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속이려는 거지?! 다 생각난 게 분명하다고!” “아니라고.”이서의 말투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나한테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 것도...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구나?” 그녀는 그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그래, 그날도 이런 식으로 나를 자극했었지.’“물론 그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큰 자극을 받았었어.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아냈고, 기절하지도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함께할 수 있었던 거야.”이서는 또 한 번 자신을 향한 지환의 배려를 떠올렸다. 그녀는 매우 풍자적이라고 느꼈다. ‘하 선생님은 내가 자극을 받지 않도록 늘 조심히 해주시는데...’ ‘하은철은...’“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방금 있었던 모든 일 때문에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됐어.” “지난 일 년 동안 네가 나를 아주 많이 다치게 했을 거라는 거.”“하은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 청춘을 너에게 바친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하...”은철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패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서의 남편이 자신의 작은 아빠이고, 자신이 그렇게 오랜 시간 속았다는 것을 떠올리면 솟아올랐던 일말의 양심은 다시 원한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문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철이 방문을 열었고, 그곳에는 경호원이 서 있었다. “하 사장님,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철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철이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이서를 한 번 보았다.“그래, 철수해!” 이 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서 문을 쾅 닫고 떠났다. 이서는 온몸에 힘이 빠져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힘없이 무릎을 꼭 껴안은 이서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바삐 일어나 방 안을 꼼꼼히 살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거실 소파에 앉아 자료를
지환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뒤로 물러나 이서의 목에 있는 스카프를 가볍게 풀어 헤치며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그럼 이건 누가 이런 거야?”이서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돌아오자마자 목이 졸린 자국을 알아차리시다니...’‘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이서야!”지환은 이를 악문 채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사실은... 하은철이 왔었는데...” ‘하은철의 말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는데...’이서의 말을 들은 지환의 안색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곧바로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이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한테 가려고요?”지환은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떠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이미 그녀에게 대답한 셈이었다. “안 돼요!”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거실로 가려고 했다. 그녀는 당최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으나, 젖 먹던 힘까지 짜낸 결과, 두 번째 시도 만에 지환을 거실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절대 가지 마세요.”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은철은 H국 제 1대 가문의 후계자예요. 선생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나는...”이서의 맑은 눈빛을 본 지환이 꽉 쥔 주먹을 천천히 놓았다.“그래, 알겠어.”“가지 않을게.” “정말요?”이서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아니신데...’ ‘설마 나 몰래 하은철을 찾아갈 생각이신 건가?’ “응.”지환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정말이야.” 사실, 그는 이미 은철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오늘 이천을 만나러 나갔던 것은 하씨 가문을 망치기 위한 첫 번째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환의 대답에서 확신을 느낀 이서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괜찮은 척하며
“그러면 어떻게 반격할 생각이야?”지환은 자기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서는 그를 한 번 보았으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지환이 긴장하며 물었다.“말해줄 테니까... 절대 비웃으면 안 돼요.” “말해봐, 절대 안 웃을게.” 이서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했다.“저는 하씨 가문을 짓밟아버리고 싶어요!” 순간, 이 말을 들은 지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샘물처럼 맑았는데, 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서는 뺨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안 웃기로 했잖아요!”지환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이서의 자그마한 두 손을 피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어렴풋이 보이는 그 눈꼬리의 눈물점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네 계획을 비웃으려던 의도는 아니었어. 그저 우리가 함께 할 생각에 웃음이 난 거지.” “혹시...”이서가 경악하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혹시... 뭐?”고개를 숙인 이서가 다소 난감해하며 말했다.“혹시... 제가 하씨 가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하씨 가문은 H국의 제1대 가문이에요. 게다가 나머지 3대 가문을 합친다고 해도 하씨 가문의 권세를 따라올까 말까죠.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순전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틀림없이 할 수 있을 거야.”“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다 하면 돼.”지환이 이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었고, 덩달아 방 안의 분위기도 점점 야릇해지기 시작했다. 지환이 이서에게 입을 맞추려던 찰나, 문밖에서부터 귀를 찌를 듯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두 사람의 동작이 굳어졌다. 이미 눈을 감았던 이서가 느릿느릿 다시 눈을 뜨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핏줄이 붉어진 지환이 숨을 고르던 찰나,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가볼게
