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환은 이서를 손쉽게 들어올렸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누르는 지환의 힘때문에 결국 이서는 지환에게 징징거리며 앙탈을 부렸다.이서의 어떠한 저항도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저항은 지환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두 사람은 엎치락 뒤치락 쉴새없이 서로의 몸을 탐하다가 다음날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이서는 지환의 품에 안겨 깊이 잠들었다.……이서는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어 금방 퇴원하게 되었다. 퇴원 축하 겸 몸보신을 위해 임하나는 이서에게 함께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이서는 서나나, 자신의 비서인 심소희, 기사인 임현태까지 그 자리에 초대했다.일곱 명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큰 룸에 모였다.메뉴를 고르고 주문할 때 이서는 임하나가 술을 열 두병씩이나 주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도수가 상당히 높은 소주로.이서는 하나를 보며 물었다.“하나 너 이거 잘못 주문한 거 아니야?”하나가 이서에게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아니거든?”“이렇게 많이 주문해서 마시면, 내가 알코올 중독 될까봐 그래?”하나는 이서의 목을 팔로 껴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늘같이 기쁜 날, 맘 편히 마시자. 내 평소 주량 넘기지는 않을게.”술을 많이 마시지 않겠다는 하나의 말이 썩 미덥지는 않았지만 이서는 그냥 나머지 음식을 마저 주문했다. 음식 주문이 끝나자 지환의 친구 이상언이 문을 밀고 느릿느릿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 사람들이 이미 와있는 것을 보고 상언은 멋쩍게 사과했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막 나오려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으며 상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했다.상언은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사람씩 눈인사를 건네다 지환을 발견했다. 지환 옆에는 임현태가 앉아있었다.상언은 현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현태 씨, 이 자리는…….”현태는 그닥 눈치가 없는 편이라 상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상언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네, 이 선생님, 하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식사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한쪽에서는 소희가 나나의 곁에 앉아 내내 자기가 궁금했던 연예계의 이런 저런 뒷담화를 꼬치꼬치 캐물어보고 있었다.나나는 소희의 계속되는 질문에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면서 다른 연예인들의 스캔들보다는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 위주로 대화했다.하나는 옆에 앉은 현태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현태는 술이 센 편이라 똑같이 마시더라도 하나의 얼굴에 먼저 취기가 벌겋게 올라왔다.이서는 상언이 하나와 현태의 대화에 끼려다 몇 번이나 멈칫멈칫 주저하는 것을 눈치챘다.이서가 지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이 선생님이 하나에게 여전히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안 그런 척 숨기고 계시네, 참 안타깝다.”지환이 이서에게 샤브샤브 국물 속 양고기 한 점을 집어 건넸다.“그냥 내버려둬. 젊은 사람들이 자기들 일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지환씨는 뭐 나이가 얼마나 많다고 아주 어른처럼 그렇게 말해?”“저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이가 많다는 게 아니고, 성숙한 거지.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서 해결하잖아.”“에효, 또 시작이네. 칭찬은 남이 해주는 거야. 겸손하세요, 하지환 씨!”이서와 지환이 서로 속삭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가 다가왔다.“정다운 두 분이 정답게 대화 다 하셨으면 이제 이서는 제가 좀 빌려갈…….”누가 봐도 만취상태인 임하나는 혀까지 꼬여 무슨 말 하는지도 알아듣기 힘든 상태였다.“하나, 너 벌써 많이 취했다.”“아니거든? 한병밖에 안마셨는데 설마 벌써 취하겠어?”임하나는 이서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나 화장실 좀 같이 가줘.”“그래.”이서 역시 하나를 화장실에 혼자 보내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이서는 소희를 불렀다.“소희 씨, 이리 와서 같이 하나 좀 부축해줘. 화장실 같이 다녀오자.”“그래요.”소희가 곧바로 와서 함께 하나의 다른 쪽 팔을 잡았다.이서와 소희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하나를 부축하여 화장실로 걸어
“이 선생님 때문은 아니야.”소희는 놀라워하며 말했다.“그럼 하나 언니가…… 이 선생님을 찬 거예요?”“그런 거 아니라니깐.”이서는 소희에게 하나의 집안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소희랑 아무리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해도 다른 친구의 비밀까지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다.“아니면 왜 그러는 건데요?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왜 함께 할 수 없는 거죠”소희는 의아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만약 현태오빠도 나를 좋아했다면 나는 아마 이 선생님 대신 현태 오빠를 선택했을 거야.’이서는 소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으이구, 이 바보야. 너도 나중에 현태 씨랑 사귀게 되면 사랑이 동화 속 이야기같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될거야.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일들이 있을 거고,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소희는 이서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연애하기 겁나요.”“하하하, 정말? 너 현태 씨랑 사귀고 싶은 거 아니야?”“언니도 참!”소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을 붉혔다.“진짜로 말해봐. 두 사람 지금 어떻게 된 건데?”