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온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혼란과 씁쓸함이 무수한 바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댔다.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붉은 입술을 펴고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태 씨, 사람은 다양한 모습이 있어요. 어떻게 제 남편에 대해 그렇게 확신해요?”임현태의 눈빛이 단호했다.“네,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위장술도 뛰어나고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기침입니다.”“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 기억해요. 남편분이 정말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평소에 지환이 이서한테 당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임현태는 이서와 지환이 잘 되기를 바랐다. 지환의 곁을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닌 그는 누군가한테 고개를 숙인 지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그렇게 콧대 높은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는 건, 이서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임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이서는 망연자실했다. “설령 그가 나를 속였다고 하더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계속 믿어야 할까요?”임현태는 침묵했다.임현태가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아가씨, 남편분께서 대체 뭘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 속인 거라면, 아마도 아가씨를 위해서일 거예요. 절 믿으세요.”지환이 이서에게 진짜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단지 그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게 위해서.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임현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아가씨, 집으로 모시겠습니다.”임현태는 떠보듯 물었다.임현태를 보는 이서의 마음은 복잡했다. 한참 뒤, 그녀는 다시 임현태를 따라 차에 올랐다.사실 이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그러나 별장 입구에 도착하여 별장에서 쏟아지는 아늑한 불빛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답을 알게
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말일 경우를 제외하고…….이 결론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그러나 그 신비의 인물이 왜 굳이 그런 사기극을 벌이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환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작은 회사 하나 있는 것 제외하고…….’‘게다가 그 회사도 아버지 거다. 지환이 대신 경영 관리만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지환이 작은 회사라고 한 것도 그녀는 믿었다. 대형 회사라면, 그가 굳이 직장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직접 가족 회사를 물려받으면 되는데…….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지환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이었다.‘이런 평범한 사람은 H 국에서 널리고 널렸다. 설령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왜 굳이 지환을 겨냥할까?’이서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왔어?” 지환의 웃는 목소리로 주방에서 흘러나왔다.다음 순간, 양복을 입은 지환이 부엌에서 나오는 걸 본 이서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지환의 정장 입은 모습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지환은 모든 양복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하였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이서가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았다.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밥 냄새였다. 왠지 더 구수한 것 같았다.“뭐해요?”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해서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비워내고자 했다.지환의 입술 라인이 위로 올라갔다.“잡채밥.” “잡채밥?”지환이 다가와 이서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이서가 눈치채고, 손을 뻗어 지환을 밀어내려고 할 때, 그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응, 잡채밥 좋아한다며?” 이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화가 나는 건, 지환의 손길이 조금도 싫지 않다는 것이다.그가 이중 결혼했을 수도 있음에도.놀란 건, 지난 번에 엉겁결에 잡채를 좋아한다는 걸 얘기했는데 그걸 지환이 기억하고 있었다.잡채는
그러나, 머릿속에는 그 여자가 보낸 마지막 사진이 갑자기 떠올랐다.유럽 궁정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지환의 사진…….소녀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마치 바늘처럼 이서의 심장을 콕콕 찔러 댔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서는 온 힘을 다해 지환을 밀어내려 했다. 이서의 저항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곧 평소대로 회복되었다.“자기야, 왜 그래?” 이서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식탁을 부축하고 있었다.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일단 진정하기로 했다.‘먼저 증거부터 찾아야 해.’‘절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돼!’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고서야 이서는 겨우 핑곗거리를 찾아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피곤해서요. 먼저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지환이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그래, 올라가 쉬어.”이 말을 들은, 이서는 사면받은 사람마냥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닫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방금 하마터면 지환에게 넘어갈 뻔했다. 