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서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본인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지언정 지환을 잊고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그녀의 문자를 본 마이클은 잠깐 침묵했다.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의사의 관점에서 그는 당연히 첫 번째 방식을 추천할 것이다.최면요법은 머릿속 지우개처럼 과거의 기억을 지우면서 고통을 더는 치료법이다.즉 깨끗한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거다.반면, 전기 충격 요법은 가장 비추하는 치료법이다.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심지어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왜냐면 치료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서 씨, 전기 충격 치료법으로 치료한 환자들의 인터뷰 자료를 먼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괜찮다고 생각된다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봅시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서는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저도 전기 충격 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저 이미 결정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컨데 제 남편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서의 확고한 태도에 마이클 천은 설득을 포기했다.“누구랑 그렇게 문자질이야?”운전 중이던 임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서를 한 번 보았다.이서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아니야.”지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혼자 조용히 그 고통을 감내할 생각이었다.“보나마나 남편이겠지.”임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오늘 지환 씨가 소중한 아내를 내게 양보한 걸 봐서, 내가 네 남편 뒷담화는 하지 않겠어.”이서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넘겼다.“우리 어느 호텔로 가?”출발한지 벌써 한 시간이나 훌쩍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했다. “다 왔어. 여기 온천 호텔인데, 내 고객의 말을 빌리자면 현지에서 꽤 유명하대. 타지 사람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이서는 이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아주 외진 곳은 아니겠지? 그 고객, 남자야, 여자야?”임하나는 순간 마음이 덜컹했다.“남자인데.
“이서야, 신경 쓰지 마. 하은철 입에서 뭔 좋은 소리 들으려고? 가자!”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임하나의 손을 지긋이 눌렀다.“말해봐.”그녀는 하은철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제대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녀의 시선에 하은철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막 입을 열려다 임하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우리 둘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이 사람 참...”이서는 짜증 난 임하나를 다독였다.“알았어, 다만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공공장소여야 해.”하은철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호텔 부근의 분수대를 가리켰다.“저기 가서 이야기할까?”이서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녀는 임하나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하은철과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분수대에 도착하자, 이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우리 남편이 왜? 뭐가 어쨌는데?”하은철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작은아빠 얘기를 꺼내야만 이서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구나.’“네 남편이 누군지 알아냈어.”그의 얘기에 바로 경각심이 생긴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래서? 어쩌려고?”수호자의 신분으로 나서는 이서의 모습에 하은철은 어처구니없었다.그가 뭘 어쩌려는 게 아니라, 작은아빠가 그의 약혼녀를 빼앗은 셈이니.“너 아직도 모르지?”“뭘?”이서의 눈에 비친 경계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네 남편이, 바로 내 작은아빠야.” 하은철은 한 글자 한 글자씩 뱉고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역시나 이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희망이 되살아났다.“몰랐었구나...”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냥꾼이 인내심을 갖고 작은 동물이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이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입을 열자, 쉰 목소리가 나왔다.“거짓말!”하은철은 조급해했다.“정말이야, 네 남편이 정말 내 작은아빠이라니까!”“안 믿어!”이서는 믿지 않았다
하은철은 몇 마디 더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임하나는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이서를 끌고 나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그만 가자.”이서는 임하나가 그녀를 차에 태우도록 내버려두었다.“이서...”차에 올라탄 임하나는 이서의 손발이 여전히 차갑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나머지 가볍게 이서를 흔들었다.이서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두 눈은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문득 이서가 발병할 때의 모습을 떠올린 임하나는 이상언에게 전화에 걸려고 했다. 그때 이서의 힘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하나야, 우리가 이곳에서 하은철 만났던 일은 상언 씨에게 비밀로 해줘.”이서가 마침내 입을 열자, 임하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잖아. 하은철 그 자식, 도대체 너한테 뭐라디?”이서의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하지만 말은 없었다.긴장하고 불안함에 휩싸인 임하나는 이서의 손을 잡았다.“이서야, 왜 그래? 사람 놀라게 하지 마...”“나 괜찮아.”하나의 따뜻한 손의 온도를 느끼고서야 이서의 눈빛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괜찮아...”