소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가 어떻게 될 것도 없어요. 현태 오빠 뇌구조는 보통 사람과 차원이 달라요. 매일 우리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내 새 남친인 줄 알았대요. 근데 그 때마다 사람들한테 굳이 오빠 동생 사이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다들 나한테 덩치 좋은 오빠가 있는 줄 안다니까요. 내 손가락 하나 안건드려요.”여기까지 말하면서 소희는 심지어 자랑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그런 건 좋은 거 아니야?”이서가 말하자 소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얼굴이 빨개져서 푸념을 늘어놓았다.“좋긴 뭐가 좋아요. 널린 게 오빤데. 고향집에 가면 오빠가 열댓명이예요. 오빠 하나 더해서 뭐에 쓰게요.”“그럼, 내가 너 도와줄 테니까 현태씨 좀 테스트해보자.” “어떤 테스트요?”소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너는 그냥 지켜보기만 해. 근데 미리 약속해야돼. 만약에
화장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상언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바로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었다.“무슨 일이예요?”화장실 안쪽에 쓰러져 있는 하나를 보고 상언은 잔뜩 긴장한 채 하나 쪽으로 다가갔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척도 없어서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하나가 이미 기절했더라고요. 너무 취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상언은 하나를 제 등에 업고 말했다.“아무래도 제가 하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요.”“저도 같이 갈게요.”이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언은 하나를 업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이서는 눈이 휘둥그레진 소희를 붙잡고 부탁했다.“나는 이 선생님이랑 함께 하나 데리고 병원에 갈거니까 네가 나 대신 다른 사람들 배웅 좀 해줘.”“그럴게요.”소희가 대답했다.이서는 상언의 빠른 걸음에 맞춰 뒤따라 빠르게 움직였다.건물 1층 입구에 도착하자 이서가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상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차를 몰고 상언의 곁에 도착했다.이서는 자기 차를 몰고 와서 상언의 앞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었다.“얼른 타세요.”상언이 뒷좌석 차문을 열고 하나를 내려놓고 자신도 곧바로 옆좌석에 올라탔다.차에 시동이 걸렸다.상언은 뒷좌석에서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하나의 손과 발을 계속해서 주물렀다.이서가 백미러로 상언과 하나의 모습을 흘끔 보고는 안심하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상언이 의사이기 때문에 이서는 상언을 100% 믿고 맡길 수 있었다.병원 이름이 저 멀리서 보였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뒷좌석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내가 왜 차에 타고 있어? 나는 지금 식당에서 샤브샤브 먹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하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서가 뒤돌아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하나야, 깨어났구나!”하나는 일어나 앉았지만 아직 정신이 덜 든 얼굴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야, 나 왜 차에 있는 거야?”하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기 옆에 상언이 앉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선생님…… 이제 더 이상 제 일에 신경쓰지 않기로 하셨잖아요.”하나는 고개를 들어 상언을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근데 왜 제가 기절했을 때 …….”상언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우리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친구 아닌가요? 친구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당연히 도와주는 거죠.”“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친구인 거네요.”하나는 상언의 눈을 보며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했다.상언은 하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그렇죠.”하나는 기운내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확실히 하는 게 저도 좋아요. 연인사이보다는 친구사이가 더 오래 가기 마련이거든요.”“나도 같은 생각입니다.”상언이 창밖을 보면서 대답했다.“그럼 이제 우리 다시 돌아가도 되는 거죠?”“이서씨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 물어봅시다.”상언은 통화를 끝내고 온 이서를 돌아보며 말했다.이서는 차에 오르며 하나와 상언에게 말했다.“지환씨가 좀 있다가 저 픽업하러 올거래요. 두 사람 중 누가 이 차 운전해서 돌아갈 사람?”하나와 상언은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도 이번에는 곧장 피하지는 않았다.“내가 할게. 이번 일은 다 나 때문인 것 같으니까.”“하나 너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놓고 운전까지 하겠다고? 내 생각에 너는 한번 병원 들어가서 이것 저것 검사 좀 받아봐야 할 것 같다.”하나는 이서의 팩트로 때리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러면 운전할 사람 저네요.”상언이 마치 학생인 듯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이서는 하나를 돌아보며 물었다.“어떻게 갈거야? 너 정 불편하면 나랑 지환씨가 차로 너 데려다 줄 수도 있어.”“됐어. 내가 그 자리에 왜 끼냐? 커플 사이에서 들러리 안합니다요. 있다가 나 혼자 택시로 가면 돼.”하나는 뒷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말하자 이서가 대답했다.“이 동네 택시 잘 안잡혀.”“내가 가는 길에 하나씨 내려줄게요.”이서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그러면 되겠다. 이 선생님이 하나를 데려다 주시면 저도 마음이 놓이
