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심소희와 서나나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자신을 꽁꽁 싸맨 나나는 차에 오르자마자 이서의 상황을 물었다. “이서는 잘 지내. 게다가 형부가 이서를 돌봐주고 계시니까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하나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나나와 소희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 같지?’ 두 사람은 격앙되기 시작했다. “하나 언니, 이서 언니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아니면 저희도 한 번 가볼까요?”하나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이서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 게다가 이 선생님의 어머니도...” 상언을 언급하던 하나는 마치 심장을 찔리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나는 배우로서 관찰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서를 친딸로 여기고 계셔. 이씨 가문의 큰딸이 된 거나 마찬가지지.” 소희는 주의하지 않고 또 질문을 하려다가 나나의 가벼운 제지를 받았다. “그건 정말 잘됐네요.”나나가 현명하게 화제를 돌렸다. “하나 언니, 이제 푹 쉴 수 있는 거예요?” “응, 회사에서 며칠 간의 휴가를 줬어.” 하나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지냈어?” 소희와 나나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모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하나가 재빨리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인데?”나나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소희가 그녀를 막았다. 이 작은 동작을 놓치지 않은 하나가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나야, 네가 말해 봐.” 나나가 소희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하나 언니, 언니가 M국에 간 이후로 하씨 가문이 계속해서 이서 언니의 회사를 노리고 있어요.” 이서는 MH그룹을 인수한 후에 곧바로 출국하였기 때문에 오래된 회사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씨 가문이 이미 윤씨 그룹의 비즈니스를 몇 개나
“엄마!”임하나가 귀찮다는 듯이 자기 엄마의 말을 끊었다.“아직도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아빠를 꼬드기겠냐고요. 다시는 이런 일로 저를 찾지 마세요. 정말... 정말 피곤하니까요.”정신이 멍해진 최명희가 곧 입을 벌리고 울며불며 소리쳤다.“세상에! 이제는 딸도 내 편이 아니라니!” “이제 너도 내 편이 아닌 거야? 너도 날 원하지 않는 거냐고! 아이고, 내 팔자야!” 하나는 최명희의 울음에 더욱 짜증이 났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명희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정말 이런 일에 관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을 본 최명희는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튿날 아침.하나는 최명희에게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아침 일찍 윤씨 그룹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서 한동안 갓길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윤씨 그룹에 도착한 하나의 마음은 마침내 아주 좋아졌다. 윤씨 그룹의 본사는 이전의 MH그룹 건물을 고친 것이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기묘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윤씨 그룹이 몰락하고, 그 건물을 MH그룹이 인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몰락한 윤씨 그룹은 MH그룹이 인수하고, 또 그 건물이 윤씨 그룹의 손에 들어온 것이라니. 하지만 이제는 MH그룹이 윤씨 가문을 노릴 수 없을 것이었다. 윤수정은 일찍부터 이서가 윤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서는 지금 외국에 있는 터라 DNA 검사를 할 수 없었다.그리고 소희는 이 점을 이용하여 협력하려는 모든 윤씨 가문의 사람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하나 언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회사에 도착한 소희가 하나를 보자마자 즉시 맞이했다. “집에서는 할 일이 없잖아.” “그래도 너무 이르잖아.”소희가 적극적으로 하나를 끌고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었는데 집에서 푹 쉬어야지. 오후에 와도 전혀 상관없어!”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었
문이 열리고, 먼지투성이가 된 상언을 본 하나는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하나 씨...”상언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하나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는데, 잠시 후에 상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상언의 살냄새와 단단하고 힘 있는 가슴을 마주한 하나는 마침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선생님이 정말 H국에 오다니!’ “왜요, 많이 놀랐어요?”하나를 놓아준 상언은 그녀가 여전히 멍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하나는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왜 여기 있어요? 분명...”상언이 웃으며 말했다.“셔먼 장관님의 딸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요?”눈을 번뜩인 하나가 화가 나서 상언을 밀쳤다.“그래요, 이미 케이티 씨랑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거 아니에요?” 상언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수 없는 듯했다. “하나 씨,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돼요?” 하나는 농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허, 질투요? 제가 무슨 자격으로 질투하겠어요?”상언이 하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그래요, 그럼 확실하게 대답해 줄게요. 전 셔먼 장관의 조건을 받아들였어요.”“하지만 그 사람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 중의 하나만 받아들였을 뿐이죠.”하나의 저항이 점차 미약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애초에 셔먼 장관이 제시한 조건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제가 한 노인을 설득해서 땅을 팔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케이티와 함께 있는 거였죠. 