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정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네?!”인내심이 바닥을 친 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에게 말했다. “차단기 내려.”별장의 차단기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이천은 몇 걸음 걸어가서 스위치를 당겼다.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하던 별장이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별장 안 사람들은 당황하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1 분 만에 별장은 다시 대낮으로 돌아왔다.광명을 되찾고, 이서정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지환의 모습이었다.“…….”지환은 이서정의 궁금해하는 눈빛을 완전히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유명 연예인보다 더 꽁꽁 싸매고 나타난 지환을 본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누군가가 관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서정 씨, 혹시 이분이 하 회장님이십니까?”이서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아, 네, 네.”“하 회장님 오늘 이…….”이서정은 지환이 이처럼 꽁꽁 싸매고 등장한 이유를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합리적인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꽃가루 알레르기라 있어서…….” 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눈동자는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올가미 같은 눈빛으로!이서도 곧바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느꼈다. 그녀도 눈을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검은 렌즈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 싶어 이서는 손가락으로의 술잔을 어루만지며 인사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지난번 SY의 신형 휴대폰 발표회에서도 기회를 놓쳤다.이번에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부러움의 눈빛으로 이서정을 바라보았다. “서정 씨, 회장님이 부인을 정말 많이 사랑하나 봅니다. 몸이 편찮은 데도 파티에 참석하시고……. 우리 집 양반이라면 꽃가루 알레르기는 고사하고 새끼손가락에 상처만 조금 나도 그걸 핑계 삼아 파티에 참석 안 하려고 할 텐데…….”“우리 집도 마찬
요 며칠, 그는 이서와 말 몇 마디 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썼는데…….진짜 신분으로 돌아온 그에게, 이서가 이렇게 쉽게 입을 열다니.“음.” 지환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그는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는 질투의 불길을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는 이서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여러 차례 저에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시간 될 때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서는 지환의 이상 반응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소파를 누르고 있던 지환의 주먹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로 인해 턱선이 긴장한 듯 팽팽해졌다.“언제든지.”지환이 이렇게 친화력이 좋을 거로 생각지도 못한 이서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그럼, 회장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그럼 앞으로 사업 관련 자문도 구할 수 있게 된다.’지환의 눈동자 속의 질투의 불길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그의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찢어질 듯한 고통이 가해졌다. 통증이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그래.”이 몇 마디는 거의 이빨 틈에서 짜낸 것이었다.이서는 눈을 깜빡였다. 지환이 귀찮아서 그러는 줄 알고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곧 이서정과 지환에게 말했다. “회장님, 서정…… 사모님, 시간이 늦었어요.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이서가 돌아서서 가려는 것을 본 지환은 더 이상 내면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잠깐!”다급한 고함 소리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이서에게 지른 소리이란 걸 안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다들 이서가 지환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으로 추측했다.이서의 심장도 쿵쿵 뛰었다.그런데, 방금 이서는 ‘잠깐’이라는 두 글자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이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도대체 얼마나 지환 씨가 보고 싶으면 이런 착각이 생기는 걸까?’괴로워하며 몸을 돌린 이서는 지환의 어두운 선글라스와 마주했다.
