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언의 머릿속에 하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여태 하나 씨에게 나는 중요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하나 씨에게는 나보다 이서가 우선이라는 사실을요.”“심지어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요.”‘하나 씨는 이서를 정말 아끼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서를 욕하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히 아주 괴로워할 거야.’상언은 하나가 느낄 고통을 공감하는 듯했다.“상언아, 제발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되냐?”상언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지환이 끝내 불만을 토로했다.하지만 그는 아예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환아, 이서를 욕하는 댓글을 다 지워버릴 수는 없는 거야?”지환이 상언을 한 번 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어.”상언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내가 너무 멍청하게 굴었구나.’‘M국에서는 지환이도 별수 없잖아.’그렇다. H국은 하씨 일가가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M국에서 하지호의 기업이 성장한 이후로는 YS그룹이 지호의 기업을 여기저기서 억제할 뿐,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두 대기업은 물론이며 기업 산하의 언론도 그러했는데, 서로를 헐뜯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두 기업의 언론은 두 유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이서의 정보를 보도한 언론이 바로 하지호의 언론이었던 것이었다.즉, 지환이 하지호의 언론을 완전히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으며, 하지호가 지환의 언론의 완전히 누르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었다. “내가 조치를 해서 이 정도인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조치를 하지 않았으면, 더 심한 욕이 있었을 거라는 뜻이야?” 상언이 초조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지환이 일어서서 상언의 앞으로 걸어갔다.“상언아, 네가 알아야 할 건... 이런 공개적인 공격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비공개적인 공격은 쉽게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야. 내가 지금 가장 두려운 건... 비공개적인 공격이야.” “물론 이서
다시 셔먼의 자택으로 돌아온 상언의 심경은 저번과 사뭇 달랐다. 지난번에는 셔먼의 잘못을 지적하고 탓했으나, 이번에는 협상하러 왔다. “하하하, 내가 그랬죠? 이 선생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요.”“역시!”셔먼은 두 팔을 벌리고 상언과 포옹하려 했으나, 상언은 냉담하게 피할 뿐이었다. “셔먼 장관님, 오늘은 지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제 대답을 들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오, 그럼 마음을 바꿨다는 겁니까?” “아니요, 첫 번째 조건은 받아들여서 몬토 씨가 그 땅을 팔도록 설득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색이 변한 셔먼이 간신히 화를 참으며 말했다.“설마, 내 딸이 싫다는 겁니까?!”“장관님의 따님이 싫은 게 아니라, 하나 씨를 좋아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언이 또박또박 말했다. 셔먼이 냉소하며 콧방귀를 뀌었다.“이 선생, 이 선생이 나보다 더 잘 알 텐데요. 그 여자와의 사랑은 이 선생의 사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요!” 상언이 반박하려던 말을 삭히며 자리에 앉았다.“15분 드리겠습니다. 시간 내에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으신다면, 대통령님께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저희 이씨 가문이 모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저희도 막대한 세금을 내는 큰 손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이 말은 셔먼의 안색은 또 한 번 어두워지게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셔먼이 말했다.“이 선생, 우선 여기서 기다리세요, 올라가서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셔먼은 이 말을 끝으로 상언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에 도착한 셔먼은 문을 닫고 급히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 사장님, 이 선생이 몬토 씨를 설득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군요.] 지호의 반응이 이렇게 냉담할 줄 몰랐던 셔먼이 입을 벌렸다. [또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셔먼이 전화를 끊지 않자 지호가 고개를 살짝 젖혔다.[아, 혹시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아서 계속 그
케이티가 갑자기 누군가를 떠올리고서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래층에서 대화를 나누는 셔먼과 상언의 모습을 보고는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같은 시각.하나는 이서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상언이 없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벌써 가려고?” 하나가 자신의 대회가 끝나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서가 아쉬워하며 하나의 손을 잡았다. “하나야,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 ‘하나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는데... 하나가 돌아가면 또 이전처럼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대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회사에서 특별히 내 사정을 배려해 준 거거든...”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이서야, 이러지 마. 난 이미 회사 측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다음에 있을 M국 출장은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그래, 알겠어.”이서가 하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하나야, 너무 아쉽다.”“바보야.”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찰나, 하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핸드폰을 확인하자, 이서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야?” “아니, 낯선 번호야. 통화 좀 하고 올게. 원고부터 보내놓고 있어.”“그래.”이서는 하나를 베란다로 보내고서야 고개를 돌려 우편함에 있는 원고를 보냈다. 모든 사람이 이 원고가 틀림없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서는 여전히 희망을 품지 않았다. ‘이 원고는 내가 처음으로 쓴 거잖아. 처음으로 쓴 글이 상을 받는 건 말이 안 되지.’같은 시각.베란다에 도착한 하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케이티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받으셨네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하나는 왠지 짜증이 나서 전화를 끊으려 했다. [오늘 이 선생님께서 저희 아버지를 찾아오셨더라고요. 이 선생님께서 뭘 위해서 저희 아버지를 찾아오셨을까요?] 하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답안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했는
