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생각해보면…….’윤이서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안에서 잠든 거야?”이서는 문을 열었고 고개를 들자마자 하지환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슴 근육을 보고 볼이 더욱 붉어졌다.“왜 왔어요, 잠시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요.”“제가 변기에 빠졌다고 생각한 거예요?”이서의 볼이 붉어진 것을 본 지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물었다.“왜 그래? 뜨거운 물이 안 나와?”“아…… 아니요…….”두 사람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지환의 살 냄새가 그녀의 코에 닿자 옛날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숨을 멎을 뻔했다.“다시 돌아가서 앉아 계세요, 바로 나갈게요.”지환은 다시 이서를 바라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 옆으로 돌아갔다.이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물동이를 가져와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지환은 이미 옷을 벗고 탄탄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이서는 그의 눈을 피해 재빨리 그의 상체를 닦아주었다.곧이어 그녀는 쑥스러워 고개를 떨궜다.지환은 머뭇거리는 이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아직 부끄러워?”이서는 얼굴을 다시 붉혔고, 지환이 도발하는 것을 알고 꿋꿋하게 반박했다.“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환 씨가 당황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침대 옆에 손을 얹었다.이서는 말을 그렇게 했으니 이를 악물고 지환의 바지를 벗겨 닦을 수밖에 없었다.지환은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담담했다.이서는 차마 고개를 숙일 수 없어 이를 악 물고 창밖을 바라봤다.더더욱 창피했다.정말 장님의 하체를 닦는다면 그렇게 창피하지 않았을 것이다.얕은 지식으로 모든 걸 다 안다고 떵떵거리는 것은 그녀만큼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이서는 말문이 막혀 서둘러 물동이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녀의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그 위에 계란후라이를 해도 익을 정도였다.얼굴의 열기를 식힌 후에야 이서는 화장실에서 나왔다.지환은 침대에 앉아 있었고 옷은 여전히 벌어져 있었
이서가 양아치들에게 협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우는 걱정되었다.[괜찮은 거예요?]“네, 괜찮아요. 그 사람들은 이미 잡혔어요. 다만 이해가 안되는 점은 이 사람들이 돈을 노리고 일을 벌였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잘 좀 알아봐 주세요. 부탁해요.”구태우는 이해한듯 말했다.[네, 걱정 마세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재차 물었다.[맞다, 요즘 지엽이랑 연락해요?]갑자기 소지엽 얘기를 꺼내자 이서는 잠깐 멍해 있었다.“아니요, 지엽이는 요즘 잘 지내고 있대요?”[요즘 엄청 바쁜가 봐요.]구태우는 웃으며 말했다.[얘기 들어보니 사업에 성공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아오려고 한답니다.]이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황급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 그래요?”[이서 씨.][만약 그 여자가 이서 씨라면 지엽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 건가요?]“저…….”이서는 눈썹을 찡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쉬었다.“저라면 아마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삶을 살라고 말했을 거 같아요.”구태우는 멍하니 이서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곧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녀석이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요.]“네?” 이서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부탁하신 일은 제가 잘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구태우는 별 다른 얘기 없이 전화를 끊었다.이서는 핸드폰을 잠시 들고는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는 것을 느꼈다.사실 ML국에서 지엽이 일부러 지환을 가해자로 몰 때 그녀는 이미 대충 눈치를 챘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줄곧 모르쇠로 일관했다.지엽이 외국에서 돌아온 후엔 단지 그녀를 잊기를 바랄 뿐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 홀가분해졌다.그녀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녀를 본 지환이 손짓했다.“왜요?” 이서는 경계하듯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나 잠 와.”“졸리면 자요, 굳이 나한테 얘기할 필요가…….”“이렇게 옆으로 누워 있으니
이서는 이튿날 깨어나서야 우기광이 여러 통의 전화를 걸어온 걸 알게 되었다.잠이 이렇게 깊숙이 든 자신의 모습에 놀라면서 급히 뺨을 두드려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움직이자, 지환도 움직였다.그는 허벅지로 이서의 몸을 눌렀다.“여보, 좀 더 자…….”“전화 좀 하고 올게요.”“이따가 다시 해.”그는 자신의 얼굴을 이서의 허리에 비볐다.이서는 마을을 가라앉히곤 말했다.“안 돼요, 지금 해야 해요.” 우기광이 이렇게 많은 전화를 한 건 틀림없이 뭔 일이 있는 것이다.지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서의 눈 속에 비친 단호함을 보니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알았어.”이서는 순간 자신이 볼장 다 보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나쁜 남자가 된 것 같았다.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한 생각들은 떨쳐버리고 휴대전화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복도에 나오자 새벽의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일순 잠이 확 깼다.그러고는 우기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는 틈을 타서 몰래 숨을 돌렸다.우기광은 1초도 안 되어 전화를 받았다.[드디어 통화가 되었네요.]우기광의 말투는 초조했다.“무슨 일이에요?”[어제 윤재하가 나를 찾아와 고소를 취하하라고 하더군요.]우기광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하은철 대표를 내세워 우리 회사를 제재하겠다고 합니다. 윤재하에게 그만한 파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윤수정을 언급하더라고요……. 걱정되어서 밤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래서 대표님이랑 대책을 상의해보고자 전화했습니다.]미간을 누르며 잠시 고민하던 이서는 중얼거리며 물었다.“하은철 쪽에는 다른 움직임이 있습니까?”[아직은 없습니다.]“그럼 조금 더 지켜보죠.”[하지만 윤수정과 하은철 대표의 관계라면…….]“윤재하가 윤수정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윤수정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을 내놨어야 했을 텐데요. 윤수정이 무슨 자선가가 아니고, 그녀가 아무 대가 없이 윤재하를 돕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윤재하한테 윤수정에게 미끼가 될만한 것이 과연 있을
