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이튿날 깨어나서야 우기광이 여러 통의 전화를 걸어온 걸 알게 되었다.잠이 이렇게 깊숙이 든 자신의 모습에 놀라면서 급히 뺨을 두드려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움직이자, 지환도 움직였다.그는 허벅지로 이서의 몸을 눌렀다.“여보, 좀 더 자…….”“전화 좀 하고 올게요.”“이따가 다시 해.”그는 자신의 얼굴을 이서의 허리에 비볐다.이서는 마을을 가라앉히곤 말했다.“안 돼요, 지금 해야 해요.” 우기광이 이렇게 많은 전화를 한 건 틀림없이 뭔 일이 있는 것이다.지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서의 눈 속에 비친 단호함을 보니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알았어.”이서는 순간 자신이 볼장 다 보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나쁜 남자가 된 것 같았다.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한 생각들은 떨쳐버리고 휴대전화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복도에 나오자 새벽의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일순 잠이 확 깼다.그러고는 우기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는 틈을 타서 몰래 숨을 돌렸다.우기광은 1초도 안 되어 전화를 받았다.[드디어 통화가 되었네요.]우기광의 말투는 초조했다.“무슨 일이에요?”[어제 윤재하가 나를 찾아와 고소를 취하하라고 하더군요.]우기광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하은철 대표를 내세워 우리 회사를 제재하겠다고 합니다. 윤재하에게 그만한 파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윤수정을 언급하더라고요……. 걱정되어서 밤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래서 대표님이랑 대책을 상의해보고자 전화했습니다.]미간을 누르며 잠시 고민하던 이서는 중얼거리며 물었다.“하은철 쪽에는 다른 움직임이 있습니까?”[아직은 없습니다.]“그럼 조금 더 지켜보죠.”[하지만 윤수정과 하은철 대표의 관계라면…….]“윤재하가 윤수정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윤수정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을 내놨어야 했을 텐데요. 윤수정이 무슨 자선가가 아니고, 그녀가 아무 대가 없이 윤재하를 돕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윤재하한테 윤수정에게 미끼가 될만한 것이 과연 있을
교외 별장.윤수정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지영과 윤재하를 보며 어이없는 듯 입을 열었다.“작은아빠, 작은엄마, 내가 안 돕는 게 아니라 두 분도 보셨잖아요. 회사가 파산한 후 은철 오빠는 내가 아예 일에 손 떼라고 했어요. 두문불출하고 방콕만 하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지금 윤수정은 하은철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회사 부도로 무려 100억을 손해봤다. 비록 외부인이 봤을 때는 하은철이 그녀가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운 거로 보이지만 윤수정은 하은철이 이번에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꽤 오랫동안 그녀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마음속으로는 똥줄이 타 당장이라도 하은철을 만나 지금의 이 문제를 풀고 싶었다.하지만 하은철은 이미 그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지금 이 상황에서 하은철을 찾아가는 건 화를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성지영의 안색이 바뀌었다.“하지만 수정아, 네가 전에 말했잖아, 우릴 도와줄 거라고……. 곧 재판이 열릴 텐데 이제 와서 한 입으로 두 말하면 안 되지…….”윤수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더는 가식을 떨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까놓고 말했다.“설마 내가 정말 도울 줄 알았어요? 윤이서가 잘 되는 꼴 보기 싫어서 훼방 놓으려고 그랬던 거지…….”성지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너……!”“흥, 작은아빠, 작은엄마!” 윤수정은 경멸하듯 그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예전에는 작은아빠가 윤씨 그룹의 CEO였고, 윤씨 가문의 경제적 명맥을 틀어쥐고 있었죠. 지금은요? 이서가 회사를 잘 운영해 나아가고 있어요. 사람들도 다 잘 따르고 있고요. 이제 다시 CEO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저도 뭐 까놓고 얘기하죠.오늘의 이 지경이 된 건 자업자득 아닌가요? 애초에 횡령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우기광 형제가 두 분을 법정에 고소할 수 있겠어요?”“윤수정! 우리를 네 부모처럼 생각하고 모시겠다고 하더니…… 우리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성지영은 너무 열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너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사실에 윤수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즉, 지금의 이서는 윤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그렇지.” 윤수정을 바라보며 윤재하는 말을 이었다.“일단 내가 이 비밀을 발표하면 이서는 더는 윤씨 그룹의 CEO를 맡을 수 없게 돼.”윤수정은 침을 몇 번 삼키고서야 말했다.“조건은요?”“은철이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징역살이 하지 않게 말이야. 그리고, 내가 다시 윤씨 그룹 CEO가 될 수 있게 해!”윤수정은 깊은 숨을 몇 번 들이마신 후에야 냉정해졌다.“원하는 게 좀 많네요?”“이렇게 큰 비밀로 내 것을 되찾는 것뿐인데, 뭐가 많다고 그래? 그리고…….”윤재하는 윤수정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서가 내 딸이 아니라고 발표하고 나면, 하경철 어르신께서 그래도 이서와 은철의 결혼을 허락할까?”윤수정의 마음이 미친듯이 흔들렸다.그녀는 미간을 누르고 잠시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래요, 거래합시다.”“그럼 나는 이사회에 이서가 내 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서류를 준비하러 가겠네.”“서두르지 마세요.”윤수정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피어올랐다.“이서는 회사를 곧잘 운영하고 있잖아요. 먼저 한동안 회사를 이끌어가게 하세요. 