하나의 끊임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이서는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설마... 상언 오빠가 실험실을 재개하기 위해서 외교부 장관의 딸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야? 말도 안 돼!”“오빠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네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오빠가 널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너에 관한 모든 일은 말해달라고 부탁하길래... 사소한 것까지 가르쳐 줬었단 말이야!”하지만 하나의 마음은 차갑게 식은 듯했다.“이서야, 네가 우리 부모님을 처음 뵀을 때...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이서가 고개를 저었다.‘내가 하나의 부모님을 처음 뵌 건 어릴 때의 일이었을 거야.’ “나는 아주 똑똑히 기억해. 네가 우리 부모님의 금슬이 아주 좋아 보인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내가 왜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 “겉모습만으로는 서로를 비난할 때의 추악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어.” “나도 때로는 사랑이라는 게 있다고 믿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해.”“사람 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나는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고... 나, 나는...” 하나를 바라보던 이서는 그녀를 힘껏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야.”하나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이서야, 너무 추워. 여기는 너무 추워. 정말이지 더는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혹시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구해줄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여기를 떠나고 싶어.” “상언 오빠가 오면 설명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이서의 품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듣기 싫어. 난 이제 이 선생님의 감언이설에 질렸어.”“하지만 이대로 널 보내면...”“난... 걱정할 거야.” 이서가 말했다. 괜찮아, 설마 내가 굳건한 사람이라는 걸 벌써 잊은 거야? 이곳을 떠나서 이 선생님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면, 나도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을 거야.”“이서야, 제발 여기를 떠나게 해줘
“그렇게 하자고요.”배미희는 결정을 내리고 누군가에게 항로를 신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서는 하나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가 짐을 챙겼는데, 호텔 입구에서 케이티를 맞닥뜨렸다.이것은 이서가 처음으로 케이티를 만난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걸어오는 것을 본 그녀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 범상치 않아.’“떠나려는 거예요?” 케이티는 하나에게 전화를 한 순간부터 줄곧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나를 웃음거리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수많은 내연녀를 상대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든, 몸싸움하는 것이든, 그녀의 눈에는 모두 저속한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무시하자. 그게 내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허,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예요?”케이티가 냉소하며 하나에게 다가갔다.“어때요? 이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케이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을 느낀 그녀는 체면이라는 것을 잊은 듯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미쳤어? 당신 누구야?!”케이티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서야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이서임을 똑똑히 보았다. “이거 안 놔?” 이서의 힘이 갈수록 세지자, 통증을 느낀 케이티가 연거푸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제 친구한테 당장 사과하세요!”이서의 말투는 대단히 차가웠다. 케이티가 울먹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거야?!”“제 친구를 괴롭혔으니, 당연히 사과하셔야죠!”“저 여자가 먼저 나를 괴롭혔다니까?!”케이티가 아무렇게나 손을 휘두르며 이서의 손에 여러 갈래의 상처를 남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하나는 동공이 심하게 움츠러 들었는데,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 케이티의 손을 ‘탁’ 쳤다. 명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
잠시 후, 케이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미안해요!”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시는 거예요?” “미안해요, 하나 씨!” “예의가 없잖아요!”“정말 죄송해요, 임하나 씨!”마침내 만족스러운 답안을 들은 이서가 케이티를 놓아주었다.“오늘을 똑똑히 기억하셔야 할 거예요. 또 한 번 제 친구를 못살게 군다면, 오늘의 백배 천배의 망신을 당하게 될 테니까요.’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본 케이티는 반박하고 싶은 모든 말을 삼켜야만 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케이티의 모습을 주시하던 이서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돌려 하나에게 물었다. “하나야, 괜찮아?”하나가 감동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야, 고마워.”“바보야, 저런 사람한테는 똑같이 되갚아 줘야 하는 법이야. 만약 네가 직접 할 수 없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하나가 입술을 오므렸다.“이서야...” “자, 이제 올라가자.”이서가 웃으면서 하나를 재촉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아까의 매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하나가 이서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던 이서는 아직도 정신이 멍한 듯했다. ‘하나를 괴롭히는 모습에 욱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댔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어...’ ‘대체 내가 기억을 잃은 1년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이서야, 나는 캐리어 가지러 다녀올게.”하나는 엘리베이터를 나서서야 이서가 아직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이서가 하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캐리어 하나만으로 모든 짐을 다 정리할 수 있었다. 이서는 하나와 함께 이씨 가문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이씨 가문의 전용기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이서는 하나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고서야 아쉬워하며 공항을 떠났다. ‘언제 또 하나를 만날 수 있을까...?’‘그리고... 나
