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정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네?!”인내심이 바닥을 친 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천에게 말했다. “차단기 내려.”별장의 차단기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이천은 몇 걸음 걸어가서 스위치를 당겼다.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하던 별장이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별장 안 사람들은 당황하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1 분 만에 별장은 다시 대낮으로 돌아왔다.광명을 되찾고, 이서정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지환의 모습이었다.“…….”지환은 이서정의 궁금해하는 눈빛을 완전히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유명 연예인보다 더 꽁꽁 싸매고 나타난 지환을 본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누군가가 관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서정 씨, 혹시 이분이 하 회장님이십니까?”이서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아, 네, 네.”“하 회장님 오늘 이…….”이서정은 지환이 이처럼 꽁꽁 싸매고 등장한 이유를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합리적인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꽃가루 알레르기라 있어서…….” 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눈동자는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올가미 같은 눈빛으로!이서도 곧바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느꼈다. 그녀도 눈을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검은 렌즈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 싶어 이서는 손가락으로의 술잔을 어루만지며 인사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지난번 SY의 신형 휴대폰 발표회에서도 기회를 놓쳤다.이번에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부러움의 눈빛으로 이서정을 바라보았다. “서정 씨, 회장님이 부인을 정말 많이 사랑하나 봅니다. 몸이 편찮은 데도 파티에 참석하시고……. 우리 집 양반이라면 꽃가루 알레르기는 고사하고 새끼손가락에 상처만 조금 나도 그걸 핑계 삼아 파티에 참석 안 하려고 할 텐데…….”“우리 집도 마찬
요 며칠, 그는 이서와 말 몇 마디 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썼는데…….진짜 신분으로 돌아온 그에게, 이서가 이렇게 쉽게 입을 열다니.“음.” 지환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그는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는 질투의 불길을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는 이서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여러 차례 저에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시간 될 때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서는 지환의 이상 반응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소파를 누르고 있던 지환의 주먹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로 인해 턱선이 긴장한 듯 팽팽해졌다.“언제든지.”지환이 이렇게 친화력이 좋을 거로 생각지도 못한 이서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그럼, 회장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그럼 앞으로 사업 관련 자문도 구할 수 있게 된다.’지환의 눈동자 속의 질투의 불길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그의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찢어질 듯한 고통이 가해졌다. 통증이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그래.”이 몇 마디는 거의 이빨 틈에서 짜낸 것이었다.이서는 눈을 깜빡였다. 지환이 귀찮아서 그러는 줄 알고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곧 이서정과 지환에게 말했다. “회장님, 서정…… 사모님, 시간이 늦었어요.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이서가 돌아서서 가려는 것을 본 지환은 더 이상 내면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잠깐!”다급한 고함 소리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이서에게 지른 소리이란 걸 안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다들 이서가 지환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으로 추측했다.이서의 심장도 쿵쿵 뛰었다.그런데, 방금 이서는 ‘잠깐’이라는 두 글자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이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도대체 얼마나 지환 씨가 보고 싶으면 이런 착각이 생기는 걸까?’괴로워하며 몸을 돌린 이서는 지환의 어두운 선글라스와 마주했다.
