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 LV의 인기 가방을 구매한 이서는 매장직원에게 M 국으로 발송해달라고 부탁했다.이서정에게 줄 가방을 구매하는 줄 알았던 심소희는 해외로 발송한다는 얘기를 듣고 의아했다. “언니, 이거 이서정에게 선물하려고 산 거 아니에요?”“이서정에게 선물을 왜 해?”일순간 할말을 잃은 심소희는 이서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은 곧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이서정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스태프들은 바로 이서를 이서정의 개인 대기실로 안내했다.“지금 안에 손님이 와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들어가서 물어보겠습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심소희는 이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틀림없이 윤수정일 거예요.”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소지나가 그 신인배우의 프로필 자료를 보냈는지 확인했다.소지나의 일 처리 효율은 아주 빨랐다.이미 서나나 관련 모든 자료를 보내왔다.아직 개봉하지 않은 작품까지도.소지나가 그녀를 이렇게 믿다니, 순간 감동했다.이서는 스태프를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서 서나나의 자료를 천천히 보았다.이때 대기실에서 이서가 왔다는 걸 알게 된 이서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는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윤수정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서정 씨, 결정하셨나요? 나랑 계약할 건가요, 아니면 윤이서랑 할 건가요?”이서정은 침묵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록 방금 윤수정의 입에서 이서는 이상언의 아내가 아니라 베프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어쨌든 이상언과 잘 알고 있는 사이는 확실하니까.‘윤수정과 계약한 걸 언짢게 생각한 윤이서가 이상언에게 한 소리 하고……?’‘이상언이 또 그 얘기를…… 하 회장에게 전달하고…….’잠시 생각을 마친 이서정이 입을 열었다. “저 광고 모델 못할 거 같아요. 이서 씨한테도 못한다고 할 거예요.”양쪽을 거절하는 게 어느 쪽에도 밉보이지 않는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윤이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윤수정이 미
스태프는 그제야 돌아서서 이서에게 말을 전하러 갔다.이서정이 윤수정에게 물었다.“잠깐 자리 피하실래요?”“아니요, 내가 왔다는 걸 일부러 윤이서에게 알리고 싶은걸요.”“윤이서의 찌그러진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이번에 그녀는 윤이서가 처절하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이서정이 이미 그녀와 계약하기로 약속했으니.즉 이미 확정된 일이라, 다른 가능성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대기실 밖, 서나나의 자료를 집중해서 살펴보던 이서는 갑자기 촬영현장에서 들려오는 액션 신 촬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살펴보니 가느다란 형체 하나가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다. 뒤이어 또 몇몇 사람이 와이어에 매달려 액션신을 선보이고 있었다. 배우들의 동작은 아주 민첩했다. 특히 처음에 매달린 소녀는 동작이 민첩하면서도 우아하고, 게다가 파워까지 느껴졌다.시각적 표현과 실용적 가치가 모두 뛰어난 액션 배우였다.이서는 스태프에게 물었다.“저기 저 스턴트우먼은 누구예요?”이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스태프는 웃었다. “아, 저 분은 스턴트우먼이 아니라 이번 드라마의 여주인 서나나입니다.”이서가 눈썹을 살짝 쳐올렸다. “서나나요?!”“네.” 스태프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대역 없이 액션 신을 직접 촬영하는 여배우들은 극히 드물어요. 나나는 예전에 무술을 배웠었고, 게다가 액션 신을 잘 찍기 위해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발레까지 배웠다고 하더라고요.”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서나나라는 여배우를 한 번 더 보았다.“아, 맞다”스태프가 갑자기 자신이 온 목적을 떠올렸다.“들어가시죠, 서정 씨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네.” 이서는 액션신을 찍고 있는 서나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 스태프의 안내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비록 이번 촬영에서 이서정은 조연에 불과했지만, 개인 전용 대기실을 갖고 있다. 내부도 꽤 널찍했다. 이서는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이서정 옆에 앉아 있는 윤수정을 보았다.그녀를 본 윤수정은 일부러 턱을 치켜 올렸다.이서 뒤를 따
“그럴 수가 없다니? 난 계약서도 다 준비했는데요…….” 이서는 계약서를 꺼내서 이서정에게 건네주었다.“보세요, 20억 원 맞죠, 난 정말 진심으로 서정 씨와 같이 일하고 싶어요.”20억 원이라는 금액을 보는 순간, 이서정은 자신이 이서 때문에 당한 굴욕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이서정이 동요한 걸 본 윤수정은 곧 이서정의 손을 잡아당겼다. “서정 씨, 25억 원, 어때요?”이서정은 다시 윤수정을 쳐다보았다.“윤수정!”이서의 다급한 모습을 본 윤수정은 25억 원이라는 큰 금액을 제시했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득의양양했다.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과 계약하면 되지. 언니도 가격 더 올려 봐.” 이서는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 사람 너무 무시하지 마!”이서는 곧이어 이서정에게 말했다. “서정 씨, 우리와 계한다면, 수익의 10%를 광고료로 드리겠습니다.”이서의 말을 들은 윤수정이 큰 소리로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언니, 너무 웃긴다. 윤씨 그룹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쳐도, 현재 윤씨 그룹은 자금도 딸리고, 운영팀도 후지고……, 대체 판매량을 어떻게 올리겠다는 건지? 10% 이윤을 준다고? 그림의 떡이지…….”말을 마치자 그녀는 또 이서정에게 말했다. “서정 씨, 저와 계약합시다. 25억 원에요.”잠깐 고민을 마친 이서정은 윤수정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네, 계약합시다.”윤수정은 이서정이 후회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회사에 전화해서 전자 계약서를 보내오라고 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면 모든 건 확정한 셈이었다.이서정의 대기실에서 나온 이서는 웃음이 귀까지 걸렸다.“언니, 나 사실 진짜 궁금하거든. 디자인, 홍보, 광고 모델까지 모두 하윤보다 한참 밑에 있는데, 어떻게 기사회생하겠다는 건지.”이서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인파 속에서 곧 서나나의 모습을 찾았다.그녀는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여주이지만 대우나 시설 면에서 이서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윤수정의 얘기를 들은
