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이 눈꺼풀을 치켜뜨며 상언을 흘겨보자, 그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 맞아.”“너더러 몬토 씨가 땅을 팔도록 설득하래?”“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상언은 지환이 항상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내용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셔먼 장관의 자택에 도청기라도 설치한 거야?’ “그 땅, 하지호가 원하는 거야.”‘그래서 지환이가 오늘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거구나.’“잠깐만, 분명 셔먼 장관은 대통령님이 그 땅을 원하시는 거라고...”말을 뚝 그친 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대통령님이 그 땅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날 이용해서 그 땅을 얻으려 한다는 거야?”“그런데 몬토 씨는 친한 사람이 아주 많잖아. 왜 하필 나야?” 지환이 또 상언을 흘겨보았다.“잊지 마, 너는 내 편이잖아.” 상언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날 이용해서 그 땅을 구매한 후,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속셈이구나...!”“그래, 하지호가 가장 잘하는 게 이간질이잖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단지 이용당한 거라 할지라도,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지금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거라고!” “이간질이라니... 꿈도 크네!”상언이 분노하며 말했다.“나는 절대 몬토 씨를 설득하지 않을 거야.” 상언은 본래 셔먼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배후와 속셈을 알게 된 이상 더욱 들어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몬토 씨를 설득시켜.”지환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상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환아, 너 미쳤어? 그 땅을 원하는 사람이 하지호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나한테 그런 요구를 하는 건데?”“네가 셔먼 장관의 요구에 응해야만 내가 하지호의 목을 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안 돼.”상언이 난색을 보였다.“지환아, 나는 못해.”‘셔먼 장
책상 위에는 지환이 이서를 위해 직접 번역한 소설이 놓여 있었다.바람이 불자, 그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서는 그 무엇으로도 종이를 누르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저 소리를 들으면 H선생님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돌려 종이를 한 번 보았다. 종이에 쓰인 지환의 글씨체는 아주 힘차고 우수했으며, 아름다웠다. 마치 탁본 된 서예 글씨처럼.이서는 그 글자를 보고 있자 하니, 책상에 엎드린 H선생님이 그녀를 대신하여 한글 자 한 글자 번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듯했다. 그녀의 텅 빈 마음은 또 가득 채워졌다. 공허함과 흡족함을 동시에 느끼던 이서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바로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하나였다. 이서가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3시 7분?’‘왜 지금...’이상함을 느낀 이서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이서야, 얼른 기사 좀 봐.]이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왜?”[우선 기사부터 봐봐.] 이서는 핸드폰의 뉴스 앱을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무슨 기사?”이서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인 인터넷 첫 페이지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외국어로 쓰여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1초 후에야 반응할 수 있었다. 이서가 얼른 기사를 클릭했다.‘나에 관한 기사라는 거야?’그 기사는 이서의 실력에 대한 칭찬을 연발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이먼 스웨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재이며, 하이먼 스웨이조차도 그녀의 작품을 보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서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기사를 읽어 보았다. 그 기사에는 이서가 H국 출신이라는 것과 여태껏 문학 산업에 종사한 적이 없다는 것, 조만간 열릴 단편 대회의 인기 참가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라면 두려울 게 전혀 없을 거야.’ 이서는 의심스러웠다.‘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출
이튿날 이른 아침.이서는 깨어나 이 일을 상언에게 알려 주었다. 보도를 확인한 상언은 이서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지환에게 전화로 이 일을 알렸는데, 지환은 이 보도들이 모두 한 매체인 CC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C는 지호의 회사 산하의 한 매체였는데, 다시 말하자면 이 보도는 모두 지호가 고의로 작성한 것이었다. “하지호,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지환이를 상대하려는 건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서까지 끌어들이려는 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라고!’지환이 말했다.[하지호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상언은 순간 침묵했다. [어제 내가 생각해 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지환이 물었다.“나... 나는 못 해.” 상언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상언이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맙다, 지환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상언이 화를 내며 물었다.“그나저나... 이서 일은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야, 아니면...” [일단 상황을 좀 지켜봐야겠어.] 지환이 손에 든 펜을 돌리며 말했다.[아마 하지호만이 이서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분명 겉보기에는 하지호가 벌인 짓이 맞아. 하지만 내가 아는 하지호는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이서를 노리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야?”한껏 눈살을 찌푸리던 상언은 문득 또 다른 일이 떠오른 듯했다. “맞다, 이전에 어떤 변태남이 이서를 습격했었잖아.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아냈어?” [CCTV 복구가 늦어지고 있어. 조사 담당자 말로는 메모리가 손상되었다던데... 아무래도 그 사건의 배후에도 하지호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상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했다.“그러니까... 한참 전부터 이서를 노리고 있었다는 거네?” [응, 그랬던 것 같아.]상언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상언이 말했
