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책상 위의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 묻힌 얼굴은,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평소 이서가 옆에 있을 때 그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첫째는, 이서가 간접흡연 하는 게 싫었고, 둘째는 비싼 시가가 그의 신분을 드러낼까 봐 우려했던 거였다.그렇다고 값싼 담배를 피우는 건 또 적응되지 않았다.앞으로 더 이상 마음 졸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자, 지환은 더욱 음울했다. 지환의 어두운 표정에 이천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이천은 애처롭게 자신을 위해 변명했다. “회장님, 저는 정말 아닙니다. 전 매일 회장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모님과 개별적으로 접촉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회장님의 신분을 폭로할 수 있겠습니까?”지환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네가 아니라면, 누굴까?” 이천은 말을 듣자마자, 지환이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몰래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이천의 눈동자가 밝았다. “사모님과 그동안 접촉한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지환이 아무 얘기가 없자, 이천은 바삐 사무실을 떠나 기술팀을 찾아갔다.천천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지환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몸을 소파에 맡겼다.그는 복기를 시작했다. 기억은 다시 ML 국에 있을 때로 돌아갔다.처음에는 모든 게 좋았다. 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후, 이서가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날부터, 모든 게 변했다.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지환은 미간을 꾹꾹 강하게 눌렀다.이쪽 일은 이미 거의 다 처리되었다.예전이었다면, 그는 벌써 이서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서 곁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지금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조사하기 전까지는.그는 이서와의 결혼 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지환은 핸드폰을 들고 이서의 사진을 보
이서는 조용히 앞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야?”그녀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윤수정과 대치 중이던 심소희는 곧 이서에게 다가갔다. “언니, 위층에서 개업 선물을 나눠 준다고……. 필요 없다는데 계속 안으로 들어가려고…….”심소희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도 윤수정과 이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개업선물은 핑계이고, 회사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수법이었다.윤수정 뒤에는 윤아영이 서있었다. 100 여 명을 윤씨 그룹을 빼낸 ‘공로’로 윤수정의 회사에 입사했다.빌붙을 곳을 찾았다고 생각한 윤아영은 이서를 보자마자 또 날뛰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무슨 도둑이니 대문을 지키고 있게? 이웃 사촌끼리 개업 선물 돌리자는 건데, 설마 여기 직원들, 다 우리 회사로 이직할 까봐 두렵나? 그런 거야?”이서는 선물이 놓인 곳으로 가서 힐끗 보았다.모두 수입 간식이었다.“윤 대표, 고마워.”“뭐 이런 걸 가지고.”윤수정이 웃으며 말했다.“언니도 먹어봐, 다른 사람들은 아영이 보고 나눠 주라고 할게.”이서는 굳이 막지 않았다. 윤아영은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간식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그 모습을 지켜본 심소희는 다급히 말했다.“언니.”이서는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잠시 뒤, 윤아영이 방글방글 웃으며 나왔다. “직원들이 뭘 물어보던가?”윤아영은 득의양양했다. “별 얘기 안 했어. 우리 쪽 대우가 좋다고, 선물까지 최고급으로 준비했다고…… 뭐 이 정도만…….”“그래?”이서가 미소를 머금었다.“너를 따라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어?”윤아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굳었다.이서는 계속해서 말했다. “경쟁을 통해서 우수한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거라면, 난 이의 없어. 하지만 지금처럼 유치한 수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너무 비열해. 여기는 소꿉놀이 하는 곳 아니야. 너희랑 놀아줄 시간이 없어.”윤수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것을 본 윤아영은 이서가 프런트에 올려 놓은 포르쉐 차 키를 발견하고 이서의
윤아영은 먼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가짜인 걸, 내가 왜 먹어?!”“네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구나. 그래. 어차피 나도 지금 시간이 되니 가보자. 확인시켜 줄게.”이서는 말하면서 차 키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윤아영은 의아해하며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이서의 속셈을 알 수 없는 윤수정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윤아영을 보고는, 그녀더러 따라가 볼 것을 암시했다.윤아영은 이서의 보조를 맞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앞서 몇 걸음 걷던 이서는 심소희가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소희야, 너도 가자, 증인이 있어야지.”심소희도 이서의 보폭에 맞춰 바삐 따라갔다.이서의 담담한 옆 모습을 본 심소희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고급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포르쉐 911은 베스트 셀링카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차라는 정도는 심소희도 알고 있다.하지만 이서의 침착한 모습을 보니 왠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두 가지 모순된 생각으로 심소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심소희의 찌푸린 표정을 본 윤아영은 이서가 그들을 속이려고 술수를 쓰고 있다고 확신했다.그러자 더이상 긴장하지 않았다.심지어 여유롭게 윤수정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그녀는 일부러 이서가 들으라고 말했다.“언니, 언니도 911이 좋아?”윤수정이 빙그레 웃었다.“물론 좋아하지. 외형적 디자인이나 내부 옵션이나 말해 뭐해, 모두 최고지.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도 그 매력에 벗어날 수 없지.”“그럼 하 대표에게 선물해 달라고 해. 하 대표가 언니 많이 사랑하잖아. 언니가 말만 꺼내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바로 대령할 걸?” 윤아영은 윤수정의 어깨를 슬쩍 치며, 한편으로 슬그머니 이서를 쳐다보았다.윤수정은 그녀의 뜻을 바로 캐치했다.이서 앞에서 하은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자랑하라는 것이었다.그녀는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연인이긴
