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과 계속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이서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가 마지막에 문자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시간 맞춰 늦지 않게 집으로 갈게요.]이서의 문자메시지를 보고 지환은 자기가 이서를 얼마나 걱정하는지를 이서가 잘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서가 상황파악이 잘 안된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이서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이서가 여전히 지환의 말을 굳게 믿고 있다는 의미이다.이서는 지환이 HS그룹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옆에 앉아있던 비서 이천은 지환이 내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천은 지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대표님, 마음 놓으십시오. 하 어르신 쪽은 벌써 사모님 남편이 혹시 대표님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대표님이 어르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으니 심증은 해도 증명할 물증이 없으니까요.”지환의 눈 속에 착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지금 없는 거지,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나도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늦기 전에 이서에게 말해야 하는데……. 안그러면 조만간 이 폭탄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다.’지환의 마음 깊이 불안이 엄습해왔다.‘하지만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은 이서정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인데…….’이서정과 위장결혼인 걸 할아버지에게 들켜도 안되고, 이서와의 오랜 관계를 알리는 것도 안될 일이야.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할아버지가 의심스러운 상황을 조사해서 모든 일이 밝혀질지도 모르고.죽을 힘을 다해 할아버지가 이서정과 이서에 대해 알아내는 것을 막아야 돼.그리고 모든 건 반드시 비밀스럽게.“이서정 쪽 지금 상황은 어때?”“이미 이서정 씨 원래 사는 아파트 쪽으로 사람을 보내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서정 씨 핸드폰과 통신설비 다 모니터하고 있습니다.”지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누군가 다른 쪽에서도 캐고 있는 건 아니고?”이천은 지환에게 숨김없이 말했다.“어르신께서도 사람을 보내 주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쪽
은철은 오늘 별 뜻 없이 주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오늘 저녁식사를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이서가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은철은 바로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뜻밖에도 할아버지에게 미움을 샀다.기껏 집에 왔는데 뜻밖에 할아버지에게 미움을 샀다.“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하경철은 은철을 쳐다보았지만 이것저것 따져 묻지는 않았다.하경철은 이제 이전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은철을 대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지금은 이서와 은철에게 결혼을 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의로 이 결혼을 반대하기까지 해야 은철과 이서가 자신이 죽기 전에 결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챙겨서 얼른 가거라. 나는 지금 이서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은철은 또 말문이 막혔다.‘할아버지 맞아?’“할아버지, 제가 오랜만에 왔으니 밥 먹고 갈게요. 어차피 식사시간이 다 되기도 했고요.”은철이 이렇게 말하자 이서는 비로소 이미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된 것을 알아차렸다.지환에게 꼭 시간 맞춰 집에 가서 식사하겠다고 약속했던 말을 떠올리며 일어섰다.“할아버지, 저는 이제 가봐야겠어요.”이서의 말을 듣자마자 하경철은 갑자기 풀이 죽었다.“집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약속거든요.”하경철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이서 너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 안 한지 얼마나 되었니? 너랑 네 남편은 매일 같이 밥을 먹으니까, 오늘 한 끼 정도는 나랑 먹어도 괜찮지 않니?”그리고 할아버지가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는데 그냥 가면 안 되지.“무슨 일이신데요?” 이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당연히 네 남편에 관한 일이지.”하경철이 한숨을 쉬었다.“너도 결혼한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할아버지한테 아직도 사람을 안 보여주는 건 말이 안 되지.”“할아버지, 왜 못 보셨죠? 그때 보신 거 같은데.”이서는 지환과 이미 결혼했다고 선포한 후 하경철에게 지환을 데리고 가서 만난 것으로 기억하
한참 후에야 지환이 답을 보냈다.[그래, 이쪽 시간 좀 확인해볼게. 가능한 시간이 나오면 당신한테 알려줄게.][알았어요.]이서는 달콤한 미소를 띤 얼굴로 식사자리로 향했다.[그럼 저는 식사하러 갑니다, 당신도 일찌감치 저녁 꼭 챙겨먹어요.][응.]지환은 한글자로 답을 보냈다.하지만 지환의 눈은 이서가 오늘 보내온 문자메시지들을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교활하고 용의주도한 어르신이 기어코 직접 자기 눈으로 봐야 믿는 거겠지. 내가 이서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 아마 이 일에서 손을 뗄 속셈이야. 안그러면 아마 틀림없이 끝까지 파헤칠 사람이지. 하지만 일단 만나면 정체가 드러날텐데.’하경철을 만나기 전에 이서에게 먼저 자신의 정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근데 일단 솔직해지면…….늘 일관성있고 명확한 지환의 생각이 근래 보기 드물게 혼란스럽다.지환은 눈을 살짝 감고 손끝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한편 이서가 식사중인 식탁 위.하경철은 식사시간 내내 은철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이서하고만 대화를 나누었다.“이서야, 좀 더 먹어라. 내내 너 마른 거 봐라. 돌아가서는 신랑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해, 알았지?”“네, 할아버지, 알겠어요. 벌써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그랬냐?”하경철은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내 정신 좀 봐라, 사람이 늙으면 다 이렇게 되는구나. 너는 이런 할애비 싫어하고 피하지 않을 거지?”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러겠어요,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분은 저희 같은 MZ세대들도 다 알아본다구요.”은철은 이서의 이 말을 듣고 하경철이 자신을 언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자기 이름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그 사람 성격이 꽤 좋아서 아마 안 그럴 거예요.”이서의 이 말 때문에 하경철은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신랑 성격이 좋아?”지환 같은 스타일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한다. 성격이 좋을 리가 없다. 하경철 역시
