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떨리는 손으로 지환의 이름을 입력했다.[사진이 필요하다면 며칠 뒤에 보내줄 수 있어.]이서는 그제야 지환과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만약 루나가 지환의 사진을 요구한다면, 쿡이 사진 완성본을 보내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이름 보니 H 국 사람이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름도 겹치는 게 많지 않을 테니까. 지환 관련된 모든 자료를 너한테 보내주면 되는 거지?]이서는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시간 날 때 꼭 한 번 들어와.]루나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러고는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 얘기 들으니, 네가 H 국 하씨 그룹의 후계자 약혼녀라고 들었는데, 어때? 결혼했어?]이서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여러 해 동안 연락이 없었던 루나가 그녀에게 열정적인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사회 생활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이서도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함은 없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우리는 결혼 안 했어.]루나는 이서의 뜻을 오해했다. [그럼 언제 결혼할 거야?][…….][내 말은, 우리 결혼 안 해, 우리는 파혼했어.]이 문자가 발송되자 루나가 답장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걸 이서는 느꼈다.[정말 유감이네.][응.] 이서는 이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자료 찾으면 알려줄 수 있어?]15 분 후.[응, 알았어.]이서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일어나 물을 따르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지환이었다.이서는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자 곧 후회했다.[자기야.]지환의 낮고 침울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그녀의 고막을 자극했다.귀가 간질간질하며 심장도 쿵쾅거렸다.그녀는 괴로워하며 손으로 심장 부위를 눌렀다.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계속되었다. 어색한 기운에 질식해 죽을 거 같을 때 이서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지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고 싶
지환이 지금 그녀 앞에 있다면, 그녀는 모든 걸 다 집어치우고 그의 말을 100% 믿었을 것이다.그에게는 신비한 마법 같은 게 있다.그의 편에 서게 하는 마력.심지어 하은철 같은 대 가문, 대기업 후계자도 이서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임하나 마저도 지금은 지환의 편에 서 있지 않는가?‘이성적이어야 해!’이서는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몸에 고통이 가해지자 호흡도 드디어 편해졌다. 그녀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루나에게 빨리 좀 알아봐 달라고 얘기하려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몇 년 동안 연락 없이 지내다 갑자기 나타나 일 처리 도와달라고 재촉하는 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은행의 알림 문자가 떴다.지환이 그녀에게 2억 원을 송금했다.이서는 여러 개의 0을 보고, 심장이 다시 한 번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환은 정말 그녀에게 잘해주었다.즉 재물과 여색 위해서 그녀를 속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이서보다 돈 많은 사람들도 천지이고, 외모도 그녀보다 예쁜 여자들도 도처에 널렸다. 그러니 굳이 그녀를 찾을 필요가 없다.‘설마…… 자극이 필요해서?’이서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웠다. 차라리 아예 이 문제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루나 쪽 소식이나 기다려보자.’만약 지환이 정말 그녀를 속이고, M 국에서 결혼해서 아내도 있다면, 그녀는 즉시 지환과 이혼하고, 평생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이서의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그녀는 계좌에 찍힌 2억 원을 보며, 임하나에 전화를 걸었다.“하나야, 오후에 시간 있어?”임하나 쪽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 일 있어? 이서야, 나 반차 낼까?]“아니.” 이서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별일 없으니 일 해.”임하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정말 괜찮아?]“응, 정말 별일 없
대리점에 들어서니, 자동차 딜러가 바로 반갑게 맞이했다. 이서가 1~2억 대의 차를 사고 싶다고 하자 더욱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최근 새로 출시된 신에너지 차종이 고객님이 원하는 가격대랑 딱 맞겠습니다. 원하시면 시운전해 보셔도 됩니다.”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딜러가 얘기하는 신형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몇 걸음 걷자마자 이서정이 눈에 보였다.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경호원을 여러 명 대동하고 있는 모습이 안 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었다.10 여 명의 경호원이 그녀와 다른 한 사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는 데…….공기를 경계하는 건지 아니면 은신술을 부리는 팬들을 경계하는 건지지 모르겠다.딜러가 이서의 시선을 따라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어, 저분이 바로 우리 하 대표 둘째 숙모입니다.”이 대리점은 하씨 그룹 산하 대리점이었다.하씨 그룹 대리점의 딜러로서, 이런 사모님이 있다는 게 좀 창피했다.이서정을 본 적이 없던 이서는 하은철 삼촌과 결혼한 사람이라면 대가 규수처럼 단정하고 우아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매너와 인품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사람을 보니, 이서정의 자질이 심히 걱정되었다.아니나 다를까 저쪽에서 이서정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하은철 대표 숙모야. 친척이라고, 당신이 먼저 주문했어도 내가 마음에 들면 내가 먼저 사는 거야.” 이서는 이서정 옆에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 포르쉐911 이었다. 베스트 셀링카다. 전 세계에 몇백 대밖에 없는 차량이라 구하기도 어려운 차종이었다. 따라서 절대적인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이서정이 차를 갖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되었다.하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도 양보할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녀도 이 차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착순이 있지, 설령 당신이 하 대표 숙모라고 해도 내 차를 빼앗을 수는 없어. 내가 몇 년을 기다렸는데…… 나더러 포기하라고?”이서정은 팔
