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환은 냉정하게 분석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너랑 나는 상황이 달라. 이서와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하나 씨는 그렇지 않아.”“어렸을 때 가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사랑을 믿지 않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네 사랑을 받아줄 수 있겠어?”“너도 예전에는 사랑을 믿지 않았잖아.”“난 이서가 믿게 만들었지.”“어떻게 믿게 했는데?”지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자신과 이서는 많은 것을 겪으며, 일련의 사건들이 사슬로 묶인 듯 서로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줬다. 하지만 그에게 언제부터 사랑을 믿었느냐고 물으면, 지환은 대답할 수 없었다.“방법을 똑같이 해도 소용없어. 정말 하나 씨를 믿게 만들고 싶다면, 심리치료를 받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치료할 수 있는지, 언제 나을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친구로서 포기하라는 거야.”이상언의 두 눈이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정말 포기하는 것만이 최선일까?”지환은 침묵했다.그는 조언만 해줬을 뿐, 나머지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상언은 소파에 앉아 말을 이어갔다.“근데 포기가 안 돼.”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의학 공부보다 더 좋아했다.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상언을 바라보았다.……이서정의 아파트.문밖에서 초인종이 울렸을 때, 서정은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며칠 전 이천이 집에 데려다준 이후로는 문이 잠겨서 외출하지 못하고 있었다.매니저가 한 번 보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 적이 있었다.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초인종이 한참 동안 계속 울리고 나서야, 문득 밖에 있는 사람이 이하영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정은 그 정체불명의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후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당시 하영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기를 잃었던 서정의 눈동
이하영은 눈을 매섭게 떴다. “나라고 걔가 죽기를 바라지 않겠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걔가 전부 피해 갔어.”그 일을 떠올리니 이하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사모님, 이걸 제가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얘기해.”“전에 그 여자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모님이 보낸 사람들이 무능했기 때문이에요.”“너…….”“사모님, 일단 화내지 말고 진정하세요.”이서정이 말했다.“만약 민씨 가문 사람들을 보냈다면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을 겁니다.”이하영이 몸을 비틀거렸다.“민씨 집안의 힘을 빌리라는 말이니?”“네, 사모님. 따님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으세요?”이하영은 소파에 앉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우리 딸 원수를 갚고 싶지만, 그 양반이 이미 네 남편과 계약을 맺었어. 두 집안이 손을 잡은 이상 다시는 윤이서를 괴롭힐 수 없어.”서정은 가슴이 철렁했다.하지환이 민씨 집안과 손잡은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주먹을 꽉 쥔 서정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환은 윤이서를 정말 사랑했다!서정은 한참을 애쓰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끝내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괜찮지 않나요? 게다가 저희 남편 곁에는 저도 있으니까, 설령 일이 들통나더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면 되지 않겠어요?”“그런가?” 이하영은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사실 그녀도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정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이제 서정이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당장 윤이서를 처리하고 싶었다.“물론이죠.” 이하영이 동요하는 것을 본 서정은 더더욱 밀어붙였다.“게다가 이번엔 제가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니까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봐.” 이하영은 조급하게 재촉했다.그 시각, 윤이서의 집.드디어 이상언과 임하나가 돌아갔다.윤이서가 뒤돌아서는 순간 하지환이 그녀를 껴안았다.“이거 놔요…….” 이서는 수줍게 지환
긴장한 그의 표정을 보며, 윤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죠. 우리 다 어른이잖아요,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하지.”하지환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는 이서의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그런 생각 하지 마, 알겠어?” “앗…….” 이서는 차가운 숨을 들이마셨다.“무슨 사람이 개도 아니고, 왜 물어요?”하지만 지환의 눈빛은 여전히 이서를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약속해, 이서야.”이서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멈칫하다, 입꼬리를 올리며 지환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지환 씨, 당신이 날 제일 잘 알지 않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아닌지, 지환 씨가 제일 잘 알 텐데.”지환은 여전히 이서를 노려보았고, 그 강렬한 기운에 이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여보!”이를 본 이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놀린 거지.”그제야 지환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이서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그제야 포식한 짐승처럼 만족스러운 듯 이서를 놓아주었다.“잘 자.”이서가 투덜거렸다.“잘 자라니, 어이가 없네.”하지만 마음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몇 달 동안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었다.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지환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지환 쪽으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이서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젠장, 늦었어!”시간을 보고 당황한 이서가 얼른 침대에서 뛰어내려 옷을 찾으려는데, 그대로 덥석 손목이 잡혔다.지환은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번뜩였다.“오늘은 그냥 쉬어.”“안 돼요, 이미 조씨 그룹 인수 건에 대해 지시했단…….”이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지환이 보였다.말하지 않아도 이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환이 먼저 말했다.“여보, 싸웠을 때도 당신 마음속