이서의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서 다시 루나의 대화창을 켰다.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더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현재 명품백은 아직 M 국에 도착 전이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제일 하기 싫어하는 일을 했다.그녀는 백화점 점원에게 전화해 운송장 번호를 받아 루나에게 보냈다.[오늘 쇼핑하러 나갔다가, 가방 하나 봤는데,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하나 샀어. 국제 우편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이서는 무표정하게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녀는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는 일을 극히 싫어했다.하지만 지금, 지환이 중혼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그녀는 자세를 낮추었다.하루빨리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메시지가 발송한 지 1분도 채 안 되어 루나의 문자를 받았다.[고마워. 친구 사이에 뭐 이렇게까지……, 암튼 고마워 살 쓸게.]말을 마치고, 그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온 이서는 아직 자고 있는 지환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래층에 도착한 그녀는 혼자 운전하여 떠났다.다만 그녀가 차고에 들어가 차를 운전해서 나가는 순간, 지환이 2층 커튼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이서의 차가 거리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피곤한 듯 눈썹을 꼬집고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갔다.깊은 무력감은, 그의 마음은 묵직한 돌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뭐를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핸드폰을 들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요 며칠 지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고 있는 이천은 늘 대기 상태에 있었다.핸드폰 벨 소리를 듣자마자 깼다.“뭐 알아낸 거 있어?” 지환의 목소리가 음침하고 무서웠다.이천은 하품 소리도 감히 내지 못하고 바로 답했다.[회장님, ML 국 호텔에 CCTV가 없어, 지금 투숙객을 통해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수상한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며칠째지?”이천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3일 더 줄게. 그래도 아무것도 못 찾아낸다면, 다 꺼져!”[3…….]이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핸드폰을 들고 있는 이천은 기가 막혔다.수사를 담당하는 다른 직원들도 잇달아 이천을 돌아보았다.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직원들을 보고 있지나, 이천도 참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환의 명령이라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회장님이 우리에게 3일 안에 결과를 내라고 하셨어. 안 그러면 다 끝장이야.”방 안에 울부짖는 소리가 퍼졌다.조사를 담당하는 팀장이 담배를 한 대 꺼내 들고는,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조용할 것을 표시했다. 그는 며칠째 감지 않은 엉겨붙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이천 앞으로 걸어갔다. “이 비서님, 이 기간에 투숙한 손님만 족히 300명이 넘습니다. 한 명씩 확인하려면 최소 보름은 걸립니다. 그것도 잠도 안 자고 2교대로 돌려야 가
“또 다른 문제 있나요?” 이서는 차분하게 물었다.조금 전보다는 기세를 살짝 누그러뜨렸다.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갔다.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또 불평을 늘어놓았다.“뭔 일이래? 화약통을 삶아 먹었나?”“열이 안 받을 수가 있겠어? 나라도 그렇겠다. 마지막 희망인 이서정도 계약을 마쳤다고 하니 화가 안 날 수 있겠냐고!”“이게 바로 약자의 분노라는 거야. 에효, 내가 친구들에게 윤씨 그룹에서 일한다고 했더니, 다들 망하기 직전의 회사에 왜 들어가냐고 말렸는데, 지금 봐서는 다음 달 신제품이 출시되는 즉시 우리 모두 보따리 싸 들고 회사 나가야 할 판인데…….”“설마 그럴 리가요.”이서의 팬인 디자인부 팀장은 이서에 대해 나름 객관적이었다.“나는 우리가 위층과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치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디자인팀 팀장을 바라보았다.……같은 시각.경찰이 막 떠나자, 비서가 우기광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양 사장님 오셨습니다.”안 만난다고 얘기하려는데, 양전호는 이미 문에 도착했다.우기광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바꾸었다. “어쩐 일로……?”양전호는 우기광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대문 쪽을 보면서 말했다. “방금 경찰이 왔다 가는 것 같던데, 윤재하 사장 때문에 온 건가?”윤재하의 횡령 사건을 고소한 사람이 우기광이란 걸, 그도 며칠 전에야 알았다.우기광이 소리 소문 없이 이 많은 증거를 수집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음.”양전호는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증거를 확보했대?”“윤이서 대표가 준 거네.”양전호는 못 믿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불가능이지, 이서가 어떻게 장부를 손에 넣는다고?”“정말 윤이서가 준 거야, 양 사장, 우리의 옛정을 봐서 내가 충고 한마디 하겠네. 윤이서 보통내기 아니네, 절대 얕보지 마.”양전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
