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환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넌 항상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지 않잖아. 내 가슴 여기가 돌멩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어. 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유는 다 이거 때문이라 생각해. 아니면 나에게 미소 한번만 지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해?”윤이서는 지환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을 생각하며 꾹 참고 마지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이를 본 지환이 말했다.“여보, 그런 억지 미소는 날 더 불편하게 할 뿐이야.”이서가 말하려 할 때 갑자기 지환이 인상을 지으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이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고, 황급히 말했다.“내……, 내가 웃으면 되잖아요, 웃을게요. 잠깐만 시간을 줘요.”장난스러운 계획이 성공하자 지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서를 바라봤다.하지만 이서는 지환을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대한으로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야 했다.하지만 오랫동안 끄집어내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이서는 포기한 뒤 말했다.“그냥 재밌는 영상이라도 보면 안 될까요?”그런다면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휴대폰을 꺼냈다.예전에는 웃긴 영상만 봐도 까르르 웃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지환은 힘들어 보이는 이서를 바라보며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고, 가슴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지환의 앞에서 전혀 웃을 수 없었다.‘얼마나 실망을 할까?’지환은 이서가 자신과 하은철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만약…….”“방법이 있어요.”이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입술 양쪽을 누른 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이게 제 미소예요.”지환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행복했다.지환의 미소를 본 이서의 기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아졌고 그녀도 함께 웃었다.순간 웃고 있는 이서의 눈과 지환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을 깜짝 놀랐다.한동
윤이서가 떠난 후 병실에는 서나나와 하지환만 남았다.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나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지환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말해서 지환은 정말 잘생겼지만, 나나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상대는 어쩔 수 없이 항상 긴장해야 했다.‘이서 언니는 어떻게 견딘 거야?’그녀는 코를 쓸었다.눈을 뜬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나는 휴대폰을 꺼내 혼자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이건 어제 받은 대본이었다.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작가 하이먼 스웨이의 작품으로, 새 드라마인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바다의 딸’은 한국 소녀가 타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 소녀는 무술을 익혀 아름답고 용감해야 했기에 최근 인기를 끌었던 나나가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그녀에게 대본이 전달된 것이었다.나나는 대본 내용을 읽자마자 반했으며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느껴졌다.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것도 똑같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며 무술을 연마하고, 대도시에서 홀로 힘겹게 싸우는 것도 똑같지만, 타국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고 나나는 그녀의 귀인, 이서를 만났다.이러한 공통점으로 나나는 여주인공으로 뽑히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 작품을 놓고 많은 여배우들이 도전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이제 막 뜨기 시작한 나나가 그런 대선배들과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나는 병문안을 겸해 이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온 뒤 분주하게 요리하기 시작했다.마지막 음식이 완성되고 포장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바로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바로 루나가 보낸 메시지였다.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루나의 메시지에 이서의 심장
서나나가 화면을 쳐다보니 하지환의 배경화면은 윤이서였다.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숨길 수 없다.사랑하는 것은 작은 행동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형부, 왜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세요? 급한 일 있어요?”지환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거의 한시간이 지났어.”“네?”“원래 지금쯤이면 돌아오거든.”나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문을 쳐다보고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형부, 너무 집착하시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나간지 아직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잖아요.”지환은 차가운 눈으로 나나를 바라봤다.나나는 급히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크흠, 오래 걸리네요. 얼른 전화해 볼게요.”지환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나는 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 모습을 보고 지환의 기분이 좋은 걸 알 수 있었다.‘참 츤데레야, 분명 언니가 뭘 하는지 알고 싶은 것 같은데 나한테 전화하라고 빙빙 돌려 말한 거잖아.’