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환은 맞아서 몸이 휘청거렸지만 곧 소파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지환은 이상언을 보고 있었다.상언의 말은 안개를 가르는 햇살처럼 귀가 번쩍 뜨였다.그렇다, 지환도 고통스러운데, 이서는 어찌 또 고통스럽지 않겠는가?지금 지환이 해야 할 것은 여기서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서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빨리 찾는 것이다.지환은 숨을 여러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선 전화를 걸었다.“들어와.”30초 후, 이천은 전전긍긍하며 들어섰고, 지환의 부어오른 얼굴과 코밑의 피를 보고 겁에 질려 상언을 바라보았다.“이서가 왜 나랑 이혼하려는지 당장 알아봐.”지환의 목소리는 낮고 무서웠고 손목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두 시간 줄게. 두 시간 안에 너의 보고를 반드시 들어야겠어.”“네?”“네가 어떤 방법을 쓰든 난 상관 없으니까 무릎을 꿇고 이서한테 빌어서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와.”이천은 상언을 바라보았다.상언은 지환이 냉정해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빛도 더 이상 긴장하지 않고, 예전의 우아하고 유순함으로 돌아갔다.“날 봐서 뭐해, 어서 가지 않고.”“알…… 알겠습니다.”이천은 난감해하며 말했다.사무실을 나서자 이천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만 싶어졌다.대표님은 자신에게 두 시간밖에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모님이 대표님과 이혼하려고 하는 이유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하지만 오늘의 상황을 봤을 때 만약 자신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아마 앞으로의 생활은 모두 지옥 모드가 될 것이다.요즘 줄곧 전전긍긍하게 지낸 것을 생각을 하니 이천은 부들부들 떨었다.이천이 망설이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사이 뒤에서 상언의 목소리가 들렸다.“날 좀 기다려.”이천은 고개를 돌려 상언을 보고 우는 것보다 더 못생긴 표정을 지었다.“이 선생님.”상언은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웃으며 이천을 보았다.“그러지 마. 마치 장례를 치르려는 것 같아.”말이 떨어지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상언이 들어갔다. 이천은 자료를 안고 상언을 따라 들어갔다
하지환은 윤이서가 결코 무고한 이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일부러 이천을 오게 한 것일 것이다.어차피 지환이 누구를 오게 하든 그들이 이혼한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신념을 확고히 하고서야 이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들어오라 해.”“네.”서나나는 심소희가 나간 후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 제가 자리를 피할까요?”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옆의 접대실에 가서 나를 기다려. 아직 내가 인계해야 할 일이 좀 있어. 너 급해?”“안 급해요.”나나는 웃으며 말했다.“이 배역을 위해 이미 모든 일을 미뤘어요.”“여은아가 잔소리 많이 했겠지?”나나는 혀를 내밀었고 은아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는 사실을 이서에게 말하지 않았다.나나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경쟁하겠다고 했을 때 은아는 이미 불만을 품었다. 그 후에 나나가 심지어 모든 일을 미뤘다는 것을 알고 더욱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욕했다.나나는 은아가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나가 불가능한 역할을 위해 이렇게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나나는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나나도 이 배역이 십중팔구로 이서정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한 번 싸우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다.“괜찮아요, 저는 이미 은아 언니의 잔소리에 익숙해졌어요.”말이 끝나자 나나는 문을 열었다.“저 먼저 가 있을게요.”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나가 문을 닫자 이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몸 안에서 다시 시작된 전율을 억눌렀다.한참 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서는 물컵을 꼭 쥐고 말했다.“들어와.”소희는 문을 열고 말했다.“이서 언니, 이 선생님께서 오셨어요.”이서는 차갑게 이천을 바라보며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네.”소희는 문을 열고 떠났다.이서의 맞은편에 선 이천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사모님…….”“이 비서님, 아니, YS 그룹 대표이사
심소희는 어리둥절해하며 들어왔다.“이 선생님.”이천은 허둥지둥 윤이서를 쳐다보았지만, 도저히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서 얼버무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사모님, 틀림없이 뭔가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말이 끝나자 이천은 급히 떠났고 가능한 한 빨리 이 일을 하지환에게 알리려 했다.처음에 이천은 하 어르신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환이 결혼한 자료를 제출했었다. 하지만 자료 목록에는 지환의 아내가 누구인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분명 지금 사모님이 알게 된 그 신비한 사람과 관계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이천이 떠나자 이서의 등줄기를 받치고 있던 줄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이서는 의자에 주저앉았고 얼굴은 썰물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소희는 이서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걱정하며 말했다.“이서 언니…….”그러자 이서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나나 보고 들어오라 해.”“이서 언니.”“난 괜찮아, 내일이 바다의 딸 여주인공 캐스팅하는 날이야.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러니 빨리 나나를 들어오라 해.”이 말은 소희에게 한 말이자 이서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이서는 지금 모든 정력을 나나에게 쏟아부어 반드시 나나를 도와 여주인공이라는 배역을 차지해야 했다.이서는 하씨 가문, 특히 지환에게 모든 사람이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임의로 그들이 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소희는 어쩔 수 없이 나나를 불렀다.……YS 그룹 화영 지사.이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도 두드리는 것을 잊고 대표실 문을 직접 열었다.“대표님, 큰일 났어요.”이천은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는 이미 대표님 은철 도련님의 둘째 삼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지환의 얼굴빛은 순간 물처럼 어두워졌고, 손잡이를 잡은 손등에는 핏줄이 벼락같이 뛰었다.“뭐라고?!”“제가 방금 사모님을 찾아갔는데 사모님께서 저에게 대표님께서 외국에 계신 아내는 이서정이고 이서정은 은철 도련님의 아내라고
