 그 많은 하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영영 불구가 될 뻔했던 정우빈은 이를 악물며 분노를 뿜어냈다.정우빈은 지금 임유환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밥도 잘 넘어가지 않을 만큼 분했다.“걱정 마, 우빈아. 네 복수는 이 아빠가 꼭 해줄게.”정서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너는 치료에만 집중해. 내일 아침에 신의가 와서 수술 진행할 거야.”“고마워요, 아버지.”정우빈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에는 아직도 현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 억울함이 가득했다.한낱 하루살이 정도로 여겼던 임유환이 어떻게 무제의 실력을 갖췄는지 믿기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이 그딴 놈에게 졌다는 것도 분하기 짝이 없었다.“아들, 자꾸 그놈 생각하지마. 그놈이 널 이긴 건 말 못 할 수법을 쓴 거야. 너한테는 대적도 안 되는 보잘것 없는 놈이니까 신경 쓰지 마.”정서진은 그런 아들의 생각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가주님, 임유환의 신분에 대해 이미 다 알아봤는데, 그게...”“그게 뭐?”한 하인이 들어와 임유환에 대해 보고하자 정서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고 누워있던 정우빈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제 조사에 따르면 그놈의 신분은 평범합니다. 5년 전에 허유나라는 여자와 결혼을 해서 5년 동안 그 여자에게 빌붙어 살다가 얼마 전에 이혼당했답니다.”“근데 그
이런 대규모의 군대라면 임유환도 두 번이나 흑제한테 부탁하진 못할 거라 생각한 정서진의 눈빛이 섬뜩해졌다.“아버지 말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정서진의 말을 듣던 정우빈은 임유환이 자신을 이긴 게 이상한 수법을 쓴 덕분이라 확신했다.자신이 가장 빛나야 할 순간을 망쳐버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하게 한 임유환에 대한 분노로 정우빈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아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정서진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지막하게 정우빈을 향해 말했다.“아들, 너는 일단 치료에만 집중해.”“그놈 신분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했고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게 확인됐으니 내가 반드시 그놈더러 오늘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리고 그 몸에 어르신이 원하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어르신이요?”어르신을 언급하는 정서진에 정우빈의 동공이 갑자기 작아지면서 초조한 기색이 비쳤다.15년 전에도 그 어르신의 도움으로 삼류가문에 머물러있던 정씨 가문이 급속도로 성장해 오늘날의 최고 명문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아버지, 그 어르신은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걸까요?”정우빈은 실력이 어마어마한 그분이 임씨 집안에서 탐낼만한 게 무엇인지 몰라 호기심에 차 물었다.“옥 팔찌를 찾는다고 하던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그때 어르신이 임준호의 아내 고하연을 죽이라 지시한 것도 고하연에게서 그 옥 팔찌를 얻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옥 팔찌는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옥 팔찌요?”정우빈은 아버지의 말을 듣더니 더 놀라운 표정을 하고 물었다.“응.”정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무튼 그 어르신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리는 그냥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우빈아, 너는 일단 좀 쉬어. 임유환 일은 아빠한테 맡기고 신경 쓰지 마.”말을 마친 정서진이 정우빈의 방을 나섰다....그때 임유환은 스위트룸 침대에 누워있었다.한참을 뒤척여봐도 오지 않는 잠에 임유환은
문자 소리에 생각을 멈춘 임유환이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어보니 윤서린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그에 순간 당황한 임유환이 얼른 문자 창을 클릭했다.[유환 씨, 오늘 별일 없었어요?]내용은 간단했지만 임유환은 윤서린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얼른 답장했다.[응, 아무 일도 없었어.][다행이네요.]윤서린의 대답에서 임유환은 그녀가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 서둘러 전화를 걸어보았다.수신음이 울리기도 전에 바로 받은 전화 너머로 윤서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유환 씨만 괜찮으면 됐어요.”“미안해, 또 너 걱정시켰네.”임유환의 다정한 말에 윤서린의 기분이 눈에 띄게 나아진 듯했다.“아무 일 없으면 된 거죠 뭐.”“아, 유환 씨 지금은 어디 있어요?”“호텔에 있어.”“혼자요?”“응.”“흥!”임유환의 말을 들은 윤서린은 갑자기 화가 난 듯 볼멘소리를 냈다.“왜 그래, 서린아?”갑자기 변한 말투에 의아해진 임유환이 물었다.“무사히 호텔에 갔으면서 왜 나한테 연락 하나 안 해요?”윤서린이 서운한 티를 내며 말하자 그제야 왜 화가 났는지 알아챈 임유환이 얼른 사과하며 윤서린을 달랬다.“미안해, 서린아.”“됐어요, 이젠 날 다 잊은 거죠!”“그게 아니라 나는...”삐진 윤서린에 임유환은 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아니면 뭔데요?”“그게...”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는 윤서린에 임유환은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결혼식장에서 아버지를 봤어. 지금 와이프랑 같이 있더라.”임유환의 한마디에 윤서린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 다시 미안한 듯 말했다.“미안해요,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나 잊은 줄 알고...”“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다 잊어도 너를 어떻게 잊어.”임유환도 윤서린이 온종일 걱정했던 걸 알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미안하단 말은 내가 해야지. 내가 빨리 전화 안 해서 네가 더 걱정했잖아.”임유환은 진심으로 윤서린을 걱정 시킨 게 미안했다.“바보예요 진짜? 유환 씨도