지환은 이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곧바로 폭로하지는 않았다. 상언은 긴장한 탓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나 씨는 내가 셔먼 장관의 자택에 간 걸 몰랐을 텐데... 당연히 나랑 셔먼 장관의 거래도 몰랐을 거고...’ 상언이 마침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나 먼저 가볼게, 둘은 천천히 이야기 나눠.” 완전히 긴장감을 놓은 그의 뒷모습을 보던 이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H선생님, 이건 오빠를 속이는 게 아닐까요?” “아니야.”지환이 갑자기 이서의 손을 놓고, 그녀와 거리를 두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이 집을 떠나지 말라고! 밖은 위험하단 말이야!”하지만 하나가 귀국한다잖아요. 하나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만약 하나를 배웅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이서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적막하게 말했다.“하나가 귀국하면... 저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없잖아요. 하자가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지환이 몸을 웅크리고 이서의 눈을 바라보았다.“여기가 싫은 거야?”걱정스러운 지환의 눈빛을 마주한 이서는 심장이 일렁이는 듯했다.“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저에게 친절히 대해주시지만... 여기는 제 집이 아니잖아요.” “H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조금요.”이서가 뒤돌아서서 장원을 바라보았다.“조금은... H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럼 대회가 끝나면 너를 데려다줄 사람을 찾아보도록 할게.” ‘아마 그때쯤이면 하지호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기세를 꺾어 놓을 수는 있겠지.’‘그때가 되면 나도 이서랑 같이 H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이서가 그를 보며 말했다.“저를 데려다 줄 사람을 찾아보겠다니... 그럼 이번에도 선생님께서 직접 저를 배웅할 수는 없다는 거예
하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심소희와 서나나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자신을 꽁꽁 싸맨 나나는 차에 오르자마자 이서의 상황을 물었다. “이서는 잘 지내. 게다가 형부가 이서를 돌봐주고 계시니까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하나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나나와 소희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 같지?’ 두 사람은 격앙되기 시작했다. “하나 언니, 이서 언니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아니면 저희도 한 번 가볼까요?”하나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이서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 게다가 이 선생님의 어머니도...” 상언을 언급하던 하나는 마치 심장을 찔리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나는 배우로서 관찰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서를 친딸로 여기고 계셔. 이씨 가문의 큰딸이 된 거나 마찬가지지.” 소희는 주의하지 않고 또 질문을 하려다가 나나의 가벼운 제지를 받았다. “그건 정말 잘됐네요.”나나가 현명하게 화제를 돌렸다. “하나 언니, 이제 푹 쉴 수 있는 거예요?” “응, 회사에서 며칠 간의 휴가를 줬어.” 하나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지냈어?” 소희와 나나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모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하나가 재빨리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인데?”나나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소희가 그녀를 막았다. 이 작은 동작을 놓치지 않은 하나가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나야, 네가 말해 봐.” 나나가 소희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하나 언니, 언니가 M국에 간 이후로 하씨 가문이 계속해서 이서 언니의 회사를 노리고 있어요.” 이서는 MH그룹을 인수한 후에 곧바로 출국하였기 때문에 오래된 회사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씨 가문이 이미 윤씨 그룹의 비즈니스를 몇 개나
같은 시각.호텔에 있던 이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그녀는 지환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일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환이 그녀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엎치락뒤치락하고도 잠이 오지 않자, 이서는 아예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랐다. 물을 들이켜고 나니, 졸음은 완전히 달아났다. 그녀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지환 씨가 외출할 때 따라갈걸 그랬나?’ ‘그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따라가는 것은 짐만 될 뿐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이서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 엉뚱한 생각의 폭을 넓혀가던 그녀는 갑자기 하경철을 떠올렸다.‘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후로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할아버지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실까?’‘몸은 예전처럼 건강하실까?’ 이서는 아직도 하경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꼈다.하경철은 그녀가 하씨 가문으로 시집오기를 바라는 유일한 하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가장 잘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하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반목하여 원수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속상하셨을 거야.’‘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찾지 않으실 리 없어.’ 갑자기 이서의 머릿속에는 고택에 가서 하경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병원에 있던 지환은 세 번째 상대를 만났다.괴력왕은 그를 속인 것이 아니었는데, 뒤의 상대는 확실히 갈수록 강력해졌다.“하지호 사장님의 수하입니다!”이천은 단번에 맞은편에 있는 네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하지호의 수하였다. “고작 네 명만 보내다니, 우리 어둠의 세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이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천은 바로 설명했다.“절대 저 네 사람을 얕봐선 안 됩니다. 저 사람들은
