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 마치 큰 산이 몸을 짓눌러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것만 같았다.이서정의 인생에서 이토록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여태껏 딱 한 사람뿐이었다.그 사람은 바로…… 하 선생님, 서정의 가짜 남편이었다.서정은 자신의 가짜 남편을 떠올리자 그 무엇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앞의 이 남자까지도.“당신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아? 당신이 뭔데 날 막아!”지환은 담담한 눈빛으로 서정의 손을 뿌리쳤다. 지환은 금방이라도 서정을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서정은 마스크를 쓴 지환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아,당신, 윤이서의 남편이지?”서정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정을 노려보던 지환과 이서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해졌다.하지만 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빈정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난 당신을 알아. 당신이 바로 윤이서의 그 형편없는 남편이지.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면목가증함이 틀림없어!”이서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면목가증이라니.지환이 면목가증 한 것이라면 그들은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괴물?“이서정 씨, 말 돌리지 마세요.”이서는 나나를 서정 앞으로 끌고 갔다.“나나는 왜 때린 겁니까?”“맞을 짓을 했으니까! 서나나가 내 여주인공 자리를 꽤 찬다는게 가당키나 해?”이서는 우스웠다.“바다의 딸은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께서 창작하신 거예요. 투자는 민 씨 그룹과 하 씨 그룹이 맡았고요. 그런데 어째서 그게 당신 것이라 말할 수 있죠?”“내가 바로 하 대표님의 아내니까!”서정은 당당하게 두 손을 허리 위에 올렸다.이서는 정말이지 서정이 하은철의 둘째 삼촌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까발리고 싶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하은철의 둘째 삼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둘째 삼촌의 도움을 받은 적 있는 이서이기에 더더욱.이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
두 손을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이서정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이를 본 이서는 음모가 들통난 서정이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지환이 이서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태 진짜 앞에서 위세를 떨쳤던 거야? 이제 정말 끝인가?’서정이 겁에 질려 머리가 새하얘질 무렵, 이천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대표님.”이천은 눈앞의 복잡한 상황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줄리가 잡혔습니다.”지환은 이천을 힐긋 보더니 서정을 내팽개쳤다.“이 여자 데려가. 하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 직접 처리하시겠다고!”이천은 지환이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놓였다.‘정체를 들키지 않으셨구나.’이천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정을 끌고 떠났다. 서정은 차에 내팽개쳐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극장에서의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이서는 서나나를 뒷문까지 부축했다. 뒷문에서는 매니저 여은아가 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나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은아는 벌겋게 부어오른 나나의 뺨을 보고 놀라 물었다.“어머,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서가 나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이서정 짓이에요.”서정의 이름을 듣자, 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또 그년이야. 자기가 은철 도련님의 둘째 숙모라는 것만 믿고 설치잖아. 확 이혼해버렸으면 좋겠어!”“은아 언니, 그만하세요. 전 괜찮아요.”“너도 참.”나나는 괜히 서정의 미움을 사 연예계 활동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은아는 그런 나나가 안타까웠다.“너무 속상해 마. 이미 이서정은 작지만 큰 벌을 받았어.”“그게 무슨 뜻이에요?”나나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참.”은아는 서정을 향한 조롱 섞인 웃음을 쏟아냈다.“이서정은 당연히 자기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섣불리 자신이
순간, 하지환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서정이 지환의 마스크를 망가뜨린 탓에 지환의 얼굴에는 아무런 가림막도 없었기 때문이다.여은아의 뜨거운 눈빛을 본 지환의 마음속에는 요란한 경종이 울려 퍼졌다.은아는 흥분한 채 이서를 지나 지환에게 다가갔다.“혹시…… 연예계에 관심 없으세요?”“…….”은아는 이처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지환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몸의 기질 역시 뛰어났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내놔도 군계일학의 존재일 것이다.스타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은아는 지환과 같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데뷔만 한다면 분명 국민적인 스타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인터넷이 발달하면서 H 국에서는 20~30년 전과 같은 국민적 우상이 등장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때문에 은아가 지환과 계약할 수만 있다면,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그러나 계속해서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은아와는 달리 지환은 여전히 싸늘하고 담담했다.“여보, 우리 이제 가도 돼?”은아의 눈은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이, 이, 이, 이, 이 분이 윤 대표님의 남편이라고?! 윤 대표님의 남편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쩜 이렇게 훤칠하실 수 있지?’이서는 은아가 지환에게 이토록 적극적인 것은 매니저의 DNA가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이서는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덤덤하게 말했다.“나나야, 돌아간 후에 대본을 잘 연구해. 이건 정말 절호의 기회야. 네가 해외 진출을 노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마.”“네, 알겠습니다 대표님.”나나는 이서에게 연신 감사함을 표한 후, 다시 은아에게 말했다.“은아 언니, 우리 이제 빨리 가요.”은아는 몹시 아쉬웠지만 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 은아는 이서를 향해 외쳤다.“윤 대표님, 대표님의 남편분은 정말이지 스타가