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이서야, 우리 그냥 집에 가자.”“아니야.”이서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아냐, 안 갈 거야.”지금 지환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과민한 반응에 임하나는 깜짝 놀랐다.“이서야...”이서는 임하나를 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안 돌아 갈 거야. 지금 돌아가기 싫어.” “알았어, 지금 가지 말자. 우리 먼저 가서 호텔 룸부터 잡자. 걱정 마, 절대 하은철 그 자식이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까.”이서는 임하나의 어깨에 기댔다. 그제야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임하나는 이서를 데리고 체크인하러 갔다.이서는 목석처럼 따라다니기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임하나는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체크인 수속을
이서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자, 지환은 불길한 예감이 갈수록 강해졌다.옆에 있던 이상언이 지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하나 씨랑 바람 쐬러 간 거잖아. 뭘 그렇게 긴장해?”지환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전화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내가 하나에게 전화할까?”거절 의사가 없자, 이상언은 곧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임하나의 액정에 나타난 ‘이상언’ 세 글자를 보고 바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야.”이서는 그제야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 화면에 뜬 ‘이상언’ 세 글자를 보았다.“하나야, 받아, 나 지금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알았어.”임하나는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가 연결되자, 저쪽에서 이상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 받아요?]임하나는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이서를 한번 보고는 짜증이 올라왔다“무슨 일인데요?”임하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언도 멍해졌다. 그리고 곧 지환을 슬쩍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이서 씨 옆에 있어요?]임하나는 눈을 깜박였다.“화장실 갔는데, 무슨 일이에요?”이상언은 한숨을 내쉬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따가 나오면 지환에게 전화 좀 하라고 전해줘요.잠깐 못 봤다고, 그새 또 보고싶은가 봐.]임하나도 마음이 불편한지 몇 마디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쪽 상황을 전혀 알 리 없는 이상언은 임하나가 자기에게 화난 줄 알고, 마음속으로는 이유도 모르고 당하니 억울하기만 했다.“뭐래?”지환이 물었다.“어, 이서 씨 화장실에 갔대. 내가 뭐랬어? 괜찮다니까.” 이상언은 지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 요즘 너무 초긴장 상태인 거 같아. 별거 아닌 일에도 엄청 예민하고...”지환은 입을 오므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호텔 안.임하나는 전화를 끊고 방안으로 돌아왔다.여전히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있는 이서를 본 임하나는 앞으로 다가가 이서를 껴안았다.“이서야...”임하나의 품에 머리를 묻고
이서는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보았다.잠시 후, 그녀는 핸드폰 홈 화면 버튼을 눌렀다.그러나 통화 다이얼을 누르려는 순간, 손을 다시 움츠렸다.두려웠다.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게 답이 되어 돌아올까 봐.바로 이때,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마이클 천이 보낸 것이었다.다음 치료는 이틀 후로 정해졌다는 연락이었다.이서는 지금 치료에 신경 쓸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그녀는 바로 문자를 넘겼다.임하나는 무심결에 문자를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서야, 너 천 의사랑 치료 약속 잡았었어?”“응.” 이서의 시선은 다시 지환의 번호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침내 큰 결심을 굳힌 듯 전화버튼을 눌렀다.지환 쪽은 바로 받았다. 마침 핸드폰을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사람처럼.이서의 마음은 또 약해졌다.[방금 전화했는데...]지환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이서의 마음은 이미 누그러졌다. 눈시울도 약간 뜨거워졌다.“응, 씻고 왔어요. 핸드폰 두고 가서...”[그랬었구나.] 지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기야, 나 없이 노니까 재미있어?]이서는 높은 호텔 룸에서 아래의 인산인해를 바라보며 머리속에는 온통 하은철이 한 그 얘기로 가득했다.심장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응, 재미있어...”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지환과 대화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확실한 건 하은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도무지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괜히 질문했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불신과 의혹이 그녀와 지환을 압사시킬 수도 있겠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서야.”임하나도 이서가 이번 문제에 직면할 용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우리 바람 쐬러 왔잖아. 그러니까 걱정일랑 집어 치우고, 여행 끝나고 다시 생각하자.”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미안해, 하나야, 나 때문에 기분 다 망쳤지?”“뭔 소리야!”임하
