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시영의 답장이 바로 왔다. 점심에 다른 친구와 선약이 있긴 한데, 괜찮다면 함께 만나자는 거였다.이서는 개의치 않고 ‘좋다’고 답장했다.지난번 협력 이후, 두 사람은 종종 연락하며 언니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배시영이 정한 점심 식사 장소는 회사에서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그 식당의 바로 맞은편이 바로 하씨 그룹의 고층 건물이었다.지환이 바로 맞은편에 있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기분이 안 좋아?” 배시영은 음료 한 잔을 이서에게 건넸다.이서가 그녀에게 약속 문자를 보내기 전에, 그녀는 이미 지환과 연락했었다.전화기 저쪽의 지환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오늘 이서의 굳은 표정을 본, 배시영은 두 사람이 사랑싸움 중일 것으로 추측했다.“아니에요. 별일 없어요.”배시영은 손을 흔들었다. “내 전공 분야가 뭐지? 사람의 언행과 기분을 살피는 능력조차 없다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지.”그러자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언니한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네요. 사실 감정의 문제로 좀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제가 오늘 언니를 찾아온 건 윤씨 그룹에 적합한 광고 홍보대사를 찾기 위해서예요. 저는 아직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니께 조언 좀 구하려고요. 혹시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을까요?”배시영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서가 감정 관련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서의 화제를 따라가며 잠시 생각을 마친 뒤 말했다. “회사 브랜드의 포지셔닝을 먼저 볼 수 있을까?” 이서는 자료를 배시영에게 건넸다.배시영은 진지하게 보았다.“딱 적당한 인물이 한 명 있긴 한데…….”“그런데요……?”“이 사람은…… 복불복이거든.”이서는 의아해했다.“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말이 떨어지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시영아.”이서와 배시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소지나인 것을 확인한 이서는 멍해졌다.소지나도 꽤 놀랐다.“이런 우연이…….
“고액의 홍보 대행료를 지급할 능력이 안 됩니다.”소지나가 웃었다. “이서 씨처럼 솔직한 사장은 처음 보네요. 이렇게 해요. 지난번에 저를 도와줬으니, 제가 50% 할인해드리죠.”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50% 할인해도 그녀는 지불할 수 없었다. “그분의 프로필과 관련 자료를 보고 싶습니다.”소지나는 이서의 생각이 확고한 것을 보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OK, 하지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최근 드라마나 영화 촬영 중인 대스타들이 몇 있으니 홍보 부탁해 볼게요. 참고로 무료로요.”이서는 감격의 눈빛으로 소지나를 바라보았다.“정말 고마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럼 두 분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응, 잘 가요.”이서가 떠난 후, 소지나는 고개를 돌려 배시영을 바라보았다. “시영아, 윤이서 씨…… 어때?”배시영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소지나가 말했다. “내 동생에게 소개해 주면 어떨까? 어떻게 생각해? 내 동생이 이서 씨 좋아할 것 같지 않아?” 음료수를 마시던 배시영은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그녀는 격렬하게 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경고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은 애초에 단념하는 게 좋겠어.”소지나가 의아한 듯 물었다.“왜?”배시영은 냅킨을 꺼내어 입을 가볍게 닦은 뒤 자신의 베프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한 뒤 마침내 합리적인 핑계를 찾았다. “결혼했잖아, 유부녀야!”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너 이서 씨 남편 본 적 있어?”소지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서가 결혼도 안 했으면서, 하씨 집안과 파혼하려고 일부러 결혼했다고 거짓말한 게 아닌가, 난 심히 의심된다.”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마침 내 동생이 며칠 후에 돌아오는데, 이번 홍보 모델 섭외 건을 내 동생에게 맡기려고. 그럼 두 사람이 접촉할 기회도 많아지잖아. 소개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니, 거부감도 없을 테고…….”배시영의 입꼬리가 살짝 경직되었다.“그래도 심사숙고
백화점에서 LV의 인기 가방을 구매한 이서는 매장직원에게 M 국으로 발송해달라고 부탁했다.이서정에게 줄 가방을 구매하는 줄 알았던 심소희는 해외로 발송한다는 얘기를 듣고 의아했다. “언니, 이거 이서정에게 선물하려고 산 거 아니에요?”“이서정에게 선물을 왜 해?”일순간 할말을 잃은 심소희는 이서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은 곧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이서정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스태프들은 바로 이서를 이서정의 개인 대기실로 안내했다.“지금 안에 손님이 와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들어가서 물어보겠습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심소희는 이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틀림없이 윤수정일 거예요.”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소지나가 그 신인배우의 프로필 자료를 보냈는지 확인했다.소지나의 일 처리 효율은 아주 빨랐다.이미 서나나 관련 모든 자료를 보내왔다.아직 개봉하지 않은 작품까지도.소지나가 그녀를 이렇게 믿다니, 순간 감동했다.이서는 스태프를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서 서나나의 자료를 천천히 보았다.이때 대기실에서 이서가 왔다는 걸 알게 된 이서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녀는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윤수정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서정 씨, 결정하셨나요? 나랑 계약할 건가요, 아니면 윤이서랑 할 건가요?”이서정은 침묵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록 방금 윤수정의 입에서 이서는 이상언의 아내가 아니라 베프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어쨌든 이상언과 잘 알고 있는 사이는 확실하니까.‘윤수정과 계약한 걸 언짢게 생각한 윤이서가 이상언에게 한 소리 하고……?’‘이상언이 또 그 얘기를…… 하 회장에게 전달하고…….’잠시 생각을 마친 이서정이 입을 열었다. “저 광고 모델 못할 거 같아요. 이서 씨한테도 못한다고 할 거예요.”양쪽을 거절하는 게 어느 쪽에도 밉보이지 않는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윤이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윤수정이 미