출입문이 곧 눈앞이다.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이서는 뒤에는 다시 한번 들려오는 하 회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서 씨!”이서의 몸은 순간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움찔 했다. 순간 정말 지환이 그녀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머릿속의 혼돈이 지나가자, 지환과 하 회장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둘 다 모두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지환의 목소리는 더 캐주얼한 반면, 하 회장은 더욱 성숙하며 딱딱한 느낌이 강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몸을 돌렸다. “하 회장님, 또 무슨 볼일이 있나요?”지환은 이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이서정의 매니저를 바라보았다.“사람 몇 명을 불러서 선물 들고 오세요.” 이서정은 정말로 선물이 있다는 얘기에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었다.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부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하 회장님 정말 아내 분을 사랑하시나 봐요. 부러워해 죽겠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이서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녀를 불러 세우고 아무 말이 없자, 무턱대고 떠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할 말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입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잠시 뒤, 경호원 몇 명이 선물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모두 정교하게 포장되었다.딱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지환이 이렇게 많은 선물을 사 줄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이서정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그녀의 시선은 온통 선물에 꽂혀 있었다.다른 사람들도 산더미를 이룬 선물에 깜짝 놀랐다.대부분 상류사회의 부잣집 며느리들인 파티 참석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돈 씀씀이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준비한 선물과 본인이 구매한 물품은 확연히 다른 개념의 물건이라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앞 전에 지환과 이서정의 금실이 좋다고 아부한 건, 상업적 멘트에 불과했다.하지만 지금 두 눈으로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니, 질투와 분노가 느껴졌다.‘이서정은 단지 삼류 무명 연예인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는 ‘남’인 이서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준비했으면서, 그녀에게는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어처구니없기는 다른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이는 지환의 마음속에서, 윤이서가 이서정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다는 걸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파티에서 이서를 비웃고 조롱하던 몇몇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더해졌다.그들은 바삐 휴대전화를 꺼내 이서에게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장난삼아 한 얘기라며 부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해 달라고 말이다.이서는, 지금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주의력은 옆에 놓인 선물 더미에 있었다.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하 회장이, 둘째 삼촌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셨지?’‘과거에 몇 차례 도움을 준 거라면, 하은철의 안면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은철과 파혼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설마 하 회장이 아직 파혼 소식을 모르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한차례 선물 소동이후, 파티는 곧 끝났다.거실에는 이서정과 지환만 남았다.지환은 마스크와 안경을 벗고 섹시하고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폭발하려던 이서정의 분노가 반으로 감소하였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제 체면도 좀 봐주시길 바랍니다.”지환은 두 다리를 커피 테이블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눈빛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서의 모습뿐이었다.‘아마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선물을 뜯고 있겠지?’그의 눈동자에 다정함이 물결처럼 일렁이었다.선물은 성공적으로 줘서 기쁘지만, 남편이 아닌 하 회장, 둘째 삼촌의 신분으로 줬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서정은 그의 귓가에서 자기가 얼마나 창피당했는지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듣다못해 짜증이 난 지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기, 이서정 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 당신 남편 아니고, 당신도 내 아내 아니야. 왜 내가
이서는 방안 가득한 선물을 보며 또다시 막막했다.그녀 대신 선물을 안고 들어오는 임현태에게 물었다.“현태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네, 말씀하세요, 아가씨.”“하 회장님이 왜 제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셨을까요?”임현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도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 남녀 간의 사랑, 이런 것보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마음?”눈썹을 살짝 찡그린 이서는 또 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문밖에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걸 봤다.지환의 차였다.이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다음 순간, 훤칠한 그림자가 차 안에서 내렸다.“남편분이 돌아오셨네요?”임현태의 말투가 유쾌한 듯했다.하지만 이서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제야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이상한 기운을 깨달았다.‘설마…… 싸웠나?’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곧 얘기했다. “아가씨,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이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차 쪽으로 가던 임현태는 마침 별장으로 들어오던 지환과 마주쳤다.지환은 임현태를 보지도 않고, 곧장 이서한테로 걸어갔다.“여보야!”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이서는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집안으로 걸어갔다.지환도 바삐 뒤따라갔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 장면을 본 임현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구나.’옛날 같았으면 회장님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텐데, 그런데…….지환이 이서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이서는 소파에 앉아서 굳은 얼굴로 말했다.“말씀하세요.”신분 노출이 아니라는 것을 안 지환은 심적으로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주방에 가서 이서에게 줄 물을 한 잔 따랐다. “여보, 먼저 물 한 잔 마시고…….”물컵을 본 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돌아와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지금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요.”“먼저 물 먼저 한 잔 마시
