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결코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쿡에게 질문을 이어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쭈뼛쭈뼛 사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이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틀림없는 소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서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피팅룸 입구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손에 옷을 들고 서있는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피팅룸에서 약간 떨어진 소희의 맞은편에는 발을 밟힌 길고양이처럼 분노한 얼굴을 한 한 여자가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여자의 뒤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또 한 명의 여자가 서있었다.이서는 그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장희령.장희령은 H국 최초로 M국의 연예계에 진출한 스타로, H국의 자랑이었다.그러나 장희령이 M국 국적을 취득하여 M국 사람이 된 이후로 장희령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하지만 이서가 그런 장희령을 잘 알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몇 년 전, H국에 돌아온 장희령은 다시금 H국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씨 가문의 가주의 아들, 심동과도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서는 장희령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희령의 앞에 선 채 기세등등한 여자는 장희령의 비서임이 틀림없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길길이 날뛰며 소희를 저주하고 있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서를 받겠다?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면 경찰은 왜 있겠어?”“당신 말대로라면,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건가요?”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서는 기세등등한 그 여자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그 여자, 장희령의 비서가 확실해! 이름이…… 에이미던가?”누군가 그 여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에이미라는 그 여자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어서 죽을 기세로 사과하지 못해?”이서는 잠시 눈썹을 찡그린 뒤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장희령이었다.이서는 이것이 장희령에게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장희령처럼 작품도, 연기력도 있는 사람들은 유출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법이었다.연기가 바로 자신만의 가장 좋은 통행증이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이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단지 장희령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빨리 경찰에 신고하시죠, 저희도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이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따가 경찰이 오면 울지나 마!”에이미는 의기양양한 이서의 모습에 약이 올라 직접 112를 눌렀다.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이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세요, 저는 울지 않을 테니. 단지, 장희령 씨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심씨 가문이 울지는 않을까 걱정이네요.”장희령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이내 장희령은 에이미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아 발로 세게 밟았다.에이미는 놀란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웅얼거렸다.“령아.”장희령이 차가운 얼굴로 이서를 쏘아보았다.“당신, 누구야?”“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내 친구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게 중요할 뿐이죠!”소희가 이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서 언니.”소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장희령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면 각종 커뮤니티에서 장희령의 팬들이 울며 불며 소희를 향한 폭동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장희령은 여전히 하찮은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이 뭔데?”장희령이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장희령의 밝은 이목구비와 어투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이서가 고개를 젖혔다. “다 봤어요, 제 친구가 먼저 피팅룸 입구에 서있는걸요. 당신들이 새치기하려던 거지, 제 친구가 새치기하려던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소희 씨?”고개를 끄덕이는 소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맞아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도, 저 사람들이 새치기하려 했어요.”‘멍청한 사람들이야.’‘이서 언니에게