그러다가 이제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때 작은아빠가 다시 인수하여 이익을 챙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재하는 듣자마자 얼굴에 음흉한 기색이 역력했다.“수정아,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장사꾼의 기질을 타고 난 거 같구나.”윤수정은 웃으며 말했다.“작은아빠도 만만치 않은 걸요.”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 모두 고개를 들어 하하 웃었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지영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이번 사태도 무탈하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챘다.윤수정이 나서서 하은철에게 사정한다면 그들은 징역살이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이서는 연속 며칠동안 병원에서 지환을 돌보았다.회사 관련 결제할 사안에 대해서는 모두 심소희에게 병원으로 가져오게 했다.회사 쪽
그녀는 무방비로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지환이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녀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이서는 말을 마치고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계속 자료를 연구했다.이서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옆모습을 보며 지환은 입술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름답고 편안한 시간은 그로 하여금 처음으로 병원이라는 곳이 친근하게 느껴지게 했다.바로 그때 회진하던 의사가 들어왔다.“하 선생님, 사모님.”의사는 자발적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그는 이 부부에 대해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병원 통 털어 이 부부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분명히 금슬이 좋은 부부인데 다른 사람이 묻기만 하면 아내는 늘 부인했다.부부싸움으로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하지만 매번 그렇게 생각하려 치면 말과 행동이 엇나갔다.이서는 지환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는 매번 회진할 때면 이서가 지환을 세심하게 돌보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예컨대 지환이 밤에 잠 때,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방석을 사서 지환에게 깔아주었다.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늘 신선한 과일과 꽃이 준비되어 있었다.그리고 그들 병실의 음식은 늘 가장 맛있었다.이서는 의사의 목소리를 듣고 수중의 자료를 내려놓았고 물었다.“선생님, 등쪽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의사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귀찮았다.의사는 간호사에게 거즈를 벗기고 살펴보며 말했다.“상처가 잘 아물었네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의사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뜨려 지환의 얼굴에 떨어졌다.남자의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어려있지만 온몸에서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의사선생님, 제 상처가 잘 아물었다고 확신하십니까?”의사의 이마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말이 헛나오기 시작했다.“응, 아마도요…….”“네? 아마도라니요?” 지환은 눈가의
하지환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넌 항상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지 않잖아. 내 가슴 여기가 돌멩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어. 내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유는 다 이거 때문이라 생각해. 아니면 나에게 미소 한번만 지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해?”윤이서는 지환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의사의 말을 생각하며 꾹 참고 마지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이를 본 지환이 말했다.“여보, 그런 억지 미소는 날 더 불편하게 할 뿐이야.”이서가 말하려 할 때 갑자기 지환이 인상을 지으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이서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고, 황급히 말했다.“내……, 내가 웃으면 되잖아요, 웃을게요. 잠깐만 시간을 줘요.”장난스러운 계획이 성공하자 지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이서를 바라봤다.하지만 이서는 지환을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대한으로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야 했다.하지만 오랫동안 끄집어내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이서는 포기한 뒤 말했다.“그냥 재밌는 영상이라도 보면 안 될까요?”그런다면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휴대폰을 꺼냈다.예전에는 웃긴 영상만 봐도 까르르 웃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지환은 힘들어 보이는 이서를 바라보며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고, 가슴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지환의 앞에서 전혀 웃을 수 없었다.‘얼마나 실망을 할까?’지환은 이서가 자신과 하은철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만약…….”“방법이 있어요.”이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입술 양쪽을 누른 채 살짝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봐요, 이게 제 미소예요.”지환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행복했다.지환의 미소를 본 이서의 기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아졌고 그녀도 함께 웃었다.순간 웃고 있는 이서의 눈과 지환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을 깜짝 놀랐다.한동