호텔.지환은 이서를 대신하여 그녀의 목에 약을 발라주려고 했다. 하지만 목에 밀려오는 한기를 느낀 이서가 불편감을 느낀 듯 손을 들어 목을 문지르려 했고, 지환은 이를 제지했다. “이 약은 효과가 아주 좋아. 아마 내일이면 이 자국도 없앨 수 있을 거야.”“설마 부하직원들이 네 목에 있는 상처를 보게 하려는 건 아니지?” 이 말은 이서의 충동을 손쉽게 잠재울 수 있었다.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 “하 선생님, 선생님의 도움이 좀 필요해요.”“자.”지환이 USB를 꺼내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 이서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뭐예요?” “그날 대회장의 CCTV 녹화본이야.”“이 CCTV 녹화본이면 심가은이 먼저 너에게 손을 댔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그 여자가 총에 맞아 죽은 건 사실이지만, 절대 네가 죽인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 USB 에는 경찰의 조사 결과도 담겨 있어. 아마 이 두 가지면 너의 결백을 증명할 만할 거야.” 이서가 웃으며 물었다.“제가 이 두 가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지환이 USB를 책상 위에 놓았다.“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군 루머, 나도 봤거든.”“아...”이서가 붉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지환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슴이 따뜻해졌다.“감사합니다, 정말.” 지환이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좀 쉬어.”“네.”그녀는 지환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USB를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깊은 눈동자를 다시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 방으로 돌아온 지환은 핸드폰을 꺼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은철을 감시해. 그리고 그 자식이 또 함부로 이서에게 접근하려 한다면, 당장 그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나에게 바치도록 해.”“그리고... 우리가 철저히 세웠던 계획, 지금 당장 실행시켜!” [대표님, 정말 지금 바로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동안 저희가 하씨 그룹의 일부 시장을 선점한 건 사실이지만, 현재의 윤씨 그룹은 아직 하씨 그룹의 적수라
“그래.”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다른 협력 회사의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강 대표님 문제는 해결했지만, 아직 어려운 상대가 몇 명 남았으니,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야.’이서는 자료를 한참 살피다가 갈증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소희가 아직 제자리에 서서 가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고, 궁금해하며 물었다.“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머뭇거리던 소희가 이내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우선 살인 루머부터 해명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왜냐하면 많은 고위층 분이 그 루머가 진짜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와 협력하려던 기업들도 협력 의사를 철회하려는 거고요.”“아마 확실한 해명이 있다면, 그 협력 회사들은...” 이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하지만 결코 장희령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 여자와 심씨 가문의 후계자인 심동의 결혼 날짜가 가까워지고 있어서 연예계에서 그 여자의 입김이 막강한 상황이라고 하더라고.” “만약 내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 루머에 대한 해명을 발표한다면, 틀림없이 그 여자의 심기는 뒤틀리고 말 거야. 그러면 그 여자는 모든 힘을 나나를 괴롭히는 데 쓰려하겠지. 절대 나나에게 불리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돼.”“만약 그 여자가 대중의 반발심을 불러일으켜서 나나를 짓밟으려 한다면, 우리는 비즈니스가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해야 할 테니까.” “물론 회사도 중요하지. 하지만 합작 회사들과의 계약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기간 내에 해명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런 압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소희 씨가 그 고위층 인사분들을 설득해 줬으면 해.” “아, 참, 나나한테 전화해서 그쪽의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어본다고 했었지?” “어서 가봐.”이서의 말을 들은 소희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온기를 느꼈다. ‘이서 언니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을 할 때 곳곳에서 우리를 생각해 주고
이 답장을 본 소희는 기뻐하며 곧바로 이서를 찾아갔다. “이서 언니, 방금 연락해 봤는데요, CCTV 녹화본은 확보했는데 이미 모든 게 깨끗하게 지워진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복구할 사람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이서가 손에 든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가능한 한 빨리 복구할 사람을 찾아봐 줘. 복구되어야지만 우리가 진상 공개에 착수할 수 있을 테니까.”소희가 난감하다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매니저님께서 이미 여러 전문가에게 물어봤는데, 복구가 쉽지 않을 거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대요.” 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할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이서 언니, 하 선생님께서 이 방면의 타고난 천재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그분께 CCTV 녹화본을 맡기면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서가 물었다.“하 선생님? 하지환 선생님을 말하는 거야?” “네.”소희가 대답했다.“하나 언니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인상을 찌푸린 이서는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알을 꺠고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책상의 가장자리를 꽉 쥐었다.“그렇게 잘하신다고?” “네.”안타깝게도 소희는 이서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하 선생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몸을 살짝 휘청이던 이서가 고개를 숙이고 인상을 찌푸렸다.“나나한테 CCTV 녹화본을 나한테 주라고 전해줘. 내가 오늘 저녁에 하 선생님께 전해 드릴게.” 이서가 한 쪽 손을 미간에 대고 있는 것을 본 소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불안해하며 물었다. “이서 언니,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이서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소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아무래도 요 며칠 좀 무리했나 봐. 아마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상황을 지켜보던 소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까 푹 쉬세요.”
