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카운티 정부에서 만나자는 그 문자를 생각하니 하지환은 더욱 짜증이 났다.다행히 이천 쪽에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어서, 이서정의 통신 장비가 확실히 윤이서와 지환이 ML 국에 있을 때 현지에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곧 알아냈다.그리고 시간대도 잘 맞아떨어졌다. 즉, 십중팔구 서정이었다.이 증거를 받고 이천은 즉시 지환을 찾아갔다.“대표님, 보세요.”지환은 증거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이서정한테 전화해.”이천은 상황을 보고 바삐 말했다.“대표님, 먼저 진정하세요. 만약 대표님께서 이서정 아가씨께 전화를 하신다면 어르신 쪽에서 알게 될 것이고 곧 실마리를 따라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를 알아낼 것입니다.”“그때가 되면 어르신께서는 분명 사모님께 알리실 것이고…… 대표님의 신분은 틀림없이 드러날 것입니다.”이천은 지환이 서정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하려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서정이 계약을 어기고 고의로 그들의 관계를 사모님께 알려준 것은 물론 가증스럽다. 하지만 경솔하게 행동하면 아마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지환은 검지로 미친 듯이 뛰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지환은 이서를 필사적으로 생각해야만 천천히 냉정해질 수 있었다.냉정해진 후, 혼돈의 뇌가 마침내 많이 명확해졌다. 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이서가 조만간 어떤 공공장소에 나타날지 알아봐.”이 일은 너무 간단해서 이천은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장을 받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내일 나나 아가씨와 함께 연극 캐스팅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모두 회사에 계십니다. 다른 초청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지환은 잠시 망설이고 말했다.“알았어, 나가봐.”이천은 머뭇거리며 말했다.“네.”이천이 나간 후 지환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아래층의 차들이 빽빽이 다니는 것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재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지환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보다 이서의 곁에 서고 싶었다.그래서!지환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이
윤이서는 이튿날 아침 일찍 서나나와 함께 캐스팅 현장으로 향했다. 캐스팅 장소는 국제연극센터였다.나나의 매니저인 여은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나는 꽤 난감해하며 말했다.“이서 언니, 은아 언니에게 전화할게요.”“좋아.”이서는 은아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대충 짐작했다.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나를 멀리 바라보았다.이서와 거리가 좀 떨어진 후에야 나나는 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아 언니, 왜 아직 안 오셨어요? 캐스팅이 곧 시작될 거예요.”“내가 가든 안 가든 모두 똑같잖아. 어차피 마지막에 이 배역은 이서정의 것인데.”잠시 멈추자 은아는 계속 말했다.“나나야, 날 믿어. 지금 당장 돌아와. 그 드라마 아직 할 수 있어.”“은아 언니…….”“자.”은아는 나나의 말을 끊었다.“내가 몇 년 동안 너를 데리고 있었으니, 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너는 벽에 부딪히지 않고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아.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조금만 말할게.”“만약 이번에 네가 실패한다면, 앞으로 너의 모든 일은 반드시 나의 말을 들어야 해.”나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은아 언니…….”“봐봐, 너 자신조차도 분명히 이 배역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나는 네가 왜 이 일로 소란을 피우려 하는건지 정말 모르겠어.”“아니에요, 은아 언니…….”“아무 말도 하지 마.”은아는 나나의 말을 끊었다.“이미 결정했어. 배역을 얻지 못하면 앞으로 모든 일은 내가 배정할 거야.”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아는 한숨을 쉬고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나나가 적막하게 핸드폰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이서는 말없이 시선을 돌리자 들어오는 이서정과 우연히 부딪쳤다.그 메스꺼움이 또 밀려왔다. 이서는 주먹을 꽉 쥐고서야 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서정도 이서를 보았다. 이서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무명의 불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그 사람들이 잡힌 후에야 서정은
“윤 대표님, 나나야.”윤이서는 이서정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가슴에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이서의 시선은 서정 뒤에서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에게 떨어졌다. 그러자 눈 속의 분노는 웃음으로 변했다.“서정 아가씨.”서정은 오늘 이서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디가 다른지 또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자신이 반드시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서정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서정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서의 귓가에 말했다.“당신들은 참으로 용감하군요. 이 배역이 이미 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오다니요.”그들은 매우 가까이 다가서서 마치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한 것 같았다.이서의 얼굴에도 웃음이 계속 번지고 있었다.“당신이 자신 것이라고 하면 당신 것인가요?”서정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세웠다.“어머, 설마 연예계에서 실력이 후원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여기까지 말하자 서정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그러자 이서도 웃었다.“저는 연예계에 대해 잘 모르고 이 업계에서 무엇을 신봉하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오늘 온 이유는 하씨 가문에게 비록 그들이 H 국 제일의 대가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서정은 표정이 멍해지고 이서가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뒤에서 찰칵 소리가 사방에서 나자 서정은 정신병자라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매니저를 데리고 분장실로 걸어갔다.