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환은 그 자리에 정우빈과 서인아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유환 씨, 괜찮아요?”윤서린은 걱정스러운 듯 임유환을 바라보았다.“난 괜찮아.”임유환은 윤서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안. 걱정했지?”“알기는 하네요?”이 말을 한 사람은 조명주였다.그녀는 지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 “임유환 씨가 방금 한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조 중령님, 그만두죠. 유환 씨도 자기 어머니를 위한 것이잖아요.”윤서린이 사려 깊게 말했다. “봐봐요. 서린 씨가 얼마나 사려가 깊은지.”조명주는 임유환을 노려보더니 이내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됐네요. 당신도 기분이 상할 데로 상했을 테니깐요. 하지만 다시는 이러면 안 돼요.”“알겠어요. 조 중령님.”임유환은 조명주가 자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눈에도 온화한 빛이 떠올랐다.“당신은 센 척 하는 게 습관 돼서 그래요. 이 버릇을 좀 고쳤으면 좋을 텐데.”조명주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방금 긴급한 순간에 임유환이 자기 앞을 가로막는 행동을 생각하니 그녀도 심쿵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나설 때 나설 줄 아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참, 내일 결혼식에는 안 갈 거죠?”조명주는 빠르게 무엇이 생각났다.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인아의 자극법이라는 것을 알죠?”“걱정하지 마세요. 안 갈 거예요.”임유환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평온한 눈빛에서는 그의 마음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 됐어요.”조명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서린도 임유환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있던 청첩장을 주워 임유환에게 건네주었다.“서린아, 뭐 하는 거야?”임유환은 의아해했다.“가든 말든 일단 가져가세요.”윤서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린아...”임유환은 가슴이 흔들렸다.그는 윤서린의 마음을 안다.“서린 씨, 이놈한테 청첩장을 왜 준거예요?”
“너 뭐 하는 거야?”조효동은 저에게로 다가오는 임유환을 향해 소리 질렀다.“뭐 하는 거냐고?”그에 임유환은 섬뜩하게 웃으며 답했다.“당연히 네 소원 들어주려고 그러는 거지.”“그리고 가르쳐 줄 것도 좀 있고 해서, 나중에 또 서우 씨 괴롭히는 건 내가 두고 볼 수가 없거든.”“네가 뭔데 감히 날 가르쳐!”조효동은 눈을 치켜뜨며 임유환을 향해 낮게 말했다.“나는 이제 정우빈 도련님 사람이야, 너 나 건들기만 해...”조효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유환의 손바닥이 조효동의 뺨에 닿았다.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조효동은 한대 만에 몇 미터 밖으로 나가떨어졌고 순식간에 부어오른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아아! 내 얼굴...”“너... 네가 감히 날 때려?! 내가 당장 정우빈 도련님께 말씀드릴 거야!”조효동은 표정을 굳힌 채 계속 저를 향해 다가오는 임유환에 주춤거리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는 따끔거리는 왼쪽 볼을 부여잡고 파티장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그때 임유환이 조재용을 불렀다.“조재용!”“예!”임유환의 부름에 조재용이 황급히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쟤 데려가. 어떻게 처리할 진 내가 말 안 해도 알지?”“예, 임 선생님!”임유환의 명령에 조재용이 손을 젓자 순식간에 검은 장정들이 조효동을 에워쌌다.“뭐 하는 짓이야 이게!”그에 깜짝 놀란 조효동은 또 정우빈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난 정우빈 도련님 사람이야, 너희들이 날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도련님한테 다 말씀드릴 거야!”“끌고 가!”조재용은 이미 정우빈과의 사이도 틀어졌기에 더는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조효동을 말을 무시하고 명령했다.감히 대마왕님을 건드린 조효동을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예!”조재용의 수하는 대답을 마치고 바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조효동을 끌고 무대 뒤로 들어갔다.“아아!”그리고 바로 무대 뒤에서 조효동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조재용의 수하에게 잔인한 폭행을 당하고
“조재용이 날 무서워한다고요?”조명주의 말에 임유환이 웃으며 대답했다.“전에 조폭일 할 때 나랑 한번 붙은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로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조명주가 팔짱을 낀 채 임유환을 보며 물었다.“조 중령님이 정 못 믿으시겠다면 조재용한테 직접 물어보세요.”임유환이 고개를 돌려 조재용을 보자 조재용은 갑자기 저에게로 향하는 시선에 멈칫하다가 이내 대꾸를 했다.“임 선생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둘이 지금 짜고 나 속이는 거죠!”그래도 믿기 힘들었던 조명주는 팔짱을 낀 채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그게... 조 중령님 여기서 계속 말씀 나누세요, 저는 다른 손님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더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조재용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임유환의 허락 없이는 그 신분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조재용은 순간 십 년도 더 된 옛날에 임유환이 부른 헬기에 에워싸였던 때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이 자리에 조재용이 직접 가서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던 조명주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는 조재용을 보다 임유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을 치켜떴다.“솔직하게 말해요, 둘이 무슨 사이에요?”“어... 사실은 전에 중동 전장에서 제가 부대를 불러서 조재용을 진압한 적이 있어요, 그 일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예요.”잠시 생각하던 임유환이 사실을 말했지만 조명주는 역시나 임유환이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며 믿지 않았다.“자꾸 거짓말 할거예요?!”그리고 조명주가 믿지 않을 걸 알고 있던 임유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진짜 거짓말을 할 때도, 진실을 말할 때도 믿어주지 않는 조명주에 어이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말하기 싫으면 그만둬요.”조명주는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임유환의 말처럼 임유환이 조재용과 싸워서 무서워하는 걸 수도 있는 것 같았다.임유환은 그 정도 능력은 있을 것 같았다.그리고 무엇보다 조명주의 관심