윤이서는 하지환의 손을 뿌리치려 몇 번의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지환이 이서의 손을 놓아줄 리 없었다. 이서가 포기하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급커브로 인해 이서의 몸이 지환의 품으로 기울었다.“…….”지환은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여보, 이거 내 품에 안긴 거 아니야?”이서는 화가 나서 지환의 가슴을 밀치듯 짚고 일어났다.“임현태 씨, 운전 제대로 하세요.”운전석의 현태가 말했다.“네. 죄송합니다. 아가씨.”하지만 현태의 시선은 지환을 향하고 있었다. 지환은 이서가 창밖을 보는 틈을 타 현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현태 씨 월급을 올려줘야겠구나.’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이서는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어 sns를 보기 시작했다.이서가 sns를 켜자마자 이서정이 올렸다던 게시글이 보였다.[제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으로 선발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줄곧 하이먼 스웨이 선생님의 작품을 동경해왔어요. 이런 걸작에 참여하여 연기할 수 있다니,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댓글은 이미 조롱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다.[하하하하하, 대박이다 진짜. 이서정이 이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바다의 딸의 공식 계정에 서나나가 여주인공으로 선발되었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며? 완전 코미디 프로가 따로 없네.][하하하하하하하, 올해 본 것 중에 제일 웃겨. 정말 압권이야. 근데 이서정도 누구한테 속아서 자기가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이 된 줄 알았던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하게 게시글을 올리는 게 말이 돼?][바다의 딸의 여주인공 캐스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여기저기서 이서정이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에 가장 적합한 배우라고 떠들어댔으니 거만했던 거지. 게다가 본인 영어실력이 8급이라고 허풍까지 떨었다지? 허허, 난 세상 사람 모두가 이서정이 캐스팅 현장에서 보여준 형편없는 영어 대사를 들어 보기를 바라.] 이서는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고, 누군가 이미 업로드한
“여보…….”하지환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운전석의 임현태는 백미러로 보이는 지환의 굽실거리는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윤이서는 지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구태우가 보내온 조사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보고서에 따르면, 며칠 전 느닷없이 나타나 이서가 가진 것을 약탈하려 했던 그 무리가 이하영의 사람들이라 했다.이하영…….민예지의 어머니.이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지난번 드레스 숍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하영과 이서정이었다.민예지가 미쳐버린 것이 비록 이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할지라도, 민 씨 가문의 원망의 화살이 이서에게 향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이상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이서는 하경수를 만나고 돌아온 후, 줄곧 민 씨 가문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의 예상은 빗나갔고, 민 씨 가문은 그림자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서도 이 일을 잊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강도 사건의 배후가 민 씨 가문, 그리고 서정이라니.이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드레스 숍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서정은 이서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하영은 예지의 일로 일찍부터 이서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같은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은 단번에 마음이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서에게 문자를 보내 지환이 해외에 있을 때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고,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기를 기다린 것이 틀림없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서와 지환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자, 재차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들을 약탈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어쩌면, 이서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 술집에서 만난 그 세 사람과 있었던 일 모두 하영과 서정이 꾸민 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핸드폰을 내려놨다.이서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퍼즐을 풀기 위해 줄리가 필요했다.이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마치 누군가가
윤이서는 하지환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환의 필사적인 힘을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지환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그렇지?”이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땀이 날 것만 같았다.“지환 씨!”“여보…….”“임현태 씨, 차 세우세요.”현태가 갓길로 차를 세웠다. 그러자 이서는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내려, 내려서 먹고 와.”이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줄리에게 누가 자신을 속이게 한 것인지 묻고 싶은 심정었다.“여보, 같이 가자.”이서는 눈썹을 찡그린 채 말했다.“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이 사람,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지?’“네가 날 두고 떠나버리면 어떡해.”“…….”지환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에 이서는 할 말을 잃었고, 지환을 따라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 마라탕 가게로 들어섰다.