윤아영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이게 네 거라고? 누구한테 빌린 거야?”동시에, 전화기 너머에서 하은철이 초조하게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야?]“오빠, 오빠 소유의 포르쉐 대리점에 911이 아직 한 대가 남아 있다며? 그 차 구하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나한테 남겨주면 안 돼?”윤수정과 하은철은 통화 중이었고, 윤아영은 포르쉐를 훑어보며 쉴 새 없이 지껄였다. “빌린 게 아니라면, 짝퉁이겠지. 쯧쯧쯧, 윤이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너 정말 별 짓 다하는 구나. 수정 언니를 봐봐, 좋은 남자 찾으니 원하는 건 다 들어주잖아. 네 남편 은…….”“찰싹…….”“뭐라고?!”날카로운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렸다. 윤아영은 화가 나서 뜨거운 뺨을 감싸 쥐고 달려들어 이서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려 했다. 하지만 이서는 민첩하게 그녀를 힘껏 밀려났다.윤아영의 몸이 포르쉐에 부딪혔다. 그녀는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입은 여전히 가만 있지 않았다. “윤이서, 네가 감히 나를 때려?”“네가 나한테 똥물을 퍼붓는데, 난 널 한 대 치면 안 되니?”이서는 차분하게 윤아영을 바라보았다.윤아영이 남편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이서는 뒷말을 더 듣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악담을 퍼부을지 상상이 되었다. 비록 지환과 냉전 중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하루라도 부부인 이상 그녀는 지환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윤아영은 윤수정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정언니.”여러 번 불렀지만, 아무 응답도 없자, 고개를 돌려 윤수정을 바라보았다. 윤수정은 힘 없이 기가 죽어 멍하니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뒤, 이쪽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충혈된 눈으로 이서를 노려보며 휴대폰을 손에 꽉 쥐고 물었다. “이 포르쉐, 설마 은철 오빠가 준 거야?!”하은철이 직접 말하지 않았더라면, 윤수정은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윤이서를 싫어했는데, 어떻게 차를 줄 수 있지.’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수
윤아영은 놀라서 엎드러지고 곱드러지며 엘리베이터로 도망갔다. 마치 좀비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이서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는 몸을 돌려 심소희를 보며 말했다. “가자.”“네.”심소희는 말꼬리를 올리며 윤수정을 힐끗 보고는 의기양양하게 이서 곁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역시는 역시네요. 911 대박 예술이네요.”이서는 그녀가 일부러 윤수정을 약 올리기 위한 수법인 걸 알고 살짝 웃었다.사무실로 돌아온 후 심소희가 말했다. “언니, 오늘부로 위층에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죠?”이서는 윤수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우리 회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트집 잡고 말썽부릴 거야.”“아, 레알 싫어.”심소희가 눈살을 찌푸렸다.“언니, 윤수정 혼꾸멍내줄 방법 없을까요?”이서는 미소를 지었다. 하은철이 윤수정의 보호막이 되어주고 있는 한, 윤수정은 이 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99%보다 더 나은 상위 1%의 삶을 누리면서 말이다.“응, 있지.”이서는 멀지 않은 곳의 초록색 화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우리 회사를 하씨 그룹보다 더 잘나가는 회사로 키우는 그날이, 윤수정 제삿날이야.”심소희는 놀란 눈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일찍이 이서가 야심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야망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이서는 시선을 거두었다.“가서 일 봐.”“네.”심소희가 물러갔다.이서는 대표이사 자리에 서류를 펼쳤다.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주워 보니, 이서정이 준 명함이었다.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그녀는 갑자기 이서정이 한 말이 생각났다.‘아마 제 남편도 참석할 거예요.’‘그녀의 남편이라면…….’‘하은철 둘째 삼촌이잖아?’이서의 속눈썹이 두 번 깜박였다.하은철 삼촌으로 인해, 지난번 지환과 다툰 이후로, 이서는 오랫동안 이 재계의 천재에 대
하지만 이 방법도 약발이 거의 다 떨어졌다. 그녀는 수시로 지환이 떠올랐다. 글자 하나, 풀 한 포기, 머리를 시키는 짧은 휴식 타임에도 계속 그가 불쑥불쑥 생각났다.이서도 모르는 사이에, 지환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바로 이 이유때문에 그녀는 두려웠다.예전에 하은철도 종종 외국에 출장을 갔었다. 심지어 출장이 몇 달 동안 지속되어도 하은철이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하은철이 출장 간다고 하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직장인이 되어서야 그게 무슨 기분인지 깨달았다.휴가를 맞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지환과 헤어진 지 하루도 안 되었는데, 그가 미치도록 그리워졌다.