교외 별장.윤수정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지영과 윤재하를 보며 어이없는 듯 입을 열었다.“작은아빠, 작은엄마, 내가 안 돕는 게 아니라 두 분도 보셨잖아요. 회사가 파산한 후 은철 오빠는 내가 아예 일에 손 떼라고 했어요. 두문불출하고 방콕만 하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지금 윤수정은 하은철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회사 부도로 무려 100억을 손해봤다. 비록 외부인이 봤을 때는 하은철이 그녀가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운 거로 보이지만 윤수정은 하은철이 이번에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꽤 오랫동안 그녀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똥줄이 타 당장이라도 하은철을 만나 지금의 이 문제를 풀고 싶었다.하지만 하은철은 이미 그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지금 이 상황에서 하은철을 찾아가는 건 화를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성지영의 안색이 바뀌었다.“하지만 수정아, 네가 전에 말했잖아, 우릴 도와줄 거라고……. 곧 재판이 열릴 텐데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 말하면 안 되지…….”윤수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더는 가식을 떨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까놓고 말했다.“설마 내가 정말 도울 줄 알았어요? 윤이서가 잘 되는 꼴 보기 싫어서 훼방 놓으려고 그랬던 거지…….”성지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너……!”“흥, 작은아빠, 작은엄마!” 윤수정은 경멸하듯 그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작은아빠가 윤씨 그룹의 CEO였고, 윤씨 가문의 경제적 명맥을 틀어쥐고 있었죠. 지금은요? 이서가 회사를 잘 운영해 나아가고 있어요. 사람들도 다 잘 따르고 있고요. 이제 다시 CEO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저도 뭐 까놓고 얘기하죠.오늘의 이 지경이 된 건 자업자득 아닌가요? 애초에 횡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우기광 형제가 두 분을 법정에 고소할 수 있겠어요?”“윤수정! 우리를 네 부모처럼 생각하고 모시겠다고 하더니…… 우리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성지영은 너무 열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너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사실에 윤수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즉, 지금의 이서는 윤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그렇지.” 윤수정을 바라보며 윤재하는 말을 이었다.“일단 내가 이 비밀을 발표하면 이서는 더는 윤씨 그룹의 CEO를 맡을 수 없게 돼.”윤수정은 침을 몇 번 삼키고서야 말했다.“조건은요?”“은철이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징역살이 하지 않게 말이야. 그리고, 내가 다시 윤씨 그룹 CEO가 될 수 있게 해!”윤수정은 깊은 숨을 몇 번 들이마신 후에야 냉정해졌다.“원하는 게 좀 많네요?”“이렇게 큰 비밀로 내 것을 되찾는 것뿐인데, 뭐가 많다고 그래? 그리고…….”윤재하는 윤수정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서가 내 딸이 아니라고 발표하고 나면, 하경철 어르신께서 그래도 이서와 은철의 결혼을 허락할까?”윤수정의 마음이 미친듯이 흔들렸다.그녀는 미간을 누르고 잠시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래요, 거래합시다.”“그럼 나는 이사회에 이서가 내 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서류를 준비하러 가겠네.”“서두르지 마세요.”윤수정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피어올랐다.“이서는 회사를 곧잘 운영하고 있잖아요. 먼저 한동안 회사를 이끌어가게 하세요. 그러다가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때 작은아빠가 다시 인수하여 이익을 챙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재하는 듣자마자 얼굴에 음흉한 기색이 역력했다.“수정아,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장사꾼의 기질을 타고 난 거 같구나.”윤수정은 웃으며 말했다.“작은아빠도 만만치 않은 걸요.”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 모두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지영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이번 사태도 무탈하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챘다.윤수정이 나서서 하은철에게 사정한다면 그들은 징역살이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이서는 연속 며칠동안 병원에서 지환을 돌보았다.회사 관련 결제할 사안에 대해서는 모두 심소희에게 병원으로 가져오게 했다.회사 쪽
그녀는 무방비로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지환이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녀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이서는 말을 마치고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계속 자료를 연구했다.이서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옆모습을 보며 지환은 입술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름답고 편안한 시간은 그로 하여금 처음으로 병원이라는 곳이 친근하게 느껴지게 했다.바로 그때 회진하던 의사가 들어왔다.“하 선생님, 사모님.”의사는 자발적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그는 이 부부에 대해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병원 통 털어 이 부부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분명히 금슬이 좋은 부부인데 다른 사람이 묻기만 하면 아내는 늘 부인했다.부부싸움으로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하지만 매번 그렇게 생각하려 치면 말과 행동이 엇나갔다.