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네가 시키는 일을 내가 어떻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어?”콧방귀를 뀐 박예솔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자리를 떠나자, 지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마침 들어온 비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사장님, 예솔 아가씨께는... 왜 그런 관용을 베푸시는 겁니까?”‘만약 다른 사람이 노크도 없이 하 사장님의 사무실을 드나들었다면, 이미 사지가 찢겼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예솔 아가씨는 아무리 하 사장님의 심기를 건드려도 무사할 수 있는 거지?’지호가 목소리를 높였다.“쓸데없는 소리 좀 집어치워!”비서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비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지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분노가 아닌 어떠한 추억이 서려 있는 듯했다. ‘휴, 다행이다.’ 그렇다. 지호는 확실히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는 예솔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당시 그는 아직 하씨 가문에 거주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도련님으로 모시며 아첨하기 바빴는데, 유독 예솔만이 그를 경멸하듯 바라보며 말했었다.“그쪽은 하씨 가문에서 기르는 사냥개일 뿐이에요.”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지호는 밀려오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호는 이 말을 듣고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웃음이 났다. 예솔이야말로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호는 지환의 형이었기 때문에 하씨 가문 고용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지호가 하씨 가문이 기르는 사냥개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총명했던 지호는 그들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는커녕, 매우 슬프게 한 것이었다.그래서 지호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이 지환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신경 쏟았다.애석하게도 줄곧 기회가 없었지만 말이다.그러던 어느 날, 지호는 이서의 등장과 함께 지환의
[저기... 오늘은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혼자 호텔에 있으면 정말 심심할 것 같은데... 혹시 시간 있으세요?]상언이 말했다.“그럼요. 하나 씨가 어디를 가든 함께 있어 줄게요.”곰곰이 생각하던 하나가 입을 열었다.[그럼 저랑 같이 쇼핑하러 가실래요? 여기에 온 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 이곳의 거리를 마음 편히 구경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좋아요, 호텔에서 기다리세요, 곧 데리러 갈게요.”상언이 말했다. 전화를 끊은 상언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는 재빨리 하나가 있는 호텔로 차를 몰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나 씨, 곧 도착할 거예요. 지금 내려오면 될 것 같아요.”상언의 말에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온 하나는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상언의 차를 볼 수 있었다.상언이 조수석의 문을 열며 하나를 태우려 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제가 말한 쇼핑은 걸으면서 거리를 구경하는 거였어요.” 눈썹을 찌푸린 상언의 시선이 곧 하나의 발에 떨어졌는데, 그녀가 신은 것은 구두가 아닌 운동화였다.조금 놀란 그가 하나에게 물었다.“왜 갑자기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이곳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거든요.”하나가 주차장을 가리켰다.“주차하고 오세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상언이 차 열쇠를 호텔 종업원에게 건네주었다.“이제 가요.”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언은 오랫동안 M국에서 생활했으며, 이 일대는 지환이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었기에 딱 두 마디만 하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다.“이 일대는 전부 지환이의 영역이에요.”하나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었다.“이전에 형부가 세계 최고의 재벌이라고 했을 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하씨 가문보다 더 대단한 가문이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거죠.” “하나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지환이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과 몇
하나의 입술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럼... 저를 포기하시는 게...”여기까지 말한 하나가 고개를 들고 약간의 웃음을 띠었다.“이 선생님, 제가 이 선생님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벌써 잊으신 거예요?”그녀의 미소를 본 상언의 눈빛이 약간 흐려졌다. “하나 씨, 솔직히 말해봐요, 진심이에요?”하나는 마음속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네, 진심이에요, 저는 정말 이 선생님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없으니까요. 혹여라도 제가 이 선생님의 안전에 영향을 끼칠 상황이 된다면, 주저 없이 저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겠죠?” 상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하나 씨의 눈빛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 하나는 상언의 기세등등한 눈빛을 피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럼 왜 내 눈을 못 쳐다보는 거예요?”상언의 핍박을 받던 하나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밀어내야만 했다.“너무 피곤하네요. 인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온 길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의 고집스러운 뒷모습을 보던 상언은 몇 초간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택했다. 이를 알아차린 하나의 발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는데, 나중에는 뒤에서 밀려오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언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나는 코끝이 찡해지는 듯했으며, 곧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호텔 입구에 거의 도착한 그녀는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었고,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에야 상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선생님, 더는 저를 따라오지 마세요.” “싫어요, 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요.”상언의 말투는 평소답지 않게 아주 단호했다. “하나 씨는 내 행동이 의미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입술을 움찔거리던 하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 선생님은 지금 하는 모든 일