이서는 일어나 통유리 창문으로 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차량들을 내려다보며 고통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지환이 정말 외국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 감정에 직면해야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바로 이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뒤돌아서 확인해 보니 지환이 걸려 온 영상 전화였다.잠시 망설이던 거절을 누르려고 했지만, 손은 뇌의 제어를 벗어난 듯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손의 만행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서둘러 카메라를 껐다. 전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지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이서의 심장이 찌릿했다. 순간 화면을 뚫고 지환을 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이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퍼졌다. 그제야 떨리는 몸이 서서히 안정되었다.“무슨 일 있어요?”[오랫동안 자기 못 봤잖아, 자기 얼굴 좀 보여줘.]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였으며 고혹적인 매력을 띠고 있었다.긴장해서 팽팽했던 심금이 그의 말 한마디에 끊어질 것 같았다.그녀는 바삐 팔을 물며, 목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흐느낌을 피부에 파묻었다.한참 뒤 그녀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차갑게 말했다. “볼 거 없어요.”지환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핸드폰 마이크
하윤회사 내부.윤수정이 사무실 내 부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부순 후, 기진맥진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윤아영은 난장판인 사무실에 무릎 꿇고 있었다. 이마, 손, 무릎 등에는 전부 상처 자국이었다. 모두 윤수정으로 낸 상처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숨소리조차 크게 쉴 엄두를 내지 못했다.문 열고 들어온 비서는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보고 황급히 물러나려고 했다. 윤수정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야?”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양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양전호가 왔다는 얘기를 들은 윤수정은 그제야 얼굴에 난폭한 기운이 조금 누그러졌다.“회의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사람들 시켜 여기 깨끗이 치워 놓고.”“네.”비서가 바쁘게 사무실을 나갔다.그러고는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윤아영을 보며 단호하게 일렀다.“앞으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다시 벌였다가는…… 내 회사에서 꺼져!” “응……, 네.” 윤아영은 바들바들 떨면서 답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윤수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양 사장님, 어쩐 일로 회사까지 행차하셨어요?”양전호는 윤수정을 보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굿뉴스를 전하러 왔지…….”“오, 무슨 좋은 소식인데요?”“아래층에서 십이지 컨셉으로 의상을 디자인했는데, 중저가 전략으로 패션시장을 공략할 건 가봐…….”“어떻게 아셨어요?”윤수정은 금세 흥미가 생겼다.“그래도 내가 한 때는 아랫집 주주였잖아. 이 정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이지. 윤 사장, 뭔 계획 없어?”윤수정은 곧 웃었다. “십이지 컨셉이라고요? 그까짓 거 우리도 하나 하죠 뭐, 중저가 전략을 펼친다고 했으니…… 우리도 똑같이 중저가 전략으로 가는 걸로…….”“최고의 디자이너를 초빙하고, 유명 스타를 광고 홍보 모델로 써서…….” 여기까지 말하고는, 윤수정의 얼굴에 웃음이 귀에까지 걸렸다.“두 회사의 경쟁 구도를 통해 인지도를 높여
사람들이 잇달아 이천을 훔쳐보았다.이천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지환이 왜 이리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그도 별수가 없었다.‘결자해지…….’‘그럼 사모님이 화를 풀어야 하는데…….’‘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남한테 속는다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이 침묵 속에서 연구개발팀 직원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그는 이천을 보았다.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이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회장님, 잠깐 다녀오겠습니다.”말을 마치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몸에 부적을 붙인 사람처럼.사람들이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왔다.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이천은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에야 물었다. “어때? 뭐 나온 게 있어?”연구개발팀 직원은 프린트한 사진 몇 장을 이천에게 건넸다.사진 속 사람은 이상언과 이서, 임하나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민호일의 아내 이하영이고, 다른 하나는 이서정이었다.사진으로 봐서는 웨딩드레스 샵 안이었다.엔지니어가 말했다. “사모님과 접촉한 적이 있고, 회장님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번 훑어봤는데, 이 사람을 발견했습니다.”그는 사진 속 이서정을 가리키며 말했다.“회장님의 신분을 누설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천은 흥분했다. “확실해?”“100% 확실할 수는 없습니다. 이서정이 사모님이 이서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이천은 급히 재촉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바로 해.”“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이서정 말고는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알았어.”이천이 엔지니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수고했어. 자네가 우릴 살렸네.”엔지니어가 눈을 깜빡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곁들어 설명하지 않았다. 문을 밀고 곧장 회의실로 들어가 지환의 귓가에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환의 긴장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