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서도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응, 결과 나오면 가장 먼저 알려줘요.”이서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웃음을 보며 지환도 웃음을 지었다.이서가 윤씨 핏줄만 아니라면... 모든 건 쉽게 해결된다.그와 이서에게도 드디어 좋은 날이 올 것이다.집에 도착하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왔다.[이서야, 우리 한동안 놀러 간 기억이 없네.]그녀는 웃었다.“왜?”[우리 간만에 바람 쐬러 갈까?]전화기 너머에서 임하나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너 결혼한 뒤 우리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은 거 알지?]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순간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미안해...”[저기요, 따지러 전화한 게 아니고...]임하나는 이서의 말을 잘랐다.[난 단지 너랑 단둘이 놀러 가고 싶을 뿐이야. 마침 나한테 온천호텔 이용권 두 장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좋지.”회사 구조조정은 지환에게 맡길 생각이다.CEO라는 역할에 미리 적응할 기회도 되고.그녀도 마침 기분 전환하러 가고, 일석이조인 셈이다.최근 참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나가서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하고 오면, 또 새로운 뭔가 생길지도 모른다.이서는 자신의 생각을 지환에게 말했다.지환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럼, 회사 쪽 일은 나한테 맡겨. 자긴 나가서 잘 놀고 오기만 하면 돼.”“응, 고마워.”이서는 지환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 몸을 돌려 샤워실로 들어갔다.이서의 모습을 보며, 지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서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곧 휴대전화를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수화기 너머의 이천은 갑자기 이야기하다 말고 사라지는 지환의 대화법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는 아무 일 없었듯 보고를 계속했다.[방금 사모님과 윤씨 부부의 친자관계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지환은 ‘응’ 하고 다시 말을 있다.“내일 결과를 알아야겠다.”[...]‘성질 급
하지만 이서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본인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지언정 지환을 잊고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그녀의 문자를 본 마이클은 잠깐 침묵했다.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의사의 관점에서 그는 당연히 첫 번째 방식을 추천할 것이다.최면요법은 머릿속 지우개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우면서 고통을 더는 치료법이다.즉 깨끗한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거다.반면, 전기 충격 요법은 가장 비추하는 치료법이다.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심지어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왜냐면 치료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서 씨, 전기 충격 치료법으로 치료한 환자들의 인터뷰 자료를 먼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괜찮다고 생각된다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봅시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서는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저도 전기 충격 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저 이미 결정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컨데 제 남편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서의 확고한 태도에 마이클 천은 설득을 포기했다.“누구랑 그렇게 문자질이야?”운전 중이던 임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서를 한 번 보았다.이서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아니야.”지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조용히 그 고통을 감내할 생각이었다.“보나마나 남편이겠지.”임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늘 지환 씨가 소중한 아내를 내게 양보한 걸 봐서, 내가 네 남편 뒷담화는 하지 않겠어.”이서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넘겼다.“우리 어느 호텔로 가?”출발한지 벌써 한 시간이나 훌쩍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다 왔어. 여기 온천 호텔인데, 내 고객의 말을 빌리자면 현지에서 꽤 유명하대. 타지 사람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이서는 이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아주 외진 곳은 아니겠지? 그 고객, 남자야, 여자야?”임하나는 순간 마음이 덜컹했다.“남자인데.