스태프는 그제야 돌아서서 이서에게 말을 전하러 갔다.이서정이 윤수정에게 물었다.“잠깐 자리 피하실래요?”“아니요, 내가 왔다는 걸 일부러 윤이서에게 알리고 싶은걸요.”“윤이서의 찌그러진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이번에 그녀는 윤이서가 처절하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이서정이 이미 그녀와 계약하기로 약속했으니.즉 이미 확정된 일이라, 다른 가능성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대기실 밖, 서나나의 자료를 집중해서 살펴보던 이서는 갑자기 촬영현장에서 들려오는 액션 신 촬영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살펴보니 가느다란 형체 하나가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다. 뒤이어 또 몇몇 사람이 와이어에 매달려 액션신을 선보이고 있었다. 배우들의 동작은 아주 민첩했다. 특히 처음에 매달린 소녀는 동작이 민첩하면서도 우아하고, 게다가 파워까지 느껴졌다.시각적 표현과 실용적 가치가 모두 뛰어난 액션 배우였다.이서는 스태프에게 물었다.“저기 저 스턴트우먼은 누구예요?”이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스태프는 웃었다. “아, 저 분은 스턴트우먼이 아니라 이번 드라마의 여주인 서나나입니다.”이서가 눈썹을 살짝 쳐올렸다. “서나나요?!”“네.” 스태프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대역 없이 액션 신을 직접 촬영하는 여배우들은 극히 드물어요. 나나는 예전에 무술을 배웠었고, 게다가 액션 신을 잘 찍기 위해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발레까지 배웠다고 하더라고요.”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서나나라는 여배우를 한 번 더 보았다.“아, 맞다”스태프가 갑자기 자신이 온 목적을 떠올렸다.“들어가시죠, 서정 씨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네.” 이서는 액션신을 찍고 있는 서나나를 한 번 더 쳐다보고, 스태프의 안내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비록 이번 촬영에서 이서정은 조연에 불과했지만, 개인 전용 대기실을 갖고 있다. 내부도 꽤 널찍했다. 이서는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이서정 옆에 앉아 있는 윤수정을 보았다.그녀를 본 윤수정은 일부러 턱을 치켜 올렸다.이서 뒤를 따
“그럴 수가 없다니? 난 계약서도 다 준비했는데요…….” 이서는 계약서를 꺼내서 이서정에게 건네주었다.“보세요, 20억 원 맞죠, 난 정말 진심으로 서정 씨와 같이 일하고 싶어요.”20억 원이라는 금액을 보는 순간, 이서정은 자신이 이서 때문에 당한 굴욕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이서정이 동요한 걸 본 윤수정은 곧 이서정의 손을 잡아당겼다. “서정 씨, 25억 원, 어때요?”이서정은 다시 윤수정을 쳐다보았다.“윤수정!”이서의 다급한 모습을 본 윤수정은 25억 원이라는 큰 금액을 제시했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득의양양했다.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과 계약하면 되지. 언니도 가격 더 올려 봐.” 이서는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 사람 너무 무시하지 마!”이서는 곧이어 이서정에게 말했다. “서정 씨, 우리와 계한다면, 수익의 10%를 광고료로 드리겠습니다.”이서의 말을 들은 윤수정이 큰 소리로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언니, 너무 웃긴다. 윤씨 그룹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쳐도, 현재 윤씨 그룹은 자금도 딸리고, 운영팀도 후지고……, 대체 판매량을 어떻게 올리겠다는 건지? 10% 이윤을 준다고? 그림의 떡이지…….”말을 마치자 그녀는 또 이서정에게 말했다. “서정 씨, 저와 계약합시다. 25억 원에요.”잠깐 고민을 마친 이서정은 윤수정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네, 계약합시다.”윤수정은 이서정이 후회할 것을 우려하여, 즉시 회사에 전화해서 전자 계약서를 보내오라고 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면 모든 건 확정한 셈이었다.이서정의 대기실에서 나온 이서는 웃음이 귀까지 걸렸다.“언니, 나 사실 진짜 궁금하거든. 디자인, 홍보, 광고 모델까지 모두 하윤보다 한참 밑에 있는데, 어떻게 기사회생하겠다는 건지.”이서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인파 속에서 곧 서나나의 모습을 찾았다.그녀는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여주이지만 대우나 시설 면에서 이서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윤수정의 얘기를 들은
만약 윤이서가 이서정과 계약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하은철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5억 원에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데, 윤이서 때문에 족히 20억 원을 더 썼다.“윤이서!” 윤수정이 앞으로 돌진하며 이서의 옷깃을 잡았다.심소희가 막아서려고 하는데 이서가 저지했다.그녀는 무심코 주위의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용감한 거야, 무모한 거야? 촬영장에 카메라가 이렇게 널렸는데, 감히 손댄다고? 그래, 쳐 봐, 네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윤수정은 그제야 여기가 드라마 촬영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가 이서를 괴롭힌다는 스캔들이 터지면 새 회사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뿐만 아니라, 하은철과의 감정 회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그녀는 이서를 놓아주며 이를 갈았다. “윤이서, 고작 20억 원으로, 우리 하윤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말해 두는데, 은철 오빠가 있는 한, 우린 자금 걱정 없어. 반면 너는? 