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초반의 몇 명은 금방 사라지는 무명 배우였고, 대본도 읽지 않은 건지 극중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한 두 명을 본 이서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하이먼 스웨이도 마찬가지였다.무대 뒤편에서 보고 있던 이서정은 형편없는 그들의 실력에 안심했다.서정은 묵묵히 대사를 외우고 있는 서나나를 보고 말했다.“네가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노력한다 해도 결국 여주인공은 나야. 그러니까…….”서정은 일어나 나나의 뒤로 가 허리를 굽혀 나나의 귀에 대고 말했다.“능력은 필요없어. 좋은 후원자가 있어야지.”나나는 고개를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선배님, 방해하지 마세요.”서정은 나나의 대본을 툭 치며 말했다.“꼴에 연습은 하겠다? 잘 들어, 네 인기도 한 순간이야. 넌 내 상대가 안 된다고, 알아들어?”나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서정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허리를 굽혀 대본을 집어 들었다.이를 본 서정은 곧바로 대본을 즈려 밟았다.서정은 나나의 턱을 있는 힘껏 들어 올린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윤이서만 믿고 깝치지마.”“전 그런 적 없습니다.”나나는 서정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현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하은철의 둘째 숙모였으니 말이다.나나가 만약 서정에게 미움을 산다면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그런 적이 없다고?”서정은 이를 악물었다.“내가 널 때렸을 때 속으로 욕했지?”“전 정말 그런 적이 없어요.”나나는 용서를 빌었지만 눈빛에는 굴복할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서정은 더욱 화가 났다.서정이 손을 들어 나나의 뺨을 때리려던 그때, 뒤에서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정아, 네 차례야. 왜 아직 여기 있어?”매니저는 객석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서정이 올라오지 않자 서둘러 무대 뒤로 달려와 서정을 찾았다.어쩔 수 없이 서정은 나나를 놓아주었다.“운 좋은 줄 알아.”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대본을 들고 매니저에게 다가갔다.“SNS는
이서정도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기회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싶었다.‘그럼 하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야!’“시작해도 될까요?”아무런 시작도 하지 않는 서정을 본 하이먼 스웨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서정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서정은 서둘러 생각을 접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네.”서정은 무대 중앙으로 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공연을 시작했다.하이먼 스웨이의 대본은 유출될 위험이 있어 배우들에게 각각 한 챕터의 견본만 보냈다.그녀가 받은 대본은 이렇다. 외국에 있던 여주인공 방은이는 자신이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과 아직 엄마가 멀쩡히 살아 계신다는 걸 알게 되고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은아는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인생 중 20년이 넘게 연락이 끊겼던 엄마를 드디어 만났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그녀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다시 헤어지게 된다.이 장면은 갈등을 표현하는 챕터로, 경력이 있는 배우라면 누구나가 방은이와 엄마의 갈등 부분을 선택할 것이다.서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서정은 자신의 연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미 암암리에 여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상, 이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 장면을 선택할 때에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또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만 잘 소화한다면 하이먼 스웨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무대 위에 있는 서정은 연기를 시작했다.무대 아래에 있던 이서의 관심은 서정에게 집중되지 않았다.그녀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달랬다.‘됐어, 잊어버려. 어차피 내일 이혼할 거잖아.’서정이 나오자 이서의 마음속 슬픔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이서는 참을 수 없었다.‘왜? 무슨 자격으로?’‘왜 난 계속 하씨 가문한테 당하는 거야?’‘지환 씨는 왜 나랑 결혼하고 또 이서정이랑 결혼한 거야?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이서의 떨림은 곧 허벅지를 통해 지환에게 전해졌다.그 떨림은 마치 세찬 눈보
이때 무대에서 이서정은 이미 연기를 끝냈다.하이먼 스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서정의 연기에 만족한 편이었다.사실이 그랬다.서정이 낙하산이었기 때문에 하이먼 스웨이는 서정이 연기를 전혀 할 줄 모를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의외로 연기를 할 수는 있었다. 비록 잘하지는 않았지만, 뭐 적어도 꽃병보다는 훨씬 잘했다.하지만 서정의 얼굴을 보자마자…….하이먼 스웨이는 마음속의 온갖 트집을 억눌렀다. 어차피 이 대본은 흠이 너무 많아 나중에 다시 쓸 생각이었다.‘그냥 내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이렇게 생각하니 서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서정은 하이먼 스웨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눈 속에 희색을 띠며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하고서야 물러났다.다음은 바로 서나나였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무대에 집중했다.지환은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는 이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서의 시선을 따라 무대로 바라보았다.무대 위에서 나나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불빛이 나나의 얼굴을 비춘 순간 하이먼 스웨이의 미간이 한 번 뛰었다.나나에게 있는 강인하면서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는 바로 하이먼 스웨이가 상상하는 방은이의 이미지였다.나나가 고른 부분도 어머니와 처음 만나서 싸우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연기가 진행됨에 따라 하이먼 스웨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나나의 연기 방식은 서정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서정이 연기한 은이는 친어머니를 만난 뒤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의 말다툼도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하지만 나나가 연기한 은이는 이 감정을 다루는 데에 결코 가볍고 거친 것이 아니라 겹겹이 전진하는 것이었다.처음에는 원망스러웠던 마음에서부터 어머니가 일부러 고아원에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주의로 인해 유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은이의 감정은 복잡해졌다.더 이상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가 얽히고 설키다가 어머니가 은이의 어릴 적 장난감, 옷을 꺼내자 억눌렸던 감정이 완전히 무너져
