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침묵한 채 하지환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지환은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죽였다. 마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잠시 후, 이서는 입을 열었다.“이야기는 잘 엮었네, 논리도 뚜렷하고. 그런데…….”지환을 바라보는 이서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내가 또 속을 것 같아?”지환은 돌아서는 이서를 가로막았다.“네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아…….”지환은 핸드폰을 꺼내 이서에게 건네주었다.“너 전에 하 대표님의 핸드폰 발표회에 참가한 적 있지? 아직 그분의 목소리 기억하지? 나는 못 믿어도 그분 말은 믿지?”이서는 주저하며 지환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이서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의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니…… 내가 또 지환 씨 말에 휘둘리고 있잖아?’“여보…….”이서가 핸드폰을 건네받지 않자, 지환의 코끝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지환의 두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만연했다.“어차피 전화만 하는 거잖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안 그래?”지환의 말이 맞다. 고작 전화 한 통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핸드폰을 받아 든 이서는 잠시 망설이다 비고에 있는 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만의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침착하지만 동시에 힘이 있었다. 이서가 발표회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윤이서 씨, 맞죠?]이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서는 핸드폰을 든 채 지환을 등지고서 수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물었다.“당신이 은철의 둘째 삼촌이십니까?”“네, 맞습니다. 윤이서 씨와 지환의 일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개인적인 일로 두 분께서 이혼할 뻔하셨으니까요. 제 잘못이 큽니다.”이서는 눈썹을 찡그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하은철의 둘째
[하하, 마음이 편치 않은가요?]하은철의 둘째 삼촌은 이서의 속이 훤히 내다보인다는 듯 말했다.[마음이 편치 않다면, 이혼은 없던 일로 하시죠.]“둘째 삼촌!”수화기 너머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됐어요. 그만 놀릴게요. 지환이는 정이 아주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로 인해 두 분의 감정에 흠이 생겼으니 2억의 배상은 받지 않는 걸로 하죠. 잘못을 물어야 할 사람은 저니까요.][이서정에 관한 문제도 잘 처리할 겁니다. 다시는 두 분께 어떠한 번거로움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이서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서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일부러 목소리를 바꿔 위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하은철의 둘째 삼촌임이 분명했다.이서의 흔들리던 마음도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 모든 것이 지환의 말대로였다.하은철의 둘째 삼촌과 이서정은 거짓 혼인 증명서를 위해 지환과 이서정이 실제로 혼인신고를 감행하도록 했다.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이서정의 계략이 아니겠는가.이서와 지환의 사이가 안정된 것을 알게 된 서정이 일부러 이서에게 문자를 보내 지환과의 갈등을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이서는 출국 전, 웨딩드레스로 인해 서정과 얼굴을 붉혔던 일이 떠올랐다.다시 생각하니 모든 퍼즐이 들어맞기 시작했다.“여보…….”지환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이서는 어쩔 줄 모르는 지환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못 믿겠어…….”지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여보…….”이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런데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은 아니야.”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지환은 드디어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내가 지환 씨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앞으로의 지환 씨의 행동에 달렸어.”이서는 몸을 돌려 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나나가 아직 극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지환은 그제야 어깨를 짓누
남자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 마치 큰 산이 몸을 짓눌러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것만 같았다.이서정의 인생에서 이토록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여태껏 딱 한 사람뿐이었다.그 사람은 바로…… 하 선생님, 서정의 가짜 남편이었다.서정은 자신의 가짜 남편을 떠올리자 그 무엇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앞의 이 남자까지도.“당신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아? 당신이 뭔데 날 막아!”지환은 담담한 눈빛으로 서정의 손을 뿌리쳤다. 지환은 금방이라도 서정을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서정은 마스크를 쓴 지환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아,당신, 윤이서의 남편이지?”서정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정을 노려보던 지환과 이서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해졌다.하지만 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빈정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난 당신을 알아. 당신이 바로 윤이서의 그 형편없는 남편이지.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면목가증함이 틀림없어!”이서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면목가증이라니.지환이 면목가증 한 것이라면 그들은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괴물?“이서정 씨, 말 돌리지 마세요.”이서는 나나를 서정 앞으로 끌고 갔다.“나나는 왜 때린 겁니까?”“맞을 짓을 했으니까! 서나나가 내 여주인공 자리를 꽤 찬다는게 가당키나 해?”이서는 우스웠다.“바다의 딸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께서 창작하신 거예요. 투자는 민 씨 그룹과 하 씨 그룹이 맡았고요. 그런데 어째서 그게 당신 것이라 말할 수 있죠?”“내가 바로 하 대표님의 아내니까!”서정은 당당하게 두 손을 허리 위에 올렸다.이서는 정말이지 서정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까발리고 싶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하은철의 둘째 삼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둘째 삼촌의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이서이기에 더더욱.이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