나나는 휴대폰을 들고 창가에 가서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나나는 의아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때 나나의 뒤에서 지환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나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전화를 안 받아요.”지환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곧바로 끊어졌고, 다시 전화를 해보니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나나가 그를 잡았다.“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지환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으며 그의 표정은 정말 험악했다.나나는 분주하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꼈고 그를 따라 병원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환이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끌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운전자는 겁에 질려 있었고 나나는 재빨리 신용카드를 운전자의 손에 밀어 넣었다.“죄송해요, 카드에 몇 천만원 정도 들어 있어요, 비밀번호는 6688입니다. 잠시 차 좀 빌릴게요. 나중에
윤이서의 층에 도착했을 때 서나나는 그 소리가 하지환 때문에 난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실제로…… 문을 직접 부수고 맨손으로 열었다.나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이미 침실로 걸어가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손을 들어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여보!”지환의 말투에 담긴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나나가 봤던 지환과 전혀 달랐다.이때 방 안에서 이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 당신 얼굴은 보기도 싫어!”나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는 멀쩡했는데 어떻게…….’그녀는 지환을 바라봤다.지환은 이마를 문에 대고 인내심 있게 이서와 대화를 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해주면 안 돼?”방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지환이 다시 문을 부수려 할 때, 나나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형부……, 형부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가면 언니가 얘기해 줄 것 같아요? 이러면 일이 더 꼬일 뿐이에요.”나나와 이서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이서가 지환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쳐들어가면 이서는 더 반감을 가질 것이었다.지환은 미간을 짚으며 나나를 봤다.붉게 충혈된 눈은 나나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형부, 언니를 걱정하는 건 알지만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형부도 이서 언니와의 갈등을 빨리 해결하고 싶잖아요.”나나의 마지막 말에 이성을 잃었던 지환은 점차 진정됐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그럼 방법이 있어?”“먼저 병원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언니 옆에 있으면서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지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나나는 지환과 번호를 교환한 뒤 엘리베이터를 태워 보냈다.부엌을 지나갈 때 나나는 식탁 옆 바닥이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고 침실 문을 올려다봤다.나나는 어질러진 것을
“그럼 좀 드실래요?”서나나는 국수를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그러나 윤이서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드시면 어떡해요.”나나가 달랬다.“이서 언니, 몸은 혁명의 밑천이에요. 하늘이 무너져도 음식을 좀 드셔야죠.”이서는 머리를 한쪽으로 하고 나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선은 초점이 없었고 입술은 움직였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나나는 걱정하며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이서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에게 알려줄 수 있어요?”이서는 입꼬리를 잡아당겼지만 웃지 않았다. 나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서의 손을 꼭 잡았다.“괜찮아요, 이서 언니.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드시고 싶지 않으면 안 드셔도 돼요. 제가 여기서 함께 있을 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저한테 말해주세요. 알겠죠?”이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나는 안심하고 일어나 침대 옆으로 가서 커튼을 쳤다.조금 어두운 공간은 이서를 조금 더 안전하게 해주었다. 이서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자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나나는 소리 없이 이서를 바라보며 하지환이 올 때 목숨을 걸고 운전한 것을 떠올리며 문자를 보냈다.[이서 언니가 문을 열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문자를 보내고 난 뒤 나나는 잠시 생각한 후 또 문자를 보냈다.[비록 언니와 형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었는지 모르지만, 이서 언니는 일찍이 저에게 형부가 밖에 다른 여자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제 생각에 이서 언니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요.][비록 제가 언니와 형부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형부가 정말 이서 언니를 좋아한 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서 언니를 좋아한다면 왜 다른 여자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건가요?][죄송합니다. 외부인으로서 저는 언니와 형부 사이의 일에 끼어들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서 언니가 저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저는 언니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나
