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들어도 나이 든 것 같은 목소리였다.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결혼식장의 혼란을 순식간에 잠재워버렸다.“총사령관님이야!”사람들뿐만 아니라 임유환의 시선도 상석에 앉아있는 백발의 총사령관에게로 향했다.총사령관은 화를 내지도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임유환과 정서진을 보며 말했다.“오늘 일은 둘 다 그만하지.”그 말에 정서진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고 임유환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총사령관님을 향한 임유환의 눈빛에는 물론 존경도 묻어나 있었지만 한기도 함께 있었다.총사령관은 스승님의 오랜 벗이자 나라의 공신이었으니 존경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의 복수를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었다.“총사령관님, 이 일에 꼭 관여하셔야겠어요?”위협적인 투로 말하는 임유환에 사람들은 감히 총사령관을 상대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그를 놀란 듯 쳐다보았다.정서진도 이때다 싶어 총사령관의 화를 돋우려 한마디 거들었다.“어디서 감히 총사령관님한테 그런 말을 내뱉어!”“총사령관님, 저 자식이 이렇게 건방져요, 총사령관님한테도 저렇게 무례하다니, 제가 지금 당장 저놈을 잡아들이겠습니다!”“괜찮아.”총사령관은 손을 저으며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도 임유환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손 놓고 있었다가는 임유환이 결혼식장을 뒤집어엎을 것만 같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그는 피바다를 이렇게 많은 하객들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만약 소문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그 영향도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총사령관님이 너그러우셔서 이렇게 넘어가시는 거야! 너는 운 좋은 줄 알아!”정서진이 임유환을 향해 코웃음을 치자 임유환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됐어, 다들 조용히 해!”능구렁이 같은 정씨 일가가 역겨워 난 총사령관은 한 번 더 호통을 쳤다.“예, 사령관님.”정씨 일가는 입으로는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에서는 우쭐거림과 조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마치 총사령관이 정씨 집안 편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정서진은 총사령관이 임유환이 일을
정씨 일가가 나가자 임유환도 명령을 내려 군사를 철수했다.그렇게 결혼식장은 다시 조용해졌고 하객들은 경악과 놀라움에 찬 눈길을 임유환에게로 보냈다.그중에서도 조 씨, 전 씨, 손 씨, 이 씨, 윤 씨 등 5대 가문의 가장들이 유독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임씨 집안의 버려진 아들이 정씨 집안과 맞설 정도의 힘을 키웠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조 씨, 전 씨, 손 씨, 이씨 일가는 그날의 일이 떠올라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오늘 일은 그냥 해프닝쯤으로 기억하고 다들 이만 집으로 돌아가게.”그때 총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자 사람들은 눈치 있게 하나둘 결혼식장을 빠져나갔다.“총사령관님,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5대 가문의 사람들도 총사령관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는데 그중 네 명은 그 발걸음이 아주 급해 보였다.윤씨 집안 가장만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임유환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그렇게 결혼식장에는 순식간에 총사령관, 임유환, 그리고 서강인 부녀만이 남게 되었다.“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사령관님을 오해했어요.”임유환은 진심으로 죄송스럽다는 듯 총사령관을 향해 아까일에 대해 사죄드렸다.“하하, 너랑 나 사이에 뭐 그런 걸로 사과를 해.”늙은 모습이었지마는 줄곧 위엄을 잃지 않았던 총사령관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스스럼없이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그에 임유환은 오히려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그 광경을 본 서강인은 잠시 벙쪄있다가 총사령관을 향해 물었다.“사령관님은 임유환이랑 아는 사이셨어요?”눈을 크게 뜨며 참지 못하고 묻는 서강인 옆에는 별로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입술만 달싹이는 서인아가 있었다.임유환이 총사령관과 친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지금 보아하니 그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다.“하하, 알고 있었지.”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총사령관은 서강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이놈은 내가 아주 좋게 본 놈이야, 꼭 잡아둬.”“나도 이만 가봐야겠으
서강인이 모를 줄은 몰랐던 임유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게 사실은...”임유환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했다.“이런 미친놈!”그리고 그 말을 다 들은 서강인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런 개 같은 놈이 감히 내 딸에게 손찌검을 해?!”서강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정우빈의 뺨을 날려주고 싶었다.“걱정 마세요, 정우빈이 인아한테 한 짓들 제가 다 백배로 갚게 할 거에요.”화를 내는 서강인에 임유환은 다시 차가워진 눈을 번뜩였다.“고마워 정말.”임유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던 서강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자네만 괜찮으면 이제부터 아저씨라고 불러, 가주님은 너무 멀어 보이잖아.”“네, 아저씨.”바로 호칭을 바꾸는 임유환에 서강인도 호탕하게 웃었다.“하하, 듣기 좋네. 그럼 나도 유환이라고 부를게.”서강인은 임유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옆에 있던 서인아를 바라보았다.임유환의 말을 듣고 나니 화장에 가려진 딸의 왼쪽 볼에 난 멍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정우빈이 어젯밤 때렸다는 뺨인 것 같아 다시 화가 치밀어올라 몸을 떨어대던 서강인은 이내 죄책감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딸, 아빠가 집안일 때문에 바빠서 너한테 신경을 너무 못 썼네.”“아빠는 우리 집안 가장인데 당연히 집안일이 먼저고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그런 소리 마세요.”