출입문이 곧 눈앞이다.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이서는 뒤에는 다시 한번 들려오는 하 회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서 씨!”이서의 몸은 순간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움찔 했다. 순간 정말 지환이 그녀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머릿속의 혼돈이 지나가자, 지환과 하 회장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둘 다 모두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지환의 목소리는 더 캐주얼한 반면, 하 회장은 더욱 성숙하며 딱딱한 느낌이 강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몸을 돌렸다. “하 회장님, 또 무슨 볼일이 있나요?”지환은 이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이서정의 매니저를 바라보았다.“사람 몇 명을 불러서 선물 들고 오세요.” 이서정은 정말로 선물이 있다는 얘기에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었다.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부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하 회장님 정말 아내 분을 사랑하시나 봐요. 부러워해 죽겠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이서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녀를 불러 세우고 아무 말이 없자, 무턱대고 떠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할 말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입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잠시 뒤, 경호원 몇 명이 선물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모두 정교하게 포장되었다.딱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지환이 이렇게 많은 선물을 사 줄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이서정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그녀의 시선은 온통 선물에 꽂혀 있었다.다른 사람들도 산더미를 이룬 선물에 깜짝 놀랐다.대부분 상류사회의 부잣집 며느리들인 파티 참석자들은, 다들 하나같이 돈 씀씀이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준비한 선물과 본인이 구매한 물품은 확연히 다른 개념의 물건이라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앞 전에 지환과 이서정의 금실이 좋다고 아부한 건, 상업적 멘트에 불과했다.하지만 지금 두 눈으로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니, 질투와 분노가 느껴졌다.‘이서정은 단지 삼류 무명 연예인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는 ‘남’인 이서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준비했으면서, 그녀에게는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어처구니없기는 다른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이는 지환의 마음속에서, 윤이서가 이서정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다는 걸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파티에서 이서를 비웃고 조롱하던 몇몇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더해졌다.그들은 바삐 휴대전화를 꺼내 이서에게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장난삼아 한 얘기라며 부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해 달라고 말이다.이서는, 지금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주의력은 옆에 놓인 선물 더미에 있었다.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하 회장이, 둘째 삼촌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셨지?’‘과거에 몇 차례 도움을 준 거라면, 하은철의 안면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은철과 파혼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설마 하 회장이 아직 파혼 소식을 모르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한차례 선물 소동이후, 파티는 곧 끝났다.거실에는 이서정과 지환만 남았다.지환은 마스크와 안경을 벗고 섹시하고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폭발하려던 이서정의 분노가 반으로 감소하였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제 체면도 좀 봐주시길 바랍니다.”지환은 두 다리를 커피 테이블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눈빛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서의 모습뿐이었다.‘아마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선물을 뜯고 있겠지?’그의 눈동자에 다정함이 물결처럼 일렁이었다.선물은 성공적으로 줘서 기쁘지만, 남편이 아닌 하 회장, 둘째 삼촌의 신분으로 줬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서정은 그의 귓가에서 자기가 얼마나 창피당했는지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듣다못해 짜증이 난 지환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기, 이서정 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 당신 남편 아니고, 당신도 내 아내 아니야. 왜 내가
이서는 방안 가득한 선물을 보며 또다시 막막했다.그녀 대신 선물을 안고 들어오는 임현태에게 물었다.“현태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네, 말씀하세요, 아가씨.”“하 회장님이 왜 제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셨을까요?”임현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도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 남녀 간의 사랑, 이런 것보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마음?”눈썹을 살짝 찡그린 이서는 또 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문밖에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걸 봤다.지환의 차였다.이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다음 순간, 훤칠한 그림자가 차 안에서 내렸다.“남편분이 돌아오셨네요?”임현태의 말투가 유쾌한 듯했다.하지만 이서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제야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이상한 기운을 깨달았다.‘설마…… 싸웠나?’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곧 얘기했다. “아가씨,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이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차 쪽으로 가던 임현태는 마침 별장으로 들어오던 지환과 마주쳤다.지환은 임현태를 보지도 않고, 곧장 이서한테로 걸어갔다.“여보야!”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이서는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집안으로 걸어갔다.지환도 바삐 뒤따라갔다.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 장면을 본 임현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구나.’옛날 같았으면 회장님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텐데, 그런데…….지환이 이서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이서는 소파에 앉아서 굳은 얼굴로 말했다.“말씀하세요.”신분 노출이 아니라는 것을 안 지환은 심적으로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주방에 가서 이서에게 줄 물을 한 잔 따랐다. “여보, 먼저 물 한 잔 마시고…….”물컵을 본 이서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돌아와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지금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요.”“먼저 물 먼저 한 잔 마시