윤씨 그룹이 얼마나 더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투자자도 없으니, 윤씨 그룹은 조만간 도산하겠지.”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럼 지켜봐.”말을 끝내고 그녀는 심소희를 불러 촬영현장을 유유히 빠져나났다.차에 탄 심소희는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다. 그녀는 임현태가 옆에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언니, 일부러 윤수정을 골탕 먹이는 거였어요?! 대박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20억 원을 잃다니…….”얘기를 듣던 임현태는 어리둥절했다. 심소희는 방금 전 윤수정이 이서에게 속아 이서정과 고액의 광고 모델을 계약한 걸 임현태에게 알려주었다.임현태도 듣고 나서 허벅지를 치며 감탄했다.“아가씨, 정말 대단하네요. 순식간에 20억원을 잃게 하다니, 앞으로 더는 우리 회사 직원에게 정보를 캐묻고 다니지 못하겠네요.”이서는 향후 후환까지 없애는 멋들어진 수법을 썼다.이서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뭐 먹고 싶어? 오늘 내가 쏜다.”임현태와 심소희는 눈을 마주쳤다.“언니, 오늘 집에서
이서는 온몸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혼란과 씁쓸함이 무수한 바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댔다.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붉은 입술을 펴고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태 씨, 사람은 다양한 모습이 있어요. 어떻게 제 남편에 대해 그렇게 확신해요?”임현태의 눈빛이 단호했다.“네,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위장술도 뛰어나고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기침입니다.”“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 기억해요. 남편분이 정말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평소에 지환이 이서한테 당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임현태는 이서와 지환이 잘 되기를 바랐다. 지환의 곁을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닌 그는 누군가한테 고개를 숙인 지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그렇게 콧대 높은 사람이 고개를 숙인다는 건, 이서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임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이서는 망연자실했다. “설령 그가 나를 속였다고 하더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계속 믿어야 할까요?”임현태는 침묵했다.임현태가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아가씨, 남편분께서 대체 뭘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정말 속인 거라면, 아마도 아가씨를 위해서일 거예요. 절 믿으세요.”지환이 이서에게 진짜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단지 그가 하씨 집안 사람이라는 걸 이서에게 알려주지 않게 위해서.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임현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아가씨, 집으로 모시겠습니다.”임현태는 떠보듯 물었다.임현태를 보는 이서의 마음은 복잡했다. 한참 뒤, 그녀는 다시 임현태를 따라 차에 올랐다.사실 이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그러나 별장 입구에 도착하여 별장에서 쏟아지는 아늑한 불빛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답을 알게
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말일 경우를 제외하고…….이 결론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그러나 그 신비의 인물이 왜 굳이 그런 사기극을 벌이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환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작은 회사 하나 있는 것 제외하고…….’‘게다가 그 회사도 아버지 거다. 지환이 대신 경영 관리만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지환이 작은 회사라고 한 것도 그녀는 믿었다. 대형 회사라면, 그가 굳이 직장생활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직접 가족 회사를 물려받으면 되는데…….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지환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것이었다.‘이런 평범한 사람은 H 국에서 널리고 널렸다. 설령 신비의 인물이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왜 굳이 지환을 겨냥할까?’이서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왔어?” 지환의 웃는 목소리로 주방에서 흘러나왔다.다음 순간, 양복을 입은 지환이 부엌에서 나오는 걸 본 이서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지환의 정장 입은 모습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지환은 모든 양복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하였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며 웃었다.이서가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았다.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밥 냄새였다. 왠지 더 구수한 것 같았다.“뭐해요?”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해서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비워내고자 했다.지환의 입술 라인이 위로 올라갔다.“잡채밥.” “잡채밥?”지환이 다가와 이서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이서가 눈치채고, 손을 뻗어 지환을 밀어내려고 할 때, 그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응, 잡채밥 좋아한다며?” 이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화가 나는 건, 지환의 손길이 조금도 싫지 않다는 것이다.그가 이중 결혼했을 수도 있음에도.놀란 건, 지난 번에 엉겁결에 잡채를 좋아한다는 걸 얘기했는데 그걸 지환이 기억하고 있었다.잡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