윤이서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환은 이천으로부터 민호일이 자신을 만나러 회사에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지환은 어제 전해 받은 정보를 떠올리며 두 눈이 차갑게 식었다.정보에 따르면 전에 튀어나와 이서를 겁탈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하영 측에서 보낸 자들이며, 그동안 이하영과 이서정은 번갈아 윤이서를 자주 괴롭혀왔다.이는 애초에 민호일과 맺은 계약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동이었다.“지금 바로 갈게.”“네.”지환의 명확한 대답을 들은 이천은 전화를 끊고 대기실로 향했다.“민 대표님, 도련님께서 조금 있다가 오신답니다.”민호일은 기뻐하며 얼굴이 환해졌다.“잘됐네,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약 30분 후, 지환이 드디어 도착했다.큰 보폭으로 응접실에 들어선 지환은 민호일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민호일이 지환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하 대표님, 모레가 제 아내의 생일인데, 생일 파티에 대표님이 참석해 주시면 어떨까 하고 찾아왔습니다.”“생일이요?” 지환은 눈앞에 놓인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초대장을 건네받아 몇 번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모레가 아내 분 생일이라고요?”“네, 그렇습니다.” 민호일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기대에 찬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참석하실 수 있으시죠?”“물론이죠.” 지환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제가 특별히 아주 큰 선물도 준비하겠습니다.”이 말을 들은 민호일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만으로 저희 민씨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지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파티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 기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께서 워낙 겸손하신 분이라, 사람들 앞에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티 당일
“아니거든요?” 소희는 이서의 손을 잡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저한테만 살짝 말해보세요. 사랑 없는 제가 질투 좀 해보게.”“현태 씨랑은 어떻게 돼 가?”이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에이, 말도 마세요.” 임현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저를 여전히 여동생쯤으로 생각한다니까요.”“그런 강철 같은 남자라면, 공개만이 답일지도 몰라.”“됐어요.” “만약 현태 씨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고백하는 거라면,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소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아니면, 내가 언제 한번 현태 씨의 속마음 좀 알아봐 줄까?”“그거…… 별론데요?”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희가 대답했다.이서는 그런 소희가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말고.” “언니!”“도대체, 알아봐달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이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소희는 수줍게 이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언니는 너무 짓궂어요.”“어서 일이나 하러 가자. 법률부가 가능한 한 빨리 인수 방안을 내놓게 해야 해. 내일 당장 조씨 그룹과 인수 건에 대해 논해야 하거든.”“그렇게 빨리요?”“질질 끌면 안 돼.”이서는 하루라도 빨리 지환이 하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이대로 가다가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지환 씨에게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몰라.’“네, 알겠어요.”소희가 자리를 떠나자 이서의 핸드폰이 울렸다.조용환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이서는 눈썹을 찡그렸다.‘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잠시 망설이던 이서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윤 대표님?]수화기 너머, 조용환의 목소리는 유난히 공손했다.“무슨 일이세요?”[저희 조씨 그룹을 인수하고 싶으시다는 말씀, 아직 유효한가요?]이서는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요.”[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바로 인수
머지않아 조용환이 이서에게 시간과 장소를 보내왔다.[내일 오전 9시, 북쪽 교외의 찻집에서 뵙죠.]‘9시라…… 조금 이른데.’이는 늦어도 내일 오전 9시까지는 인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저녁 야근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이서는 내선전화를 들어 소희를 불러들였다.“소희 씨, 오늘 법률부가 고생 좀 해줘야겠어. 내일 오전 9시 전까지 인수 방안을 마련해야 해.”“이렇게 급하게요?”“응, 방금 조진명 씨 아버지께서 전화를 걸어오셨는데, 당장 내일 인수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셔. ““우리 쪽에서 먼저 인수 방안을 준비해 가면 걱정할 게 없을 거야.”“네, 법률부에는 제가 공지할게요.”소희가 방을 나가려 하자, 이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아냐, 내가 직접 갈게. 마침 전할 말도 있고 …… 시간 아끼자.”그렇게 이서는 법률부로 향했다.소희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이서 언니는 정말…… 한가할 틈이 없네.’‘이제 막 화해했는데 또 일에 집중해야 한다니…….’ 이서는 법률부와 3시간이 넘는 토론하고서야 인수 방안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서는 마침내 기지개를 켰다.“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부터 이틀간 휴가를 드리죠. 푹 쉬세요.”“감사합니다. 대표님!”이서의 말에 모두가 약간의 활력을 되찾은 듯했다. 이서는 직원들 모두가 집으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이서가 사무실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있는 지환이 보였다.이서는 멍하니 지환을 바라보았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환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퀭한 눈으로 이서를 향해 팔을 벌렸다.이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지환을 지나쳤다.지환이 이서를 끌어안았다.“끝났어?”지환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를 오래 기다렸음이 틀림없었다.