지환이 눈꺼풀을 치켜뜨며 상언을 흘겨보자, 그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 맞아.”“너더러 몬토 씨가 땅을 팔도록 설득하래?”“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상언은 지환이 항상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내용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셔먼 장관의 자택에 도청기라도 설치한 거야?’ “그 땅, 하지호가 원하는 거야.”‘그래서 지환이가 오늘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거구나.’“잠깐만, 분명 셔먼 장관은 대통령님이 그 땅을 원하시는 거라고...”말을 뚝 그친 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대통령님이 그 땅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날 이용해서 그 땅을 얻으려 한다는 거야?”“그런데 몬토 씨는 친한 사람이 아주 많잖아. 왜 하필 나야?” 지환이 또 상언을 흘겨보았다.“잊지 마, 너는 내 편이잖아.” 상언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날 이용해서 그 땅을 구매한 후,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속셈이구나...!”“그래, 하지호가 가장 잘하는 게 이간질이잖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단지 이용당한 거라 할지라도,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지금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거라고!” “이간질이라니... 꿈도 크네!”상언이 분노하며 말했다.“나는 절대 몬토 씨를 설득하지 않을 거야.” 상언은 본래 셔먼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배후와 속셈을 알게 된 이상 더욱 들어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몬토 씨를 설득시켜.”지환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상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환아, 너 미쳤어? 그 땅을 원하는 사람이 하지호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나한테 그런 요구를 하는 건데?”“네가 셔먼 장관의 요구에 응해야만 내가 하지호의 목을 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안 돼.”상언이 난색을 보였다.“지환아, 나는 못해.”‘셔먼 장
책상 위에는 지환이 이서를 위해 직접 번역한 소설이 놓여 있었다.바람이 불자, 그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서는 그 무엇으로도 종이를 누르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저 소리를 들으면 H선생님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돌려 종이를 한 번 보았다. 종이에 쓰인 지환의 글씨체는 아주 힘차고 우수했으며, 아름다웠다. 마치 탁본 된 서예 글씨처럼.이서는 그 글자를 보고 있자 하니, 책상에 엎드린 H선생님이 그녀를 대신하여 한글 자 한 글자 번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듯했다. 그녀의 텅 빈 마음은 또 가득 채워졌다. 공허함과 흡족함을 동시에 느끼던 이서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바로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하나였다. 이서가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3시 7분?’‘왜 지금...’이상함을 느낀 이서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이서야, 얼른 기사 좀 봐.]이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왜?”[우선 기사부터 봐봐.] 이서는 핸드폰의 뉴스 앱을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무슨 기사?”이서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인 인터넷 첫 페이지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외국어로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1초 후에야 반응할 수 있었다. 이서가 얼른 기사를 클릭했다.‘나에 관한 기사라는 거야?’그 기사는 이서의 실력에 대한 칭찬을 연발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이먼 스웨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재이며, 하이먼 스웨이조차도 그녀의 작품을 보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서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기사를 읽어 보았다. 그 기사에는 이서가 H국 출신이라는 것과 여태껏 문학 산업에 종사한 적이 없다는 것, 조만간 열릴 단편 대회의 인기 참가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라면 두려울 게 전혀 없을 거야.’ 이서는 의심스러웠다.‘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출
이튿날 이른 아침.이서는 깨어나 이 일을 상언에게 알려 주었다. 보도를 확인한 상언은 이서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지환에게 전화로 이 일을 알렸는데, 지환은 이 보도들이 모두 한 매체인 CC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C는 지호의 회사 산하의 한 매체였는데, 다시 말하자면 이 보도는 모두 지호가 고의로 작성한 것이었다. “하지호,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지환이를 상대하려는 건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서까지 끌어들이려는 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라고!’지환이 말했다.[하지호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상언은 순간 침묵했다. [어제 내가 생각해 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지환이 물었다.“나... 나는 못 해.” 상언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상언이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맙다, 지환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상언이 화를 내며 물었다.“그나저나... 이서 일은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야, 아니면...” [일단 상황을 좀 지켜봐야겠어.] 지환이 손에 든 펜을 돌리며 말했다.[아마 하지호만이 이서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분명 겉보기에는 하지호가 벌인 짓이 맞아. 하지만 내가 아는 하지호는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이서를 노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야?”한껏 눈살을 찌푸리던 상언은 문득 또 다른 일이 떠오른 듯했다. “맞다, 이전에 어떤 변태남이 이서를 습격했었잖아.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아냈어?” [CCTV 복구가 늦어지고 있어. 조사 담당자 말로는 메모리가 손상되었다던데... 아무래도 그 사건의 배후에도 하지호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상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했다.“그러니까... 한참 전부터 이서를 노리고 있었다는 거네?” [응, 그랬던 것 같아.]상언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상언이 말했
