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곧 마이클 천의 병원에 도착했다.임하나는 원래 치료실 벤치에서 이서를 기다릴 예정이었는데, 이서는 먼저 들어가라고 성화였다.“치료 마치면 택시 타고 갈게, 너 먼저 돌아가.”“정말 괜찮겠어?”“의사 샘이 둘만 보자고 하셔서..., 언제 마칠지도 모르는데,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어.”“알았어.”임하나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나섰다.임하나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이서는 마이클 천에게 말했다.“선생님, 시작하시죠.”마이클은 하려던 말을 얼버무렸다.이서는 빙그레 웃었다.“저는 이미 준비 다 되었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따라오시죠.” 마이클 천은 이서를 데리고 특별히 마련된 진료실로 갔다.진료실의 외벽은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차갑고 삼엄해 보였다.마이클 천이 문을 열었다.안에는 의자 하나가 보였고, 의자 옆에는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놓여 있었다.“앉으세요.”마이클 천은 시시각각 이서의 표정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눈앞의 기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모습을 보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이서는 마이클 천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옆에 있던 간호사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기구를 이서의 신체 각 부위에 붙였다.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기기의 차가운 촉감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찌릿했다.“이서 씨, 모든 잡념은 버리고 제 얘기를 들으면서 꿈나라로 들어가는 겁니다.지금 풀밭에 누워 있습니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이 보인다고 상상해 보세요.”심리학 방면의 대가답게 시작하자마자, 이서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마치 정말 풀밭에 있는 것 같았다. 먼 하늘에는 흰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천둥번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놀라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천둥과 번개의 굉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치 그녀의 옆까지 바짝 쫓아온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
임하나는 홧김에 말을 뱉고는 곧 후회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그녀는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우고 이상언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이상언은 속눈썹을 거두고 다시 한 번 말했다.“오늘 내가 자기를 막아선다면, 우리 둘은 깨진다는 거다. 그 얘기죠? 지금?”“네.” 임하나의 떨리는 소리로 답했다.“우리 감정이 이렇게 가벼웠던 거군요.”이상언은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서도, 우리 사이가 이처럼 가벼운 사이인 줄은 몰랐네.”임하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 얘기 그만하고 싶어요. 비켜요. 나 이서 지키러 갈 거야!”저는 지환이 이서를 아프게 하는 걸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그래요.” 이상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철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 지금 우리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서 씨와 지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고. 지환이 이서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때, 지환도 이서가 은철의 약혼녀였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중에 알았을 때는, 이서가 하씨 집안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니까, 갖은 방법을 써서 숨기려고 했던 거고. 이 모든 건 이서랑 함께하기 위해서였다고... 지환이 이서를 다치게 할 거라고 생각된다면, 가요.”말이 끝나자, 이상언은 한 걸음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임하나도 그제야 좀 진정되는 듯했다.텅 빈 복도를 보며,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웅크리고 제자리에 앉았다.“하늘도 무심하지, 이서는 태어날 때부터 하씨 집안과 엮여서 한번도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없어. 그래도 결혼하면서 하씨 집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남편이 하씨 집안 사람이라니...”이상언의 눈동자는 고통으로 가득했다. 상심에 빠진 임하나를 보니 꼭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끝내 다가가지 않았다.같은 시각, 진료실은 ‘펑’하는 소리와
마이클 천은 바로 나갔다.마이클이 자리를 비우자, 이상언은 지체하지 않고 곧 지환에게 말했다.“지환아, 잘 들어. 너 지금 선택해야 해. 이서 씨가 고통받도록 두던가, 아니면... 널 잊게 하던가.”임하나는 숨을 죽이고 긴장한 모습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녀도 지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이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그에게는 고통이 따를 것이기다.한 세기가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지환의 고통에 휩싸인 목소리가 들렸다.“날 잊게 해.”말을 마친 지환은 육안으로 볼 수 있듯이 초췌해졌다.옆에서 지켜보던 임하나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계속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임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방법은 없어요?”이상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결정했으면 나가자.”임하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이서를 애처롭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진료실을 나섰다.막 몸을 돌려 다시 한번 이서를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이 닫혀버렸다.임하나가 긴장한 듯 말했다.“대체 지금 뭐하는 거예요?”유리 창문을 통해 안쪽을 보던 이상언이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긴장하지 마. 단지 이서와 제대로 작별하고 싶었을 거예요.”임하나의 마음도 칼로 에이듯이 아팠다.진료실 안.지환은 이서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시간이 1초, 1초 흘러갈 때마다 그는 심장이 한 올 한 올 도려지는 것 같았다.“자기야, 날 꼭 기억해줄 거지? 난 자기 믿어.”그는 이서의 손을 자신의 볼에 대고 어루만지며 말했다.이서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꿈속의 이서는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미간을 다시 한번 깊게 찌푸렸다.5분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치료실에 들어온 마이클 천은 지환의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대표님, 나가 주셔야 합니다.”지환은 이서를 그윽한 눈으로 보고, 또 보았다. 빨개진 눈동자를 숨기고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마이클 천을 바라보았다.“잘 부탁해요, 다만 기억해.
