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팔을 뻗어 지환의 허리를 껴안았다.“안심해요, 저는 절대로 돌아와요. 설사 아무리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어도 당신과 한 약속은 꼭 지켜요.”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던 팔을 살짝 풀고 이서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들어와.”“네.”이서는 지환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다.“지환 씨…….”“응.”“지환씨는 어릴 때 있었던 일들 기억해요?”지환은 이서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서의 신발을 벗겨주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어렸을 때라, 얼마나 어렸을 때를 말하는 건데?”“음, 대여섯 살쯤?”“기억하지.”이서의 눈이 반짝였다.“그 때 지환 씨는 뭐 했어요?”지환은 자신이 대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장사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보통 사람들과 똑같지. 유치원 다니고, 친구랑 함께 놀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랑 놀이공원도 가고 그러는 거지…….”이서가 턱을 괴고 말했다.“부럽다. 나는 내가 대여섯 살 때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참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은 기억나는데, 바로 그 전에는 뭘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어요.마치 칼로 싹뚝 썰어서 잘라 내버린 것처럼 내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여덟 살 이후부터만 기억이 있어요.”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마도…… 어렸을 때 머리통이 너무 작아서 옛날 일이 다 저장이 안된 건가?”이서는 웃으며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그럼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이 늙고 두뇌용량이 다시 작아지면 지환씨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그럴 리가!”지환은 이서를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자신있게 말했다.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요새 알츠하이머나 치매가 있는 노인의 비율도 적지 않아요.” “나한테 만약은 없어.”지환은 이서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가볍게 숨을 이서의 볼에 불었다.“나는 내 머리로 너를 기억하는 게 아니야. 이 가슴으로 너를 기억하는 거지.”이서의 속눈썹
이서는 일어나서 하이먼 스웨이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정말 잘됐네요! 지금 어디 있대요?”하이먼 스웨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확 가라앉았다[아직 찾지는 못했대. 단지 아이가 H국의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는 것만 알아냈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그 부부는 바로 북성 사람이고. 이미 내 매니저랑 이야기 끝냈어. 바로 오늘 저녁에 북성으로 갈 거야.]이서가 시간을 확인했다.외국에 있는 하이먼 스웨이가 있는 곳은 지금 저녁 시간일 것이다.“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마중나갈게요.”[됐어!] 하이먼 스웨이가 말했다. [이서야, 내 딸 찾으면 다 네 덕분이야. 신세 꼭 갚을게.]이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이만 끊자. 나 곧 출발하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겠어.]“네.”이서가 전화를 끊었다.지환이 마침 물이 담긴 컵을 들고 들어왔다. 질투심 가득한 말투로 이서에게 말했다.“누구 전환데 이렇게 좋아해?”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요. 지환 씨는 여자한테도 질투해요?”지환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또 은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분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한테 무슨 일로?”이서는 순식간에 눈썹을 치켜세웠다“작가님이 오래전에 유괴당한 딸 소식을 최근에 들으셨고, H국의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는 걸 막 알게 됐나봐요. 그것 때문에 지금 H국에 오신대요.”지환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서가 말했다.“왜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 오시는데 기쁘지 않아요?”지환은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기쁘지. 그냥…….”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이 누구인지를 안다.그리고 애초에 바다의 딸 시나리오를 MH그룹에게 넘기려 했던 것은 순전히 지환 때문이었다.‘그녀가 만약 H국에 도착한다면 곧 딸을 찾게 될 텐데.’시간이 걸리게 되면 하이먼 스웨이는 그 사이에 이서와 연락이 닿게 될 것이고 그때는…….지환은 이서가 물을 마시는 틈을 타 뒤돌아 이마를 짚었다.‘일이 왜 갈수록 이렇게 복잡
“그래, 기다릴게, 지환 씨가 나타날 때까지.”“내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계속 기다릴게.”침묵을 지키던 지환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 자.”“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신을 바라보는 이서의 모습에 지환은 이서를 향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듯했다.“계속 안 자면 나…….”“아, 잘못했어!”이서가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지환은 번데기가 된 듯한 이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지환의 눈빛은 너무 고요하고도 쓸쓸했다.‘신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런 행복한 나날들은 꿈이 되고 말 거야…….’3일째 되던 날, 이서는 또 한 번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함께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었다. 이서는 두말없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제안을 승낙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북성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당을 예약하는 일은 자연스레 이서의 일이 되었다.이서가 또 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만남을 가진다는 소식을 들은 소희는 감격에 겨워 이서에게 물었다. “이서 언니,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사인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소희 씨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팬이야?”“아니면 어때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시잖아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사인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할 거예요.”소희가 대답했다.이서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내일 현태 씨랑 데이트할 때 뭐 입을지는 생각해 봤어?”소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이서 언니!”“놀리기만 하면 얼굴이 빨개진다니까. 소희 씨, 하나한테 뻔뻔함을 좀 배워야겠어.”소희가 웃었다.“그건 그래요. 맞다, 하나 언니랑 이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요? 며칠 전에도 같이 계신 거 봤는데, 아마 샤브샤브를 먹은 다음날이었던 것 같아요.”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돌렸다.“소희 씨, 나 아직 대답 못 들었