서정이 떠나자 나나는 이서에게 말했다.“이서 언니, 우리도 들어가요.”“응.”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나와 함께 분장실로 들어갔다.분장실에는 서정을 제외하고 모두 작은 배우들이었다. 이 배역이 서정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 들러리로 온 것이었다.그 작은 배우들의 등급이 서정만 못하기에 분장실에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윤이서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미녀는 이미 멀어졌다.이서는 참지 못하고 스태프에게 물었다.“방금 그분은 누구시죠?”“캐스팅 심사위원 중 한 명인데 죄송하지만 제가 안면 인식 장애가 있어서 외국인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서 어떤 심사위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스태프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말없이 두 사람은 관중석에 도착했고, 이서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매니저 자리로 향했다.매니저 자리에는 몇 사람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아마 그 몇 명의 작은 배우들의 매니저일 것이다.그들은 이서를 보고 낯을 가려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서도 그들과 인사할 의욕이 없어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심소희가 보낸 문자 외에 아무도 이서를 찾지 않았다.이혼에 대해서 이서는 임하나에게 알리지 않았다.하나의 감정도 지금 침체된 시기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의 관계 때문에 감정에 특히 민감해서 약간의 바람이 불어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이서는 하나가 자신이 지환에게 속았기에 색안경을 끼고 이상언을 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방관자의 각도에서 이서는 사실 하나가 상언과 함께 있기를 특별히 희망했다. 아무래도 상언은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누가 또 알겠는가?지환이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하지만 마지막은…….이서는 손끝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자신이 왜 또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지?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바로 이때 옆에 누군가가 앉았다.이서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보자 눈빛이 매섭게 흔들렸다.옆에 앉은 사람은 뜻밖에도 자신이 1초 전에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그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긴 다리를 마구 잡아당겨 이서의 다리를 눌렀다.이서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그 사람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서는 줄곧 그 사람과 정면으로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 사람이 바로 자신
곧 극장 무대의 막이 천천히 올라갔다.앞줄의 선정위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고 하이먼 스웨이 자리만 비어 있었다.이서는 이 유명한 극작가를 매우 좋아했다. 특히 그 신랄한 언어 스타일은 종종 이서를 공감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극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서는 기대가 매우 컸다.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걷잡을 수 없이 몸 옆을 흘겨보게 되었다.옆에 앉은 남자의 허벅지는 아직도 이서의 허벅지를 누르고 있었다.극장 안의 불빛은 이미 어두워졌다.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 다리가 맞붙어있는 줄 알 것이다.하지만 이서는 당사자로서 그 피부가 맞닿는 느낌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옛날의 기억은 느린 영화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이서는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여광 중 지환의 모습을 지우지 못했다.왜 그렇게 어려울까?애초에 하은철을 잊었을 때, 전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이서의 생각이 복잡할 즈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줄줄이 들려왔다. 이서는 숨을 들이마시고 이 기회를 빌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으로 바라보았다.그러자 한눈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온 하이먼 스웨이를 보았다.이서는 멍해졌다.이서는 줄곧 하이먼 스웨이가 백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노란 피부의 아시아인이었다.그리고 하이먼 스웨이를 보는 순간 이서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어디서 본 것 같았다.그리고 그 느낌은 하이먼 스웨이가 가까워질수록 강렬해졌다.하이먼 스웨이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이서는 마침내 뒤늦게 눈을 돌렸다.이때 자리에 앉은 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돌려 이서의 방향을 한 번 보았다.그러나 시선은 초점을 맞추지 않아 이서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다.하이먼 스웨이 주변의 프로듀서는 그분이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주의를 기울여 물었다.“스웨이 여사님, 왜 그러세요?”“아무것도 아니에요.”하이먼 스웨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왠지 모르게 방