마이클 천이 답했다.“현재로서는 저도 아직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서 씨가 깨어나야 알 수 있습니다.”진료실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또 족히 1세기가 지나서 마침내 이서가 깨어났다.마이클 천은 앞으로 다가가려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말했다.“깨어났어요?”이서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눈앞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곧 임하나에게 집중되었다.“하나?”임하나는 기뻤다.“이서야, 나 기억해?”“하나야, 무슨 소리야? 그리고 여긴 어디야? 나 왜 여기 있지?”임하나는 이상언을 한번 보고서야 고개를 돌려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서야, 다른 거 더 기억나는 거 없어?”이서는 갑자기 목을 움츠렸다. 긴장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며 임하나의 손을 꼭 잡았다.“하나야, 저 두 사람은 누구야, 네 친구들이야?”그중 한 사람의 눈빛은 정말 무서웠다.매우 강한 소유욕을 띤 그런 눈빛이라고나 할까...임하나는 고개를 돌려 지환을 한번 보았다.“아, 잊었구나. 저분은...”마이클 천은 갑자기 뒤에서 임하나를 살짝 잡아당겼다.“하나 씨.”그는 고개를 저으며 임하나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표시했다.“이서 씨, 여기서 잠깐 쉬세요. 우리 잠시 후에 다시 올게요.”이서는 불안한 듯 임하나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는 공포로 가득 찬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두려움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지환은 날카로운 칼이 그의 가슴을 에이는 것 같았다.지환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임하나도 마음이 아팠다.비록 이서를 속인 개자식이긴 하지만...“가요.” 이상언은 임하나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임하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두 사람이 문 쪽에 도착했을 때, 지환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이상언은 앞으로 가서 그를 끌어당겼다.“가자.”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지환을 쳐다보는 이서를 보고 있자니 주위사람들조차 안쓰럽게 만들었다.지환을 진료실에서 데리고 나간 이상언은 즉시 치료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집안의 몰락으로 지환이 부득이하게 가장의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지금처럼 풀이 죽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이서를 만난 후, 지환도 드디어 사람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오늘 지환도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나약한 순간이 있다는 걸 느꼈다.이상언은 지환 옆에 말없이 서 있다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가자.”지환도 묵묵히 몸을 돌려 진료실의 방향을 한 번 보았다.“너 먼저 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싶어.”“그런데...” 이상언은 숨을 들이쉬었다.“그럼 내가 같이 있어 줄게.”지환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차로 갔다.이상언도 조수석의 위치에 따라 앉았다.같은 시각, 임하나는 소설 마니아의 위력을 발산하며 이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그러니까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다는 거지. 그래서 정신의학과 선생님께 진료를 본 거고, 여기 진료실에 있는 거고...”“응. 맞아.” 임하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 순간, 그녀는 왜 지환이 이서를 속이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서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그럼 사고 낸 사람은?”“아, 그거 이미 보험 처리하고 다 끝냈어. 걱정하지 마. 우리 이제 집에 가자.”진료실 내의 다양한 의료기기를 둘러본 이서는 마음속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왜?”“아니야.”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물었다.“방금 그 두 사람은 누구야, 네 친구야?”“응.”“근데 아까 그 남자, 나를 보는 눈빛이 무서웠어. 돈 떼먹은 사람처럼 말이야, 내가 설마 돈 빌렸어?”눈가에 핑 도는 눈물을 감추고자 임하나는 얼른 눈을 깜빡거렸다.“아니야, 그 사람 인상 좀 더럽지?”그녀는 바삐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갈까?”“그래.” 침대에서 일어난 이서는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임하나는 즉시 몸을 돌려 이서 쪽으로 걸어왔다.“이서야...”“나 괜찮아...”이
임하나는 순간 당황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의사를 불렀다.“선생님! 진 선생님!”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마이클 천은 이서의 모습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았다. 그는 즉시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이서의 입에 알약을 넣어 넣었다.그러고는 간호사에게 이서를 병상으로 옮기라고 얘기했다.임하나는 안색이 창백한 이서를 보고 마음이 초조해졌다.“선생님, 이서 괜찮아요?”마이클 천은 정색하고 물었다.“환자에게 무슨 말을 한 겁니까?”임하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깜빡하고, 이서에게 전 남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딱 한 마디만 했는데...”“내가 뭐랬어요? 이러게 되면...”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임하나를 본 마이클 천은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현재 이서 씨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의 일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서 씨는 단편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그녀의 기억 조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기억을 조작하려고 하지 마세요. 