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문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겨야만 했던 아빠의 고초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서인아는 자책하는 아빠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가장의 딸로서 그 책임을 나눠 가지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서인아기에 그전에도 원망은 해본 적이 없었다.“딸, 나는...”서강인은 조금 자란 뒤로 일찍 철이 들어 아버지 걱정만 하던 서인아에 반해 자신은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코끝이 찡해났다.“나 진짜 괜찮다니까요.”서인아는 그런 아빠를 향해 일부러 더 웃어 보이며 말했다.“이런 상처는 며칠 뒤면 다 사라질 건데 왜 그래요 자꾸.”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임준호가 임유환에게로 다가왔다.15년 만에 본 아버지라는 인간은 눈가에 주름이 더 생긴 것 말고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그 옆에 선 여자는 소녀처럼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서른이 넘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리를 잘한 것 같았다.“유환아, 15년 사이에 많이 컸구나. 하마터면 널 알아보지 못할뻔했어.”“네.”먼저 인사를 건네는 임준호에 임유환은 담담하게 짧은 대답을 남길 뿐이었다.임유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정함과 한기에 주위의 공기도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누가 봐도 부자 사이가 원만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상태였다.조명주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부자 사이의 대화를 나누기 편하게 비켜주려고 임유환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유환 씨, 먼저 얘기해요. 저랑 서우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임 선생님, 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흑제의 인사에 임유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사람들이 빠르게 빠져나가고서야 임유환은 무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임준호를 응시했다.끝을 알 수 없는 매정함에 임준호는 난감한 듯 말했다.“우리 부자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어.”“그러게요.”대답하는 임유환의 말투는 여전히 매정하고 낯선 이를 대하는 듯 서먹했다.“후...”그리고 그런 임유환의 태도를 느낀 임준호는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유환아, 네가 그때 일로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거 알아. 하지만 네가 생각한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냥 사정이 있어서 말을 못 한 것뿐이야.”“그럼 사실은 뭔데요?”임준호를 보는 임유환의 눈에 파동이 일었다.“사실...”“오빠.”임준호가 입을 열려 하자 채수빈이 나지막하게 그를 말렸다.“미안해, 아직은 말 못 하겠다.”깊은숨을 들이마신 임준호가 말을 거두자 임유환은 다시 차가운 눈을 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말을 못 한다고요?”“저 여자 말은 아주 잘 듣나 봐요?”저런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임유환은 어머니가 더
구구절절 맞는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임준호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날 일은 나도 너희 엄마한테 미안하게 생각해...”“미안해요?”자책이라도 하듯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는 임준호에 임유환은 냉소를 흘리고는 말했다.“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난 거예요? 그 말 한마디면 엄마가 다시 살아 돌아와요?”“엄마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 걱정을 했다고요!”“당신이 그런 엄마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요!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나는...”임유환의 다그침에 임준호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대답해요 임준호 씨, 남자답게 대답이란 걸 하라고!”감정이 북받친 임유환이 임준호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 임준호는 고통스러워하며 임유환의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했다.“유환아, 그래도 네 아버진데 얼른 그 손 놔!”그때 한쪽에 서 있던 채수빈이 임유환을 뜯어말렸다. 온화하기만 했던 두 눈은 어느새 흥분과 책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때 분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며 밖으로까지 뿜어져 나왔다.일그러진 표정으로 채수빈을 쳐다보는 임유환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도 야수의 눈빛같이 흉악스러웠다.채수빈은 그 매서운 눈빛에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임유환을 말리고 있었다.그에 화가 치밀어오른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채수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감히 날 말려?”본인에게 임유환을 말릴 자격도, 임유환 앞에 나설 자격도 없음을 알고 있는 채수빈은 임유환 말에 낯빛이 창백해졌다.하지만 또 임유환의 오해를 받고 혼자 괴로워하는 임준호가 마음에 걸렸던 채수빈은 다시 표정을 굳히며 임유환을 나무랐다.“내가 자격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준호 오빠는 네 아버지잖아. 어떤 아들이 아버지한테 이런 행동을 해, 교양 없게!”“내가 교양이 없다고?”임유환은 채수빈이 아버지한테 점수를 따려는 줄로 알고 코웃음을 쳤다.임유환의 어머니를 괴롭혀 죽게 만들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서는 아버지를 쥐고 흔들며