하이먼 스웨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으나 장희령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누구세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장희령은 목이 메는 듯했다.“안녕하세요, 장희령입니다. 작가님의 팬입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장희령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사람을 보는 눈이 너무도 정확했기에 장희령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더 이상 장희령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이서야, 무슨 일이야?”휴게실에 있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 역시 누군가 맞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서가 나가는 것을 보고도 따라 나가지는 않았다.‘나는 유명인이잖아, 일을 크게 벌일 뿐이야.’ ‘게다가 외국에서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일단 여기서 이서를 기다려보자.’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이서가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직접 이서를 찾아 휴게실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작가님. 그냥 이상한 두 사람을 만났을 뿐이에요!”에이미는 이서의 말에 즉시 화를 냈다.“누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야?!”장희령은 이서의 말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저렇게나 친하다고?!’‘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에이미를 밀쳐낸 장희령이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에게 물었다. “작가님과 아는 사이에요?”이서가 눈썹을 찌푸렸다.“불만 있어요?”장희령은 다시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바라보았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과 사이가 꽤 좋아 보이는데, 무슨 관계죠?”하이먼 스웨이 여사 역시 이서를 따라 눈썹을 찌푸렸다.두 사람의 표정과 태도가 비슷해서였는지 생김새가 아주 닮아 보였다. “당신, 방금 우리 이서를 못살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만무례했던 태도에 대해 소희 씨에게 사과하도록 시켜야지.”소희 역시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이서 언니에게도 사과하도록 해야 해요.”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소희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하이먼 스웨이가 말했다.“들었죠?”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장희령과 에이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희령 역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희령은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능한 사람이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에이미는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하기 시작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봅니다. 이 두 분께서 작가님의 가까운 지인이신 줄 정말 몰랐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번졌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시선은 다시 장희령에게 향했다.장희령이 꽉 쥔 주먹을 풀었다 쥐었다 했다.여전히 이서와 소희에게 사과할 결심이 서지 않는 듯했다.장희령의 눈에 이서와 소희는 아랫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아랫사람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그러나 이내 장희령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눈빛에서 오는 압박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장희령의 말을 너무도 빨라서 도무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비웃으며 물었다.“사과하는 척도 못하는군요. 그쪽, 이름이 뭐예요?”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것을 들은 장희령은 앞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장희령이라고 합니다. 저는…….”“그래요.” 하이먼 스웨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기억하죠.”장희령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돌아가서 비서와 모든 영화사에 확실히 통보하겠어요, 절대 당신과는 합작하지 말라고.”말을 마친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턱을 살짝 들어 이서와 소희에게 말했다.“그만 가자
“그럼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정말?!”“네, 정말이요!”이서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귀여운 표정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그럼, 그렇게 하자.”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핸드폰을 꺼내어 스케줄표를 펼치며 말했다.“수요일에 시간이 있는데 괜찮겠어?”“네, 괜찮아요.”이서가 말했다.“요즘 회사가 그리 바쁘지 않아요.”최근 들어 심심할 정도로 한가하던 이서였다. 계속해서 조씨 그룹을 인수하려 노력했으나, 조진명의 아버지, 조용환이 너무도 갑작스레 죽어버렸다.조용환이 사망한 이후, 조씨 그룹은 몇몇 대주주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사분오열 되고 말았다. 어떤 회사를 인수하여 지환에게 주어야 할지 고민하던 이서는 끝내 지환을 사직시켰다.지환을 생각하면, 이서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떠올랐다.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하은철의 사이가 아주 좋다는 소문이 떠오른 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하이먼 스웨이 여사에게 물었다.“작가님, YS의 회장님을 뵌 적이 있으세요?”“아, 매튜 말하는 거야? 당연히 서로 잘 알지. 우리는 망년지우란다.”“망년지우요?”이서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에게 하은철의 둘째 삼촌은 그저 사업가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문예계의 큰손과 나이를 초월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너, 아직 모르는구나.”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그 사람, 각 계의 최고의 인물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너그러운 투자자라서 많은 분들이 거래하기를 원하시지.”“그분이 너그러우시다고요?”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래.”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이서의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아주 예전에 고도의 기술을 연구하던 한 큰손이 있었어. 그 사람은 아주 막대한 연구개발 자금을 필요로 했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단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어. 그 사람이 가장 낙담했을 때 만난 사람