오후가 다가오자 윤이서의 안색은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맛이 없고 밥도 먹지 않아서 서나나는 이서가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질까 봐 걱정했다.하지만 나나는 이서가 심소희의 전화를 받을 수 있고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조언을 하는 것을 보고 이서는 때려잡아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업무 중의 이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열정적이었다. 전혀 사랑의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핸드폰을 내려놓자 이서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힘없이 침대에 엎드렸다.나나는 상황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자 대본을 꺼내 이서에게 보여 주었다. 역시나 대본을 받은 이서는 바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서는 대본에 집중하여 대본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나나는 이서가 이렇게 몰입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는 살금살금 거실로 가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상님이시여, 드디어 답장을 줬구나.]여은아가 곧 전화를 걸었다.[지금 어디에 있어? 빨리 회사로 돌아와.]“무슨 일 있어요?”[회사는 너에게 새로운 대본을 하나 계약해 줄 예정이야. 현재 웹드라마 천해의 열기를 틈타 너에게 같은 유형의 드라마를 제작할 거야.]나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은아 언니,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같은 장르의 소재는 두 번 다시 만지지 않겠다고요. 이러면 제 필모그래피를 제한하게 될 거예요.”[나나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너는 극작가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잖아. 근데 내가 말하는데 너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왜요?”이렇게 부정당하자 나나는 달갑지 않았다.“저는 이전에 연극배우였어요. 그러니 연극 무대는 여전히 견딜 수 있어요.”[나나야, 나는 너의 매니저야. 네가 이전에 연극배우였다는 것을 내가 모르겠어? 그런데 나는 방금 소식을 받았어.]은아는 꽤 어쩔 수 없어하며 말했다.[이서정이 이 배역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그 사람이…… 어떻게 이 배역을 마
“이거 정말 그분이 쓰신 거야?”이서가 말했다.“이건 그분의 스타일 같지 않은데.”하이먼 스웨이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와 신랄한 비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따뜻한 정감이 넘쳐흐르고 있어 전혀 그분이 쓰신 것 같지 않았다.“네, 게다가 그분은 H 국에 오셔서 여주인공을 뽑으려 합니다. 그런데…….”나나는 애써 숨기려 했지만 이서는 나나의 눈 속에서 깊은 상실감을 보았다.“아마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분이 오시면 결정될 것 같아요.”이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벼웠다. 그리고 지금 막 일을 마쳤기 때문에 정력을 좀 분산시켰고 마음속에 타오르는 분노도 그렇게 왕성하지 않았다.이서는 자신에게 모든 주의를 나나에게 기울이도록 강요했다.“왜?”“왜냐면…… 이미 내정됐기 때문이에요.”나나는 이서를 보고 일어나 물었다. “이서 언니, 배고프시죠? 국수 끓여 드릴게요.”이서는 나나를 눌렀다.“서두르지 마. 이 배역은 누구한테 주었는데?”“이서정이요.”이서의 얼굴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하얗게 질렸다. 나나가 왜 그러냐고 묻자 이서는 직접 나나를 밀치고 욕실로 돌진했다.욕실에 들어가자 이서는 더 이상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와- 하고 토해냈다. 이서는 거의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아서 아무것도 토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은 계속 울렁거렸다.한참을 토하고서야 그 메스꺼운 느낌이 마침내 가라앉았다.이서는 변기를 끌어안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나나를 올려다보며 겨우 힘을 내어 달래주었다.“난 괜찮아.”나나는 걱정되어 물었다.“이서 언니, 제가 보기에는…….”이서는 변기를 받치고 일어나려다가 발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나나는 눈치가 빨라서 이서를 부축했다.“이서 언니.”이서는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고파.”나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이서를 부축하여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았다.“제가 국수를 끓여 드릴게요.”이서는 고개를 살
“이서 언니.”서나나는 재빨리 국수를 들고 들어왔다.“비교적 담백하게 삶아서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맛있어.”이서는 몇 입 먹고 칭찬했다.“그래요?”나나는 기뻐서 미간을 구부렸다.“좋아하시면 냄비에 더 있어요.”이서는 나나를 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나가 물었다.“왜요, 이서 언니?”“내가 전에 약속했던 거 기억나?”나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야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여자 스타로 만드시겠다는 그 일 말입니까?”“응.”이서는 몸을 곧게 펴고 나나를 보며 말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극작가야. 이번에 그분께서 H 국에 오셔서 바다의 딸을 위해 여주인공을 뽑는 것은 매우 좋은 계기야.”“하지만…….”이서는 손을 흔들었다“난 네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이서정은 전혀 이 배역에 어울리지 않고 연극을 연기할 능력이 없어.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께서 이 대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게 아닌한, 그분께서는 이서정을 바다의 딸 여주인공으로 선택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을 거야.”“그리고 내가 방금 알아봤는데, 너는 연극을 한 적이 있고 인생 경력도 극본 속의 여주인공과 매우 비슷해. 자신의 마음의 역정과 같은 배역을 맡으면 더욱 뜻대로 될 거야.”“그런데 너의 유일한 문제는 영어야. 영어 실력은 어때?”“겨우 교류할 정도예요…….”나나는 자신도 모르게 이서의 생각을 따라갔다.“그건 안 돼.”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서는 엄숙하고 진지해졌다.“그동안 영어를 잘 연습해야 해.”말하면서 이서는 웹 브라우저를 누르고 검색하기 시작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께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H 국에 도착할 예정이시고 아마도 캐스팅은 화요일에 시작될 것 같아. 즉, 너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여. 너는 일주일 안에 대본 내용을 익혀야 하고 적어도 영어로 대본을 유창하게 외울 수 있어야 해. 괜찮지?”나나는 이서의 말을 듣고 온몸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괜찮아요!”“그래, 그럼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