“저도 알아요.”이서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밥은 잘 챙겨 드셔야죠. 그래야 문제를 처리할 힘이 날 테니까요.”상언이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긴 하네...”그는 탁자 옆으로 가서 젓가락을 들었다. 상언이 밥을 먹으려는 것을 본 이서는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천천히 드세요, 저는 나가볼게요.” 이서의 그림자가 사라지려던 찰나, 상언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이서야.”“네?”이서는 고개를 돌려 상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상언이 입술을 오므렸다.“고맙다는 말을 아직 못한 것 같아서... 하나 씨의 모든 일을 나한테 알려줘서 정말 고마웠어.” 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뭘요, 저는 하나가 오빠처럼 모든 과거를 내려놓고 새로운 미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어요.”“내가... 하나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상언이 눈을 내리깔고 희망이 없는 어투로 말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나도 언젠가 오빠의 마음을 느끼게 될 거예요.”상언이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데 어제 하나 씨가 그러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의 굳은 결심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라고.”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어제 새벽 3시가 넘어서 제게 전화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서가 이 말을 마치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상언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은 모양새였다. 잠시 후. 상언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하나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마침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황급히 베란다로 걸어간 그의 눈에 차에서 내리는 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잘 못 본 건가?’같은 시각.아래층으로 내려간 이서가 급히 들어오는 하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않아도 방금까지...” 하나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이서야, 상황이 좀 안 좋아. 인터넷에 너에 대한 모든 정보가 퍼졌단 말이야...” 하지만 유일하
“구체적인 상황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서의 모든 상황이 퍼뜨려진 걸 확인하고 바로 여기로 달려온 거예요.”하나가 이서를 바라보았다.“온통 이서를 욕하는 내용밖에 없어요. 재능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면서, 본인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비교하려 든다고요.” “하나 씨, 핸드폰 좀 보여주세요.” 상언이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 상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핸드폰을 건네받던 상언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손가락을 건드렸고, 그녀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손가락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서는 멀리 서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럼... 누군가가 저를 노리고 있다는 거네요...?” 이서가 괴로워하며 하나에게 물었다.“하나야, 누가 나를 노리고 있는지 알아?’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니... 대체 누굴까?’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 생각에는...”“아마... 심가은인 것 같아. 그 여자는 이전에도 곳곳에서 너를 노렸던 사람이거든. 물론 지금 네가 M국에 있어서 그 여자가 더 이상 너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콜록콜록!”이서가 갑자기 심한 기침을 몇 번 하면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스웨이 작가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하나가 안색이 약간 변하여 상언을 바라보자,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매우 어두워졌다. ‘내가 방금 한 말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께서 다 들으셨다는 거야?!’ ‘아무리 좋은 관계라 할지라도, 자기 딸을 가십거리로 삼는 것을 들으셨으니... 분명히 화를 내실 거야.’ 이렇게 생각한 하나가 재빨리 몸을 돌려 하이먼 스웨이에게 사과했다.“스웨이 작가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 씨, 왜 그래요? 왜 갑자기 사과하고 그래요?” 하이먼 스웨이가 환한 미소를
“지금은 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요. 물론 부대표님께서 윤 대표님과 친분이 깊다는 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선 회사의 규정을 따라야죠.”고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우기광은 더 황당해졌다.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규정을 근거로 날 해고하겠다는 겁니까?”고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해고 통보서를 내놓았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더 버티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고이서는 책상 옆에 놓인 전화기를 잡았지만, 우기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기광은 명예직이었으나, 고이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일부러 우기광을 겨냥해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우기광은 이서와 오래된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를 해고하는 건 곧 이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고이서는 내선 전화를 걸며 덧붙였다. “보안팀이죠? 대표실로 와서 우기광 씨 좀 모시고 나가 주세요.” “당신...!” 분노로 가득 찬 우기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고이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 보기에 좀 그렇지 않겠어요? 괜히 보안팀에 끌려 나가는 건 보기에 안 좋잖아요.” 우기광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허,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우기광이 이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고위층 임원들이 우기광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우기광을 향하자,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일들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우기광은 그렇게 한마디의 경고를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남은 사람들은 우기광
