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철의 말에 너무 놀라 여러 갈래로 흩어지던 여러 생각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은철이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은철은 잠시 멈칫했다.“수정이가 자주 찾아가서 귀찮게 구는 거야?”은철의 말을 듣자 이서는 웃음이 나왔다.“몰랐어? 일부러 없는 병을 만들어서 아픈 척 내 신장을 떼어달라고 한 일을 몰랐다고? 이미 다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하는 거 별로 이제 안먹혀.”“그 건은 이미 너한테 사과하라고 했어. 수정이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어. 할아버지가 그 때 너랑 결혼하라고 강요만 안하셨더라도…….”“아, 이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되는 거구나, 그럼 나도 이유 있으면 사람 죽여도 되겠네?”이서는 은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아직 살아있으니 당신한테 말하고, 나를 스스로 변호도 하는 거야. 만약 그 때 내가 죽었으면…….”여기까지 말하자 이서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당신들은 내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나는…….”이서는 은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서 손사래를 쳤다.“하나 물어보자, 왜 이렇게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는 거야?”이서의 말을 듣자 은철은 예닐곱살 때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그 해에 하경철은 은철과 이서를 함께 데리고 출국했었다.당시 어렸던 수정도 떼를 부리며 같이 데려가 달라고 보챘다.양쪽 집안 모두 여러 아이들이 같이 가면 잘 어울릴 거라며 수정도 함께 동행하게 했다.두 집 모두 여러 아이가 어울려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정을 함께 데리고 갔다.그들은 출발 후에 HK시에서 다른 비행편으로 환승할 예정이었다.당시의 HK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부유층 인사나 그 가족들이 납치되었다는 뉴스가 자주 나왔었다.그래서 그날 환승했던 공항에서 하경철은 30명은 족히 넘을 경호원을 동원했다.하지만 혼란한 틈을 타 은철, 이서, 수정 세 사람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묶여서 납치된 후 이 세 아이들은 이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은철은 자신이 내린 결론이 맞는지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16세가 되던 해에 이서가 귀국하자 아름답고 여린 그녀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서는 전에 겪었던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은철은 대단히 화가 나서 자신을 구한 사람이 수정일거라고 더욱 확신했다.이 역시 은철이 이서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이유이다.그는 여전히 꿈 속에서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리고 힘들어하지만 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그는 이서에게 수차례 그 때 일이 기억나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항상 고개를 저으며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다.그러기를 수차례, 은철은 오늘도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이서에게 물었다.“너는 내가 일곱 살 때쯤, 그러니까 네가 다섯살 때 우리가 납치당했던 일을 기억하니?”이서는 알 수 없다는 듯 은철을 쳐다봤다.은철은 이미 여러 차례 이서에게 이 질문을 해왔다.그녀가 16살 되던 해에 외국에서 돌아와 처음 만났을 때 은철은 이 문제를 물었다.후에 은철은 이서와 만날 때마다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그리고 매번 모진 눈빛으로 이서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이 배신자.’“이미 수없이 너에게 대답한 것 같은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완전히 뒤죽박죽되어서 전혀 기억 안나.”이서 자신도 스스로 왜 기억을 잃었는지 모른다.그냥 예전 일들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이서의 아버지 윤재하 부부는 이서가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고, 그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아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 같다고 했었다.은철은 피식 웃었다.“만약 네가 그 사고에 대해 기억해낸다면, 내가 왜 이렇게 수정이를 싸고 도는지 알게 될거야.”말이 끝나자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혀 헤드레스트에 가볍게 대고 앞을 바라보았다.“다 왔어.”이서는 아직 좀 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은철의 말을 듣고 확실히 집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서는 팔을 뻗어 지환의 허리를 껴안았다.“안심해요, 저는 절대로 돌아와요. 설사 아무리 내가 오늘 죽을 운명이어도 당신과 한 약속은 꼭 지켜요.”지환은 이서를 껴안았던 팔을 살짝 풀고 이서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들어와.”“네.”이서는 지환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다.“지환 씨…….”“응.”“지환씨는 어릴 때 있었던 일들 기억해요?”지환은 이서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서의 신발을 벗겨주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어렸을 때라, 얼마나 어렸을 때를 말하는 건데?”“음, 대여섯 살쯤?”“기억하지.”이서의 눈이 반짝였다.“그 때 지환 씨는 뭐 했어요?”지환은 자신이 대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장사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보통 사람들과 똑같지. 유치원 다니고, 친구랑 함께 놀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랑 놀이공원도 가고 그러는 거지…….”이서가 턱을 괴고 말했다.“부럽다. 나는 내가 대여섯 살 때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참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은 기억나는데, 바로 그 전에는 뭘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어요.마치 칼로 싹뚝 썰어서 잘라 내버린 것처럼 내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여덟 살 이후부터만 기억이 있어요.”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마도…… 어렸을 때 머리통이 너무 작아서 옛날 일이 다 저장이 안된 건가?”이서는 웃으며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그럼 미래의 어느 날 당신이 늙고 두뇌용량이 다시 작아지면 지환씨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그럴 리가!”지환은 이서를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자신있게 말했다.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요새 알츠하이머나 치매가 있는 노인의 비율도 적지 않아요.” “나한테 만약은 없어.”지환은 이서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가볍게 숨을 이서의 볼에 불었다.“나는 내 머리로 너를 기억하는 게 아니야. 이 가슴으로 너를 기억하는 거지.”이서의 속눈썹