윤이서가 떠난 후 병실에는 서나나와 하지환만 남았다.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나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지환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말해서 지환은 정말 잘생겼지만, 나나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상대는 어쩔 수 없이 항상 긴장해야 했다.‘이서 언니는 어떻게 견딘 거야?’그녀는 코를 쓸었다.눈을 뜬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나는 휴대폰을 꺼내 혼자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이건 어제 받은 대본이었다.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작가 하이먼 스웨이의 작품으로, 새 드라마인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을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바다의 딸’은 한국 소녀가 타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 소녀는 무술을 익혀 아름답고 용감해야 했기에 최근 인기를 끌었던 나나가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그녀에게 대본이 전달된 것이었다.나나는 대본 내용을 읽자마자 반했으며 ‘바다의 딸’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느껴졌다.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것도 똑같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며 무술을 연마하고, 대도시에서 홀로 힘겹게 싸우는 것도 똑같지만, 타국의 여주인공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고 나나는 그녀의 귀인, 이서를 만났다.이러한 공통점으로 나나는 여주인공으로 뽑히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 작품을 놓고 많은 여배우들이 도전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이제 막 뜨기 시작한 나나가 그런 대선배들과 경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나는 병문안을 겸해 이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온 뒤 분주하게 요리하기 시작했다.마지막 음식이 완성되고 포장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바로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바로 루나가 보낸 메시지였다.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루나의 메시지에 이서의 심장
서나나가 화면을 쳐다보니 하지환의 배경화면은 윤이서였다.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숨길 수 없다.사랑하는 것은 작은 행동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형부, 왜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세요? 급한 일 있어요?”지환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거의 한시간이 지났어.”“네?”“원래 지금쯤이면 돌아오거든.”나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문을 쳐다보고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형부, 너무 집착하시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나간지 아직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잖아요.”지환은 차가운 눈으로 나나를 바라봤다.나나는 급히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크흠, 오래 걸리네요. 얼른 전화해 볼게요.”지환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나는 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 모습을 보고 지환의 기분이 좋은 걸 알 수 있었다.‘참 츤데레야, 분명 언니가 뭘 하는지 알고 싶은 것 같은데 나한테 전화하라고 빙빙 돌려 말한 거잖아.’나나는 휴대폰을 들고 창가에 가서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나나는 의아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이때 나나의 뒤에서 지환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나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전화를 안 받아요.”지환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곧바로 끊어졌고, 다시 전화를 해보니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나나가 그를 잡았다.“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지환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으며 그의 표정은 정말 험악했다.나나는 분주하게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꼈고 그를 따라 병원 아래층으로 내려가 지환이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끌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봤다.운전자는 겁에 질려 있었고 나나는 재빨리 신용카드를 운전자의 손에 밀어 넣었다.“죄송해요, 카드에 몇 천만원 정도 들어 있어요, 비밀번호는 6688입니다. 잠시 차 좀 빌릴게요. 나중에
윤이서의 층에 도착했을 때 서나나는 그 소리가 하지환 때문에 난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실제로…… 문을 직접 부수고 맨손으로 열었다.나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이미 침실로 걸어가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손을 들어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여보!”지환의 말투에 담긴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나나가 봤던 지환과 전혀 달랐다.이때 방 안에서 이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 당신 얼굴은 보기도 싫어!”나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는 멀쩡했는데 어떻게…….’그녀는 지환을 바라봤다.지환은 이마를 문에 대고 인내심 있게 이서와 대화를 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해주면 안 돼?”