“콰당!”상언의 품으로 넘어진 하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잠시 후 하나가 입을 열었다.“이런 건…… 친구가 해줄 만한 일은 아닌데…….”“그럼요.”상언은 하나의 여우 같은 눈매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친구는 다른 친구의 옷 속에 손 넣는 일 따위도 하지 않죠.”하나는 피식 웃으며 상언의 몸에 지탱하고 천천히 일어났다. 두 팔은 여전히 상언의 목에 두르고 있는 상태였다.“라면 먹고 갈래요?”하나가 몸을 밀착해오자 상언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상언과 하나의 관계는 바로 이 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지나간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다만, 지난번에 먼저 질문한 사람은 상언이었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질문했다.“그래요.”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상언의 입이 먼저 하나의 제안을 승낙해 버렸다.하나가 자신의 입술을 상언의 입에 갖다 대자 뜨거운 입김을 느끼기 시작했다.“그럼 같이 올라가요.”두 사람은 함께 하나의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상언은 하나의 허리를 깊게 껴안고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하나의 붉은 입술에 마침내 키스하기 시작했다.하나의 달콤한 입술에 상언은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자신을 더 이상 멈출 수 없었다.하나는 차가운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들고 열정적으로 상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하나의 집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상언과 하나는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집 문 앞까지 왔다.하나가 한 손으로는 상언을 끌어안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현관 열쇠를 꺼내 바로 문을 열었다.집 안에 들어서자 상언이 벽을 더듬어 불을 켜려고 했지만 하나가 상언의 손을 잡았다.“불 켜지 마세요.”상언은 하나의 입술에 계속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알았어요.”어둠은 늘 모든 이들에게 사랑 앞에서 무모해질 수 있는 용기를 준다.두 사람은 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예솔은 지호의 손을 인정사정 없이 뿌리쳤다.“오빠 같은 괴물을 도울 순 없어요.”지호의 얼굴빛이 매우 어두워졌다. 하지만 금새 표정을 바꿔 봄바람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생각할 시간을 줄게. 나랑 힘을 합칠 것인지 아니면 쭉 저런 비뚤어진 인간들 편에 설건지.”예솔은 파르르 떨릴 정도로 두 주먹을 단단히 쥐고 CCTV 속에서 울고 있는 이서정을 보며 심란해했다.이서정은 민씨 집안의 도움으로 이서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서정의 행동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서에게 조금도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덕분에 지환과 이서의 감정이 급속도로 깊어지게 되었다.예솔은 이서와 지환이 오늘 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파티하는 장면을 상상하고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이 직접 가서 이서를 죽일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예솔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지환는 예솔에게 도저히 어길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예솔이 화영에 나타난다면 아마 박씨 집안과 하씨 집안의 관계는 그대로 끝나버릴 것이다.‘그렇게 되면 지환 씨와는 이대로 끝인 거잖아.’예솔은 몇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지호를 비웃듯 바라보았다.“맘 접으세요. 저는 앞으로도 오빠랑 같이 편먹을 생각 없으니까요.”이 말을 남기고 예솔은 밖으로 나갔다.지호는 밖으로 나가는 예솔의 뒷모습을 보고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기 시작했다.“예솔이 너 혼자 힘으로는 윤이서를 상대할 수 없는데 그걸 모르네.”지호가 서류 위에 놓인 이서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지호는 이를 더 악 물었다.‘평소에는 여자에 별 관심도 없던 네가 지금 이 사진 속 여자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다는 거지? 그럼 그게 네 약점이 되는 거고, 나는 그걸 이용할 수 있는 거고.’꿈 속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이서가 갑자기 눈을 떴다. 밖은 여전히 날이 새기 전이었다.“무슨 일이야?”이서가 눈을 뜨자마자 지환이 함께 잠에서 깨며 물었다.“별일 아니에요.”그녀는 꿈 속에서
누워있던 이서가 다시 눈을 뜨고 지환을 바라보았다.“왜요?”그녀의 예쁘고 깨끗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지환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자.”이서는 지환이 좋아하는 달달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당신한테 비밀 하나 말해줄게요.”지환은 재빨리 하연 쪽으로 다가왔다.이서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지환의 얼굴에 순식간에 뽀뽀를 했다.“자, 이제 안심되죠?”이 말을 하면서 이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지환의 눈에 이제야 불안이 사라졌다. 이서가 혹시 은철과 만나려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다.천진난만한 이서의 웃는 눈을 보자 지환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한결 가벼워졌다.‘처음부터 다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그는 천천히 다시 누워서 이서를 꼭 껴안았다.온 힘을 다해 이서를 자기 몸의 일부분으로 새겨 넣고 싶은 마음이었다.……날이 밝았다.아침식사 후 이서는 출근길에 올랐다.이서는 어제 심소희를 도와 임현태를 시험해 보겠다고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차에 오르자마자 현태에게 말했다.“현태 씨,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말씀하세요.”“제가 소희 씨 남자친구 찾는 거 도와주려고 하는데요, 소희 씨 같은 성격은 어떤 남자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이서는 이 말을 하며 현태를 계속 지켜보았다.현태의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심소희 씨는 어째서 갑자기 남자친구를 찾는 건데요?”“소희가 올해 22살밖에 안됐지만, 좋은 남자는 임자가 빨리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안그러면 25살 돼서 다른 사람들이 다 주워가고 남은 사람 중에 고를 수밖에 없잖아요.”현태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했다.“아가씨, 이런 일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이서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창문에 기댔다.“그러면, 소희가 손 부장님 같은 사람과 가정을 꾸리며 사는 건 어때요?”현태