“이서야, 신경 쓰지 마. 하은철 입에서 뭔 좋은 소리 들으려고? 가자!”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임하나의 손을 지긋이 눌렀다.“말해봐.”그녀는 하은철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제대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녀의 시선에 하은철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막 입을 열려다 임하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우리 둘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이 사람 참...”이서는 짜증 난 임하나를 다독였다.“알았어, 다만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공공장소여야 해.”하은철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호텔 부근의 분수대를 가리켰다.“저기 가서 이야기할까?”이서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녀는 임하나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하은철과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분수대에 도착하자, 이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우리 남편이 왜? 뭐가 어쨌는데?”하은철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작은아빠 얘기를 꺼내야만 이서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구나.’“네 남편이 누군지 알아냈어.”그의 얘기에 바로 경각심이 생긴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래서? 어쩌려고?”수호자의 신분으로 나서는 이서의 모습에 하은철은 어처구니없었다.그가 뭘 어쩌려는 게 아니라, 작은아빠가 그의 약혼녀를 빼앗은 셈이니.“너 아직도 모르지?”“뭘?”이서의 눈에 비친 경계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네 남편이, 바로 내 작은아빠야.” 하은철은 한 글자 한 글자씩 뱉고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역시나 이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희망이 되살아났다.“몰랐었구나...”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냥꾼이 인내심을 갖고 작은 동물이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이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입을 열자, 쉰 목소리가 나왔다.“거짓말!”하은철은 조급해했다.“정말이야, 네 남편이 정말 내 작은아빠이라니까!”“안 믿어!”이서는 믿지 않았다
하은철은 몇 마디 더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임하나는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이서를 끌고 나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그만 가자.”이서는 임하나가 그녀를 차에 태우도록 내버려두었다.“이서...”차에 올라탄 임하나는 이서의 손발이 여전히 차갑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나머지 가볍게 이서를 흔들었다.이서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두 눈은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문득 이서가 발병할 때의 모습을 떠올린 임하나는 이상언에게 전화에 걸려고 했다. 그때 이서의 힘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하나야, 우리가 이곳에서 하은철 만났던 일은 상언 씨에게 비밀로 해줘.”이서가 마침내 입을 열자, 임하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하은철 그 자식, 도대체 너한테 뭐라디?”이서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하지만 말은 없었다.긴장하고 불안함에 휩싸인 임하나는 이서의 손을 잡았다.“이서야, 왜 그래? 사람 놀라게 하지 마...”“나 괜찮아.”하나의 따뜻한 손의 온도를 느끼고서야 이서의 눈빛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괜찮아...”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이서야, 우리 그냥 집에 가자.”“아니야.”이서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아냐, 안 갈 거야.”지금 지환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과민한 반응에 임하나는 깜짝 놀랐다.“이서야...”이서는 임하나를 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안 돌아 갈 거야. 지금 돌아가기 싫어.” “알았어, 지금 가지 말자. 우리 먼저 가서 호텔 룸부터 잡자. 걱정 마, 절대 하은철 그 자식이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이서는 임하나의 어깨에 기댔다. 그제야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임하나는 이서를 데리고 체크인하러 갔다.이서는 목석처럼 따라다니기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임하나는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체크인 수속을
이서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지환은 불길한 예감이 갈수록 강해졌다.옆에 있던 이상언이 지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하나 씨랑 바람 쐬러 간 거잖아. 뭘 그렇게 긴장해?”지환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전화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내가 하나에게 전화할까?”거절 의사가 없자, 이상언은 곧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임하나의 액정에 나타난 ‘이상언’ 세 글자를 보고 바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야.”이서는 그제야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 화면에 뜬 ‘이상언’ 세 글자를 보았다.“하나야, 받아, 나 지금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알았어.”임하나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가 연결되자, 저쪽에서 이상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 받아요?]임하나는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이서를 한번 보고는 짜증이 올라왔다“무슨 일인데요?”임하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언도 멍해졌다. 그리고 곧 지환을 슬쩍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이서 씨 옆에 있어요?]임하나는 눈을 깜박였다.“화장실 갔는데, 무슨 일이에요?”이상언은 한숨을 내쉬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따가 나오면 지환에게 전화 좀 하라고 전해줘요.잠깐 못 봤다고, 그새 또 보고싶은가 봐.]임하나도 마음이 불편한지 몇 마디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쪽 상황을 전혀 알 리 없는 이상언은 임하나가 자기에게 화난 줄 알고, 마음속으로는 이유도 모르고 당하니 억울하기만 했다.“뭐래?”지환이 물었다.“어, 이서 씨 화장실에 갔대. 내가 뭐랬어? 괜찮다니까.” 이상언은 지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 요즘 너무 초긴장 상태인 거 같아. 별거 아닌 일에도 엄청 예민하고...”지환은 입을 오므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호텔 안.임하나는 전화를 끊고 방안으로 돌아왔다.여전히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있는 이서를 본 임하나는 앞으로 다가가 이서를 껴안았다.“이서야...”임하나의 품에 머리를 묻고