하지만 저는 첫 번째 조건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이미 실험실에 관련된 일은 다 처리한 셈이에요.” “셔먼 장관은 곧 내 실험실을 재개할 거고요.”“그리고... 다음에도 이런 추잡한 수작을 부린다면, 내가 직접 대통령님을 찾아뵐 생각이에요.”하나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상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모든 의문과 우려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소희는 지시를 받고 가장 위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은 회사의 주주와 고위층이 그녀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 줬다는 것이었다. “심 비서, 그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재 의사라는 겁니까?”“와, 임하나 씨와 이 선생님이 연인 사이라고요? 사실이라면 정말 잘된 일이네요.”그들이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YS그룹의 대표님이 이 선생님과 친한 친구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선생님을 통해서 YS그룹의 대표님과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다면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맞습니다, 맞아요. 그렇게 된다면 하씨 가문의 사람이 열 명이 있어도 두려울 게 없을 거예요!”“...”소희가 흥분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렇게 번거로울 필요 없어요.’‘여러분의 사장님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바로 YS그룹의 대표님이니까요.’ ...하나와 상언은 차를 타고 귀가했는데, 그곳은 당연히 하나의 자택이었다.두 사람은 귀가하는 길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고, 상언은 이미 해야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곧 하나 씨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겠네요.”차가 곧 멈추려고 할 때, 상언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하나에게 말했다. “정식적으로 어머님을 만나는 자리는 아니지만요...” 하나는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신 게 분명해.’ 그녀가 최명희를 떠올렸다. ‘어제 아빠의 간통 현장을 잡으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오늘 돌아가면 어떤 소란을 피우실지 몰라.’ 하나는 갑자기 상언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방향을 바꾸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다 왔어요.”상언이 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상언을 바라본 하나는 발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자격지심을 느꼈다. ‘M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 선생님의 다른 가족분들은 만나 뵙지 못했지만, 배미희 여사님이랑 이서가 같이 지내는 모습만 봐도 이씨 가
상언의 진지한 말투를 들은 최명희는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하나 씨가 결혼을 매우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아니요, 우리 하나는...” 최명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하나 씨에게 왜 아직도 남자 친구가 없는 건지 생각해 본 적은 있으십니까?” 최명희가 말했다.“아무래도 하나는 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남자 친구도 여러 번 있었는데, 자주 바뀌기도 했고요...”상언의 시선을 느낀 최명희가 믿기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설마... 하나가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는 이유가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예요?”“어머님,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 씨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관계를 보면서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태까지의 연애도 하루, 혹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던 거고요. 아마 3일이 넘는 연애는 긴 연애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최명희가 입술을 움찔거렸다.“전혀... 전혀 몰랐어요. 하나 아버지의 바람이 하나에게 그런 상처가 되었을 줄은...”“네... 어머님도 부모가 처음이었을 테니까요.”상언이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하지만 정말 하나 씨가 이렇게 된 게 아버님의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상언의 두 눈에서 적의를 느낀 최명희가 경계하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아버님의 바람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남자가 끓어오르는 욕구조차 통제할 수 없다면 물리적 거세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로서 딸을 데리고 남편의 간통 현장을 잡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본 남편이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든 간에 그런 방식은 바람직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순간, 최명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했다.그녀가 잠시 후에야 괴로워하며 입을 열었다.“우리의 집안일이에요. 그쪽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요.” “하나 씨가 제
