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DNA 검사 결과에는 확실히 가은이가 내 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병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이서가 1년가량의 기억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었을 텐데...’ “스웨이 작가님, 하나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계시는 거죠?” 이서의 목소리는 마침내 하이먼 스웨이를 현실로 불러온 듯했다. “아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구나...” “스웨이 작가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분명 입구에 서 계셨는데, 하나의 말을 못 들으셨을 리가 없잖아.’ ‘단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걸 거야.’ 하이먼 스웨이는 아무리 부인해도 이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이자,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서야, 너부터 솔직하게 말해다오. 너도 가은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스웨이 작가님, 하나의 말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시지는 마세요. 가은 씨랑 저는 단지 몇 번 만났을 뿐이잖아요. 가은 씨가 벌인 일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그래.”하이먼 스웨이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딸을 의심하면 안 되는 법이지...”하이먼 스웨이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큰시큰한 듯했다.“그래, 가은이가 가끔은 거친 모습을 보여주지만, 천리를 뒤엎는 짓을 할 만한 애는 아니야.” 이 말은 이서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서는 가은에 대해 좋지 않은 낌새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이기 때문에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스웨이 작가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집에 돌아온 그녀는 서재로 들어가 다시 한번 그 메일을 열었으며, 또 한 번 자세히 훑어보았다.메일에는 심가은이 한 살 때 바뀌었으며, 당시 심씨 부부를 찾아갔을 때 그들이 매우 놀랐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의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가은이가 내 딸이 아니라는 거잖아?’ 하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신이 난 가은이 서재로 들어왔다.“엄마, 이것 좀 보세요!” 하이먼 스웨이가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 “뭔데?” “제가 쓴 단편소설인데, 한 번 보시겠어요?” “네가 소설을 썼다고?” 하이먼 스웨이는 마침내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가은의 원고를 몇 번 훑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원고, 문필이 왠지 낯설지 않은데...”가은은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원고를 빼앗아 오는 충동을 꾹 참아야만 했다.“설마요, 제가 직접 쓴 건데요...”하이먼 스웨이가 다시 한번 원고를 훑어보았다.‘짙은 익숙함이 풍기는데...’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그나저나, 왜 갑자기 단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엄마, 곧 한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시잖아요. 제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딸인데도 소설을 쓸 줄 모른다고 하면, 사람들이 제가 엄마의 딸이 맞는지 의심할 것 같아서요.”“차라리 저도 이번 대회에 참가해서 제가 글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가은이 말했다. 하이먼 스웨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은아, 그런 의지를 갖추고 있는 건 좋은데... 화를 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건 옳지 않아. 화풀이를 위해서 글을 쓰면, 그 글은 생동감을 잃게 될 테니까.” 가은이 애써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엄마, 아직 제 작품이 어떤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소설의 대가인 하이먼 스웨이가 가은의 원고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은이는 분명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데...’가은은 하이먼 스웨이의 혜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원고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가은아,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가은이 반짝이는 눈으로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하이먼 스웨이가 입을 열었다. “인터넷에 이서의 정보가 퍼졌다던데...” 하이먼 스웨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은이 감정이 격해져
상언의 머릿속에 하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여태 하나 씨에게 나는 중요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하나 씨에게는 나보다 이서가 우선이라는 사실을요.”“심지어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요.”‘하나 씨는 이서를 정말 아끼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서를 욕하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히 아주 괴로워할 거야.’상언은 하나가 느낄 고통을 공감하는 듯했다.“상언아, 제발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되냐?”상언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지환이 끝내 불만을 토로했다.하지만 그는 아예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환아, 이서를 욕하는 댓글을 다 지워버릴 수는 없는 거야?”지환이 상언을 한 번 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어.”상언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내가 너무 멍청하게 굴었구나.’‘M국에서는 지환이도 별수 없잖아.’그렇다. H국은 하씨 일가가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M국에서 하지호의 기업이 성장한 이후로는 YS그룹이 지호의 기업을 여기저기서 억제할 뿐,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두 대기업은 물론이며 기업 산하의 언론도 그러했는데, 서로를 헐뜯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두 기업의 언론은 두 유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이서의 정보를 보도한 언론이 바로 하지호의 언론이었던 것이었다.즉, 지환이 하지호의 언론을 완전히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으며, 하지호가 지환의 언론의 완전히 누르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었다. “내가 조치를 해서 이 정도인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조치를 하지 않았으면, 더 심한 욕이 있었을 거라는 뜻이야?” 상언이 초조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지환이 일어서서 상언의 앞으로 걸어갔다.“상언아, 네가 알아야 할 건... 이런 공개적인 공격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비공개적인 공격은 쉽게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야. 내가 지금 가장 두려운 건... 비공개적인 공격이야.” “물론 이서