이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몇몇 힘 없는 배우들은 모두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불행한 서나나를 쳐다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작은 소리로 수근 거리기도 했다.“이건 사실상 반 죽여버리는 거 아니야?”민씨 그룹은 현재 하은철의 둘째 삼촌과 협력하여 규모를 두 배 넘게 늘렸다. 현재 드라마나 영화라면 모두 민씨 그룹과 관련이 있고 연예계에서의 발언권도 곧 하씨 그룹을 따라잡을 것이다.“정말 불쌍해라.”내막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서나나의 매니저는 이번 캐스팅에 참가하는 것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들었어.”“매니저가 동의하지 않는데, 왜 또 왔데?”“서나나의 배후에 있는 쩐주가 기어코 오라고 했다는데.”“윤이서 말이야?”“맞아.”“윤이서가 오라고 해서 왔다고? 참 말 한 번 잘 듣네. 어떻게 그 여자 말을 들을 수 있어? 지난번에야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우연히 서나나가 뜰 거라는 걸 맞춘 거지. 그냥 복권 당첨 된 거지. 그런데 복권이 어떻게 번번이 당첨 될 수 있겠어?”“그러게! 그래서 서나나 바보 아니야? 일은 미뤄두고 손에 넣을 수도 없는 이 대본을 궁리하는 데 전념하다니. 게다가 내 생각에 이 대본도 윤이서가 고친 걸 거야.”“나도 윤이서가 고쳤다고 생각해. 이쪽 업계 사람이라면 모두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의 대본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고 있을 거야. 하이먼 스웨이의 대본을 손질할 만큼 멍청하지 않을 거라고.”“맞아, 하하, 하이먼 스웨이의 대본을 고치다니. 지가 뭐 셰익스피어야?”주위의 수근거림이 갈수록 커졌다. 이서가 안 들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는 그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개의치 않았다.이서가 하이먼 스웨이의 대본을 손질한 건 자기가 하이먼 스웨이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본을 읽다 방은이가 어머니를 만나러 간 부분이 아무리 읽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은이는 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여자이다. 어머니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모두의 시선을 무시하고 윤이서는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방금 하이먼 스웨이는 계속 이동 중이어서 이서는 하이먼 스웨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이제 드디어 하이먼 스웨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느낌은 더욱 강렬해졌다.하이먼 스웨이도 이서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매는 항상 자신에게 매우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하이먼 스웨이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부드러운 못소리로 물었다.“아가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이서가 대답했다.“윤이서입니다.”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의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왜 제 대본을 고치려고 한 겁니까?”“왜냐하면 저는 방은이가 딸로서 자신의 어머니가 몇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줄곧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당신…… 당신은 방은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미워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이서가 말했다.“하지만 딸로서 저는 방은이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쓴 방은이라는 인물이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면요.”“그러나 당신이 제시한 방은이는 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데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이먼 스웨이는 천천히 일어섰고, 눈가에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아주 잘 고쳤습니다. 저는 이제야 마침내 이 대본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이 대본은 초기의 대본이었다. 그 당시, 하이먼 스웨이의 딸은 유괴되었고, 자신은 슬픔에 잠겨서 마음속 번민을 풀기 위해 글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초기에 창작한 것으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대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이먼 스웨이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여러 해를 거쳐, 하