“이서 언니의 남편은 연예계에서 내로라하는 꽃미남들보다도 훨씬 잘생겼어요. 형부가 데뷔만 한다면 연예계의 모든 남자들을 다 제칠 수 있을걸요?”“정말요?”훤칠한 두 남자 이야기에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눈이 반짝이는 듯했다.“벌써 수요일 약속이 기다려지는걸요?”이서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같은 시각.SY화영 지부, 회장실 내부.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스크린 속의 이서정을 쳐다보고 있었다.공적인 일을 처리한 후, 지환은 줄곧 이서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이천이 이서정의 방에 숨겨진 CCTV를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하경철의 집사인 주경모가 지환의 사진을 뒤지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이 두 가지 일은 지환의 빠른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환은 실눈을 뜬 채 창가로 걸어갔다. 흐리멍덩한 지환의 눈은 차들이 즐비한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이서정을 없애야 해.’‘반드시 소리 소문 없이 없애버려야 해. 절대 이서가 알아서는 안돼.’지환은 한참이 지나서야 찌푸렸던 미간을 서서히 펴기 시작했다.지환이 빠르게 몸을 돌려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실로 와.”전화를 받은 이천은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지환의 앞에 나타났다.“대표님.”“이서정에게 가서 우리가 가짜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서 살려주겠다고 말해. 그런데도 만약 다시 이서를 다치게 한다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덧붙여.” 이천은 의아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이천이 아는 지환은 결코 인정사정 봐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지환은 한번 누군가의 체면을 세워주리라 마음을 먹으면, 동시에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려는 각오도 하는 사람이었다.그렇게 생각하자, 이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래도 대표님이 독하고 대표님의 수단이 악랄하다고 탓할 수는 없어.’ ‘대표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이나 이서정에게 경고하셨잖아. 그럼에도 이서정이 고집대로 하려고 한 것이니, 자업자득이지, 뭐.’“네, 알겠
이서가 집에 도착하자,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지환의 모습이 보였다.이서는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살금살금 지환의 뒤로 다가가 뒤에서 지환을 껴안았다.“움직이지 마, 강도야.”한창 요리를 볶고 있던 지환은 이서의 말에 살짝 웃었다.“저는 가진 건 없지만, 당신을 만족시킬 수는 있어요.”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누가 뭘 원한다고 그래?”“그럼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지환이 몸을 돌려 이서의 허리를 껴안은 채 이서를 들어 올렸다. “내 악당, 정말 아깝지 않은 거예요?”이서는 지환의 애틋한 눈빛에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이내 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빨리 내려줘.”지환이 이서의 허리를 어루만졌다.“입가에 있는 고기를 내놓으라고 하다니. 귀염둥이, 당신은 정말 순진하고 귀엽군요.”이서는 화가 나서 하연의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나쁜 놈, 나쁜 놈, 너야말로 정말 나쁜 놈이야.”불을 끈 지환은 한 손으로 가볍게 이서의 두 손을 제지한 채 이서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그래, 난 나쁜 놈이야. 나쁜 놈이 이제 토끼를 잡아먹어버릴 테야.”“아, 싫어요…….”이서가 용서를 빌었다.“제가 잘못했어요. 토끼를 잡아먹지 마세요. 토끼가 불쌍하잖아요.”이서가 애꿎은 눈을 크게 뜨고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이서를 품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지환이 큰 손바닥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이서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이서는 한바탕 전율을 느꼈다.“지환 씨…….”가볍게 신음을 뱉는 이서의 목소리는 대단히 요염하여 지환의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다.지환은 천천히 몸을 숙여 이서의 붉은 입술을 물었고, 마치 맛있는 음식을 맛보기라도 하는 듯 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품속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두 사람의 무르익은 열기가 점점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졌다.이서의 허리는 점점 부드러워졌고, 이내 녹아내린 물처럼 소리 없이 바다에 녹아들기 시작했다.끊임없는 절정, 그리고
이서도 어른들의 지지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었다.‘스웨이 작가님께서 지환 씨를 만나시면 분명히 안목이 좋다고 칭찬하실 거야.’이서가 고개를 숙이자 지환의 심장은 두근거리는 듯했다. “내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을 뵈러 가길 원해?”이는 대단히 귀에 익은 말이었다.이서가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들어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지환 씨가 원하는 대로 해.”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위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지환은 이서를 말릴 수 없다는 듯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 유명한 작가님라고 하지 않았어? 앞으로 분명 우리와 협력할 일이 있으실 거야.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이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우리가 작가님과 협력할 일이 있을까?”이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듯했다.지환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당연하지. 