이서는 일어나서 하이먼 스웨이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정말 잘됐네요! 지금 어디 있대요?”하이먼 스웨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확 가라앉았다[아직 찾지는 못했대. 단지 아이가 H국의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는 것만 알아냈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그 부부는 바로 북성 사람이고. 이미 내 매니저랑 이야기 끝냈어. 바로 오늘 저녁에 북성으로 갈 거야.]이서가 시간을 확인했다.외국에 있는 하이먼 스웨이가 있는 곳은 지금 저녁 시간일 것이다.“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마중나갈게요.”[됐어!] 하이먼 스웨이가 말했다. [이서야, 내 딸 찾으면 다 네 덕분이야. 신세 꼭 갚을게.]이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이만 끊자. 나 곧 출발하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겠어.]“네.”이서가 전화를 끊었다.지환이 마침 물이 담긴 컵을 들고 들어왔다. 질투심 가득한 말투로 이서에게 말했다.“누구 전환데 이렇게 좋아해?”이서가 웃으며 말했다.“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요. 지환 씨는 여자한테도 질투해요?”지환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또 은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분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한테 무슨 일로?”이서는 순식간에 눈썹을 치켜세웠다“작가님이 오래전에 유괴당한 딸 소식을 최근에 들으셨고, H국의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는 걸 막 알게 됐나봐요. 그것 때문에 지금 H국에 오신대요.”지환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서가 말했다.“왜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 오시는데 기쁘지 않아요?”지환은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기쁘지. 그냥…….”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이 누구인지를 안다.그리고 애초에 바다의 딸 시나리오를 MH그룹에게 넘기려 했던 것은 순전히 지환 때문이었다.‘그녀가 만약 H국에 도착한다면 곧 딸을 찾게 될 텐데.’시간이 걸리게 되면 하이먼 스웨이는 그 사이에 이서와 연락이 닿게 될 것이고 그때는…….지환은 이서가 물을 마시는 틈을 타 뒤돌아 이마를 짚었다.‘일이 왜 갈수록 이렇게 복잡
“그래, 기다릴게, 지환 씨가 나타날 때까지.”“내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계속 기다릴게.”침묵을 지키던 지환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 자.”“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신을 바라보는 이서의 모습에 지환은 이서를 향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듯했다.“계속 안 자면 나…….”“아, 잘못했어!”이서가 재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지환은 번데기가 된 듯한 이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지환의 눈빛은 너무 고요하고도 쓸쓸했다.‘신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런 행복한 나날들은 꿈이 되고 말 거야…….’3일째 되던 날, 이서는 또 한 번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함께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었다. 이서는 두말없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제안을 승낙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북성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당을 예약하는 일은 자연스레 이서의 일이 되었다.이서가 또 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만남을 가진다는 소식을 들은 소희는 감격에 겨워 이서에게 물었다. “이서 언니,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사인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소희 씨도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팬이야?”“아니면 어때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시잖아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사인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할 거예요.”소희가 대답했다.이서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내일 현태 씨랑 데이트할 때 뭐 입을지는 생각해 봤어?”소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이서 언니!”“놀리기만 하면 얼굴이 빨개진다니까. 소희 씨, 하나한테 뻔뻔함을 좀 배워야겠어.”소희가 웃었다.“그건 그래요. 맞다, 하나 언니랑 이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요? 며칠 전에도 같이 계신 거 봤는데, 아마 샤브샤브를 먹은 다음날이었던 것 같아요.”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돌렸다.“소희 씨, 나 아직 대답 못 들었
“4대 가문이요?”이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4대 가문 중 입양된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물론, 어떤 가문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하나 더 낳기도 해요.”“사람들은 체면을 위해서 그 아이가 친척 집 아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내가 시골에서 낳았다고 하기도 해요. 절대 사생아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거죠.”“그런데 입양이라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워요.”“4대 가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혈연이거든요.”“어떻게 남의 핏줄에게 4대 가문을 맡기겠어요?”“그래도…… 한번 알아봐 주겠니?”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제야 겨우 내 딸아의의 소식을 들었는데…….”“작가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볼게요.”“그래, 정말 고맙다, 이서야.”“아니에요, 작가님.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 사람을 싣은 차량이 c시 요리 전문점에 다다랐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아주 오랫동안 Y국에 돌아가지 않았기에 매운 음식을 접한 것 역시 아주 오래되었지만, 매운 음식에 대한 참을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이서와 소희는 얼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바빴지만, 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두 사람 다 매운 걸 잘 못 먹는구나.”