큰 소리와 함께 목에 꽂힌 칼 두 자루가 ‘우지끈’ 소리를 냈고, 반동으로 인해 목에서 빠져나왔다.이천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지환은 일찍이 대책이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칼을 단단히 붙들었고, 칼끝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바닥에 단단히 꽂아 내렸다. 그 칼을 바닥에 깊은 흔적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잦아들었다. 모처럼 낭패한 지환을 보며, 괴력왕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하 대표님, 사업 수완은 뛰어나실지 몰라도, 힘으로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모두를 부른다고 해도 저를 이길 순 없죠.” “하지만 지금은 열댓 명만 있을 뿐이고요.” “비록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와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지인으로서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를 이기지 못하신다면, 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그 순간, 눈을 부릅뜬 괴력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뒤통수를 눌렀다. 엄청난 통증을 느낀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끈적끈적한 느낌은 현기증을 불러왔다. 그는 희미한 눈으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몇 명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이 지환과 이야기하는 그를 기습한 것이었다.괴력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았고, ‘쿵’하는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제... 제 약점이 뒤통수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이 비밀은 그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것이었다. 지환이 천천히 일어섰다.“벌써 잊은 겁니까? 난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가 산에서 나오라고 부탁했었는데요.” 괴력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보며 말했다.“그 몇 번의 짧은 만남으로 제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까?”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괴력왕이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하하하, 역시 하 대표님이군요. 저는 온몸에서 힘이 넘치지만, 머리는 좋지 않아요.” “오늘밤, 전력을 다해야만 했던 것처럼요.” 괴력왕
“제가 오늘 밤에 상대할 사람이 하 대표님이었군요!”그 사람이 움직이자, 사람들은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이천이 지환의 앞에 서서 말했다.“괴력왕, 당신이 어떻게 하은철 아버지의 조수가 된 거죠?”눈앞의 괴력왕은 힘으로 대동맥을 끊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타고난 힘을 가진 그는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줄곧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천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괴력왕과 맞붙은 적 없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까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괴력왕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사람들은 모두 그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다.“하하, 말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만, 기꺼이 말씀드리죠.”키가 큰 괴력왕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지환을 볼 수 있었다.“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제 딸이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그걸 알게 된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께서 훌륭한 의사를 찾아 제 딸을 치료해 주신 거죠.”“그래서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약속했습니다.”“다만, 첫 번째 임무가 하 대표님을 상대하는 건 줄은 몰랐죠.”지환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대단했다.괴력왕처럼 은둔하는 사람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어쩐지, 상대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더라니.’‘상대를 알면 후회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지?’지환은 괴력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괴력왕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게다가 지환은 의리 있는 괴력왕의 성격을 아주 좋아했다.그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으로 괴력왕을 끌어들이려 했었다.하지만 싸우기 싫어하는 괴력왕의 성격 때문에 그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고, 지환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가 전쟁이 될 줄은 몰랐다. “각자의 보스나 신경 쓰도록 하죠. 시작합시다!” 지환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괴력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 대표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저쪽에 있던 하도훈은 이미 입구까지 걸어갔다.그의 곁에는 수십 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흰색 천 조각이 씌워져 있었다. 지환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그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지환은 꿈쩍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병원 입구에 다다랐다. “형님, 오랜만입니다!”하도훈의 얼굴에서는 커다란 슬픔이 묻어났다. “왔구나!”지환이 말했다.“은철이 시신을 제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직된 몸을 심하게 떨었다.“지환아, 너 정말 독하구나. 한 여자를 위해서 조카를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니! 