무대 초반의 몇 명은 금방 사라지는 무명 배우였고, 대본도 읽지 않은 건지 극중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한 두 명을 본 이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하이먼 스웨이도 마찬가지였다.무대 뒤편에서 보고 있던 이서정은 형편없는 그들의 실력에 안심했다.서정은 묵묵히 대사를 외우고 있는 서나나를 보고 말했다.“네가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노력한다 해도 결국 여주인공은 나야. 그러니까…….”서정은 일어나 나나의 뒤로 가 허리를 굽혀 나나의 귀에 대고 말했다.“능력은 필요없어. 좋은 후원자가 있어야지.”나나는 고개를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선배님, 방해하지 마세요.”서정은 나나의 대본을 툭 치며 말했다.“꼴에 연습은 하겠다? 잘 들어, 네 인기도 한 순간이야. 넌 내 상대가 안 된다고, 알아들어?”나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서정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허리를 굽혀 대본을 집어 들었다.이를 본 서정은 곧바로 대본을 즈려 밟았다.서정은 나나의 턱을 있는 힘껏 들어 올린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만 믿고 깝치지마.”“전 그런 적 없습니다.”나나는 서정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현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하은철의 둘째 숙모였으니 말이다.나나가 만약 서정에게 미움을 산다면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그런 적이 없다고?”서정은 이를 악물었다.“내가 널 때렸을 때 속으로 욕했지?”“전 정말 그런 적이 없어요.”나나는 용서를 빌었지만 눈빛에는 굴복할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서정은 더욱 화가 났다.서정이 손을 들어 나나의 뺨을 때리려던 그때, 뒤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정아, 네 차례야. 왜 아직 여기 있어?”매니저는 객석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서정이 올라오지 않자 서둘러 무대 뒤로 달려와 서정을 찾았다.어쩔 수 없이 서정은 나나를 놓아주었다.“운 좋은 줄 알아.”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대본을 들고 매니저에게 다가갔다.“SNS는
이서정도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기회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싶었다.‘그럼 하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야!’“시작해도 될까요?”아무런 시작도 하지 않는 서정을 본 하이먼 스웨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서정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서정은 서둘러 생각을 접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네.”서정은 무대 중앙으로 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공연을 시작했다.하이먼 스웨이의 대본은 유출될 위험이 있어 배우들에게 각각 한 챕터의 견본만 보냈다.그녀가 받은 대본은 이렇다. 외국에 있던 여주인공 방은이는 자신이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과 아직 엄마가 멀쩡히 살아 계신다는 걸 알게 되고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은아는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인생 중 20년이 넘게 연락이 끊겼던 엄마를 드디어 만났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그녀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다시 헤어지게 된다.이 장면은 갈등을 표현하는 챕터로, 경력이 있는 배우라면 누구나가 방은이와 엄마의 갈등 부분을 선택할 것이다.서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서정은 자신의 연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미 암암리에 여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상, 이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 장면을 선택할 때에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또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만 잘 소화한다면 하이먼 스웨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무대 위에 있는 서정은 연기를 시작했다.무대 아래에 있던 이서의 관심은 서정에게 집중되지 않았다.그녀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달랬다.‘됐어, 잊어버려. 어차피 내일 이혼할 거잖아.’서정이 나오자 이서의 마음속 슬픔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이서는 참을 수 없었다.‘왜? 무슨 자격으로?’‘왜 난 계속 하씨 가문한테 당하는 거야?’‘지환 씨는 왜 나랑 결혼하고 또 이서정이랑 결혼한 거야?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이서의 떨림은 곧 허벅지를 통해 지환에게 전해졌다.그 떨림은 마치 세찬 눈보
이때 무대에서 이서정은 이미 연기를 끝냈다.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서정의 연기에 만족한 편이었다.사실이 그랬다.서정이 낙하산이었기 때문에 하이먼 스웨이는 서정이 연기를 전혀 할 줄 모를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의외로 연기를 할 수는 있었다. 비록 잘하지는 않았지만, 뭐 적어도 꽃병보다는 훨씬 잘했다.하지만 서정의 얼굴을 보자마자…….하이먼 스웨이는 마음속의 온갖 트집을 억눌렀다. 어차피 이 대본은 흠이 너무 많아 나중에 다시 쓸 생각이었다.‘그냥 내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이렇게 생각하니 서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서정은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눈 속에 희색을 띠며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하고서야 물러났다.다음은 바로 서나나였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무대에 집중했다.지환은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는 이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서의 시선을 따라 무대로 바라보았다.무대 위에서 나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불빛이 나나의 얼굴을 비춘 순간 하이먼 스웨이의 미간이 한 번 뛰었다.나나에게 있는 강인하면서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는 바로 하이먼 스웨이가 상상하는 방은이의 이미지였다.나나가 고른 부분도 어머니와 처음 만나서 싸우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연기가 진행됨에 따라 하이먼 스웨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나나의 연기 방식은 서정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서정이 연기한 은이는 친어머니를 만난 뒤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의 말다툼도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하지만 나나가 연기한 은이는 이 감정을 다루는 데에 결코 가볍고 거친 것이 아니라 겹겹이 전진하는 것이었다.처음에는 원망스러웠던 마음에서부터 어머니가 일부러 고아원에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주의로 인해 유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은이의 감정은 복잡해졌다.더 이상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가 얽히고 설키다가 어머니가 은이의 어릴 적 장난감, 옷을 꺼내자 억눌렸던 감정이 완전히 무너져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