감독과 다른 제작진들은 나나를 영화 팀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이 영화는 심동이 막대한 투자를 한 것이고, 희령은 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기에 감독은 그녀를 직접 찾아와 악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려던 것이었다. ‘뭐야, 흔쾌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사실, 제작진들도 희령이 나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제작진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자기 명성에 누가 될까 봐 몸을 사리는 건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분들과 잘 상의해 볼게요. 희령 씨, 그럼 이만 좀 쉬어요.” 희령을 입술을 움찔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독이 나가는 것을 본 희령의 매니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령아, 서나나도 CCTV 녹화본을 확보했을 거야.”“어? 벌써?”“응, 다른 매니저한테 들었는데, 서나나의 매니저가 아침부터 CCTV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복구할 수는 없겠지. 그건 우리가 철저히 없애버린 거니까.” “희망을 걸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 꽤 재밌겠는걸?”희령의 매니저가 말했다. “바로 그걸 노렸던 거잖아. 아마 내일이면 서나나는 배역이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게 될 거야. 그건 그 여자에게 큰 치명타가 되겠지.” 희령이 손을 쓰다듬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이를 들은 매니저가 웃음을 터뜨렸다.“감독님이 정말로 서나나의 배역을 바꿀 수 있을까? 서나나의 출연료는 제작진 중에서 가장 저렴하잖아, 하하!” “그럼 무슨 소용이야? 촬영 시간을 지체했는데.”“요 며칠간 날린 돈을 합하면, 서나나 정도의 배우는 10명도 캐스팅할 수 있었을걸?” “그래, 맞아.”매니저가 더 환하게 웃었다.“그럼 앞으로 다시는 연예계에서 서나나를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겠네?” “흥, 조금만 기다려. 내일 제작진의 발표가 나오기만 하면, 서나나는 틀림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오빠는 마케팅 회사를
퇴근한 이서는 소희에게 받은 CCTV 녹화본을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지환의 방 입구에 다다른 이서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이 열리고, 목욕 가운을 입은 지환의 모습을 마주한 이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복근과 가슴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환이 온몸에서 뿜어내는 호르몬의 기운은 이서의 목을 더욱 타게 했다. 붉어진 이서의 귓불을 본 지환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운 여몄다.“무슨 일 있어?” “그게...”이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환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CCTV 녹화본이 삭제되었대요. 소희 씨가 하 선생님께서 이 방면의 타고난 천재라고 하던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지환이 CCTV 녹화본을 건네받았다.“아주 간단한 일이야.” 이서가 눈을 크게 떴다.“아주 간단하다고요? 이미 많은 전문가가 복구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던데...” “하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복구할 방법이 없을 거야.”지환이 이서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앉아 있어. 얼른 고쳐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은 이서는 지환이 뒤적거리며 도구를 찾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모습은 이서의 머릿속에 또 한 번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게 했다. ‘이... 이건!’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뇌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서는 지환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재빨리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겨 다른 곳으로 주의력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지환의 카리스마는 너무도 강했기에, 이서는 몇 번이나 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이서는 갑자기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팔걸이를 꽉 잡고 나서야 그 엄습하는 불안감에서 서서히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긴장한 이서가 지환을 바라보았을 때, 다행히도 그는 열심히 CCTV 녹화본을 수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