이서의 메시지를 확인한 마이클 천은 다소 의아했다.[갑자기 왜요?]이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내일 치료받기를 바란다는 얘기만 했다.마이클 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결국, 돈줄을 쥔 자가 갑이니.치료 시간을 확정하고 나서야 이서의 어수선한 마음은 다소 진정해졌다.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이제 내일만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이서와 전화를 마친 후 지환의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손에 일이 안 잡힐 리가 없었다.“아니, 방금 이서 씨랑 통화했잖아, 왜 그런데 아직도 저기압이야?”이상언은 이해할 수 없었다.지환은 말없이 눈으로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았다.이상언은 그를 슬쩍 밀쳤다.지환은 그제야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이상언은 지환의 눈동자가 까맣고 유난히 밝은 걸 발견했다. ‘젠장, 이건 폭풍전야의 징조다.’“너... 왜 그래?”지환은 미간을 꾹 눌렀다.“아니야. 괜찮아.”“괜찮기는, 네 모습을 봐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은데.” 이상언은 친구가 걱정되었다.“도대체 무슨 일이길래?”지환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기우이길 바랄 뿐이야.”이서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이상언은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알 것 같았다.“그럼 이렇게 하자, 내일 나랑 같이 이서 씨 있는 곳으로 가보자.”‘임하나도 볼겸.’지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럼 일찍 쉬어.”오늘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음.”‘오늘도 또 불면의 밤이 되겠구만.’다음날 이른 아침, 지환은 일어나자마자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상언은 아직 꿈나라에 있었다. 지환의 전화에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이렇게 일찍 갈 필요 없잖아. 이제 겨우 6시야. 이서 씨 어디 도망 안 간다고.”지환의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얼른 일어나, 지금 넘어 갈게.”이상언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지환의 차에 오르자마자, 그는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로했다.“친구야, 너 이서 씨랑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미치겠지
두 사람은 곧 마이클 천의 병원에 도착했다.임하나는 원래 치료실 벤치에서 이서를 기다릴 예정이었는데, 이서는 먼저 들어가라고 성화였다.“치료 마치면 택시 타고 갈게, 너 먼저 돌아가.”“정말 괜찮겠어?”“의사 샘이 둘만 보자고 하셔서..., 언제 마칠지도 모르는데,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어.”“알았어.”임하나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나섰다.임하나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이서는 마이클 천에게 말했다.“선생님, 시작하시죠.”마이클은 하려던 말을 얼버무렸다.이서는 빙그레 웃었다.“저는 이미 준비 다 되었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따라오시죠.” 마이클 천은 이서를 데리고 특별히 마련된 진료실로 갔다.진료실의 외벽은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차갑고 삼엄해 보였다.마이클 천이 문을 열었다.안에는 의자 하나가 보였고, 의자 옆에는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놓여 있었다.“앉으세요.”마이클 천은 시시각각 이서의 표정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눈앞의 기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이서는 마이클 천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옆에 있던 간호사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기구를 이서의 신체 각 부위에 붙였다.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기기의 차가운 촉감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찌릿했다.“이서 씨, 모든 잡념은 버리고 제 얘기를 들으면서 꿈나라로 들어가는 겁니다.지금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보인다고 상상해 보세요.”심리학 방면의 대가답게 시작하자마자, 이서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마치 정말 풀밭에 있는 것 같았다. 먼 하늘에는 흰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천둥번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놀라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천둥과 번개의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치 그녀의 옆까지 바짝 쫓아온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
임하나는 홧김에 말을 뱉고는 곧 후회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그녀는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우고 이상언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이상언은 속눈썹을 거두고 다시 한 번 말했다.“오늘 내가 자기를 막아선다면, 우리 둘은 깨진다는 거다. 그 얘기죠? 지금?”“네.” 임하나의 떨리는 소리로 답했다.“우리 감정이 이렇게 가벼웠던 거군요.”이상언은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서도, 우리 사이가 이처럼 가벼운 사이인 줄은 몰랐네.”임하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 얘기 그만하고 싶어요. 비켜요. 나 이서 지키러 갈 거야!”저는 지환이 이서를 아프게 하는 걸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그래요.” 이상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철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 지금 우리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서 씨와 지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고. 지환이 이서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때, 지환도 이서가 은철의 약혼녀였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중에 알았을 때는,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니까, 갖은 방법을 써서 숨기려고 했던 거고. 이 모든 건 이서랑 함께하기 위해서였다고... 지환이 이서를 다치게 할 거라고 생각된다면, 가요.”말이 끝나자, 이상언은 한 걸음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임하나도 그제야 좀 진정되는 듯했다.텅 빈 복도를 보며,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웅크리고 제자리에 앉았다.“하늘도 무심하지, 이서는 태어날 때부터 하씨 집안과 엮여서 한번도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없어. 그래도 결혼하면서 하씨 집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남편이 하씨 집안 사람이라니...”이상언의 눈동자는 고통으로 가득했다. 상심에 빠진 임하나를 보니 꼭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끝내 다가가지 않았다.같은 시각, 진료실은 ‘펑’하는 소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