“저도 알아요.”이서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밥은 잘 챙겨 드셔야죠. 그래야 문제를 처리할 힘이 날 테니까요.”상언이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긴 하네...”그는 탁자 옆으로 가서 젓가락을 들었다. 상언이 밥을 먹으려는 것을 본 이서는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천천히 드세요, 저는 나가볼게요.” 이서의 그림자가 사라지려던 찰나, 상언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이서야.”“네?”이서는 고개를 돌려 상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상언이 입술을 오므렸다.“고맙다는 말을 아직 못한 것 같아서... 하나 씨의 모든 일을 나한테 알려줘서 정말 고마웠어.” 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뭘요, 저는 하나가 오빠처럼 모든 과거를 내려놓고 새로운 미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어요.”“내가... 하나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상언이 눈을 내리깔고 희망이 없는 어투로 말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나도 언젠가 오빠의 마음을 느끼게 될 거예요.”상언이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데 어제 하나 씨가 그러더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의 굳은 결심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라고.”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어제 새벽 3시가 넘어서 제게 전화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서가 이 말을 마치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상언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마치 벼락을 맞은 모양새였다. 잠시 후. 상언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하나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마침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 황급히 베란다로 걸어간 그의 눈에 차에서 내리는 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잘 못 본 건가?’같은 시각.아래층으로 내려간 이서가 급히 들어오는 하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않아도 방금까지...” 하나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이서야, 상황이 좀 안 좋아. 인터넷에 너에 대한 모든 정보가 퍼졌단 말이야...” 하지만 유일하
“구체적인 상황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서의 모든 상황이 퍼뜨려진 걸 확인하고 바로 여기로 달려온 거예요.”하나가 이서를 바라보았다.“온통 이서를 욕하는 내용밖에 없어요. 재능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면서, 본인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비교하려 든다고요.” “하나 씨, 핸드폰 좀 보여주세요.” 상언이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 상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핸드폰을 건네받던 상언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손가락을 건드렸고, 그녀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손가락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서는 멀리 서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럼... 누군가가 저를 노리고 있다는 거네요...?” 이서가 괴로워하며 하나에게 물었다.“하나야, 누가 나를 노리고 있는지 알아?’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니... 대체 누굴까?’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 생각에는...”“아마... 심가은인 것 같아. 그 여자는 이전에도 곳곳에서 너를 노렸던 사람이거든. 물론 지금 네가 M국에 있어서 그 여자가 더 이상 너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교류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콜록콜록!”이서가 갑자기 심한 기침을 몇 번 하면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스웨이 작가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하나가 안색이 약간 변하여 상언을 바라보자,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안색이 순식간에 매우 어두워졌다. ‘내가 방금 한 말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께서 다 들으셨다는 거야?!’ ‘아무리 좋은 관계라 할지라도, 자기 딸을 가십거리로 삼는 것을 들으셨으니... 분명히 화를 내실 거야.’ 이렇게 생각한 하나가 재빨리 몸을 돌려 하이먼 스웨이에게 사과했다.“스웨이 작가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하나 씨, 왜 그래요? 왜 갑자기 사과하고 그래요?” 하이먼 스웨이가 환한 미소를