수요일에 카운티 정부에서 만나자는 그 문자를 생각하니 하지환은 더욱 짜증이 났다.다행히 이천 쪽에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어서, 이서정의 통신 장비가 확실히 윤이서와 지환이 ML 국에 있을 때 현지에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곧 알아냈다.그리고 시간대도 잘 맞아떨어졌다. 즉, 십중팔구 서정이었다.이 증거를 받고 이천은 즉시 지환을 찾아갔다.“대표님, 보세요.”지환은 증거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이서정한테 전화해.”이천은 상황을 보고 바삐 말했다.“대표님, 먼저 진정하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이서정 아가씨께 전화를 하신다면 어르신 쪽에서 알게 될 것이고 곧 실마리를 따라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를 알아낼 것입니다.”“그때가 되면 어르신께서는 분명 사모님께 알리실 것이고…… 대표님의 신분은 틀림없이 드러날 것입니다.”이천은 지환이 서정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하려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서정이 계약을 어기고 고의로 그들의 관계를 사모님께 알려준 것은 물론 가증스럽다. 하지만 경솔하게 행동하면 아마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지환은 검지로 미친 듯이 뛰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지환은 이서를 필사적으로 생각해야만 천천히 냉정해질 수 있었다.냉정해진 후, 혼돈의 뇌가 마침내 많이 명확해졌다. 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이서가 조만간 어떤 공공장소에 나타날지 알아봐.”이 일은 너무 간단해서 이천은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을 받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내일 나나 아가씨와 함께 연극 캐스팅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모두 회사에 계십니다. 다른 초청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지환은 잠시 망설이고 말했다.“알았어, 나가봐.”이천은 머뭇거리며 말했다.“네.”이천이 나간 후 지환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아래층의 차들이 빽빽이 다니는 것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재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지환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보다 이서의 곁에 서고 싶었다.그래서!지환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이
윤이서는 이튿날 아침 일찍 서나나와 함께 캐스팅 현장으로 향했다. 캐스팅 장소는 국제연극센터였다.나나의 매니저인 여은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나는 꽤 난감해하며 말했다.“이서 언니, 은아 언니에게 전화할게요.”“좋아.”이서는 은아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대충 짐작했다.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나를 멀리 바라보았다.이서와 거리가 좀 떨어진 후에야 나나는 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아 언니, 왜 아직 안 오셨어요? 캐스팅이 곧 시작될 거예요.”“내가 가든 안 가든 모두 똑같잖아. 어차피 마지막에 이 배역은 이서정의 것인데.”잠시 멈추자 은아는 계속 말했다.“나나야, 날 믿어. 지금 당장 돌아와. 그 드라마 아직 할 수 있어.”“은아 언니…….”“자.”은아는 나나의 말을 끊었다.“내가 몇 년 동안 너를 데리고 있었으니, 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너는 벽에 부딪히지 않고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아.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조금만 말할게.”“만약 이번에 네가 실패한다면, 앞으로 너의 모든 일은 반드시 나의 말을 들어야 해.”나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은아 언니…….”“봐봐, 너 자신조차도 분명히 이 배역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나는 네가 왜 이 일로 소란을 피우려 하는건지 정말 모르겠어.”“아니에요, 은아 언니…….”“아무 말도 하지 마.”은아는 나나의 말을 끊었다.“이미 결정했어. 배역을 얻지 못하면 앞으로 모든 일은 내가 배정할 거야.”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아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나나가 적막하게 핸드폰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이서는 말없이 시선을 돌리자 들어오는 이서정과 우연히 부딪쳤다.그 메스꺼움이 또 밀려왔다. 이서는 주먹을 꽉 쥐고서야 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서정도 이서를 보았다. 이서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무명의 불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그 사람들이 잡힌 후에야 서정은
“윤 대표님, 나나야.”윤이서는 이서정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가슴에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이서의 시선은 서정 뒤에서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에게 떨어졌다. 그러자 눈 속의 분노는 웃음으로 변했다.“서정 아가씨.”서정은 오늘 이서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디가 다른지 또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자신이 반드시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서정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서정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서의 귓가에 말했다.“당신들은 참으로 용감하군요. 이 배역이 이미 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오다니요.”그들은 매우 가까이 다가서서 마치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한 것 같았다.이서의 얼굴에도 웃음이 계속 번지고 있었다.“당신이 자신 것이라고 하면 당신 것인가요?”