이서는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보았다.잠시 후, 그녀는 핸드폰 홈 화면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통화 다이얼을 누르려는 순간, 손을 다시 움츠렸다.두려웠다.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게 답이 되어 돌아올까 봐.바로 이때,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마이클 천이 보낸 것이었다.다음 치료는 이틀 후로 정해졌다는 연락이었다.이서는 지금 치료에 신경 쓸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그녀는 바로 문자를 넘겼다.임하나는 무심결에 문자를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서야, 너 천 의사랑 치료 약속 잡았었어?”“응.” 이서의 시선은 다시 지환의 번호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침내 큰 결심을 굳힌 듯 전화버튼을 눌렀다.지환 쪽은 바로 받았다. 마침 핸드폰을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사람처럼.이서의 마음은 또 약해졌다.[방금 전화했는데...]지환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이서의 마음은 이미 누그러졌다. 눈시울도 약간 뜨거워졌다.“응, 씻고 왔어요. 핸드폰 두고 가서...”[그랬었구나.] 지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기야, 나 없이 노니까 재미있어?]이서는 높은 호텔 룸에서 아래의 인산인해를 바라보며 머리속에는 온통 하은철이 한 그 얘기로 가득했다.심장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응, 재미있어...”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지환과 대화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확실한 건 하은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도무지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괜히 질문했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불신과 의혹이 그녀와 지환을 압사시킬 수도 있겠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서야.”임하나도 이서가 이번 문제에 직면할 용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우리 바람 쐬러 왔잖아. 그러니까 걱정일랑 집어 치우고, 여행 끝나고 다시 생각하자.”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미안해, 하나야, 나 때문에 기분 다 망쳤지?”“뭔 소리야!”임하
이서의 메시지를 확인한 마이클 천은 다소 의아했다.[갑자기 왜요?]이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내일 치료받기를 바란다는 얘기만 했다.마이클 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결국, 돈줄을 쥔 자가 갑이니.치료 시간을 확정하고 나서야 이서의 어수선한 마음은 다소 진정해졌다.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이제 내일만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이서와 전화를 마친 후 지환의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손에 일이 안 잡힐 리가 없었다.“아니, 방금 이서 씨랑 통화했잖아, 왜 그런데 아직도 저기압이야?”이상언은 이해할 수 없었다.지환은 말없이 눈으로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았다.이상언은 그를 슬쩍 밀쳤다.지환은 그제야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이상언은 지환의 눈동자가 까맣고 유난히 밝은 걸 발견했다. ‘젠장, 이건 폭풍전야의 징조다.’“너... 왜 그래?”지환은 미간을 꾹 눌렀다.“아니야. 괜찮아.”“괜찮기는, 네 모습을 봐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은데.” 이상언은 친구가 걱정되었다.“도대체 무슨 일이길래?”지환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기우이길 바랄 뿐이야.”이서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이상언은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알 것 같았다.“그럼 이렇게 하자, 내일 나랑 같이 이서 씨 있는 곳으로 가보자.”‘임하나도 볼겸.’지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럼 일찍 쉬어.”오늘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음.”‘오늘도 또 불면의 밤이 되겠구만.’다음날 이른 아침, 지환은 일어나자마자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상언은 아직 꿈나라에 있었다. 지환의 전화에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이렇게 일찍 갈 필요 없잖아. 이제 겨우 6시야. 이서 씨 어디 도망 안 간다고.”지환의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얼른 일어나, 지금 넘어 갈게.”이상언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지환의 차에 오르자마자, 그는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로했다.“친구야, 너 이서 씨랑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미치겠지
두 사람은 곧 마이클 천의 병원에 도착했다.임하나는 원래 치료실 벤치에서 이서를 기다릴 예정이었는데, 이서는 먼저 들어가라고 성화였다.“치료 마치면 택시 타고 갈게, 너 먼저 돌아가.”“정말 괜찮겠어?”“의사 샘이 둘만 보자고 하셔서..., 언제 마칠지도 모르는데,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어.”“알았어.”임하나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나섰다.임하나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이서는 마이클 천에게 말했다.“선생님, 시작하시죠.”마이클은 하려던 말을 얼버무렸다.이서는 빙그레 웃었다.“저는 이미 준비 다 되었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따라오시죠.” 마이클 천은 이서를 데리고 특별히 마련된 진료실로 갔다.진료실의 외벽은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차갑고 삼엄해 보였다.마이클 천이 문을 열었다.안에는 의자 하나가 보였고, 의자 옆에는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놓여 있었다.“앉으세요.”마이클 천은 시시각각 이서의 표정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눈앞의 기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이서는 마이클 천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옆에 있던 간호사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기구를 이서의 신체 각 부위에 붙였다.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기기의 차가운 촉감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찌릿했다.“이서 씨, 모든 잡념은 버리고 제 얘기를 들으면서 꿈나라로 들어가는 겁니다.지금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보인다고 상상해 보세요.”심리학 방면의 대가답게 시작하자마자, 이서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마치 정말 풀밭에 있는 것 같았다. 먼 하늘에는 흰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천둥번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놀라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천둥과 번개의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치 그녀의 옆까지 바짝 쫓아온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