수화기 너머에서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상언 오빠, H국에 도착하신 거예요? 하나는 만나셨어요?]“이서야, 나야.”하나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만 리 밖의 M국으로 전해지자, 이서는 감격에 겨워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오빠랑 같이 있는 거야? 하나야, 내 말을 좀 들어봐. H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상언 오빠는...] 하나가 가볍게 웃으면서 이서의 말을 끊었다.“이서야, 나도 다 알아.” [그럼 오빠랑 화해한 거야?]이서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으로 눈앞의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나가 옆에 앉은 상언을 바라보았다.‘이게... 화해인가?’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이전처럼 화해라는 말을 배척하지 않았다.[너무 잘됐다.] 이서는 하나가 아직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의 대답을 들은 듯했다. [하나야...] 이서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우리가 했던 내기, 아직 잊지 않았지?]하나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당연하지.” 이서가 또 코를 훌쩍였다.[그래, 이제 방해하지 않을게, 상언 오빠랑 좋은 시간 보내. 대회가 끝나는 대로 너한테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볼게.]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꽤 감개무량한 듯했다.“쉽지 않네요.” 이서의 시선이 옆에 있던 지환에게 향했다. 잠시 후, 시선을 거둔 이서가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단편 소설 대회 심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스웨이 작가님이 그러시던데, 다음 주면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혹시 그날 저랑 같이 가실래요?” 지환이 물었다.“무슨 요일이야?” “수요일이에요.”지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바쁘세요?”이서가 물었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참석할게.” “괜찮아요, 시간 없으면 안 오셔도 돼요.” 이서가 진심을 숨긴 채 말했다.“꼭 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뭐.”지환이 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번역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아니면 네 글쓰기 실력을 못 믿는 거야?” 고개를 살짝
하이먼 스웨이의 별채, 서재 안.DNA 검사 결과지를 손에 든 하이먼 스웨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과는 이미 나온 상황이었다. ‘가은이가 정말 내 딸이 아니라고?’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하이먼 스웨이였으나, 부정할 수 없는 DNA 검사 결과 앞에 그녀의 심리적 방어선은 철저히 무너지는 듯했다. ‘가은이가 내 딸이 아니라니... 그럼 내 딸은 어디 있다는 거야?’ 그녀는 왜 애초에 DNA 검사 결과가 틀렸던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혼란에 빠져 있던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엄마.”가은이 득의양양하게 들어왔다.“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요 며칠 동안 외출도 하지 않으시고 방에만 계신다고 하시던데, 단편 소설 대회 원고를 심사하느라 바쁘신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흥분된 감정에 젖어 하이먼 스웨이의 이상한 낌새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엄마, 우승자가 누군지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 미스터리한 여자의 말에 따르면, 우승자는 틀림없이 내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던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를 찾아가 결과를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하이먼 스웨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 소녀의 웃음은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투표만 담당하고, 개표는 다른 스태프들이 담당하는 거라서 우승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구나.”하이먼 스웨이가 약간은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네.”가은은 약간 실망한 듯했다.“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잠깐...”하이먼 스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은을 불렀다.“가은아, 요즘도 심씨 가문이랑 연락하니?”안색이 약간 변한 가은이 곧 보육원 일을 떠올렸다. “아니요, 안 해요.” “정말?”하이먼 스웨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섰다.“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도 심씨 가문 사람들이 너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예전에는 가은이가 내 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가은이를 좋게 보려 했지만...’‘이제
지환이 하이먼 스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은에게 DNA 검사 결과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던 하이먼 스웨이가 우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수화기 너머의 지환이 한 말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의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가은을 한 번 보았다.“확실해?” [네, 확실한 증거도 있습니다. 복구된 카페 CCTV 영상을 통해서 심가은이 이서를 다치게 한 변태남과 접촉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사진을 그 변태남에게 보여주었더니, 자신에게 이서를 해치라고 사주한 사람이 심가은이 맞다고 인정하더군요.]하이먼 스웨이는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그럼 이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잠시 침묵하던 지환이 입을 열었다.[장모님의 따님이니... 우선 장모님께 맡기겠습니다.] ‘하 서방이 이서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야.’ ‘그리고...’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움직이겠다는 뜻이지.’ “엄마...”가은의 울음소리가 하이먼 스웨이를 현실로 이끌어 오는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는 눈앞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가은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마음은 그야말로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었다. ‘가은이가 카페에서 그 변태남을 만났다고?’ ‘그날... 가은이는 그 카페에서 나랑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잖아.’‘어쩐지... 그날 이후로 가은이가 변한 것 같더라니...’ 그렇다. 심가은은 확실히 변했다. 다만 이전보다 더욱 악랄해졌을 뿐.깊은 한숨을 내쉬며 모든 감정을 배출한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숙인 채 가은을 향해 또박또박 물었다.“그 변태남한테 이서를 해치라고 사주한 사람이 너였니?” 안색이 순식간에 변한 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의 공격적인 눈빛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하이먼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