우기동은 급한 마음에 손에 든 서류를 두고 양전호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우기광이 소리를 질러 제지했다. “그만 좀 해!”“형님,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야. 지금 투자금을 철회하지 않으면, 우리 투자한 돈 다 날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그래도 뒤에서 칼 꽂을 수는 없어!”“형님, 장사는 장사고, 도의는 도의야, 도의를 위해서 장사를 버릴 수는 없잖아!”우기동은 속이 타 죽을 것 같았다.우기광은 매섭게 눈썹을 비틀며 손을 흔들었다. “난 이미 결정했어. 그리고 너 단디 들어라. 만약 네가 감히 나 몰래 투자금을 철회한다면, 우리 그 날로 인연 끊는 거다. 알겠냐!”우기광의 단호한 태도를 본 우기동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우기광 사무실을 뛰쳐나갔다.우기광은 회사 대문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투자금을 다 날려도 절대 뒤통수 쳐서는 안 된다니…….’……같은 시각, 식당에서 소지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서는 우기광 쪽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계약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서나나의 자료를 뒤져 보았다.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서나나는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무술도 잘 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전 소속사는 그녀에게 액션 대역과 엑스트라만 시켰다.그래서 데뷔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이렇다 할 인기는 전혀 없었다.그녀가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귓가에 갑자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이서?!”이서는 고개를 들었다. 웬 야인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주저하다 물었다. “소지엽?!”눈앞의 소지엽은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마 앞의 잔머리가 미간을 덮었고, 몸에 아무렇게나 걸친 와인색 긴 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뭔가 큰 충격을 받은 사람 같았다.하지만 그의 눈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소지엽은 타임머신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게 한스러웠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서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했다.오늘 아침
“잠깐만…….”이서는 일어서서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소지엽은 20여 년간 가슴에 묻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다.“이서야, 나…….” “하나?”창가 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임하나인 걸 확인한 이서는 소지엽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는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하나야? 여기 어쩐 일이야? 이건…….”테이블 위에 술병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이서는 임하나 손에 든 술잔을 빼앗았다.“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이미 술이 곤죽이 된 임하나는 눈앞의 이서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임하나는 술잔을 찾으려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다행히 눈치 빠른 소지엽이 바로 타이밍 적절하게 그녀를 부축했다.그러나 임하나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소지엽을 확 밀쳐냈다. “꺼져, 이 사내놈들아!” 식당 안 손님들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임하나를 부축하며 이서가 소지엽에게 사과했다.“미안, 하나가 술이 많이 취했네.”그러고는 식당 직원을 불러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내가 결제할게.”“아냐, 내가 미안하잖아.”“친구 사이에, 술 한 잔 못 사니?”말을 마치고, 그는 임하나를 부축했다. “술을 진짜 많이 마셨나 봐, 내가 부축할게.”임하나를 잡는 순간, 그녀는 소지엽을 또 확 밀어 버렸다.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고마워. 그냥 내가 데려가는 게 낫겠어. 오늘 정말 미안해. 오늘 계약 건으로 할 얘기 있었는데…….”소지엽은 눈빛에 비친 허탈감을 애써 감추고자 했다. “괜찮아.”그는 걱정 어린 말투로 다시 물었다. “정말 혼자 괜찮겠어?”이서가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임하나를 잡아당겼다.“걱정 마, 먼저 간다.”말을 마치자 이서는 임하나를 부축하여 식당을 나섰다.멀어져가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지엽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하게 따라나섰다. “그래도…… 내가 데려다주는 게 낫겠어!”말하면서 그는 이미 자발적으로 택시 한 대를 잡았다.이서는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 중인 임현태를
오늘 이서는 그녀의 완벽한 몸매라인을 잘 드러내는 정장을 입었다. 섹시했다.“내가 같이 밥 먹자고 여러 번 얘기했던 거 같은데.”그녀는 말하면서 소지엽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물컵을 받으며 소지엽의 손가락이 이서의 손을 스쳤다.찌릿찌릿했다. 감전된 듯한 느낌에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두근거리는 심장이 다소 진정되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이서는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소지엽의 빨개진 얼굴을 발견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소지엽은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에 홍조가 목까지 빠르게 번지며 땀까지 뻘뻘 흘렸다.“콜록콜록…… 나…….”“너무 덥지?”이서는 몸을 돌려 리모컨을 찾으러 갔다.“남자는 여자보다 열이 많아서 땀을 많이 흘리는 것 같더라.”두근거리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오히려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곧 리모컨을 찾은 이서는 에어컨을 켰다.그리고, 곧 침실에 들어가 담요를 가져와 하나에게 덮어주었다. 소지엽은 이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이서가 하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을 보고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옅은 감탄을 내뱉었다.“보고만 있어도 힐링되는 거 같아.” 이서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소지엽은 순간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아……, 네가 하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걸 보니까 힐링되는 거 같아. 어렸을 때 엄마도 나한테 이렇게 이불을 덮어주셨겠지? 사실,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이렇게 완벽한 너를, 하은철은 왜…….”말을 뱉고서야, 소지엽은 주제 넘은 얘기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미안, 내가…….”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잖아. 난 신경 안 써.”소지엽은 이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그녀를 기분을 살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정말…… 다 내려놓은 거야?”“응, 진작에…….”“남편 때문에?” 소지엽의 마음이 씁쓸했다.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