두 손을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이서정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이를 본 이서는 음모가 들통난 서정이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지환이 이서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태 진짜 앞에서 위세를 떨쳤던 거야? 이제 정말 끝인가?’서정이 겁에 질려 머리가 새하얘질 무렵, 이천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대표님.”이천은 눈앞의 복잡한 상황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줄리가 잡혔습니다.”지환은 이천을 힐긋 보더니 서정을 내팽개쳤다.“이 여자 데려가. 하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 직접 처리하시겠다고!”이천은 지환이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놓였다.‘정체를 들키지 않으셨구나.’이천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정을 끌고 떠났다. 서정은 차에 내팽개쳐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극장에서의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이서는 서나나를 뒷문까지 부축했다. 뒷문에서는 매니저 여은아가 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나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은아는 벌겋게 부어오른 나나의 뺨을 보고 놀라 물었다.“어머,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서가 나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이서정 짓이에요.”서정의 이름을 듣자, 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또 그년이야. 자기가 은철 도련님의 둘째 숙모라는 것만 믿고 설치잖아. 확 이혼해버렸으면 좋겠어!”“은아 언니, 그만하세요. 전 괜찮아요.”“너도 참.”나나는 괜히 서정의 미움을 사 연예계 활동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은아는 그런 나나가 안타까웠다.“너무 속상해 마. 이미 이서정은 작지만 큰 벌을 받았어.”“그게 무슨 뜻이에요?”나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참.”은아는 서정을 향한 조롱 섞인 웃음을 쏟아냈다.“이서정은 당연히 자기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섣불리 자신이
순간, 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서정이 지환의 마스크를 망가뜨린 탓에 지환의 얼굴에는 아무런 가림막도 없었기 때문이다.여은아의 뜨거운 눈빛을 본 지환의 마음속에는 요란한 경종이 울려 퍼졌다.은아는 흥분한 채 이서를 지나 지환에게 다가갔다.“혹시…… 연예계에 관심 없으세요?”“…….”은아는 이처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지환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몸의 기질 역시 뛰어났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내놔도 군계일학의 존재일 것이다.스타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은아는 지환과 같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데뷔만 한다면 분명 국민적인 스타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인터넷이 발달하면서 H 국에서는 20~30년 전과 같은 국민적 우상이 등장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때문에 은아가 지환과 계약할 수만 있다면,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그러나 계속해서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은아와는 달리 지환은 여전히 싸늘하고 담담했다.“여보, 우리 이제 가도 돼?”은아의 눈은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이, 이, 이, 이, 이 분이 윤 대표님의 남편이라고?! 윤 대표님의 남편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쩜 이렇게 훤칠하실 수 있지?’이서는 은아가 지환에게 이토록 적극적인 것은 매니저의 DNA가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이서는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덤덤하게 말했다.“나나야, 돌아간 후에 대본을 잘 연구해. 이건 정말 절호의 기회야. 네가 해외 진출을 노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마.”“네, 알겠습니다 대표님.”나나는 이서에게 연신 감사함을 표한 후, 다시 은아에게 말했다.“은아 언니, 우리 이제 빨리 가요.”은아는 몹시 아쉬웠지만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은아는 이서를 향해 외쳤다.“윤 대표님, 대표님의 남편분은 정말이지 스타가
윤이서는 하지환의 손을 뿌리치려 몇 번의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지환이 이서의 손을 놓아줄 리 없었다. 이서가 포기하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급커브로 인해 이서의 몸이 지환의 품으로 기울었다.“…….”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여보, 이거 내 품에 안긴 거 아니야?”이서는 화가 나서 지환의 가슴을 밀치듯 짚고 일어났다.“임현태 씨, 운전 제대로 하세요.”운전석의 현태가 말했다.“네. 죄송합니다. 아가씨.”하지만 현태의 시선은 지환을 향하고 있었다. 지환은 이서가 창밖을 보는 틈을 타 현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현태 씨 월급을 올려줘야겠구나.’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이서는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어 sns를 보기 시작했다.이서가 sns를 켜자마자 이서정이 올렸다던 게시글이 보였다.[제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으로 선발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줄곧 하이먼 스웨이 선생님의 작품을 동경해왔어요. 이런 걸작에 참여하여 연기할 수 있다니,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댓글은 이미 조롱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하하하하하, 대박이다 진짜. 이서정이 이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바다의 딸의 공식 계정에 서나나가 여주인공으로 선발되었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며? 완전 코미디 프로가 따로 없네.][하하하하하하하, 올해 본 것 중에 제일 웃겨. 정말 압권이야. 근데 이서정도 누구한테 속아서 자기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된 줄 알았던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하게 게시글을 올리는 게 말이 돼?][바다의 딸의 여주인공 캐스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여기저기서 이서정이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에 가장 적합한 배우라고 떠들어댔으니 거만했던 거지. 게다가 본인 영어실력이 8급이라고 허풍까지 떨었다지? 허허, 난 세상 사람 모두가 이서정이 캐스팅 현장에서 보여준 형편없는 영어 대사를 들어 보기를 바라.] 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고, 누군가 이미 업로드한