머릿속 기억과 현실이 다르다고 판단되면 오늘과 같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임하나는 정말 혼 줄이 났다.“네,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마이클 천이 나가기 바쁘게 지환과 이상언이 들어왔다.“이서 왜 이래?'”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를 본 이상언이 의아한 듯 물었다.“미안해요.”임하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상언은 지환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울지 말고 얘기해 봐요.”“방금... 방금 이서에게 하은철 얘기 꺼냈는데, 이서가... 이서가 그만 기절했어요...”임하나는 두 눈이 빨갛다 못해 벌겋게 달아오른 지환의 눈을 보며 말했다.“내가 밉죠? 기분이 안 풀린다면 한 대라도 쳐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하은철 얘기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서는 진료실 입구에 서서 길게 뻗은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하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아니야, 인제 그만 가자.”하나가 이서의 손을 잡았다.의심스럽다는 듯 하나를 바라보던 이서가 그녀를 따라 차에 올랐다. 보이지 않는 두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낀 이서가 조심스레 하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나야, 누군가 암암리에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설마, 형부는 아니겠지?’‘하긴, 그냥 이대로 포기할 사람은 아니잖아.’‘마이클 천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서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다른 방법을 마련하고 말 거야.’ “아니, 네가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우선 우리 집으로 가자.”“어? 왜 너희 집으로 가자는 거야?”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집을 너무 오래 비워서, 우리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하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으나, 그런 자신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내가 이미 너희 부모님께 네가 한동안 우리 집에서 머물 거라고 말씀드렸어. 너희 부모님께서는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도 모르시는데,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의심하시지 않을까?” 이서는 하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네, 그러면 신세 좀 질게, 하나야.”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 쑥스럽다는 듯 이서를 바라본 임하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비록 하나가 천천히 차를 몰기는 했으나, 차량의 속도는 여전히 빨라서 금세 지환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나 차량의 후미등을 바라보던 이상언이 지환에게 물었다.“따라갈까?”미간을 찌푸리던 지환이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됐어.”상언은 즉시 하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따라갔다가 들킬까 봐 두려워서 저러는 게 분명해.’‘아이고.’‘코 앞에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야.’...진료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가 한
“나를 오빠랑 비교하지 마.”박예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환이랑 결혼할 거야.” 이는 박예솔이 어릴 적부터 키워온 꿈이었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지호가 박예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제수씨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네가 지환이랑 결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박예솔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도대체 오빠는 누구 편이야?” 자료 속 이서의 모습을 떠올린 하지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번졌다.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네.”한참이 지난 후, 하지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박예솔을 바라보았다.“난 단 한 번도 누구의 편에 선 적이 없어. 그저 사실을 중시했을 뿐이지.” 주먹을 움켜 쥔 박예솔이 하지호를 향해 냉소하며 말했다.“분명히 말하는데, 난 반드시 지환이랑 결혼하고 말 거야!”이 말을 마친 박예솔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나버렸다. 눈썹을 치켜올린 하지호가 박예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래? 한 번 두고 보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하나가 자신의 엄마에게 이서의 상황을 말해둔 덕에 이서는 하나의 어머니와 간단한 인사만을 나눈 후,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머니, 제가 와서 많이 불편하시죠?”이서가 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단다.”하나는 이서를 끌고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방은 이미 다 치워 뒀으니까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 필요한 게 있으면 밖에 나가지 말고 언제든지 나한테 말하고.” “그럼 난 언제 밖에 나갈 수 있는 거야? 나, 은철이 보고 싶은데...” 하나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인내하는 듯했다.“기억을 잃은 네 자신에게 적응하면 그때 나가는 걸로 하자.” “그래, 알았어.”고개를 끄덕인 이서가 얌전히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방에 들어선 이서는 하나가 떠난 후에야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째서 휴대전화가 전부 포맷되어 있는 거지? 은철이 번호도 사라져 버렸잖아?’휴대전화를 손에 든 이서는 크게 놀란 듯했다.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