다시 셔먼의 자택으로 돌아온 상언의 심경은 저번과 사뭇 달랐다. 지난번에는 셔먼의 잘못을 지적하고 탓했으나, 이번에는 협상하러 왔다. “하하하, 내가 그랬죠? 이 선생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요.”“역시!”셔먼은 두 팔을 벌리고 상언과 포옹하려 했으나, 상언은 냉담하게 피할 뿐이었다. “셔먼 장관님, 오늘은 지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제 대답을 들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오, 그럼 마음을 바꿨다는 겁니까?” “아니요, 첫 번째 조건은 받아들여서 몬토 씨가 그 땅을 팔도록 설득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색이 변한 셔먼이 간신히 화를 참으며 말했다.“설마, 내 딸이 싫다는 겁니까?!”“장관님의 따님이 싫은 게 아니라, 하나 씨를 좋아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언이 또박또박 말했다. 셔먼이 냉소하며 콧방귀를 뀌었다.“이 선생, 이 선생이 나보다 더 잘 알 텐데요. 그 여자와의 사랑은 이 선생의 사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요!” 상언이 반박하려던 말을 삭히며 자리에 앉았다.“15분 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에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으신다면, 대통령님께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저희 이씨 가문이 모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저희도 막대한 세금을 내는 큰 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이 말은 셔먼의 안색은 또 한 번 어두워지게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셔먼이 말했다.“이 선생, 우선 여기서 기다리세요, 올라가서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셔먼은 이 말을 끝으로 상언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에 도착한 셔먼은 문을 닫고 급히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 사장님, 이 선생이 몬토 씨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군요.] 지호의 반응이 이렇게 냉담할 줄 몰랐던 셔먼이 입을 벌렸다. [또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셔먼이 전화를 끊지 않자 지호가 고개를 살짝 젖혔다.[아, 혹시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아서 계속 그
케이티가 갑자기 누군가를 떠올리고서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래층에서 대화를 나누는 셔먼과 상언의 모습을 보고는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같은 시각.하나는 이서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상언이 없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벌써 가려고?” 하나가 자신의 대회가 끝나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서가 아쉬워하며 하나의 손을 잡았다. “하나야,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 ‘하나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는데... 하나가 돌아가면 또 이전처럼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대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회사에서 특별히 내 사정을 배려해 준 거거든...”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이서야, 이러지 마. 난 이미 회사 측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다음에 있을 M국 출장은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그래, 알겠어.”이서가 하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하나야, 너무 아쉽다.”“바보야.”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찰나, 하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핸드폰을 확인하자, 이서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야?” “아니, 낯선 번호야. 통화 좀 하고 올게. 원고부터 보내놓고 있어.”“그래.”이서는 하나를 베란다로 보내고서야 고개를 돌려 우편함에 있는 원고를 보냈다. 모든 사람이 이 원고가 틀림없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서는 여전히 희망을 품지 않았다. ‘이 원고는 내가 처음으로 쓴 거잖아. 처음으로 쓴 글이 상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지.’같은 시각.베란다에 도착한 하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케이티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받으셨네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하나는 왠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끊으려 했다. [오늘 이 선생님께서 저희 아버지를 찾아오셨더라고요. 이 선생님께서 뭘 위해서 저희 아버지를 찾아오셨을까요?] 하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답안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했는