“서린아,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임유환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묻어나 있었다.“아니에요...”수화기 너머의 윤서린은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을 돌렸다.“그냥 몸조심하라고요. 다른 할 말은 없어요.”“그래.”임유환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내가 약속할게. 꼭 무사하게 돌아갈게.”“네.”임유환의 약속에 윤서린도 부드럽게 대꾸했다.“나 이젠 진짜 방해 안 할게요. 잘 자요.”“잘자.”전화를 끊은 임유환은 눈앞에 윤서린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어머니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신경 쓰는 여자가 바로 윤서린이었기에 임유환도 하루빨리 S 시로 돌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해져 있어 아마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임유환은 옥 팔찌를 거두고 이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한편 윤서린도 임유환 생각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사실 일주일 뒤에 엄마 따라 연경에 간다고, 연경 윤씨 집안에 가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일을 마치면 얼굴이라도 보자고 얘기하려 했지만 윤서린은 임유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결국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임유환이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 일 때문에 생각도 많아지고 심경이 복잡할 거란 걸 알기에 윤서린도 그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그리고 윤서린 본인의 사정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연경에 가면 또 윤씨 집안 사람들이 윤서린의 엄마를 박대하고 아니꼽게 볼 걸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었다.그래서 윤서린은 그저 이번에는 제 어머니를 좀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만 할 뿐이었다.그렇게 한숨을 쉰 윤서린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이튿날 점심, 임유환은 약속대로 서씨 집안 저택에 도착했다.눈앞의 으리으리한 저택 입구에는 7년 전처럼 사자 조각상이 놓여있었는데 7년 전보다 세월의 흔적이 좀 더 느껴지는 모습이었다.그걸 보고 있으니 다시는 서씨 집안에 발을 붙이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7년 전의 그 새벽이 떠올랐다.“임유환 씨 되시
조용한 로비에서 팔 장로는 못마땅한 듯 임유환을 쳐다보고 있었다.지난번 S 시에서의 일로 화가 단단히 났던 팔 장로는 오늘 임유환이 서씨 집안에 인사 온 김에 서씨 집안 장로라는 직위를 들먹여 그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듯싶었다.하지만 그런 일들을 모르는 서강인은 제가 데려온 손님에게 팔 장로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팔 장로님, 말씀을 삼가세요, 임유환 씨는 제가 데려온 손님입니다.”“손님?”팔 장로는 서강인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가주님, 저놈은 손님이 아니라 액받이가 더 어울리죠.”“어제 결혼식장에서 정씨 집안과 싸우다가 하마터면 우리 서씨 집안에도 불똥이 튈뻔하지 않았습니까?”“제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우리 서씨 집안의 미래를 생각해서예요.”순간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서강인의 눈빛이 흔들렸다.“가문을 위해 하는 말이라고요?”그때 서인아가 냉소를 흘리고는 똑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팔 장로를 쏘아보았다.“팔 장로님, 제가 장로님과 유환이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을 모를 거라 생각하세요?”“제 생각에는 가문 생각보다 이 기회를 빌려 복수하려는 걸로 보이는데요.”서인아가 제 속내를 한순간에 꿰뚫어 보자 적잖이 놀랐던 장로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듣기 좋은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아가씨, 저는 항상 가문에 충성하며 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욕심 따위는 없습니다.”“임유환이 정씨 집안을 망신당하게 했으니 정씨 집안에서 누구 하나 죽지 않는 한 절대 물러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이런 긴박한 상황에 아가씨와 가주님이 임유환을 손님으로 맞이하시면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임유환 씨는 서씨 집안의 귀빈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할 것도 없죠.”“임유환에게 그런 실력이 있다고요?”서인아가 차갑게 대꾸했지만 팔 장로가 그걸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아가씨, S 시 같은 작은 도시에서 온 놈이 실력이 있으면 얼마
“팔 장로님도 여전 같지 않으시네요. 더 이상 장로 직위를 맡아주시기엔 너무 힘들어 보이세요.”서인아는 파래진 팔 장로의 얼굴을 무시한 채 윗사람 특유의 강압적인 투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서인아의 포스에 로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팔 장로는 몸을 떨어댔다.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장로 직위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팔 장로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그래서 팔 장로는 자신의 헌신을 어필하며 다급하게 서인아를 향해 사정했다.“아가씨, 제가 지금까지 서씨 집안에 얼마나 헌신을 해왔는데요, 그건 알아주셔야죠...”“오늘 이런 외부인 하나 때문에 제 장로직을 박탈한다니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그 말에 애초부터 임유환을 못마땅해했던 다른 장로들도 동요하며 팔 장로를 위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아가씨, 저도 이 일은 아가씨께서 너무하셨다고 생각합니다.”대 장로가 무게감 있게 말하자 다른 장로들도 그를 믿고 잇따라 입을 열었다.