아마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작품도 찍을 수 있을 거야.” 이서가 욕실에서 뛰쳐나와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여보, 왜 이렇게 착해?”이서의 머리카락은 이미 물에 젖어 있었다.지환의 셔츠는 순식간에 젖어들어, 보일 듯 말 듯한 근육 라인을 드러냈다.지환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일부러 그런 거지?”지환이 화를 내자 이서는 들켰다는 듯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연기와 함께 욕실로 달려들어가 문을 잠갔다.지환은 잠긴 문을 보고는 다시 한번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서는 지환의 앞에서 항상 맹한 모습을 보여줬다. 욕실 문은 잠겼지만, 어떻게 이서가 계속 나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지핀 불을 스스로 꺼야 했다.그저…….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며칠 후에 집을 방문한다고 생각하니 웃음기가 사라진 지환이었다. 지환은 휴대전화를 꺼내 곧장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이먼 스웨이 작가에게 연락해서 내가 뵙기를 원한다고 전해.”이천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자격을 갖춘 부하 직원은 상사가 지시
심유인과 소민찬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가까스로 하버드에 합격했다고?’‘허풍 떠는 거 아니야?’ “정말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라고요? 하버드 학원 출신이 아니고요?” 현태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저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이 맞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되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하버드 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했다.두 사람은 약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홈페이지 링크를 누르자마자 우수한 동문의 행렬에 있는 현태의 얼굴을 발견했다.이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이지숙도 마찬가지였다.‘정말... 사진 속의 사람이 현태 씨라고?!’ ‘말도 안 돼!’‘소민찬이 어느 대학교에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Y국에 있는 대학교 출신일 거야. 학문도, 능력도 없는 재벌 2세들이 어디서 신분 세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한 거니까.’ Y국의 학위는 이수하기가 가장 수월해서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 사람은 분명히 알지 못해서 겁을 먹기 일쑤였다.심유인은 원래 소민찬의 학력을 빌미로 현태를 놀라게 하려 했다.하지만 놀래키기는커녕 본인이 놀라게 된 셈이었다. 심유인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 체육생으로 입학한 게 아니네요? 전공은 물리학이랑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임현태 씨는 체육에 타고난 거 아니었나요? 왜 물리학을 전공한 거죠?”“아,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 입학이었나 보네요, 그렇죠?” 소민찬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혈색을 띠며 현태의 학력을 비웃었다.“하하, 유인아, 그런 건 부정 입학이나 비리가 아니라 기부라고 하는 거야.”“임현태 씨, 입학하는 데 얼마가 필요하던가요?”“하하, 하 대표님과 대체 무슨 사이길래 그렇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거죠?” “저는 학력을 산 적도, 학력을 위해서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습니다. 정당하게 시험으로 합
심근영이 얼른 말했다.“그래, 내가 경솔했군. 하지만 현태는 내 말의 뜻을 알 거야.” “우리 소희는 어깨를 들지도, 손을 쓰지도 못해. 이 아이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니, 아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모두 화기애애한 웃음을 짓는 반면, 옆에 있던 심유인과 소민찬만이 웃지 못했다. 더욱이 소민찬은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소민찬이 여기에 온 것은 심유인이 돈을 주면서 자신의 남자 친구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민찬은 여기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소민찬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으니, 그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소민찬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하지만 심유인은 곧장 가서 소민찬을 끌어당겼다.“어디 가요?” 소민찬은 이미 주방에 도착한 심근영 일가를 힐끗 보았는데, 그들은 소민찬과 심유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민찬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가야지! 왜, 계속 남아서 네 사촌 동생의 남자 친구한테 굴욕이라도 당하라는 거야?!” “저는... 저 사람이 그저 운전기사인 줄 알았다고요.”“일단 진정해 봐요. 어쨌든 민찬 씨는 소씨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 한낱 경호원보다 못하겠어요?” 소민찬은 분명 소씨 가문의 사람이지만, 소태성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더군다나 소지엽이야말로 소태성 같은 사람인데, 소민찬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소민찬이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외국으로 내몰린 이유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소태성에게 즉시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심유인이 시선과 체면이 하늘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소민찬은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나는 소씨 가문의 도련님일 뿐이야.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고.” 심유인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가요, 저 사람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자고요.”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