은철은 어쩔 줄 몰라하며 하경철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이러시는 건…….”하경철은 은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은철아, 할아버지가 그동안 너한테 참 잘못했다. 내 욕심이지, 너랑 이서 결혼시키려고 했던 거. 그것 때문에 너희 둘 사이를 내내 불편하게 만들고. 최근에 이 할애비가 많이 반성했다. 당사자들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건데, 제3자가 감놔라 배놔라 했었구나.”“이제 안심해라. 앞으로 네가 누구랑 결혼하고 싶든지 이 할애비가 다 허락해줄 거니까.”은철이 딱히 말을 못하고 있자 하경철이 다시 말했다.“맞다, 일전에 수정이랑 결혼문제 생각해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나도 다시 생각해 봤는데,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으니 가정을 이뤄야지. 정말로 수정이를 좋아하는 거면 가능한 한 빨리 이야기를 꺼내서 혼사를 추진해라. 안그러면 이래저래 윤씨 집안 볼 면목도 없고, 우리도 마찬가지고.”탁!은철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신없이 허리를 숙여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은철은 한참 지나서야 식탁 밑에서 고개를 들었다.“켁켁, 할아버지, 지금 하신 말씀 다 진심이세요?”“물론이다마다.”하경철이 웃으며 대답했다.은철의 기침이 더 심해졌다.하경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짐짓 물었다.“은철아, 괜찮냐?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그동안 이 할애비가 잘못했구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게다.”은철은 너무 놀라서 한동안 기침이 멎지 않는 바람에 한참동안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식사시간 내내 은철은 답답했다.식사 후 함께 뒷정리를 마친 후에 이서가 하경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저 먼저 가요.”“그래라.”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예전같으면 은철이에게 너 데려다주라고 할텐데 이제는 안그럴란다. 기사 시켜서 너 태워다 줄 거야. 손님한테 푸대접했다고 생각지는 말고.”‘하아, 할아버지, 오늘 진짜 웃기시다,’“아니에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이서 입장에서는 하경철이 은철과의 결혼을 더 이상 강
이서의 집으로 향하는 은철의 차 안에서 둘 중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서는 오히려 이런 침묵을 즐겼다.하지만 은철이 하필 이런 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말씀 신경 쓰지 마.”이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은철을 보고 말했다.“무슨 소리야?”은철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너랑 네 남편 잘 살라는 말씀이라고.”이서는 뒷좌석에서 의자에 바짝 다가 앉아 말했다.“그럼, 그다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이혼하라는 말인거야?이봐, 하은철 씨, 당신은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해?내 인생 어떻게 살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당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주제가 아니라구!”은철은 이서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 꺼냈다.“그 사람, 너랑 안 어울려.”“뭐가 안 어울린다는 거야?”‘다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지만 지환에 관한 문제는 확실히 이야기를 정리해야겠어.’“이 세상에서 그 사람만큼 나랑 잘 맞는 사람 찾기 힘들어. 소울메이트라는 말 들어봤어? 그 사람이 내 소울메이트야. 내 눈빛만 봐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아는 사람이라구.”하은철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가슴 속에 큰 돌이 누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날 지환과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윤이서는 내가 갖지 못한 존재야. 그래서 꼭 갖고 싶은 거라고.’하지만 이제 이서가 이렇게 지환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잔뜩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더 이상 이서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이서가 말하는 그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 순간 핸들을 잡은 은철의 손이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내가 이서와 결혼하고 싶었던 건가?’‘아니야, 말도 안 돼, 안 돼! 내가 그럴 리 없어.’냉정을 되찾고 나자 또다시 이서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그 생각이 은철의 머릿속을 온통 점령해버렸다.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 당황스러운 생각을 억눌렀다.이서는 평소와 많이 다르게 은철이 한참동