이서는 지환의 허벅지에 걸터 앉았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언제 왔어?”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하지환이 걸어 들어왔다.“깼어?”“어디 갔었어?” 이서는 그제야 지환의 손에 들린 칫솔과 컵을 알아차렸다.하지환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왜 더 안 자?”“7시 넘었잖아. 곧 출발해야지.”지환은 이서에게 칫솔과 컵을 건네며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그저 짧은 입맞춤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지환의 입맞춤은 격해지기 시작했고, 이서는 고개를 들어 숨을 들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지환은 한참이 흐른 후에야, 이서를 놓아주었다.이서는 부끄러워하며 지환의 가슴을 두드렸다.“뽀뽀 귀신이라도 들렸어?”“응.” 지환이 웃으며 답했다. 이서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 싶었는지, 급히 칫솔과 컵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고 세면대로 향했다.이서가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지환은 의자에 앉아 인수 방안을 훑고 있었다.이서는 그런 지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바로 이때, 지환이 차갑게 입을 뗐다. “당신 사무실 너무 작아. 쉴 곳도 잘 곳도 없잖아.”만두를 먹던 이서는 지환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내가 아직 전과 같은 줄 알아? 다시 여기 발붙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야.”“당신…… 윤 씨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야?”이서는 만두를 내려놓고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지금의 윤 씨 가문이 예전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거, 잘 알아.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아직 멀었어.”“아냐,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위로할 필요없어.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돼 있으니까.”지환은 미소를 띈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이서는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행히 회사에 갈아입을 옷이 있었던지라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문제는…….“당신 먼저 나가 있으면 안 돼?”이서는 갈아입을 옷을 손에 든 채,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지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지환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보, 난 이미 당신의 피부 결 하나하나를 다 알잖아.” “…….”재빨리
“정말 신경 안 써도 돼?”이서가 지환의 팔을 건드리며 물었다.여전히 지환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응.”“그런데 왜 계속 전화가 와? 무슨 급한 일 생긴 거 아닐까?”“아니야.”지환의 말투는 너무도 담담했다.이서의 시선이 지환의 주머니로 향했다.주머니 속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내가 받을게.” 이서가 말했다.지환은 이서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하지만 이내 이서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외국에서 온 전화였다. 하지만 위에는 비고가 없었다.“여보세요?”이서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부터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자 단번에 쎄함이 밀려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지환이 녀석, 드디어 전화를 받는구나.]“안녕하세요, 저는 하지환 씨의 아내입니다.”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수씨구나, 반가워요.”‘제수씨?’이서가 지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지환 씨한테 형이 한 명 더 있다는 거야?’‘왜 여태 뵌 적이 없지?’ “안녕하세요. 아주버님.”[제수씨, 지환이 좀 바꿔주실래요?]이서가 망설이며 지환을 바라보자, 지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서의 손에 있는 전화를 건네받았다. “무슨 일이야?” 지환이 눈살을 찌푸린 채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너, 내 전화를 안 받을 줄 알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서프라이즈 선물을 좀 보냈어. 지금…… 가고 있을 거야. 한 20분쯤 걸릴걸? 너의 사람들이 그걸 뜯는 순간 펑-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하하하…….]지환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또 무슨 미친 짓이야?”“네가 내 얼마 남지 않은 비즈니스까지 다 빼앗아 갔잖아. 나, 할 일이 없어. 너희들한테 서프라이즈 좀 주고 즐기는 수밖에.”지환은 앞쪽 길목을 살핀 후, 차갑게 말했다.“차 세우세요.”지환은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이토록 사색이 된 지환의 모습은 처
같은 시각.호텔에 있던 이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그녀는 지환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일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환이 그녀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엎치락뒤치락하고도 잠이 오지 않자, 이서는 아예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랐다. 물을 들이켜고 나니, 졸음은 완전히 달아났다. 그녀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지환 씨가 외출할 때 따라갈걸 그랬나?’ ‘그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따라가는 것은 짐만 될 뿐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이서의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 엉뚱한 생각의 폭을 넓혀가던 그녀는 갑자기 하경철을 떠올렸다.‘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후로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할아버지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실까?’‘몸은 예전처럼 건강하실까?’ 이서는 아직도 하경철에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꼈다.하경철은 그녀가 하씨 가문으로 시집오기를 바라는 유일한 하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가장 잘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하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반목하여 원수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속상하셨을 거야.’‘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찾지 않으실 리 없어.’ 갑자기 이서의 머릿속에는 고택에 가서 하경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편, 병원에 있던 지환은 세 번째 상대를 만났다.괴력왕은 그를 속인 것이 아니었는데, 뒤의 상대는 확실히 갈수록 강력해졌다.“하지호 사장님의 수하입니다!”이천은 단번에 맞은편에 있는 네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하지호의 수하였다. “고작 네 명만 보내다니, 우리 어둠의 세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이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천은 바로 설명했다.“절대 저 네 사람을 얕봐선 안 됩니다. 저 사람들은