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미소를 지었다. “다음번에는 특별히 내 입맛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단다.”“저희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이서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작가님께서 좋아하신다면 된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이서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면 볼수록 참 예쁘고 친절한 아이야. 꼭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만 같아. 이서가 내 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서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한 감정을 느끼던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다.“참, 이서야, 부모님은 뭐 하는 분들이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아서.”하이먼 스웨이 여사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 예전의 4대
이서와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밥만 먹었다.그렇게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길가의 한 가게에서 커피를 샀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알아본 한 점원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와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다.평소 독설을 퍼붓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였지만 팬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팬이 요구하는 바는 모두 들어주려 했다.이서와 소희는 가게에서 하이먼 스웨이 여사를 기다렸다.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팬과 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세 사람은 인근 백화점으로 향해 소희의 옷을 살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선 소희는 주눅이 든 듯했다.“이서 언니, 여기 너무 비싼 것 같아요.”소희는 가게 입구의 인테리어만 보고도 이 가게가 터무니없이 비쌀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다면 어찌 가게 입구에 페리시아만의 카펫이 깔려 있을 수 있겠는가!이서가 입을 떼려 하자 하이먼 스웨이 여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돈 걱정은 말아요. 내가 살게요.”“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떻게 작가님께 신세를 지겠어요.”“소희씨가 만족스러운 C시 요리를 대접해줬으니 당연히 보답해야죠. 부담스러워 말아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작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원래 소희 씨 주려던 보너스는 현금으로 줄 수밖에 없겠네요.”소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소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서 같은 상사를 만났으니 말이다.이서는 모든 방면에서 소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이서 언니…….”“괜찮아.”이서 역시 소희를 너무도 아꼈다. 이서에게 있어서 소희는 여동생과 다름없는 존재였다.“빨리 들어가자.”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내 세 사람은 함께 가게로 들어섰다.점원이 밝은 미소로 세 사람을 맞이했다.이서가 소희를 가리키며 말했다.“데이트에 어울릴만한 옷이 있을까요?”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점원은 이서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럼요, 맡겨만 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원은 소희를 데리고 옷을 입
이서는 결코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쿡에게 질문을 이어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쭈뼛쭈뼛 사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이서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틀림없는 소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서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피팅룸 입구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손에 옷을 들고 서있는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피팅룸에서 약간 떨어진 소희의 맞은편에는 발을 밟힌 길고양이처럼 분노한 얼굴을 한 한 여자가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여자의 뒤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또 한 명의 여자가 서있었다.이서는 그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장희령.장희령은 H국 최초로 M국의 연예계에 진출한 스타로, H국의 자랑이었다.그러나 장희령이 M국 국적을 취득하여 M국 사람이 된 이후로 장희령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하지만 이서가 그런 장희령을 잘 알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몇 년 전, H국에 돌아온 장희령은 다시금 H국 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씨 가문의 가주의 아들, 심동과도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서는 장희령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희령의 앞에 선 채 기세등등한 여자는 장희령의 비서임이 틀림없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길길이 날뛰며 소희를 저주하고 있었다.“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서를 받겠다?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으면 경찰은 왜 있겠어?”“당신 말대로라면,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건가요?”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서는 기세등등한 그 여자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그 여자, 장희령의 비서가 확실해! 이름이…… 에이미던가?”누군가 그 여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에이미라는 그 여자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어서 죽을 기세로 사과하지 못해?”이서는 잠시 눈썹을 찡그린 뒤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