지환의 머리는 초고속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자기야, 내가 고백하기 전에, 질문 하나 해도 될까?”이서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은 숨을 들이마셨다.“자긴 하씨 집안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지환의 이 질문으로, 이서는 며칠 전 포르쉐 매장에서 이서정을 만났던 장면이 단번에 떠올렸다. 당시 이서정이 하씨 집안 사람들을 계속 언급했었다.오늘 또 하씨 집안 사람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이 미세한 동작은 눈치 빠른 지환에게 포착되었다.“싫어요.”이서가 직설적으로 말했다.“할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난 정말 하씨 집안 사람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요.”예상했던 답을 얻은 지환의 눈동자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몸을 곧게 폈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이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게 중혼과 무슨 관계지?’지환은 이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그의 눈가에 비친 다정함을 본 이서는 저도 모르게 몸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바삐 허벅지를 꼬집었다. 온 몸에 전해진 강한 통증이 이성의 끈을 다잡았다. “이제 나한테 뭘 숨겼는지 말해줘야 하지 않나요?”“알았어.” 지환은 이서 옆에 앉았다. “사실 이번 출장은 하씨 그룹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간 게 아니라…….”이서는 숨을 참았다.“내 회사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어.”이서는 놀란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회사 얘기가 아닌, 중혼에 대해 털어놓아야 하는데, 이건 뭐지……?!’이서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지환은 전자때문인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작은 회사야. 아버지가 경영 관리하던 회사라, 굳이 자기한테 얘기하지 않았던 거고…….”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분노도 기
이서가 핸드폰을 더듬어 루나의 연락처를 찾았다.이제 확실한 사실만이, 그녀가 뭘 믿어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난번 대화가 끝난 후로 루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메세지를 보내지 않았다.결혼 정보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다고 루나가 얘기했었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그녀에게 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바로 이때, 밖에서 다시 한 번 지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이서는 심장이 떨리며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했다.당혹함, 분노, 실망……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일 처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반드시 침착해야 해.’‘냉정해야만 받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어.’이를 깨닫는 건 쉽지만, 실제로 이행하기는 정말 너무 어려웠다. 심호흡을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이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알았어요, 곧 내려 갈게요.”방안에서 들려오는 응답소리를 듣고, 그제야 팽팽하게 긴장했던 지환의 몸이 드디어 약간 풀렸다.“응,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게.”말을 마친, 지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지난 밤, 이서는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지환도 마찬가지였다.이서의 반응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그도 무턱대고 이서에게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이는 그의 일 처리 스타일이 아니었다.지난날, 어떤 일에 부딪혀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관련 조사를 다 마친 뒤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단서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서를 대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지금 상황이 완전히 그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한 마디로 통제 불능이다.조사가 명확해진 뒤, 이서와 접촉해야 한다고 이성은 거듭 말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환은 참지 못하고 간밤 사이에 여러 차례 이서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두드리려고 했다.다행히 낮이 밝으면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문 이서는 고개를 숙였다. 우유 잔에 뭔가 있는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한 마디 뱉었다. “네.”“정말 화 풀렸어?”지환도 그제야 우유를 한 잔 마셨다.이서는 또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몰래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회사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큰일을 왜 말하지 않았어요?”지환은 우유 잔을 꽉 쥐었다. 몸속의 기혈이 필사적으로 솟구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이서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물안개가 그 위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삼키는 동작을 가속했다. “사직하겠다고 했던 것도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거였나요?”“…….”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애초 퇴사 얘기를 꺼낸 의도는 아주 단순했다. 회사를 설립하면 이서의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코를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랬다. 이전에 했던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결국 계속해서 더 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상관없다.이서를 다시 웃게 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할 것이다.“아니, 내가 사직하고 싶었던 이유는, 자기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 외국 회사에 대해서는…… 내가 H 국 사업을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쪽 일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거든. 암튼 자기야, 미안해.”지환은 이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이서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봐줘, 응?” 이서의 시선은 불가피하게 지환의 진심 어린 시선과 부딪쳤다.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작정 지환을 용서할 뻔했다.그 신비의 인물이 보낸 메시지 같은 건 개나 줘버리고!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힘겹게 말했다. “용서할게요. 다만…….”그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 그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