큰 소리와 함께 목에 꽂힌 칼 두 자루가 ‘우지끈’ 소리를 냈고, 반동으로 인해 목에서 빠져나왔다.이천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지환은 일찍이 대책이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칼을 단단히 붙들었고, 칼끝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바닥에 단단히 꽂아 내렸다. 그 칼을 바닥에 깊은 흔적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잦아들었다. 모처럼 낭패한 지환을 보며, 괴력왕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하 대표님, 사업 수완은 뛰어나실지 몰라도, 힘으로는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모두를 부른다고 해도 저를 이길 순 없죠.” “하지만 지금은 열댓 명만 있을 뿐이고요.” “비록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와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지인으로서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를 이기지 못하신다면, 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그 순간, 눈을 부릅뜬 괴력왕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뒤통수를 눌렀다. 엄청난 통증을 느낀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끈적끈적한 느낌은 현기증을 불러왔다. 그는 희미한 눈으로 어둠의 세력 조직원 몇 명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이 지환과 이야기하는 그를 기습한 것이었다.괴력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보았고, ‘쿵’하는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제... 제 약점이 뒤통수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이 비밀은 그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것이었다. 지환이 천천히 일어섰다.“벌써 잊은 겁니까? 난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가 산에서 나오라고 부탁했었는데요.” 괴력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보며 말했다.“그 몇 번의 짧은 만남으로 제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까?”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괴력왕이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하하하, 역시 하 대표님이군요. 저는 온몸에서 힘이 넘치지만, 머리는 좋지 않아요.” “오늘밤, 전력을 다해야만 했던 것처럼요.” 괴력왕
“제가 오늘 밤에 상대할 사람이 하 대표님이었군요!”그 사람이 움직이자, 사람들은 산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이천이 지환의 앞에 서서 말했다.“괴력왕, 당신이 어떻게 하은철 아버지의 조수가 된 거죠?”눈앞의 괴력왕은 힘으로 대동맥을 끊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타고난 힘을 가진 그는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줄곧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천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괴력왕과 맞붙은 적 없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까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괴력왕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사람들은 모두 그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랐다.“하하, 말하자면 긴 이야기입니다만, 기꺼이 말씀드리죠.”키가 큰 괴력왕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지환을 볼 수 있었다.“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제 딸이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그걸 알게 된 하은철 사장의 아버지께서 훌륭한 의사를 찾아 제 딸을 치료해 주신 거죠.”“그래서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약속했습니다.”“다만, 첫 번째 임무가 하 대표님을 상대하는 건 줄은 몰랐죠.”지환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대단했다.괴력왕처럼 은둔하는 사람도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어쩐지, 상대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더라니.’‘상대를 알면 후회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지?’지환은 괴력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괴력왕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게다가 지환은 의리 있는 괴력왕의 성격을 아주 좋아했다.그래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으로 괴력왕을 끌어들이려 했었다.하지만 싸우기 싫어하는 괴력왕의 성격 때문에 그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고, 지환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가 전쟁이 될 줄은 몰랐다. “각자의 보스나 신경 쓰도록 하죠. 시작합시다!” 지환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괴력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 대표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저쪽에 있던 하도훈은 이미 입구까지 걸어갔다.그의 곁에는 수십 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머리에는 흰색 천 조각이 씌워져 있었다. 지환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그를 소멸시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지환은 꿈쩍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병원 입구에 다다랐다. “형님, 오랜만입니다!”하도훈의 얼굴에서는 커다란 슬픔이 묻어났다. “왔구나!”지환이 말했다.“은철이 시신을 제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직된 몸을 심하게 떨었다.“지환아, 너 정말 독하구나. 한 여자를 위해서 조카를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니! 그 아이를 해칠 때, 네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니?” “예전에 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의 사이는 좋지 않았어. 