이서는 지환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는 매번 회진할 때면 이서가 지환을 세심하게 돌보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예컨대 지환이 밤에 잠 때,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방석을 사서 지환에게 깔아주었다.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늘 신선한 과일과 꽃이 준비되어 있었다.그리고 그들 병실의 음식은 늘 가장 맛있었다.이서는 의사의 목소리를 듣고 수중의 자료를 내려놓았고 물었다.“선생님, 등쪽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의사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귀찮았다.의사는 간호사에게 거즈를 벗기고 살펴보며 말했다.“상처가 잘 아물었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의사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뜨려 지환의 얼굴에 떨어졌다.남자의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어려있지만 온몸에서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의사선생님, 제 상처가 잘 아물었다고 확신하십니까?”의사의 이마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말이 헛나오기 시작했다.“응, 아마도요…….”“네? 아마도라니요?” 지환은 눈가의
하지환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넌 항상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지 않잖아. 내 가슴 여기가 돌멩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어. 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유는 다 이거 때문이라 생각해. 아니면 나에게 미소 한번만 지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해?”윤이서는 지환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을 생각하며 꾹 참고 마지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이를 본 지환이 말했다.“여보, 그런 억지 미소는 날 더 불편하게 할 뿐이야.”이서가 말하려 할 때 갑자기 지환이 인상을 지으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이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고, 황급히 말했다.“내……, 내가 웃으면 되잖아요, 웃을게요. 잠깐만 시간을 줘요.”장난스러운 계획이 성공하자 지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서를 바라봤다.하지만 이서는 지환을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대한으로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야 했다.하지만 오랫동안 끄집어내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이서는 포기한 뒤 말했다.“그냥 재밌는 영상이라도 보면 안 될까요?”그런다면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휴대폰을 꺼냈다.예전에는 웃긴 영상만 봐도 까르르 웃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지환은 힘들어 보이는 이서를 바라보며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고, 가슴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지환의 앞에서 전혀 웃을 수 없었다.‘얼마나 실망을 할까?’지환은 이서가 자신과 하은철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만약…….”“방법이 있어요.”이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입술 양쪽을 누른 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이게 제 미소예요.”지환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행복했다.지환의 미소를 본 이서의 기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아졌고 그녀도 함께 웃었다.순간 웃고 있는 이서의 눈과 지환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을 깜짝 놀랐다.한동
윤이서가 떠난 후 병실에는 서나나와 하지환만 남았다.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나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지환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말해서 지환은 정말 잘생겼지만, 나나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상대는 어쩔 수 없이 항상 긴장해야 했다.‘이서 언니는 어떻게 견딘 거야?’그녀는 코를 쓸었다.눈을 뜬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나는 휴대폰을 꺼내 혼자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이건 어제 받은 대본이었다.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작가 하이먼 스웨이의 작품으로, 새 드라마인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바다의 딸’은 한국 소녀가 타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 소녀는 무술을 익혀 아름답고 용감해야 했기에 최근 인기를 끌었던 나나가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그녀에게 대본이 전달된 것이었다.나나는 대본 내용을 읽자마자 반했으며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느껴졌다.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것도 똑같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며 무술을 연마하고, 대도시에서 홀로 힘겹게 싸우는 것도 똑같지만, 타국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고 나나는 그녀의 귀인, 이서를 만났다.이러한 공통점으로 나나는 여주인공으로 뽑히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 작품을 놓고 많은 여배우들이 도전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이제 막 뜨기 시작한 나나가 그런 대선배들과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나는 병문안을 겸해 이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온 뒤 분주하게 요리하기 시작했다.마지막 음식이 완성되고 포장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바로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바로 루나가 보낸 메시지였다.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루나의 메시지에 이서의 심장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