은철의 말에 너무 놀라 여러 갈래로 흩어지던 여러 생각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은철이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은철은 잠시 멈칫했다.“수정이가 자주 찾아가서 귀찮게 구는 거야?”은철의 말을 듣자 이서는 웃음이 나왔다.“몰랐어? 일부러 없는 병을 만들어서 아픈 척 내 신장을 떼어달라고 한 일을 몰랐다고? 이미 다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하는 거 별로 이제 안먹혀.”“그 건은 이미 너한테 사과하라고 했어. 수정이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어. 할아버지가 그 때 너랑 결혼하라고 강요만 안하셨더라도…….”“아, 이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되는 거구나, 그럼 나도 이유 있으면 사람 죽여도 되겠네?”이서는 은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아직 살아있으니 당신한테 말하고, 나를 스스로 변호도 하는 거야. 만약 그 때 내가 죽었으면…….”여기까지 말하자 이서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당신들은 내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나는…….”이서는 은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서 손사래를 쳤다.“하나 물어보자, 왜 이렇게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는 거야?”이서의 말을 듣자 은철은 예닐곱살 때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그 해에 하경철은 은철과 이서를 함께 데리고 출국했었다.당시 어렸던 수정도 떼를 부리며 같이 데려가 달라고 보챘다.양쪽 집안 모두 여러 아이들이 같이 가면 잘 어울릴 거라며 수정도 함께 동행하게 했다.두 집 모두 여러 아이가 어울려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정을 함께 데리고 갔다.그들은 출발 후에 HK시에서 다른 비행편으로 환승할 예정이었다.당시의 HK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부유층 인사나 그 가족들이 납치되었다는 뉴스가 자주 나왔었다.그래서 그날 환승했던 공항에서 하경철은 30명은 족히 넘을 경호원을 동원했다.하지만 혼란한 틈을 타 은철, 이서, 수정 세 사람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묶여서 납치된 후 이 세 아이들은 이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은철은 자신이 내린 결론이 맞는지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16세가 되던 해에 이서가 귀국하자 아름답고 여린 그녀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서는 전에 겪었던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은철은 대단히 화가 나서 자신을 구한 사람이 수정일거라고 더욱 확신했다.이 역시 은철이 이서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이유이다.그는 여전히 꿈 속에서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리고 힘들어하지만 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그는 이서에게 수차례 그 때 일이 기억나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항상 고개를 저으며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다.그러기를 수차례, 은철은 오늘도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이서에게 물었다.“너는 내가 일곱 살 때쯤, 그러니까 네가 다섯살 때 우리가 납치당했던 일을 기억하니?”이서는 알 수 없다는 듯 은철을 쳐다봤다.은철은 이미 여러 차례 이서에게 이 질문을 해왔다.그녀가 16살 되던 해에 외국에서 돌아와 처음 만났을 때 은철은 이 문제를 물었다.후에 은철은 이서와 만날 때마다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그리고 매번 모진 눈빛으로 이서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이 배신자.’“이미 수없이 너에게 대답한 것 같은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완전히 뒤죽박죽되어서 전혀 기억 안나.”이서 자신도 스스로 왜 기억을 잃었는지 모른다.그냥 예전 일들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이서의 아버지 윤재하 부부는 이서가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고, 그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아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 같다고 했었다.은철은 피식 웃었다.“만약 네가 그 사고에 대해 기억해낸다면, 내가 왜 이렇게 수정이를 싸고 도는지 알게 될거야.”말이 끝나자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혀 헤드레스트에 가볍게 대고 앞을 바라보았다.“다 왔어.”이서는 아직 좀 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은철의 말을 듣고 확실히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서는 팔을 뻗어 지환의 허리를 껴안았다.“안심해요, 저는 절대로 돌아와요. 설사 아무리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어도 당신과 한 약속은 꼭 지켜요.”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던 팔을 살짝 풀고 이서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들어와.”“네.”이서는 지환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다.“지환 씨…….”“응.”“지환씨는 어릴 때 있었던 일들 기억해요?”지환은 이서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서의 신발을 벗겨주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어렸을 때라, 얼마나 어렸을 때를 말하는 건데?”“음, 대여섯 살쯤?”“기억하지.”이서의 눈이 반짝였다.“그 때 지환 씨는 뭐 했어요?”지환은 자신이 대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장사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보통 사람들과 똑같지. 유치원 다니고, 친구랑 함께 놀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랑 놀이공원도 가고 그러는 거지…….”이서가 턱을 괴고 말했다.“부럽다. 나는 내가 대여섯 살 때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참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은 기억나는데, 바로 그 전에는 뭘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어요.마치 칼로 싹뚝 썰어서 잘라 내버린 것처럼 내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여덟 살 이후부터만 기억이 있어요.”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마도…… 어렸을 때 머리통이 너무 작아서 옛날 일이 다 저장이 안된 건가?”이서는 웃으며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그럼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이 늙고 두뇌용량이 다시 작아지면 지환씨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그럴 리가!”지환은 이서를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자신있게 말했다.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요새 알츠하이머나 치매가 있는 노인의 비율도 적지 않아요.” “나한테 만약은 없어.”지환은 이서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가볍게 숨을 이서의 볼에 불었다.“나는 내 머리로 너를 기억하는 게 아니야. 이 가슴으로 너를 기억하는 거지.”이서의 속눈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