서정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웠다.“어머, 설마 연예계에서 실력이 후원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여기까지 말하자 서정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그러자 이서도 웃었다.“저는 연예계에 대해 잘 모르고 이 업계에서 무엇을 신봉하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오늘 온 이유는 하씨 가문에게 비록 그들이 H 국 제일의 대가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서정은 표정이 멍해지고 이서가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뒤에서 찰칵 소리가 사방에서 나자 서정은 정신병자라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매니저를 데리고 분장실로 걸어갔다.서정이 떠나자 나나는 이서에게 말했다.“이서 언니, 우리도 들어가요.”“응.”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나와 함께 분장실로 들어갔다.분장실에는 서정을 제외하고 모두 작은 배우들이었다. 이 배역이 서정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 들러리로 온 것이었다.그 작은 배우들의 등급이 서정만 못하기에 분장실에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윤이서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미녀는 이미 멀어졌다.이서는 참지 못하고 스태프에게 물었다.“방금 그분은 누구시죠?”“캐스팅 심사위원 중 한 명인데 죄송하지만 제가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서 외국인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서 어떤 심사위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스태프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말없이 두 사람은 관중석에 도착했고, 이서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매니저 자리로 향했다.매니저 자리에는 몇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아마 그 몇 명의 작은 배우들의 매니저일 것이다.그들은 이서를 보고 낯을 가려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서도 그들과 인사할 의욕이 없어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심소희가 보낸 문자 외에 아무도 이서를 찾지 않았다.이혼에 대해서 이서는 임하나에게 알리지 않았다.하나의 감정도 지금 침체된 시기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의 관계 때문에 감정에 특히 민감해서 약간의 바람이 불어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이서는 하나가 자신이 지환에게 속았기에 색안경을 끼고 이상언을 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방관자의 각도에서 이서는 사실 하나가 상언과 함께 있기를 특별히 희망했다. 아무래도 상언은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누가 또 알겠는가?지환이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하지만 마지막은…….이서는 손끝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자신이 왜 또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지?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바로 이때 옆에 누군가가 앉았다.이서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보자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옆에 앉은 사람은 뜻밖에도 자신이 1초 전에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그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긴 다리를 마구 잡아당겨 이서의 다리를 눌렀다.이서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그 사람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서는 줄곧 그 사람과 정면으로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 사람이 바로 자신
곧 극장 무대의 막이 천천히 올라갔다.앞줄의 선정위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고 하이먼 스웨이 자리만 비어 있었다.이서는 이 유명한 극작가를 매우 좋아했다. 특히 그 신랄한 언어 스타일은 종종 이서를 공감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극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서는 기대가 매우 컸다.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걷잡을 수 없이 몸 옆을 흘겨보게 되었다.옆에 앉은 남자의 허벅지는 아직도 이서의 허벅지를 누르고 있었다.극장 안의 불빛은 이미 어두워졌다.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 다리가 맞붙어있는 줄 알 것이다.하지만 이서는 당사자로서 그 피부가 맞닿는 느낌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옛날의 기억은 느린 영화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이서는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여광 중 지환의 모습을 지우지 못했다.왜 그렇게 어려울까?애초에 하은철을 잊었을 때, 전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이서의 생각이 복잡할 즈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줄줄이 들려왔다. 이서는 숨을 들이마시고 이 기회를 빌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으로 바라보았다.그러자 한눈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온 하이먼 스웨이를 보았다.이서는 멍해졌다.이서는 줄곧 하이먼 스웨이가 백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노란 피부의 아시아인이었다.그리고 하이먼 스웨이를 보는 순간 이서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어디서 본 것 같았다.그리고 그 느낌은 하이먼 스웨이가 가까워질수록 강렬해졌다.하이먼 스웨이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이서는 마침내 뒤늦게 눈을 돌렸다.이때 자리에 앉은 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돌려 이서의 방향을 한 번 보았다.그러나 시선은 초점을 맞추지 않아 이서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하이먼 스웨이 주변의 프로듀서는 그분이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주의를 기울여 물었다.“스웨이 여사님, 왜 그러세요?”“아무것도 아니에요.”하이먼 스웨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왠지 모르게 방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