하지만 은철이는 그걸 전혀 개의치 않았고, 너라는 작은 아버지를 꽤 친근하게 대했다지.” “매번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향의 특산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런 조카를 이런 식으로 대한 거냐?”“너는 처음엔 여자를, 이제는 목숨을 앗아간 거야.”“은철이 녀석이 본인의 이런 말로를 알았더라면, 애초에 너를 가까이 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르겠구나.”하도훈이 말했다.지환이 차갑게 하도훈을 바라보았다.“맞습니다. 우린 가족이고, 확실히 아주 가까웠죠.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은철이가 이서를 어떻게 대했었죠?” “이서는 은철이의 작은어머니였습니다. 그때 은철이는 이서가 본인의 가족, 즉 친척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하도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래, 보아하니 너는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지환아, 너희가 목숨을 건 계약을 했다는 거, 설령 네가 내 아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네가 오늘 은철이를 보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내 허락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니?!” “형님이 허락하면 어떻고,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이내 이천이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님, 모두 안배했습니다. 이제 오셔도 됩니다.]“그래.”전화를 끊은 지환은 외투를 들고 문을 나왔는데, 맞은편 방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그는 넋을 잃은 채 그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이천이 한 말이 맴돌았다.‘덫일 수도 있다고...?’‘가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그는 이서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하면 떠나고 싶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바로 이때, 문이 ‘덜컥’ 소리를 냈다. 지환이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문 뒤에 서 있는 이서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그녀도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에 외투를 든 것을 본 이서가 물었다.“어디 나가요?”지환은 이서의 눈을 쳐다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오, 그럼 어서 가보세요. 나는 샤워하고 잘게요.”이서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는데, 이는 지환을 크게 안도시켰다. 그가 두 걸음 정도 내디뎠을 때, 뒷문이 다시 열렸고, 이서의 ‘조심해서 다녀와요’라는 한 마디가 복도에 메아리쳤다.고개를 돌린 지환은 텅 빈 복도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는 차갑고 의연한 기색만이 감돌 뿐이었다. 급히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천은 이미 어둠의 세력 조직원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즉시 똑바로 서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지환은 마지막으로 호텔을 힐끗 보고는 출발했다. 병원 입구.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고요했고,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평소 경비원이 지키고 있던 입구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히려 입구는 활짝 열려 있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천이 물었다.“대표님,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환은 냉정하게 반문했다.“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이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이미 철통같이 포위된 듯했고, 어디로 들어가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문으로
소희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서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부하고 싶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그들이 소희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저녁에 식사하던 이서는 지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괴롭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더 강해진다는 건 하씨 가문을 넘어서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건 내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에요.” 맞은편에 앉은 지환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이서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그녀 얼굴의 부드러운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얼굴의 미세한 동작까지도 끄집어냈다.“불가능한 일은 없어. 어쩌면 네가 하씨 가문을 넘어설지도 모르지.” “또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죠? 하씨 가문은 백 년의 기반을 가진 가문이예요. 내가 하씨 가문처럼 강해지기를 원한다면, 꿈속에서 하씨 가문을 이어받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요.” 하지만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와 하씨 가문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말이다. 바로 이때, 지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이천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지환이 핸드폰을 든 채 이서를 한 번 보았다. 이서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지환이 그녀가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제 배불러요. 나는 먼저 방에 가서 텔레비전을 볼게요.”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자, 지환이 수화기 너머의 이천에게 물었다.“확실해?”[확실합니다. 하은철은 확실히 죽었어요. 하지만 하씨 가문의 고택 앞에서 죽었죠.] [하은철은 치타와 마찬가지로 차가 부딪쳐 날아가는 순간에 차에서 뛰어내렸을 겁니다.] [물론, 그때 누군가가 하은철을 도왔기 때문에 하씨 가문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던 거겠죠.][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하씨 가문 고택