만약 윤이서가 이서정과 계약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하은철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5억 원에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데, 윤이서 때문에 족히 20억 원을 더 썼다.“윤이서!” 윤수정이 앞으로 돌진하며 이서의 옷깃을 잡았다.심소희가 막아서려고 하는데 이서가 저지했다.그녀는 무심코 주위의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용감한 거야, 무모한 거야? 촬영장에 카메라가 이렇게 널렸는데, 감히 손댄다고? 그래, 쳐 봐, 네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윤수정은 그제야 여기가 드라마 촬영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가 이서를 괴롭힌다는 스캔들이 터지면 새 회사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뿐만 아니라, 하은철과의 감정 회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그녀는 이서를 놓아주며 이를 갈았다. “윤이서, 고작 20억 원으로, 우리 하윤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말해 두는데, 은철 오빠가 있는 한, 우린 자금 걱정 없어. 반면 너는? 윤씨 그룹이 얼마나 더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투자자도 없으니, 윤씨 그룹은 조만간 도산하겠지.”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럼 지켜봐.”말을 끝내고 그녀는 심소희를 불러 촬영현장을 유유히 빠져나났다.차에 탄 심소희는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다. 그녀는 임현태가 옆에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언니, 일부러 윤수정을 골탕 먹이는 거였어요?! 대박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20억 원을 잃다니…….”얘기를 듣던 임현태는 어리둥절했다. 심소희는 방금 전 윤수정이 이서에게 속아 이서정과 고액의 광고 모델을 계약한 걸 임현태에게 알려주었다.임현태도 듣고 나서 허벅지를 치며 감탄했다.“아가씨, 정말 대단하네요. 순식간에 20억원을 잃게 하다니, 앞으로 더는 우리 회사 직원에게 정보를 캐묻고 다니지 못하겠네요.”이서는 향후 후환까지 없애는 멋들어진 수법을 썼다.이서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뭐 먹고 싶어? 오늘 내가 쏜다.”임현태와 심소희는 눈을 마주쳤다.“언니, 오늘 집에서
이서는 온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혼란과 씁쓸함이 무수한 바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댔다.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붉은 입술을 펴고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태 씨, 사람은 다양한 모습이 있어요. 어떻게 제 남편에 대해 그렇게 확신해요?”임현태의 눈빛이 단호했다.“네,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위장술도 뛰어나고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기침입니다.”“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 기억해요. 남편분이 정말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평소에 지환이 이서한테 당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임현태는 이서와 지환이 잘 되기를 바랐다. 지환의 곁을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닌 그는 누군가한테 고개를 숙인 지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그렇게 콧대 높은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는 건, 이서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임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이서는 망연자실했다. “설령 그가 나를 속였다고 하더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계속 믿어야 할까요?”임현태는 침묵했다.임현태가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아가씨, 남편분께서 대체 뭘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 속인 거라면, 아마도 아가씨를 위해서일 거예요. 절 믿으세요.”지환이 이서에게 진짜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단지 그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게 위해서.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임현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아가씨, 집으로 모시겠습니다.”임현태는 떠보듯 물었다.임현태를 보는 이서의 마음은 복잡했다. 한참 뒤, 그녀는 다시 임현태를 따라 차에 올랐다.사실 이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그러나 별장 입구에 도착하여 별장에서 쏟아지는 아늑한 불빛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답을 알게
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말일 경우를 제외하고…….이 결론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그러나 그 신비의 인물이 왜 굳이 그런 사기극을 벌이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환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작은 회사 하나 있는 것 제외하고…….’‘게다가 그 회사도 아버지 거다. 지환이 대신 경영 관리만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지환이 작은 회사라고 한 것도 그녀는 믿었다. 대형 회사라면, 그가 굳이 직장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직접 가족 회사를 물려받으면 되는데…….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지환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이었다.‘이런 평범한 사람은 H 국에서 널리고 널렸다. 설령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왜 굳이 지환을 겨냥할까?’이서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왔어?” 지환의 웃는 목소리로 주방에서 흘러나왔다.