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난 터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가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사장은 친절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뭐 드시고 싶으세요?”평소에 이런 상황이었다면 모든 결정권은 이서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지환이 냉큼 사장의 물음에 답했다.“마라탕 주세요.”“…….”이서는 음식을 주문하는 지환의 얼굴에 왠지 모를 비장함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이서는 문득 예전에 지환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러 갔을 때 이상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허, 지환이 얘는 위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포장마차 음식 같은 건 입도 못 댄다니까요. 별나요, 별나.”이서는 고개를 들어 길 건너 맞은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백화점과 여러 개의 식당이 즐비해 있었다. 이서는 지환에게 말했다.“난 맞은편에 가서 먹고 싶어.”지환은 이서의 시선을 따라 가게 밖을 바라보았고, 이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건너 맞은편의 식당으로 향했다. 한 시간가량의 식사를 마친 지환이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화장실 다녀올게.”이서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지환이 돌아오기를
찬 공기를 훅 들이킨 지환은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당연히 없지, 확인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이서는 지환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지환의 휴대폰에 손을 뻗었다.고개를 숙인 순간, 이서는 눈앞의 손이 떨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이서는 지환의 휴대폰을 켜고 비밀번호를 물어보려던 순간, 그가 자신의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사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이거 언제 찍은 거죠?”이서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지환에게 물었다.지환이 웃었다.“우리 처음…….”“그만.” 이서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지환을 노려보았다.차 안에는 아직 다른 사람도 있었다.지환은 살짝 미소 지었다.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휴대폰을 지환에게 다시 건넸다.“됐어요, 됐어.”지환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확실해?”이서는 침착한 지환을 보며 휴대폰에 자신의 사진이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사진을 찍었을 때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지환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네.”“그럼 이건 도로 넣을게.”이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대꾸했다.그녀의 뺨이 조용히 붉어졌다.이서도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었다.지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본인도 느낄 수 있었다.게다가 지환의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랫동안 사실을 숨긴 지환을 갑자기 용서하기가 내키지 않았다.‘됐다, 줄리와 만날 때까지 기다리지 뭐.’그렇게 생각하던 이서의 눈은 저도 모르게 차창에 비친 지환의 얼굴로 향했다.살이 빠진 탓인지 지환의 볼은 더 핼쑥해졌고, 턱선은 또렷해졌으며, 코는 더 오뚝해졌다.전체적으로 잘생기고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여은아가 지금 당장 그를 연예계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도 당연했다.이런 지환의 얼굴로 봤을 때, 그가 정말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아마 판을 휩쓸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지환이 연예계에 진출하는 것을 원치 않
이서는 줄리의 턱을 들어 올렸다.“말해봐요, 왜 날 위해 그런 연기를 한 거죠? 그리고 누가 당신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요?”“몰라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서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했다.하지만 턱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그 힘은, 전혀 여자 같지 않았다.“이래도, 모르겠어요?” 줄리를 살벌하게 바라보는 이서의 눈빛은 끔찍할 정도로 섬뜩했다.놀랍게도 줄리는 이서의 몸에서 하지환과 똑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견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봤다.이서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지환의 눈빛은 차가웠고, 그의 시선은 이서를 쫓고 있었다.애초에 줄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마치 그녀를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난 박예솔 친구인데!’게다가 연극 배우라 외모도, 몸매도 모두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런데 지환은 전혀 감흥이 없다니!화가 치밀어 오기도 전에 턱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그녀는 숨을 훅 들이켰다.“말…… 말할게, 말한다고요. 그, 그게…….”모두의 시선이 줄리에게 쏠렸다.태연한 지환도 마찬가지였다.한껏 가라앉은 그의 눈에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어두운 그의 눈가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드러나 있었다.줄리는 몸을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했다.“나, 나는 그 여자 이름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나한테 돈 보내고,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어요. 연기도…… 당신한테 했던 말도 전부 그 여자가 시킨 거예요.”“돈을 보냈다고요?” 이서는 줄리를 놓아주었다.“계좌번호 확인할 수 있어요?”“찾아본 적이 없어서 몰라요.”이천이 문득 나섰다.“사모님, 제가 확인해 볼게요.”이서는 노골적인 불신의 눈빛으로 이천을 돌아보았다.이천은 당황한 듯 코를 슥 만졌다.“이체 기록은 은행에서 제공할 수 있습니다.”그 말은 그가 가짜를 만들고 싶어도 속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던 이서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되물었다.“얼마나 걸리나요?”“빠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