소희가 꽤 충격을 받은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 언니, 농담하는 거죠?” “그런 사람이 이득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우리가 시비를 걸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하며 기도해야 할 일이지.” 이서가 빙그레 웃었다.“이제 내 말을 믿겠어?” 소희가 말했다.“이서 언니, 언니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언니는 제 동생을 잘 모르잖아요. 걔는 어릴 때부터 남들을 골탕 먹이던 애예요. 한 번도 남한테 당한 적이 없는 애죠.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내가 어제 이미 계획을 세워뒀어. 소희 씨가 내 말 대로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소희 씨, 설마 그 이상한 양부모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생각을 안 해본 거야?” 소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확실히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단지 생각에 불과했어.’ ‘양엄마가 얼마나 끈질기게 집착하는 사람인지 잘 아니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그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철저히 말살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범법행위이지 않은가.소희는 이서가 자신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치 않았다. “이서 언니,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음에 또 심태윤이 찾아오면, 그냥 무시해 버리세요.” “언니는 걔한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겠지만, 걔는 언니한테 해를 끼칠 수 있어요.” 이서가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아까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서야 알았어. 소희 씨가 심씨 가문에서 겪는 일이 내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걸.” “소희 씨, 소희 씨는 날 위해서 심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 그러니까 나한테는 심씨 가문에 있는 소희 씨의 처지를 개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아직 심 대표님 내외에게 정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소희 씨의 부모님이잖아. 세 사람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 언젠가는 그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나를 몰래 만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소희는 이서의 말에 고개를
같은 시각.차에서 칭찬받은 소희는 쑥스러워했다.‘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하지만 이지숙의 눈에는 소희가 혀로 수많은 유생과 싸운 제갈량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주머니.” 소희가 이지숙이 계속해서 말을 잇기 전에 말했다.“물건을 좀 사러 가고 싶어요. 이따가 이 근처에서 저 좀 내려주세요.” “나도 같이 갈게.”이지숙이 열정적으로 자청했다. 소희는 그런 그녀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저 혼자 가고 싶어요.”이지숙은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는 쇼핑을 원치 않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많은 일을 겪은 소희가 혼자 걷고 싶은 것이라 여겼다. “이해해, 다음 길목에서 내려줄게.”“소희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가 반드시 너를 보호할 테니까.” “...”소희는 정말이지 걱정이 많았다.‘심씨 가문 사람들의 뇌 회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소희야.” 심근영 또한 이지숙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소희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너를 구할 거야.” 소희가 그들의 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소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심근영 부부의 눈시울이 촉촉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떠나자마자, 소희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윤씨 그룹으로 갈게요.” 운전기사는 대답한 후, 곧장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30분 후, 회사에 있던 이서는 소희가 왔다는 것을 듣고는 다소 놀랐다.“들어오라고 하세요.” “예.”김하늘은 곧장 대표실로 소희를 데려왔다.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자, 소희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이서 언니...” 문이 닫히고, 밀려오는 억울함을 느낀 그녀가 이서를 껴안았다.이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소희
소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6명의 어르신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어르신들, 모든 일의 원흉인 제가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여섯 명의 어르신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고, 중간에 앉은 그 어르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그래.” “감사합니다.”“여러분, 여러분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나타남과 동시에 하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단되었으니, 저만 내쫓으신다면 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진정성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럼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거야?”심유인이 비꼬듯이 대답했는데, 어조에서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소희가 심유인을 보며 말했다.“그래서 저도 여러분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씨 가문을 떠나기만 하면, 하씨 가문은 자연히 심씨 가문을 용서하고, 다시 협력하려 할 테니까요!” ‘소희가 주동적으로 심씨 가문을 떠나겠다고 할 줄이야!’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소희야!”이지숙은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이 엄마가 부족해서 너를 고생시키는구나.”소희는 역시 눈시울을 붉히던 심근영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심이에요. 제가 쫓겨나는 걸로 하 사장님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할게요.”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조롱으로 들렸다.심근영이 중간에 앉은 어르신을 보며 말했다.“어르신, 소희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하 사장의 기분을 풀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하 사장일까요?” “윤 대표는 하 사장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하씨 가문을 건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면, 더욱 궁지에 몰릴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나는 정말이지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고 싶지 않아!’ ‘이 사람들은 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