방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지환이 다시 문을 부수려 할 때, 나나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형부……, 형부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가면 언니가 얘기해 줄 것 같아요? 이러면 일이 더 꼬일 뿐이에요.”나나와 이서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이서가 지환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쳐들어가면 이서는 더 반감을 가질 것이었다.지환은 미간을 짚으며 나나를 봤다.붉게 충혈된 눈은 나나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형부, 언니를 걱정하는 건 알지만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형부도 이서 언니와의 갈등을 빨리 해결하고 싶잖아요.”나나의 마지막 말에 이성을 잃었던 지환은 점차 진정됐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그럼 방법이 있어?”“먼저 병원으로 돌아가세요. 제가 언니 옆에 있으면서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지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나나는 지환과 번호를 교환한 뒤 엘리베이터를 태워 보냈다.부엌을 지나갈 때 나나는 식탁 옆 바닥이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고 침실 문을 올려다봤다.나나는 어질러진 것을
심유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고작 한 세트가 다예요?”“그래도 이해는 해드릴게요. 이게 능력 범위 내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제품이었을 테니까요. 800만원, 900만원을 저축하려면 몇 개월은 걸려야 하잖아요, 그렇죠?” 이지숙이 곧장 입을 열었다.“유인아, 그게 무슨 말이니? 선물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그래.”심근영도 현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네 숙모를 위해 스킨케어 제품을 골랐다는 건, 충분히 마음을 썼다는 증거란다.”심유인이 입을 삐죽거리자,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리 값비싼 선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지만, 조금 쑥스러워서 다른 선물도 준비해 왔습니다.”심유인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 선물도 화장품은 아니겠죠? 또 몇백만원짜리인 건가요?”“유인아!”이지숙은 다소 불쾌해졌지만, 성격이 좋은 현태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닙니다, 이번 선물은 스킨케어 제품보다 조금 비싼 거거든요.”현태는 이 말을 끝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심유인이 목을 길게 빼며 재촉했다.“숙모, 어서 열어보세요.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대체 뭐예요?” 이지숙은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꽤 가벼워. 아무래도 큰 선물은 아닌 것 같아.’“밥부터 먹고 열어보자꾸나.” “지금 열어보시죠. 심유인 씨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신 모양인데요.” 현태가 이지숙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심유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방금 그 스킨 케어 제품보다 조금 더 비싼 선물을 꺼내면, 내가 감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정말 웃겨.’‘저것도 고작 몇백 만원짜리 선물일 뿐일 거야.” “숙모, 선물한 사람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어서 열어보세요!”이지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스킨케어 제품이 아니라...’‘작은 증서?’상자를 또 한 번 확인한 이지숙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건.
“그래,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봐주마.”심근영이 대답했다.“같이 식사하자꾸나, 그럼 된 거지?” 심근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감사합니다, 삼촌, 역시 제게 정말 잘해주시네요.”소희는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연기가 계속될 모양이군.’ “삼촌, 민찬 씨가 선물도 사 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심유인은 심근영을 끌고 선물 더미 앞에 다다랐고, 이지숙에게 보여줬던 선물 세 개를 집어 들었다.심유인은 현태가 가져온 선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근영은 심유인의 말을 듣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마음은 고맙지만, 우리는 네 친부모가 아니잖니. 네 남자 친구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받고, 같은 값어치의 답례품을 사주도록 하렴.” 심유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눈꼬리를 치켜들었다.사실 그 선물들을 산 사람은 심유인이었는데, 그녀는 수중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 모두 신용카드와 할부로 결제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씨 가문의 회사에 가서 돈을 받으라니!심유인은 이 기회에 카드 빚을 메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챙길 수도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민찬에게 답례 선물을 산 것이라고 하면 그만일 테니 말이다.생각할수록 심유인은 점점 더 흥분했고, 심근영이 이미 허리를 숙여 선물 상자를 하나 집어 든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 안에는 뭐가 들었지?”심유인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말했다.“삼촌!” 심근영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왜?” “그게...”심유인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 알면 안 돼.’ ‘적어도 심소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소희의 남자 친구분도 선물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아직 그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것부터 열어 보는 게 어떨까요?” 심근영은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