“4대 가문이요?”이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4대 가문 중 입양된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물론, 어떤 가문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하나 더 낳기도 해요.”“사람들은 체면을 위해서 그 아이가 친척 집 아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내가 시골에서 낳았다고 하기도 해요. 절대 사생아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거죠.”“그런데 입양이라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워요.”“4대 가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혈연이거든요.”“어떻게 남의 핏줄에게 4대 가문을 맡기겠어요?”“그래도…… 한번 알아봐 주겠니?”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제야 겨우 내 딸아의의 소식을 들었는데…….”“작가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볼게요.”“그래, 정말 고맙다, 이서야.”“아니에요, 작가님.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 사람을 싣은 차량이 c시 요리 전문점에 다다랐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아주 오랫동안 Y국에 돌아가지 않았기에 매운 음식을 접한 것 역시 아주 오래되었지만, 매운 음식에 대한 참을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이서와 소희는 얼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바빴지만,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두 사람 다 매운 걸 잘 못 먹는구나.”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미소를 지었다. “다음번에는 특별히 내 입맛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단다.”“저희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이서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작가님께서 좋아하신다면 된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면 볼수록 참 예쁘고 친절한 아이야. 꼭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만 같아. 이서가 내 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서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한 감정을 느끼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다.“참, 이서야, 부모님은 뭐 하는 분들이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아서.”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 예전의 4대
이서와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밥만 먹었다.그렇게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길가의 한 가게에서 커피를 샀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알아본 한 점원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다.평소 독설을 퍼붓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지만 팬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팬이 요구하는 바는 모두 들어주려 했다.이서와 소희는 가게에서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기다렸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팬과 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세 사람은 인근 백화점으로 향해 소희의 옷을 살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선 소희는 주눅이 든 듯했다.“이서 언니, 여기 너무 비싼 것 같아요.”소희는 가게 입구의 인테리어만 보고도 이 가게가 터무니없이 비쌀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다면 어찌 가게 입구에 페리시아만의 카펫이 깔려 있을 수 있겠는가!이서가 입을 떼려 하자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돈 걱정은 말아요. 내가 살게요.”“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떻게 작가님께 신세를 지겠어요.”“소희씨가 만족스러운 C시 요리를 대접해줬으니 당연히 보답해야죠. 부담스러워 말아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작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원래 소희 씨 주려던 보너스는 현금으로 줄 수밖에 없겠네요.”소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소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서 같은 상사를 만났으니 말이다.이서는 모든 방면에서 소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이서 언니…….”“괜찮아.”이서 역시 소희를 너무도 아꼈다. 이서에게 있어서 소희는 여동생과 다름없는 존재였다.“빨리 들어가자.”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내 세 사람은 함께 가게로 들어섰다.점원이 밝은 미소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이서가 소희를 가리키며 말했다.“데이트에 어울릴만한 옷이 있을까요?”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점원은 이서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럼요, 맡겨만 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원은 소희를 데리고 옷을 입