“아가씨,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팔 장로님이 말은 좀 안 좋게 했어도 다 서씨 집안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잖습니까?”“임유환 씨가 이번에 정씨 집안에 원한을 샀으니 서씨 집안이 그런 자와 가깝게 지내서 좋을 게 없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이 장로의 말씀이 맞습니다. 정씨 집안이 연경에서 어떤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이번에 파혼한 일로 서씨 집안과의 사이가 이미 틀어졌는데 이 와중에 임유환까지 불러들이면 정씨 집안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우리 서씨 집안이 저런 놈 손에 망할 순 없잖습니까!”“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아가씨.”서인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장로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다른 장로들의 지지를 받은 팔 장로는 이때다 싶어 허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아가씨, 다른 장로님들도 다 저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저는 다 서씨 집안의 미래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어요!”“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서씨 집안의 미
하지만 팔 장로는 서인아의 결심과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너무 얕잡아보았다.“팔 장로님, 이 정도로 절 협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서인아는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팔 장로를 노려보며 말했다.“협박이라뇨 아가씨, 제가 어떻게 감히...”“협박이 아니면 이런 말들은 왜 하는 거죠?”팔 장로의 말을 끊어내는 서인아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저는 그냥 임유환 저놈은 아가씨와 어울리지도 않고 서씨 가문의 문턱을 넘을 자격도 없다 판단해서 말한 것뿐입니다.”“그 입 다물어!”“나한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를 언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판단했죠?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다른 장로들이 나서준다 해서 내가 당신 직위 하나 못 뺏을 것 같아요?”“아가씨, 저는...”임유환 하나 때문에 서인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던 팔 장로가 수염까지 떨어가며 말했다.“됐어, 다들 그만해.”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 갑자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서강인과 함께 상석에 앉은 노인이었다.그 노인이 입을 열자 다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태 장로님.”“태 장로님.”서인아와 서강인 역시 태 장로를 공손히 바라보고 있었다.물론 신분은 가주인 서강인 제일 높겠지만 그래도 이미 백 이십 세는 넘어 보이는 노인이니 집안 어르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인아야, 나는 팔 장로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모두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태 장로가 입을 열었다.“그러니 너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태 장로님까지 왜 그러세요...”태 장로까지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밀어붙이기도 힘들어진 서인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서강인 역시 태 장로까지 나설 줄 몰랐어서 안색이 좋진 않았다.그리고 팔 장로는 다시 우쭐거리며 서인아를 향해 말했다.“아가씨, 보세요. 태 장로님께서도 제 의견을 지지해주시잖아요.”“저도 아가씨가 저놈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압니다, 제가 그걸 반대하는
“너 지금 뭐라고 했어!”임유환의 말에 발끈한 팔 장로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감히 끼어들어!”그리고 다른 장로들도 같이 분노하며 임유환을 향해 호통쳤다.“하하, 그래요.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긴 하죠. 오늘도 인아와 가주님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이딴 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신들 같은 시시비비도 가리지 못하는 노인네들을 마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임유환은 냉소를 흘리며 장로들의 체면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누가 시시비비도 못 가리는 노인네야!”“어디서 이딴 놈이 굴러들어왔어!”여러 장로들이 모두 화가 나 씩씩 대자 팔 장로는 이 기회를 빌려 태 장로에게 손을 내밀었다.“태 장로님, 저놈이 저렇게 예의가 없어요. 저런 놈을 어떻게 우리 서씨 집안에 들이겠습니까!”그 말을 듣던 태 장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에 분노가 피어올랐다.그 모습에 서강인의 낯빛도 변하고 서인아도 심장이 두근거렸다.서인아는 임유환이 저를 위해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되면 서씨 집안 어른들에게 다 미움을 살 것 같아 얼른 임유환을 바라보며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임유환은 나머지는 자신에게 다 맡기라는 듯 서인아를 보고 웃었다.그에 서인아가 어리둥절해 하던 것도 잠시 팔 장로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다시금 로비에 울려 퍼졌다.“태 장로님, 얼른 명령을 내리셔서 저놈을 쫓아내셔야 합니다!”“하하, 팔 장로님 뭘 그리 급해 하세요? 얼른 대의를 더 읊으면서 다른 이들을 부추겨야죠!”저를 비웃으며 말을 끊어대는 임유환에 팔 장로가 발끈해서 화를 냈다.“누가 사람들을 부추겨!”“당연히 당신이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노인네.”“너...”노인네라는 욕까지 들은 팔 장로는 화가 나 온몸을 벌벌 떨었다.하지만 임유환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집안, 명운, 입 놀리는 거 말고 당신이 진짜로 서씨 집안을 위해 한 일이 있기는 해요?”“서씨 집안 아가씨가 가문을 위해 혼자 얼마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