청첩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모습에 놀라긴 했지만 그걸 보고 나니 임유환 말에 더 믿음이 갔다.그제야 조명주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때 윤서린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임유환을 보며 물었다.“유환 씨,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괜찮다니까. 걱정 마.”“알겠어요.”윤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유환이 최서우와 조명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조 중령님, 서우 씨, 우린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네, 기회 되면 봐요. 조심해서 가요.”“두 분도 내일 조심해서 가요.”조명주, 최서우와의 작별인사를 마친 임유환은 윤서린을 데리고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서우야, 우리도 가자.”임유환의 일을 해결하고 마음이 편해진 조명주가 최서우를 향해 말했다.“명주야, 서인아 씨랑 임유환 씨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임유환의 뒷모습을 보던 최서우가 호기심에 차 물었다.임유환과 서인아 사이에 대한 궁금증은 항상 품고 있었지만 이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음...”조명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근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보니 전에 아마도 커플이었거나 썸 타는 사이였던 것 같아.”“커플?”임유환과 서인아가 사귀었던 사이었을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 말을 조명주를 통해 들으니 여전히 놀라웠다.서인아는 “차도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이성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이건 다 내 생각이고 사실인지는 나도 몰라.”조명주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최서우를 향해 말했다.“일단 나가자. 연경 가는 차에서 내가 알고 있는 거 자세하게 얘기해줄게.”“그래!”서인아와 임유환의 사이가 누구보다 궁금했던 최서우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저녁, 연경 서씨 집안.서인아는 방에서 홀로 내일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그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전혀 설레지 않았던 서인아는 손에 들린 옛 사진으로
“우빈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왜요, 별로 반갑지 않나 봐요?”정우빈은 놀란 서인아의 얼굴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지금 들어온 게 내가 아니라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었으면 인아 씨가 좋아했겠죠?”“우빈 씨 지금 취했어요.”정우빈이 말하는 기생오라비가 임유환임을 아는 서인아는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안 취했어요!”정우빈은 손을 저으며 트림을 해댔다.“취했어요. 수미야, 정씨 집안 집사한테 연락해서 도련님 모셔가라고 해.”“네, 아가씨.”서인아의 차가운 말투에 수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수미도 술 취한 정우빈이 서인아 방까지 쳐들어와 난동을 부릴까 걱정되어 한시라도 빨리 보내고 싶었다.전에는 늘 신사답게 서인아를 만날 때면 집 대문 밖에서 기다리며 문턱도 넘지 않던 정우빈이 하필 결혼식 전날 밤에 이런 모습으로 서인아 방까지 들어온 것도 의외였다.“괜찮아요!”그때 정우빈이 갑자기 수미를 향해 소리 지르자 깜짝 놀란 수미가 정우빈을 보며 말했다.“도련님 정말 취하셨어요.”“안 취했다고!”정우빈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내일이면 서인아 씨도 정식으로 이 정우빈의 아내가 될 텐데, 내가 여기 있는 게 안될 건 없잖아요?”“도련님 말씀대로 내일이 결혼식인데 아가씨 온종일 힘드셨을 텐데 조금 쉬게 해주셔야죠.”수미의 일리 있는 말에 정우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서인아 씨가 바쁠 일이 있었나?”정우빈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으로 수미의 검은색 스커트와 스타킹을 훑어댔다.“수미 씨는 그렇게 야하게 입고 뭐 하려는 거죠?”그 말을 들은 수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수미는 정우빈이 조금 강압적이긴 해도 나름 예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 이딴 말을 내뱉는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말씀 자중해주세요.”수미가 표정을 굳힌 채 하는 말에도 정우빈은 비열하게 웃었다.“자중? 이렇게 야하게 입고 나를 꼬셔대는데 내가 어떻게 자
“우빈 씨 지금 취했어요, 일단 가서 좀 쉬어요.”서인아는 굳어진 표정으로 정우빈을 응시했다.정우빈이 임유환과 서인아의 사이에 예민한 것도, 그 강한 소유욕 탓에 결혼하면 저를 옭아맬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정우빈이 그런 말을 내뱉을 때도 서인아는 담담했다.기대가 없었으니 실망도 없는 게 당연했다.“서인아 씨는 이 와중에도 침착하네요.”서인아의 차분한 태도에 정우빈은 냉소를 흘렸다.그녀가 차분하면 할수록 서인아 마음에 정우빈은 없었다는 기정사실로 되는 것 같아 정우빈의 화는 점점 더 끓어올랐다.“그럼 우빈 씨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심경에 그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듯 냉담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에 정우빈은 주먹을 소리가 나도록 움켜쥐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어떻게 해줘요?”“임유환 그놈은 매일 걱정하면서 왜 나한테만 매번 이렇게 차가운 건데! 당신 남편은 그 자식이 아니라 나라고요!”“그놈은 임씨 집안에서 버림받은 찌질이일 뿐이잖아!”