‘분명히 미쳐버린 거야!’ ‘절대 하지환 씨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이서는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지만,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비웃듯이 튀어나왔다.‘과연 그럴까?’ 하필이면 그때 아래층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포도 묘목이 도착했는데, 같이 심을래?”이서는 천천히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고, 여전히 셔츠를 단정히 입고 있는 지환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냥 혼자 하세요.” “그래, 그럼 나 혼자 심을게.” 지환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이서는 어쩐지 지환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나도 할 일 없으니까 같이 심어요.” 지환은 이서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고, 햇살 아래 지환의 미소는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차마 못 보겠어.’ 이서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지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가까워질수록 지환의 짙은 향기와 넘치는 남성미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도망칠 곳조차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서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지환에게 말했다. “여기... 이쪽 벽 근처에 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지지대를 세우기도 편하잖아요.” 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하는 데다 심자.” 이서는 지환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져서, 애써 지환의 존재를 무시하고 급히 포도 묘목을 집어 들고 땅에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듯, 지환은 이서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듯 다가왔고, 이서가 열심히 묘목을 심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포도는 그렇게 심는 거 아니야. 내가 가르쳐줄게.” 이서가 ‘괜찮아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환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봐, 이렇게 해야 해.” 이서는 이미 지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 신경은 어느새 등에
“아...” 이서가 순간 멍해졌고,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지환의 눈을 피했다. “저기... 밥은 먹었어요?” 지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응, 먹었어.” 지환은 이서의 얼굴에 번진 수줍음을 보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서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변함없이 예쁘구나.’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포도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 “필요 없어요. 그게... 아직 배가 덜 찼거든요. 먼저 가서 밥 좀 더 먹을게요!” 이서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떴는데, 지환이 또다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를 말할까 봐 도망치듯 달아난 것이었다. 지환은 이서가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사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환도 이서가 자신을 완전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문제는 지환이 이서를 속였다는 점과 그가 하은철의 작은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하씨 가문이 과거에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준 만큼, 이서는 지환과 함께 있는 매 순간 하은철을 떠올릴 것이었으니 말이다.즉, 이서가 하은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지환과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지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숙여 꽃을 심기 시작했다.‘그냥 흐름에 맡기라는 상언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지환은 흙 속에 심어진 꽃모종을 바라보며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마음이 흔들리는 건 싫은데...’지환은 이서와의 관계에 분명한 경계를 짓고 싶었다. 한편, 주방에서 밥을 먹던 이서는 몸은 주방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바깥 정원으로 날아가 있었다.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지환을 본 순간, 지환의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과 팽팽한 가슴 근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주는 묘한 자극까지... ‘안 돼!’ 이서는 급
문이 닫히자마자 다른 임원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부대표님을 호출하는 거죠?” 우기광은 담담하게 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모두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세요. 별일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원들은 어쩐지 일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모두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서 있자, 우기광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윤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고 팀장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맡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고 대표와 일한 시간이 짧아서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번 일로 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건 옳지 않아요. 자, 여기서 이렇게 서 있어 봐야 해결될 일도 아니니,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상황을 직접 지켜봅시다. 고 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다른 임원들은 우기광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그 시각, 이서는 위층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정원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이서는 정원으로 내려가 다가가며 물었다. “벌써 출근한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집안이 조용해서 당연히 지환이 출근한 줄 알았던 이서는, 지환이 정성스럽게 꽃과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지환은 막 심은 장미 한 송이를 다듬으며 일어섰다. “벌써 잊었어?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혼자 출근할 수 있겠어?” 지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기억을 잃고 난 이후로 여긴 방치돼 있었어.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이곳을 멋진 정원으로 꾸미고 싶어. 사계절 내내 꽃이 피어 있는 정원, 정말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아?” 이서는 지환에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그들과