“여보…….”하지환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운전석의 임현태는 백미러로 보이는 지환의 굽실거리는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윤이서는 지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구태우가 보내온 조사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보고서에 따르면, 며칠 전 느닷없이 나타나 이서가 가진 것을 약탈하려 했던 그 무리가 이하영의 사람들이라 했다.이하영…….민예지의 어머니.이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지난번 드레스 숍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하영과 이서정이었다.민예지가 미쳐버린 것이 비록 이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할지라도, 민 씨 가문의 원망의 화살이 이서에게 향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이상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이서는 하경수를 만나고 돌아온 후, 줄곧 민 씨 가문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의 예상은 빗나갔고, 민 씨 가문은 그림자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서도 이 일을 잊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강도 사건의 배후가 민 씨 가문, 그리고 서정이라니.이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드레스 숍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서정은 이서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하영은 예지의 일로 일찍부터 이서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같은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은 단번에 마음이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서에게 문자를 보내 지환이 해외에 있을 때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고,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기를 기다린 것이 틀림없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서와 지환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자, 재차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들을 약탈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어쩌면, 이서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 술집에서 만난 그 세 사람과 있었던 일 모두 하영과 서정이 꾸민 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핸드폰을 내려놨다.이서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퍼즐을 풀기 위해 줄리가 필요했다.이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마치 누군가가
윤이서는 하지환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환의 필사적인 힘을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지환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그렇지?”이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땀이 날 것만 같았다.“지환 씨!”“여보…….”“임현태 씨, 차 세우세요.”현태가 갓길로 차를 세웠다. 그러자 이서는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내려, 내려서 먹고 와.”이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줄리에게 누가 자신을 속이게 한 것인지 묻고 싶은 심정었다.“여보, 같이 가자.”이서는 눈썹을 찡그린 채 말했다.“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이 사람,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지?’“네가 날 두고 떠나버리면 어떡해.”“…….”지환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에 이서는 할 말을 잃었고, 지환을 따라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 마라탕 가게로 들어섰다.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난 터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가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사장은 친절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뭐 드시고 싶으세요?”평소에 이런 상황이었다면 모든 결정권은 이서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지환이 냉큼 사장의 물음에 답했다.“마라탕 주세요.”“…….”이서는 음식을 주문하는 지환의 얼굴에 왠지 모를 비장함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이서는 문득 예전에 지환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러 갔을 때 이상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허, 지환이 얘는 위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포장마차 음식 같은 건 입도 못 댄다니까요. 별나요, 별나.”이서는 고개를 들어 길 건너 맞은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백화점과 여러 개의 식당이 즐비해 있었다. 이서는 지환에게 말했다.“난 맞은편에 가서 먹고 싶어.”지환은 이서의 시선을 따라 가게 밖을 바라보았고, 이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건너 맞은편의 식당으로 향했다. 한 시간가량의 식사를 마친 지환이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화장실 다녀올게.”이서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지환이 돌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