“유환아, 나는...”임준호는 또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됐어요, 이제 그만 해요. 연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담담히 말을 끊은 임유환은 무정한 표정으로 채수빈을 바라보았다.“당신이 무슨 수로 임준호 씨를 구워삶았길래 저 사람이 이렇게 지극정성인진 모르겠는데.”“내가 여자를 안 죽이는 걸 다행으로 알아. 적어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엔 안 죽이니까.”“아니었으면 당신은 임준호 씨가 보호해줘도 이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내가 죽이고 싶으면 나한테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유환아, 이 일은 저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화는 나한테 내, 저 사람 다치게 하지 말고.”임유환 말에 바로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는 임준호에 임유환은 점점 더 실망하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전에는 안 죽인다니까요.”“그리고 임준호 씨, 다음부턴 제 이름 똑바로 불러주세요.”“우리 엄마가 죽고 내가 쫓겨나던 그때부터 나랑 임씨 집안은 아무 상관도 없어졌어요.”“내가 아직도 임씨 성을 유지하는 건 엄마와 한 약속 때문에, 우리 엄마 눈 편히 감으시라고 안 바꾸는 거예요.”임유환의 말에 임준호는 심장이 세차게 떨리며 호흡까지 가빠졌다.임준호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 임유환, 아빠 말 들어. 얼른 연경을 떠나. 그날 일은 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아.”“떠나라고요? 왜요, 제가 여기서 당신 가족들의 행복을 망치기라도 할까 두려우세요?”임유환은 임준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차갑게 웃어 보였다.“내가 이번에 여길 온 건 원래부터 엄마 것이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예요.”“임씨 집안, 정씨 집안, 그리고 나머지 6대 가문, 그딴 건 다 신경 안 쓸 거예요.”“그날 어머니를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지 그날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에요.”“그 사람들에는 당연히 임준호 씨와 당신 아내도 포함이고요.”“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단호하게 마지막 말을 마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임준호는 죄책감, 억울함, 그리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았다.채수빈은 그런 임준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오빠, 오빠는 할 만큼 했어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요.”“수빈아, 너는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해?”갑작스러운 임준호의 질문에 채수빈은 잠시 자책과 함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확신에 찬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요.”“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네, 없어요.”채수빈은 대답을 번복하지 않고 웃으며 임준호를 향해 말했다.“오빠는 나한테 언제나 남자다운 모습만 보여줬어요. 또 엄청 잘해줬고요.”15년 동안 임준호는 억지로 끌려온 채수빈이 힘들지 않게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주었고 혼자서 임씨 집안의 막중한 책임을 떠안았었다.그러니 채수빈 눈에는 임준호만큼 남자다운 사람도 없어 보였다.“고마워, 수빈아...”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임준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다시 고통스러워했다.“하연 언니 생각나서 그래요?”그 모습에 채수빈이 조심스레 물었다.지난 15년간 임준호가 이따금 이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때면 십중팔구는 사별한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다.아까 임유환과의 대화 때문인지 오늘은 그 표정이 더욱더 선명했다.“응.”임준호는 한숨을 시작으로 대답을 했다.“내가 살면서 제일 미안한 사람이 하연이야.”“나 따라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드디어 내가 우리 가문 수장이 되었는데, 그럼 하연이랑 장모님 모시고 행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줄 정말 몰랐어.”여기까지 말한 임준호는 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고하연이 떠올라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렇게 고하연이 죽을 때까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고 생각한 임준호는 어떨 때는 그때 죽은 게 고하연이 아닌 자신이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오빠, 인제 그만 힘들어해요. 언니도 하늘에서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부드럽게 위로를 하던
호텔 앞에서는 임유환이 바람을 맞으며 찌푸린 미간을 한 채 서 있었다.그 얼굴에 감도는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은 임유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조명주, 최서우, 흑제가 한참을 기다려서야 밖으로 나오는 임유환을 볼 수 있었다.조명주는 어두워진 임유환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괜찮아요?”“네.”임유환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봤지만 마지못해 웃는 게 뻔히 보였다.“진짜 괜찮아요? 밖에서 산책이라도 좀 할래요? 같이 가 줄게요.”“고마워요, 조 중령님. 근데 저 진짜 괜찮아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호텔로 가서 쉬고 싶어요.”힘들어 보이는 임유환에 조명주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늘 말고 내일 저녁은 어때요?”“그래요, 그럼 내일 저녁에 봐요.”오늘 하루 많은 일을 겪었으니 임유환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조명주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그리고 조명주도 오늘은 피곤하기도 했으니 내일 보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았다.“그런 내일 봐요,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오늘 조명주가 의리있게 나서준 모습에 정말 감동을 한 임유환이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임유환은 아버지와 매정한 임씨 집안보다 옆에 있어 주는 친구들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인사까지 해요. 그럼 내일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요?”조명주와 최서우는 원래도 연경에서 며칠 놀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임유환한테 궁금한 것도 있으니 오늘보다는 내일 밥을 먹으면서 천천히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그래요.”대답을 마친 임유환은 최서우와 조명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흑제가 예약해둔 7성급 호텔로 향했다.스위트룸 앞에 선 흑제가 임유환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주인님, 그럼 오늘은 이만 쉬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저 부르시고요, 저 바로 옆방이에요.”“응, 그래. 너도 쉬어, 오늘 고생했어.”말을 마친 임유환은 방으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늦은 시각임에도 잠이 오지 않아 자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