이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죠?] 고이서는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대표님,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좀 더 시간을 갖고 푹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면 되니까요.”[네, 고 팀장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네요.]이서는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왜 전화했을까...?]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고이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은 후, 고이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녹음해 놓길 잘했어. 본인 입으로 나더러 회사 사람들을 마음대로 해고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로 할 일은...”고이서는 옆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김 비서, 들어오세요.” 김하늘이 잔뜩 긴장한 채 방으로 들어오자, 고이서가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거, 김 비서가 대표님께 알린 거죠?” 김하늘은 깜짝 놀라 거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니에요, 고 팀장님!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고이서는 몇 초 동안 김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만족스럽게 다리를 꼬고는 말했다. “하긴, 김 비서한테 그럴 깡은 없겠죠. 그럼 대체 누가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걸 윤 대표님께 알린 거죠?”김하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만 숙였고, 고이서는 비꼬듯 말했다.“말하기 싫어요? 아, 그 사람한테 밉보일까 봐 겁나는 거예요? 그럼 말 안 해도 돼요.”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고이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이나 정산받으세요.” 김하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저희 집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있고,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제가 직장을 잃으면 가족들이 다 굶어 죽게 된다고요.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고이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법은 없었다.고이서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그녀에겐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고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이서에게 말했다. “네, 대표님.” 하지만 돌아온 이서의 목소리는 고이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으며, 전혀 화가 난 기색을 띠지 않았다. 심지어 어딘가 즐거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공금을 횡령했다면서요?]“그게...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고이서는 더 이상 이서의 말투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급하게 해명하려 들었다.[아니요, 해명할 필요 없어요. 고 팀장님이 그 돈을 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고 팀장님, 저는 고 팀장님을 친구로 생각하는 이상, 고 팀장님을 전적으로 믿을 생각이에요.]이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회사를 위해 그 돈을 썼을 거잖아요, 그렇죠?]고이서는 얼어붙었다. ‘윤이서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방금 그 말은 치매가 오지 않은 이상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어!’ 보아하니, 이서의 병세가 꽤 심각해진 것 같았다. ‘며칠만 더 지나면 내가 윤씨 그룹의 대표 자리를 확실히 굳힐 수 있을 것 같아.’“네, 맞습니다! 사실 진행이 안 되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담당자에게 큰 선물을 보냈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며칠 내로 프로젝트를 승인해 준다고 하더군요. 대표님, 제가 이렇게 한 게 회사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니겠죠?”[그럼요, 지금은 고 팀장님이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 고 대표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제가 전화를 한 이유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였어요.][임원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대표 자리에 앉은 이상, 고 팀장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심지어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도 가능하죠.]고이서의 눈이 커졌다. “제가 회사 직원들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그렇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지금 회사의 실질적인 주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잠시 후, 소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서 언니, 솔직히 말해도 절대 화내면 안 돼요.]“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소희 씨도 내가 무슨 성격인지 잘 알잖아? 말하라고 해놓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서의 말에 하나와 소희, 나나는 용기를 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서야, 형부가 신분 문제로 널 속인 건 맞지만, 그 외의 다른 일에선 너를 진심으로 대했어.]“그러니까 네 말은 하지환 씨가 날 속인 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응... 그런 셈이지.]“소희 씨 생각은 어때?”소희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답했다.[그럼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형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형부만큼 언니한테 잘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요.][만약 저라면 그 정도 잘못은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소희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고, 혹여나 이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머뭇거렸다.다행히 이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괜히 별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거네?”[언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소희가 급히 해명했지만, 이서는 한사코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 씨,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희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소희 씨의 솔직한 생각인 거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니, 결론도 다를 수 있어. 난 소희 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잘 생각해 볼게.”소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나나가 나섰다. [언니, 아시다시피 저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아요.]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에 맡기라고...?”‘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하도훈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게 아니고, 그때까진 고민할 시간이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