프로듀서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급히 말했다.“이분은 윤이서 씨입니다. 윤씨 그룹의 대표이사일 뿐만 아니라 저희 하 대표님과의 관계도 매우 좋습니다.”하 대표님의 전 조카며느리였다. 프로듀서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하이먼 스웨이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이서가 과감하게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이다.하이먼 스웨이는 명함 한 장을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이것은 제 명함입니다. 저는 지금 새 책을 쓰고 있는데, 당신을 저의 첫 독자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게 이런 영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이서의 눈동자가 순간 빛났다.“아닙니다, 저야 말로 영광이죠.”“그럼 약속입니다. 그때 다시 연락 드릴게요. 제가 대본을 드리겠습니다.”“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이먼 스웨이는 또 무대 위의 서나나를 보았다.“저는 아무래도 이 무대 위의 서나나양이 제 마음속의 방은이의 이미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이 말이 나오자 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프로듀서는 급히 무대 위에 있던 나나를 바라보았다.“하지만…….”하이먼 스웨이는 살짝 미간을 치켜세웠다.“왜요? 제 대본인데 제가 여주인공을 정할 자격이 없습니까?”하이먼 스웨이는 국내 작가들과 달리 슈퍼 거물로서 일반 편집자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만약 하이먼 스웨이가 기분이 좋지 않다면, 직접 주인공을 대본에서 죽일 수도 있다.프로듀서는 이 큰 거물의 미움을 살 수 없어서 말했다.“네, 서나나는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과 이미지도 잘 어울리고 연기가 자연스럽고 유창해 여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습니다.”프로듀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다른 심사위원은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이 반전은 현장에 있던 모든 힘 없는 배우들과 매니저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이서가 정말 나나를 도와 서정의 입에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빼앗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분과 지위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서가 나나
“이서 언니, 우리 성공했어요!”서나나는 자기도 모르게 윤이서를 껴안았다.사실, 나나는 자신들이 정말로 강력한 배후 세력을 가진 이서정을 물리치고,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서는 싱긋 웃으며 나나의 어깨를 토닥였다.나나가 살짝 고개를 들자, 이서 뒤로 마스크를 쓴 하지환의 모습이 보였다. 지환의 한 쌍의 눈은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어두웠다.나나는 금세 지환이 불쾌한 이유를 알아차렸고, 일부러 보란 듯이 이서를 더 꽉 끌어안았다.“…….”바로 이때, 나나가 갑자기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이서는 나나에게 물었다.“왜 그래?”나나는 심사위원석에서 일어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줄리 선생님? 혹시 에이 플라 줄리 선생님 맞으세요?!”줄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고, 나나와 함께 서 있는 이서를 보자마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서는 잠시 멍해졌으나, 이내 무엇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부리나케 줄리의 뒤를 쫓았다.이서가 따라오는 것을 알아챈 줄리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지환과 나나는 영문도 모른 채, 허둥지둥 극장을 떠나는 줄리와, 그런 줄리의 뒤를 쫓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부, 이서 언니…….”지환은 눈썹을 찡그렸다.“방금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줄리, 에이 플라…….”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환은 서둘러 이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대체 왜들 이러는 거지?’지환은 이서를 쫓으며 핸드폰을 꺼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줄리가 극장에 나타났어. 그 여자, 나가지 못하게 막아.”주차장에서 대기하던 이천은 지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네.”지환과의 전화를 마친 이천은 즉시 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극장에서는 지환이 이서를 붙잡았다.“여보, 가지 마.”“손 놔.”이서는 지환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하지만 마치 올가미처럼 조여오는 지환의 힘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서는 조급해하며 말
“여보.”하지환은 윤이서의 어깨를 잡았다.“내 말 좀 들어봐. 나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아니야.”이서는 우스웠다.“당신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아니라고? 아직도 날 속이려는 거야? 하나만 묻자. 당신 외국에 있을 때, 이서정이 당신 아내였어?”지환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한 증거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하은철의 둘째 숙모가 이서정이야. 이서정은 당신의 아내고, 그런데도 당신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아니라고? 나도 이렇게 간단한 계산쯤은 할 수 있어.”“아니야, 일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지환은 미간을 세게 쥐며 말했다.“나는 정말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아니야.”이서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 지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 당신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아니라면, 왜 이서정이 당신의 아내인지 설명해 봐.”배신감으로 가득 찬 이서의 눈을 본 지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젠 나도 숨길 필요가 없어.”이서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지환을 올려다보았다.이서는 지환이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지 들어나 볼 작정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회사 일을 처리하기 위해 출국했다고 말한 거 기억나?”이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일은 이서에게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기억나, 왜?”“사실 그 회사…… SY 그룹의 대표, 하은철의 둘째 삼촌이 나에게 준 거야!”이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비웃었다. 하지만 지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해 봐.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난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인데 왜 국내로 도망왔는지?”이서는 몸을 곧게 펴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왜?”“그거야 내가 SY 그룹의 사람이니까 그렇지.”지환은 이서의 어깨를 천천히 놓았다.“처음 SY 그룹이 화영에 와서 시장을 개척하려 했을 때, 일을 크게 벌이기를 꺼렸어. 그래서 일부 사람들만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