그 아이를 해칠 때, 네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니?” “예전에 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의 사이는 좋지 않았어. 하지만 은철이는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았고, 너라는 작은 아버지를 꽤 친근하게 대했다지.” “매번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향의 특산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런 조카를 이런 식으로 대한 거냐?”“너는 처음엔 여자를, 이제는 목숨을 앗아간 거야.”“은철이 녀석이 본인의 이런 말로를 알았더라면, 애초에 너를 가까이 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르겠구나.”하도훈이 말했다.지환이 차갑게 하도훈을 바라보았다.“맞습니다. 우린 가족이고, 확실히 아주 가까웠죠.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은철이가 이서를 어떻게 대했었죠?” “이서는 은철이의 작은어머니였습니다. 그때 은철이는 이서가 본인의 가족, 즉 친척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하도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래, 보아하니 너는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지환아, 너희가 목숨을 건 계약을 했다는 거, 설령 네가 내 아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네가 오늘 은철이를 보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내 허락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형님이 허락하면 어떻고,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이내 이천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님, 모두 안배했습니다. 이제 오셔도 됩니다.]“그래.”전화를 끊은 지환은 외투를 들고 문을 나왔는데, 맞은편 방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그는 넋을 잃은 채 그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이천이 한 말이 맴돌았다.‘덫일 수도 있다고...?’‘가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는 이서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하면 떠나고 싶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바로 이때, 문이 ‘덜컥’ 소리를 냈다. 지환이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문 뒤에 서 있는 이서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그녀도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에 외투를 든 것을 본 이서가 물었다.“어디 나가요?”지환은 이서의 눈을 쳐다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오, 그럼 어서 가보세요. 나는 샤워하고 잘게요.”이서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는데, 이는 지환을 크게 안도시켰다. 그가 두 걸음 정도 내디뎠을 때, 뒷문이 다시 열렸고, 이서의 ‘조심해서 다녀와요’라는 한 마디가 복도에 메아리쳤다.고개를 돌린 지환은 텅 빈 복도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는 차갑고 의연한 기색만이 감돌 뿐이었다. 급히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천은 이미 어둠의 세력 조직원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즉시 똑바로 서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지환은 마지막으로 호텔을 힐끗 보고는 출발했다. 병원 입구.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고요했고,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평소 경비원이 지키고 있던 입구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히려 입구는 활짝 열려 있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천이 물었다.“대표님,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환은 냉정하게 반문했다.“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이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이미 철통같이 포위된 듯했고, 어디로 들어가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문으로
소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서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부하고 싶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그들이 소희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저녁에 식사하던 이서는 지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괴롭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더 강해진다는 건 하씨 가문을 넘어서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건 내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에요.” 맞은편에 앉은 지환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이서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 얼굴의 부드러운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얼굴의 미세한 동작까지도 끄집어냈다.“불가능한 일은 없어. 어쩌면 네가 하씨 가문을 넘어설지도 모르지.” “또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죠? 하씨 가문은 백 년의 기반을 가진 가문이예요. 내가 하씨 가문처럼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꿈속에서 하씨 가문을 이어받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요.” 하지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와 하씨 가문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말이다. 바로 이때, 지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이천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지환이 핸드폰을 든 채 이서를 한 번 보았다. 이서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지환이 그녀가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제 배불러요. 나는 먼저 방에 가서 텔레비전을 볼게요.”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지환이 수화기 너머의 이천에게 물었다.“확실해?”[확실합니다. 하은철은 확실히 죽었어요. 하지만 하씨 가문의 고택 앞에서 죽었죠.] [하은철은 치타와 마찬가지로 차가 부딪쳐 날아가는 순간에 차에서 뛰어내렸을 겁니다.] [물론, 그때 누군가가 하은철을 도왔기 때문에 하씨 가문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던 거겠죠.][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하씨 가문 고택