“H선생님께 번역을 도와달라고 부탁드렸어요.”“오, H선생님이 번역을 도와준다니, 1등은 따놓은 당상이겠구나!”“당연하죠!”하나가 하이먼 스웨이의 팔을 안으며 말했다. “우리 이서는 분명히 1등을 할 거예요!”그녀의 말을 듣던 이서가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하나야, 넌 콩깍지가 너무 심해.” “너는 내 좋은 친구잖아. 너한테 콩깍지가 심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콩깍지가 심하겠어?”이서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리던 하나는 상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맞다, 스웨이 작가님, 오신 김에 이서의 글을 좀 봐주시는 건 어떠세요?”“좋아요.” 하이먼 스웨이가 흔쾌히 대답했다.세 사람은 곧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하나 씨.” 상언이 뒤에서 하나를 불렀는데, 세 사람은 그제야 상언의 존재를 깨달았고, 분분히 뒤를 돌아봤다. “잠시 이야기 좀 해요.”하나가 망설이며 이서를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난 작가님이랑 먼저 올라가 있을게.” 이서는 하이먼 스웨이를 끌고 올라가면서 두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듯했다. 하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다시 아래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느리게 걸었기 때문에 5분 후에야 상언의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조용한 거실에 단둘이 남겨지자, 하나는 상언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하나 씨... 이서랑 정말 친한가 봐요. 부러운 걸 넘어서 질투를 느낄 정도... 아니, 조금은 원망스러울 정도예요.”하나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이 선생님,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그냥 이서가 부럽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나 씨는 이서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상언은 미간을 찌푸렸다.“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이서가 정말 부럽다고요...” 하나가 말했다.“그거야 당연하죠, 이서는... 제 오랜 친구니까요
“진심이 듣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상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린 하나가 상언의 시선을 피했다.‘무서워... 내가 지켜온 굳건한 마음이 흔들릴까 봐... 너무 무서워.’“진심은 뭐고, 진심이 아닌 건 또 뭔데요?”“난 실험실을 포기할 수도 있어요.”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왜요?”상언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요.”“...”“하지만 나는 실험실을 위해서 그 두 가지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하나를 향해 다가오는 상언의 말투에는 짙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하나 씨는 내가 어떤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하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모르겠어요, 저는...”상언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그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실험실을 재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서를 모함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하나 씨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하나는 입가에 맴도는 말을 간신히 참고 있었으나, 상언의 표정에 서린 슬픈 미소를 보고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상언이 하나의 손을 서서히 놓았다. “하나 씨,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으니까요.”책상을 짚고 있는 상언의 뒷모습은 대단히 피곤해 보였다. “여태 하나 씨에게 나는 중요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하나 씨에게는 나보다 이서가 우선이라는 사실을요.”“심지어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요.”상언이 말했다.“아니에요...”하나는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 변명하려 했지만 변명할 길이 없었다.‘변명할 말이 없어... 이 선생님이 말한 게 전부 사실이니까...’‘이 선생님과 헤어질 수는 있을지라도... 이서와 절교할 수는 없어.’“난 일이 있어서 이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깊은숨을 들이마신 상언이 몸을 돌려 하나를 보았는데, 그의
‘하지만 DNA 검사 결과에는 확실히 가은이가 내 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병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이서가 1년가량의 기억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었을 텐데...’ “스웨이 작가님, 하나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계시는 거죠?” 이서의 목소리는 마침내 하이먼 스웨이를 현실로 불러온 듯했다. “아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구나...” “스웨이 작가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분명 입구에 서 계셨는데, 하나의 말을 못 들으셨을 리가 없잖아.’ ‘단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걸 거야.’ 하이먼 스웨이는 아무리 부인해도 이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이자,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서야, 너부터 솔직하게 말해다오. 너도 가은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스웨이 작가님, 하나의 말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시지는 마세요. 가은 씨랑 저는 단지 몇 번 만났을 뿐이잖아요. 가은 씨가 벌인 일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그래.”하이먼 스웨이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딸을 의심하면 안 되는 법이지...”하이먼 스웨이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큰시큰한 듯했다.“그래, 가은이가 가끔은 거친 모습을 보여주지만, 천리를 뒤엎는 짓을 할 만한 애는 아니야.” 이 말은 이서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서는 가은에 대해 좋지 않은 낌새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이기 때문에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스웨이 작가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집에 돌아온 그녀는 서재로 들어가 다시 한번 그 메일을 열었으며, 또 한 번 자세히 훑어보았다.메일에는 심가은이 한 살 때 바뀌었으며, 당시 심씨 부부를 찾아갔을 때 그들이 매우 놀랐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의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가은이가 내 딸이 아니라는 거잖아?’ 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