하나의 끊임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이서는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설마... 상언 오빠가 실험실을 재개하기 위해서 외교부 장관의 딸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야? 말도 안 돼!”“오빠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네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오빠가 널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너에 관한 모든 일은 말해달라고 부탁하길래... 사소한 것까지 가르쳐 줬었단 말이야!”하지만 하나의 마음은 차갑게 식은 듯했다.“이서야, 네가 우리 부모님을 처음 뵀을 때...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이서가 고개를 저었다.‘내가 하나의 부모님을 처음 뵌 건 어릴 때의 일이었을 거야.’ “나는 아주 똑똑히 기억해. 네가 우리 부모님의 금슬이 아주 좋아 보인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왜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 “겉모습만으로는 서로를 비난할 때의 추악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어.” “나도 때로는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믿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해.”“사람 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나는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고... 나, 나는...” 하나를 바라보던 이서는 그녀를 힘껏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야.”하나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이서야, 너무 추워. 여기는 너무 추워. 정말이지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혹시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구해줄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어.” “상언 오빠가 오면 설명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이서의 품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듣기 싫어. 난 이제 이 선생님의 감언이설에 질렸어.”“하지만 이대로 널 보내면...”“난... 걱정할 거야.” 이서가 말했다. 괜찮아, 설마 내가 굳건한 사람이라는 걸 벌써 잊은 거야? 이곳을 떠나서 이 선생님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면, 나도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을 거야.”“이서야, 제발 여기를 떠나게 해줘
“그렇게 하자고요.”배미희는 결정을 내리고 누군가에게 항로를 신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서는 하나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가 짐을 챙겼는데, 호텔 입구에서 케이티를 맞닥뜨렸다.이것은 이서가 처음으로 케이티를 만난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걸어오는 것을 본 그녀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 범상치 않아.’“떠나려는 거예요?” 케이티는 하나에게 전화를 한 순간부터 줄곧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를 웃음거리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수많은 내연녀를 상대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든, 몸싸움하는 것이든, 그녀의 눈에는 모두 저속한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무시하자. 그게 내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허,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예요?”케이티가 냉소하며 하나에게 다가갔다.“어때요? 이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케이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을 느낀 그녀는 체면이라는 것을 잊은 듯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미쳤어? 당신 누구야?!”케이티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서야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이서임을 똑똑히 보았다. “이거 안 놔?” 이서의 힘이 갈수록 세지자, 통증을 느낀 케이티가 연거푸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제 친구한테 당장 사과하세요!”이서의 말투는 대단히 차가웠다. 케이티가 울먹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거야?!”“제 친구를 괴롭혔으니, 당연히 사과하셔야죠!”“저 여자가 먼저 나를 괴롭혔다니까?!”케이티가 아무렇게나 손을 휘두르며 이서의 손에 여러 갈래의 상처를 남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하나는 동공이 심하게 움츠러 들었는데,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 케이티의 손을 ‘탁’ 쳤다. 명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
잠시 후, 케이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미안해요!”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시는 거예요?” “미안해요, 하나 씨!” “예의가 없잖아요!”“정말 죄송해요, 임하나 씨!”마침내 만족스러운 답안을 들은 이서가 케이티를 놓아주었다.“오늘을 똑똑히 기억하셔야 할 거예요. 또 한 번 제 친구를 못살게 군다면, 오늘의 백배 천배의 망신을 당하게 될 테니까요.’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본 케이티는 반박하고 싶은 모든 말을 삼켜야만 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케이티의 모습을 주시하던 이서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려 하나에게 물었다. “하나야, 괜찮아?”하나가 감동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야, 고마워.”“바보야, 저런 사람한테는 똑같이 되갚아 줘야 하는 법이야. 만약 네가 직접 할 수 없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하나가 입술을 오므렸다.“이서야...” “자, 이제 올라가자.”이서가 웃으면서 하나를 재촉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의 매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하나가 이서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던 이서는 아직도 정신이 멍한 듯했다. ‘하나를 괴롭히는 모습에 욱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댔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어...’ ‘대체 내가 기억을 잃은 1년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이서야, 나는 캐리어 가지러 다녀올게.”하나는 엘리베이터를 나서서야 이서가 아직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이서가 하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캐리어 하나만으로 모든 짐을 다 정리할 수 있었다. 이서는 하나와 함께 이씨 가문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이씨 가문의 전용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이서는 하나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고서야 아쉬워하며 공항을 떠났다. ‘언제 또 하나를 만날 수 있을까...?’‘그리고... 나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