다음 순간, 양복을 입은 지환이 부엌에서 나오는 걸 본 이서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지환의 정장 입은 모습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지환은 모든 양복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하였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이서가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았다.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밥 냄새였다. 왠지 더 구수한 것 같았다.“뭐해요?”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해서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비워내고자 했다.지환의 입술 라인이 위로 올라갔다.“잡채밥.” “잡채밥?”지환이 다가와 이서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이서가 눈치채고, 손을 뻗어 지환을 밀어내려고 할 때, 그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응, 잡채밥 좋아한다며?” 이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화가 나는 건, 지환의 손길이 조금도 싫지 않다는 것이다.그가 이중 결혼했을 수도 있음에도.놀란 건, 지난 번에 엉겁결에 잡채를 좋아한다는 걸 얘기했는데 그걸 지환이 기억하고 있었다.잡채는
그러나, 머릿속에는 그 여자가 보낸 마지막 사진이 갑자기 떠올랐다.유럽 궁정풍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지환의 사진…….소녀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마치 바늘처럼 이서의 심장을 콕콕 찔러 댔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서는 온 힘을 다해 지환을 밀어내려 했다. 이서의 저항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곧 평소대로 회복되었다.“자기야, 왜 그래?” 이서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식탁을 부축하고 있었다.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일단 진정하기로 했다.‘먼저 증거부터 찾아야 해.’‘절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돼!’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고서야 이서는 겨우 핑곗거리를 찾아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피곤해서요. 먼저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지환이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그래, 올라가 쉬어.”이 말을 들은, 이서는 사면받은 사람마냥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닫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방금 하마터면 지환에게 넘어갈 뻔했다. 이서의 마음이 복잡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서 다시 루나의 대화창을 켰다.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더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현재 명품백은 아직 M 국에 도착 전이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제일 하기 싫어하는 일을 했다.그녀는 백화점 점원에게 전화해 운송장 번호를 받아 루나에게 보냈다.[오늘 쇼핑하러 나갔다가, 가방 하나 봤는데,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하나 샀어. 국제 우편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이서는 무표정하게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녀는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하는 일을 극히 싫어했다.하지만 지금, 지환이 중혼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그녀는 자세를 낮추었다.하루빨리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메시지가 발송한 지 1분도 채 안 되어 루나의 문자를 받았다.[고마워. 친구 사이에 뭐 이렇게까지……, 암튼 고마워 살 쓸게.]말을 마치고, 그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온 이서는 아직 자고 있는 지환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래층에 도착한 그녀는 혼자 운전하여 떠났다.다만 그녀가 차고에 들어가 차를 운전해서 나가는 순간, 지환이 2층 커튼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이서의 차가 거리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피곤한 듯 눈썹을 꼬집고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갔다.깊은 무력감은, 그의 마음은 묵직한 돌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뭐를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핸드폰을 들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회장님.]요 며칠 지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고 있는 이천은 늘 대기 상태에 있었다.핸드폰 벨 소리를 듣자마자 깼다.“뭐 알아낸 거 있어?” 지환의 목소리가 음침하고 무서웠다.이천은 하품 소리도 감히 내지 못하고 바로 답했다.[회장님, ML 국 호텔에 CCTV가 없어, 지금 투숙객을 통해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수상한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며칠째지?”이천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3일 더 줄게. 그래도 아무것도 못 찾아낸다면, 다 꺼져!”[3…….]이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핸드폰을 들고 있는 이천은 기가 막혔다.수사를 담당하는 다른 직원들도 잇달아 이천을 돌아보았다.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직원들을 보고 있지나, 이천도 참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환의 명령이라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회장님이 우리에게 3일 안에 결과를 내라고 하셨어. 안 그러면 다 끝장이야.”방 안에 울부짖는 소리가 퍼졌다.조사를 담당하는 팀장이 담배를 한 대 꺼내 들고는,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조용할 것을 표시했다. 그는 며칠째 감지 않은 엉겨붙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는 이천 앞으로 걸어갔다. “이 비서님, 이 기간에 투숙한 손님만 족히 300명이 넘습니다. 한 명씩 확인하려면 최소 보름은 걸립니다. 그것도 잠도 안 자고 2교대로 돌려야 가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