“그만 해요, 정우빈 씨.”이성을 잃고 소리쳐대는 정우빈에 있던 정마저 다 떨어진 서인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만? 나한테 그런 식으로밖에 말 못 해요?”그때 제대로 화가 난 정우빈이 서인아의 팔목을 잡았다.“아!”서인아는 그 통증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정우빈을 올려다봤다.“정우빈 씨, 이 손 놔요!”“놓으라고?”그에 정우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서인아 씨, 당신은 이제 내 아내예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지금의 정우빈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서인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도련님, 얼른 아가씨 놔주세요, 이러다가 아가씨 정말 다치세요!”그때 그 누구에게도 굽히기 싫어하는 서인아의 성격을 아는 수미가 나서서 정우빈을 말리기 시작했다.정우빈에게 잡힌 손목이 이미 파랗게 멍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서인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수미만 더 다급해 났다.“다친다고? 이건 서인아
“인아 씨, 나는...”서인아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본 정우빈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제가 너무 힘을 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만족해요?”“아직도 서인아 씨는 나한테 잘못했다는 소리가 하기 싫은가 봐요?”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쏘아붙이는 서인아에 정우빈은 미안함 대신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정우빈은 서인아의 남편 될 사람으로서 부도덕한 아내의 행실을 바로잡아준 것뿐이라 생각했기에 애초에 미안한 마음 따위는 없었다.정우빈의 질문에 서인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저 눈빛이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을 뿐이었다.그에 표정을 굳힌 정우빈이 더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 낮게 말했다.“시간 늦었는데 얼른 쉬어요.”“내일 여덟 시에 데리러 올게요. 얼굴은 파운데이션 좀 더 바르든지 해서 상처 가려요, 손님들이 눈치 못 채게.”“나 쪽팔리게 하지 말란 소리예요.”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문 쪽으로 향하던 정우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 말했다.“아, 그리고 그 자식 내일 결혼식장에는 못 나타나게 해요. 내가 내일 그놈 얼굴을 보게 되면 정말 죽일지도 모르니까.”정우빈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서인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눈에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려졌지만 서인아는 안간힘을 다해 그걸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썼고 결국 참아냈다.자신의 나약함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수미라 해도.하지만 수미는 그걸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아가씨,괜찮으세요? 정우빈 이 쓰레기 같은 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본 모습을 결혼식 전날 봐버렸는데 이 결혼을 지속하여봤자 서인아가 불행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나 괜찮으니까 내 걱정 말고 얼른 가서 쉬어.”서인아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하지만...”“나 진짜 괜찮다니까. 얼른 쉬어,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진짜 이 결혼 계속하실 거예요? 지금도 아가씨한테 손대는데 결혼하면...”“알아 나도. 근데 어쩌겠
S 시.임유환과 윤서린은 밤바람을 맞으며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하지만 심정은 마치 구름에 가려진 달빛마냥 그리 좋진 않았다.그렇게 걷던 둘은 호수 앞에 멈춰 섰다.대리석으로 된 난간에 몸을 기대로 수면에 얼굴을 비춰보던 임유환은 아직도 복잡한 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파티장에서 나올 때, 클라우드 별장을 떠날 때 모든 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서인아를 완전히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후련하기는커녕 무거운 돌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그래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했다.“혹시 서인아 씨 생각해요?”그때 귓가에 윤서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임유환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아니야. 이렇게 늦었는데 나랑 같이 산책해줘서 고마워.”임유환은 윤서린이 저를 걱정해서 이 늦은 시간까지 옆에 있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라 공원도 한적했고 가끔 한두 쌍의 커플이 지나가는 것 말고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온 대지가 잠든 이 시각, 임유환은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우리 사이에 뭐 이런 걸로 고마워해요.”“그리고 유환 씨 지금 상태 보면 누구라도 걱정할 거예요.”웃으며 말하는 윤서린에 임유환은 고개를 들어 구름에 에워싸인 달을 보며 대답했다.“걱정 마, 나 진짜 괜찮아. 그냥 요즘 많은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마음이 좀 복잡한 것뿐이야.”임유환이 요즘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어하는 건 윤서린도 알고 있었다. 임씨 집안 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일, 그리고 서인아 씨까지, 많은 일들이 임유환을 괴롭히고 있었다.“유환 씨...”서인아 생각을 하니 윤서린은 또 말을 잇지 못했다.사실 좀 전에 수미가 윤서린에게 연락을 해 임유환의 위치를 물었었다. 할 말이 있다며 다급 해하는 그 모습에 윤서린도 위치를 보내주었지만 임유환이 화낼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못 하고 있었다.“응?”윤서린의 부름에 임유환이 눈썹을 세우며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윤서린이 우물쭈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