이서는 결코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쿡에게 질문을 이어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쭈뼛쭈뼛 사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이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틀림없는 소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서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피팅룸 입구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손에 옷을 들고 서있는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피팅룸에서 약간 떨어진 소희의 맞은편에는 발을 밟힌 길고양이처럼 분노한 얼굴을 한 한 여자가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여자의 뒤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또 한 명의 여자가 서있었다.이서는 그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장희령.장희령은 H국 최초로 M국의 연예계에 진출한 스타로, H국의 자랑이었다.그러나 장희령이 M국 국적을 취득하여 M국 사람이 된 이후로 장희령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하지만 이서가 그런 장희령을 잘 알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몇 년 전, H국에 돌아온 장희령은 다시금 H국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씨 가문의 가주의 아들, 심동과도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서는 장희령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희령의 앞에 선 채 기세등등한 여자는 장희령의 비서임이 틀림없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길길이 날뛰며 소희를 저주하고 있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서를 받겠다?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면 경찰은 왜 있겠어?”“당신 말대로라면,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건가요?”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서는 기세등등한 그 여자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그 여자, 장희령의 비서가 확실해! 이름이…… 에이미던가?”누군가 그 여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에이미라는 그 여자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어서 죽을 기세로 사과하지 못해?”이서는 잠시 눈썹을 찡그린 뒤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장희령이었다.이서는 이것이 장희령에게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장희령처럼 작품도, 연기력도 있는 사람들은 유출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법이었다.연기가 바로 자신만의 가장 좋은 통행증이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이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단지 장희령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빨리 경찰에 신고하시죠, 저희도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이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따가 경찰이 오면 울지나 마!”에이미는 의기양양한 이서의 모습에 약이 올라 직접 112를 눌렀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이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세요, 저는 울지 않을 테니. 단지, 장희령 씨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심씨 가문이 울지는 않을까 걱정이네요.”장희령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이내 장희령은 에이미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아 발로 세게 밟았다.에이미는 놀란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웅얼거렸다.“령아.”장희령이 차가운 얼굴로 이서를 쏘아보았다.“당신, 누구야?”“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내 친구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게 중요할 뿐이죠!”소희가 이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서 언니.”소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장희령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면 각종 커뮤니티에서 장희령의 팬들이 울며 불며 소희를 향한 폭동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장희령은 여전히 하찮은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이 뭔데?”장희령이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장희령의 밝은 이목구비와 어투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이서가 고개를 젖혔다. “다 봤어요, 제 친구가 먼저 피팅룸 입구에 서있는걸요. 당신들이 새치기하려던 거지, 제 친구가 새치기하려던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소희 씨?”고개를 끄덕이는 소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맞아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도, 저 사람들이 새치기하려 했어요.”‘멍청한 사람들이야.’‘이서 언니에게
하이먼 스웨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으나 장희령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누구세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장희령은 목이 메는 듯했다.“안녕하세요, 장희령입니다. 작가님의 팬입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장희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사람을 보는 눈이 너무도 정확했기에 장희령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더 이상 장희령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이서야, 무슨 일이야?”휴게실에 있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 역시 누군가 맞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서가 나가는 것을 보고도 따라 나가지는 않았다.‘나는 유명인이잖아, 일을 크게 벌일 뿐이야.’ ‘게다가 외국에서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일단 여기서 이서를 기다려보자.’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이서가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직접 이서를 찾아 휴게실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작가님. 그냥 이상한 두 사람을 만났을 뿐이에요!”에이미는 이서의 말에 즉시 화를 냈다.“누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야?!”장희령은 이서의 말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저렇게나 친하다고?!’‘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에이미를 밀쳐낸 장희령이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에게 물었다. “작가님과 아는 사이에요?”이서가 눈썹을 찌푸렸다.“불만 있어요?”장희령은 다시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바라보았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사이가 꽤 좋아 보이는데, 무슨 관계죠?”하이먼 스웨이 여사 역시 이서를 따라 눈썹을 찌푸렸다.두 사람의 표정과 태도가 비슷해서였는지 생김새가 아주 닮아 보였다. “당신, 방금 우리 이서를 못살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