“엄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현태 씨가 왜 그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고 생각하세요? 현태 씨의 돈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소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심유인이었다.“소희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운전기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 소희도 심유인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언니, 현태 오빠가 누구의 운전기사인 줄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뭐?”심유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서 언니예요.”“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유인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현태 오빠가 운전기사인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또 다른 직업도 있어요. 그건 바로 이서 언니를 보호하는 거죠.” “운전기사일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란 말이에요.” 심유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시큰둥하게 말했다.“흥,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 기껏해야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하는 사람인 거잖아. 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어. 경호원이라 해봤자 한달에 몇백만원을 버는 게 전부일 텐데, 90억짜리 헤어샵을 사는 게 말이나 돼?” 소희는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현태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기로 했다.“허, 몇 년 동안 UFC의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람한테, 몇십억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세요?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거예요?” “UFC?!”심유인은 격투기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UFC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소희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모르면 인터넷에 찾아보시던가요.”“언니, 제가 언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현태 오빠가 평범한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일부로 언니의 남자 친구도 부른 거잖아요.” “저희 부모님께는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니의 남자 친구와 제 남자 친구를 비교하고 싶은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니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언니의 남자 친구보다 돈이 더 많을
현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헤어샵을 인수하긴 했지만, 사모님께 드릴 거거든요.” “앞으로는 사모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이십니다. 미용은 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심씨 가문에는 전속 미용사가 있었지만,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게다가 이지숙이 미용 기계를 사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시술을 두세 달이나 반년 정도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용 기계에 먼지만 앉지 않겠는가?결국 이지숙은 헤어샵에 가서 시술받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샵에 가는 것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끔 일이 생겨서 시간을 놓치면, 다시 예약을 잡아야만 했다.이지숙은 진작에 헤어샵을 인수하려고 했는데, 줄곧 자신에게 적합한 헤어샵을 찾지 못했다.이지숙은 현태가 선택한 헤어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그 샵의 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도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터라 온 가족이 외국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이지숙은 이미 그 사람과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는 않았고, 모든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생각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심유인은 ‘말도 안 돼’ 라는 말만 연신 해댔다.“말도 안 돼요! 임현태 씨는 그냥 운전기사잖아요. 대통령을 위해 운전한다고 해도 헤어샵을 살 수는 없을 거라고요!”그 헤어샵은 심유인도 아는 곳이었다.‘거긴 적어도 100억은 있어야 인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지숙도 마음속에 품었던 호기심을 드러냈다.“이 샵의 사장이 계속 외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사람하고 연락한 거죠?” “아, 그 부분은 하 대표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마침 하 대표님께서 그 샵의 사장님과 구면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하 대표님의 곁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께서 흔쾌히 샵을 양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지숙이 물었다.“하 대표가 이 일에 직접 나섰다고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순조롭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