소희가 꽤 충격을 받은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 언니, 농담하는 거죠?” “그런 사람이 이득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우리가 시비를 걸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하며 기도해야 할 일이지.” 이서가 빙그레 웃었다.“이제 내 말을 믿겠어?” 소희가 말했다.“이서 언니, 언니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언니는 제 동생을 잘 모르잖아요. 걔는 어릴 때부터 남들을 골탕 먹이던 애예요. 한 번도 남한테 당한 적이 없는 애죠.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내가 어제 이미 계획을 세워뒀어. 소희 씨가 내 말 대로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소희 씨, 설마 그 이상한 양부모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생각을 안 해본 거야?” 소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확실히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단지 생각에 불과했어.’ ‘양엄마가 얼마나 끈질기게 집착하는 사람인지 잘 아니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철저히 말살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범법행위이지 않은가.소희는 이서가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았다. “이서 언니,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음에 또 심태윤이 찾아오면, 그냥 무시해 버리세요.” “언니는 걔한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겠지만, 걔는 언니한테 해를 끼칠 수 있어요.” 이서가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까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서야 알았어. 소희 씨가 심씨 가문에서 겪는 일이 내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걸.” “소희 씨, 소희 씨는 날 위해서 심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 그러니까 나한테는 심씨 가문에 있는 소희 씨의 처지를 개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아직 심 대표님 내외에게 정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소희 씨의 부모님이잖아. 세 사람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나를 몰래 만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소희는 이서의 말에 고개를
같은 시각.차에서 칭찬받은 소희는 쑥스러워했다.‘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하지만 이지숙의 눈에는 소희가 혀로 수많은 유생과 싸운 제갈량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주머니.” 소희가 이지숙이 계속해서 말을 잇기 전에 말했다.“물건을 좀 사러 가고 싶어요. 이따가 이 근처에서 저 좀 내려주세요.” “나도 같이 갈게.”이지숙이 열정적으로 자청했다. 소희는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저 혼자 가고 싶어요.”이지숙은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는 쇼핑을 원치 않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많은 일을 겪은 소희가 혼자 걷고 싶은 것이라 여겼다. “이해해, 다음 길목에서 내려줄게.”“소희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가 반드시 너를 보호할 테니까.” “...”소희는 정말이지 걱정이 많았다.‘심씨 가문 사람들의 뇌 회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소희야.” 심근영 또한 이지숙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소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너를 구할 거야.” 소희가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소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심근영 부부의 눈시울이 촉촉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자마자, 소희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윤씨 그룹으로 갈게요.” 운전기사는 대답한 후, 곧장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30분 후, 회사에 있던 이서는 소희가 왔다는 것을 듣고는 다소 놀랐다.“들어오라고 하세요.” “예.”김하늘은 곧장 대표실로 소희를 데려왔다.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자, 소희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이서 언니...” 문이 닫히고, 밀려오는 억울함을 느낀 그녀가 이서를 껴안았다.이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소희
소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6명의 어르신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어르신들, 모든 일의 원흉인 제가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여섯 명의 어르신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중간에 앉은 그 어르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그래.” “감사합니다.”“여러분, 여러분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나타남과 동시에 하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단되었으니, 저만 내쫓으신다면 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진정성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럼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거야?”심유인이 비꼬듯이 대답했는데, 어조에서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소희가 심유인을 보며 말했다.“그래서 저도 여러분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씨 가문을 떠나기만 하면, 하씨 가문은 자연히 심씨 가문을 용서하고, 다시 협력하려 할 테니까요!” ‘소희가 주동적으로 심씨 가문을 떠나겠다고 할 줄이야!’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소희야!”이지숙은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 엄마가 부족해서 너를 고생시키는구나.”소희는 역시 눈시울을 붉히던 심근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심이에요. 제가 쫓겨나는 걸로 하 사장님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할게요.”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조롱으로 들렸다.심근영이 중간에 앉은 어르신을 보며 말했다.“어르신, 소희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하 사장의 기분을 풀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하 사장일까요?” “윤 대표는 하 사장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하씨 가문을 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면, 더욱 궁지에 몰릴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나는 정말이지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고 싶지 않아!’ ‘이 사람들은 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