지환의 머리는 초고속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자기야, 내가 고백하기 전에, 질문 하나 해도 될까?”이서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은 숨을 들이마셨다.“자긴 하씨 집안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지환의 이 질문으로, 이서는 며칠 전 포르쉐 매장에서 이서정을 만났던 장면이 단번에 떠올렸다. 당시 이서정이 하씨 집안 사람들을 계속 언급했었다.오늘 또 하씨 집안 사람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이 미세한 동작은 눈치 빠른 지환에게 포착되었다.“싫어요.”이서가 직설적으로 말했다.“할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난 정말 하씨 집안 사람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요.”예상했던 답을 얻은 지환의 눈동자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몸을 곧게 폈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이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게 중혼과 무슨 관계지?’지환은 이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그의 눈가에 비친 다정함을 본 이서는 저도 모르게 몸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바삐 허벅지를 꼬집었다. 온 몸에 전해진 강한 통증이 이성의 끈을 다잡았다. “이제 나한테 뭘 숨겼는지 말해줘야 하지 않나요?”“알았어.” 지환은 이서 옆에 앉았다. “사실 이번 출장은 하씨 그룹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간 게 아니라…….”이서는 숨을 참았다.“내 회사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어.”이서는 놀란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회사 얘기가 아닌, 중혼에 대해 털어놓아야 하는데, 이건 뭐지……?!’이서의 속마음을 알리 없는 지환은 전자때문인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작은 회사야. 아버지가 경영 관리하던 회사라, 굳이 자기한테 얘기하지 않았던 거고…….”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분노도 기
이서가 핸드폰을 더듬어 루나의 연락처를 찾았다.이제 확실한 사실만이, 그녀가 뭘 믿어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난번 대화가 끝난 후로 루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메세지를 보내지 않았다.결혼 정보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다고 루나가 얘기했었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그녀에게 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바로 이때, 밖에서 다시 한 번 지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이서는 심장이 떨리며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했다.당혹함, 분노, 실망……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일 처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반드시 침착해야 해.’‘냉정해야만 받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어.’이를 깨닫는 건 쉽지만, 실제로 이행하기는 정말 너무 어려웠다. 심호흡을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이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알았어요, 곧 내려 갈게요.”방안에서 들려오는 응답소리를 듣고, 그제야 팽팽하게 긴장했던 지환의 몸이 드디어 약간 풀렸다.“응,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게.”말을 마친, 지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지난 밤, 이서는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지환도 마찬가지였다.이서의 반응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그도 무턱대고 이서에게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이는 그의 일 처리 스타일이 아니었다.지난날, 어떤 일에 부딪혀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관련 조사를 다 마친 뒤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단서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서를 대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지금 상황이 완전히 그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한 마디로 통제 불능이다.조사가 명확해진 뒤, 이서와 접촉해야 한다고 이성은 거듭 말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환은 참지 못하고 간밤 사이에 여러 차례 이서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두드리려고 했다.다행히 낮이 밝으면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문 이서는 고개를 숙였다. 우유 잔에 뭔가 있는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한 마디 뱉었다. “네.”“정말 화 풀렸어?”지환도 그제야 우유를 한 잔 마셨다.이서는 또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몰래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회사 얘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큰일을 왜 말하지 않았어요?”지환은 우유 잔을 꽉 쥐었다. 몸속의 기혈이 필사적으로 솟구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이서는 속눈썹을 깜빡였다. 물안개가 그 위에 걸려 있었다.그녀는 삼키는 동작을 가속했다. “사직하겠다고 했던 것도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거였나요?”“…….”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애초 퇴사 얘기를 꺼낸 의도는 아주 단순했다. 회사를 설립하면 이서의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코를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랬다. 이전에 했던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결국 계속해서 더 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상관없다.이서를 다시 웃게 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할 것이다.“아니, 내가 사직하고 싶었던 이유는, 자기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 외국 회사에 대해서는…… 내가 H 국 사업을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쪽 일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거든. 암튼 자기야, 미안해.”지환은 이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이서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봐줘, 응?” 이서의 시선은 불가피하게 지환의 진심 어린 시선과 부딪쳤다.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작정 지환을 용서할 뻔했다.그 신비의 인물이 보낸 메시지 같은 건 개나 줘버리고!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힘겹게 말했다. “용서할게요. 다만…….”그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환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 그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