잠시 후, 이서는 마침내 생각났다. 소지엽의 누나, 소지나였다.이서가 단번에 소지나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전에 소지나가 그녀를 여러 번 도와줬기 때문이다.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 시절이었다. 하은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행사 도중 하은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이서를 괴롭히는 부류들이 있었다.소지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매번 그녀가 나서서 도와주었다.사냥하고 친절했다.전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니, 이서도 당연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이서는 일부러 무고한 눈을 깜박거리며 이서정을 바라보았다. “서정 씨, 어떻게 된 거예요?”이서정은 분노를 억누르고 소지나를 쳐다보았다. “이서 씨, 저 여자 말 듣지 마요. 이 차는 내 거예요.”“당신 거라니?” 소지나는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 본다. “난 계약금도 냈다고!”대리점 2층.아래층에서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보고 있던 점장은 또 한 명의 여자가 가세하자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다.‘망했다. 오늘 대리점에서 뭔 대참사가 일어날지 걱정이다.’그는 난처한듯 옆에 있는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도 아래층을 바라보았다.오늘 대리점에 911 두 대가 들어왔다. 하은철도 그 중 한 대를 인도하러 온 것이었다.점원이 출고하러 간 사이, 그는 2 층에 올라가서 차를 마셨다. 차를 반쯤 마셨을 때 아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하은철을 옆에서 모시느라 점장이 나서지 않자, 다른 직원들도 제지할 용기가 나지 않아 다투도록 두었다.하은철의 시선이 이서정과 소지나를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 갔을 때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눈동자는 차에서 내려온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했더니, 이서가 또 달라졌다.눈매에 더해진 분위기는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보였다. 특히 눈동자 속에 깃든 상흔은 하은철의 심장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리며 나댔다. 살짝 우울한 모습의 이서가 이렇게……
이서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곧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소지나를 바라보았다. “소씨 그룹의 딸이었군요. 무례했습니다.”이서정의 전후 변화에 소지나는 비웃었다.“이 차를 원하지 않았어? 가져.”“아니, 아니, 아니에요.”이서정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당신이 먼저 주문한 거니 당연히 선착순 구매해야죠. 저는 다른 대리점으로 가보겠습니다.”말하자면, 이서정은 경호원을 거느리고 서둘러 대리점을 떠났다.떠나기 전에, 이서정은 특별히 이서에게 감사를 전했다.“이서 씨,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이서 씨 아니었다면, 큰 실수할 뻔했네요.” 이서정이 이서에게 초대장 한 장을 건넸다. “며칠 뒤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꼭 와주세요. 그때 감사 인사 제대로 하겠습니다. 아, 맞다, 그때 저희 남편도 참석할 수도 있으니 꼭 오세요.”말을 마치고 도망가 듯 이슈정은 황급히 나갔다.이서정이 꼬리 빳빳이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고, 이서와 소지나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라면, 정말 저 뻔뻔한 사람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소지나가 온화하고 고상하게 입을 열었다.“천만에요. 제가 더 고맙죠. 꼭 한 번 인사드리고 싶었어요.”이서는 별다른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소지나는 단숨에 그녀의 말 뜻을 이해했다.“시간 있어요, 내가 커피 한 잔 살게요.”“아니에요.” 이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차를 봐야 해서요. 다음에 시간 내서 제가 꼭 커피 사겠습니다.”“네. 그래요.” 소지나는 볼수록 이서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하은철을 떠난 뒤 이서의 모습이 참 좋았다. 그녀는 갑자기 ML 국에 있는 동생이 떠올라 미소를 지으며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약속한 거예요.”“네. 그럼요.” 이서는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소지나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딜러의 안내라 따라 차량 결제 관련 서류 작성하러 갔다.이서에게 안내를 하던 딜러도 이서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
이서는 대리점에서 911 한 대를 자기에게 준다는 것을 알고, 몇 초 동안 멍해 있었다.“저희 대리점에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선물입니다.”점장은 말하면서 자기조차 믿을 수 없는 거짓말에 어이가 없었다.이서도 당연히 믿지 않았다. “이렇게 귀한 사례는 받을 수 없습니다.”“이건 네가 받아 마땅해.”2층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하은철을 보았다.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렸다.하은철의 베푸는 듯한 말투가 너무 불편했다.“아니, 필요없어.”비록 그녀도 911이 마음에 들지만, 하은철이 선물한 것이라면 안 받는 게 낫다.이서가 딜러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올 게요.”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딜러와 점장은 서로 쳐다보았다.이서가 결혼한 걸 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이서는 하은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하은철을 알뜰살뜰 보살피지만, 오히려 하은철에게 괄시만 받던 이서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서가 하은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쌩 도는 이서의 모습을 보고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잇달아 하은철을 바라보다.하은철이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급히 2층에서 내려왔다.그리고 얼굴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당혹감이 묻어났다.“이서야!”이서가 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하은철이 마침내 그녀를 막아섰다.그는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우울한 눈빛을 보니 저도 모르게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전의 일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게. 이 911 은 받아. 그렇지 않으면 나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을 거 같아.”이서는 가소롭다는 듯 하은철을 바라보았다. “양심? 네가 없는 걸 가지고 허세 떨지 말아 줄래?”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변명을 해댔다. “나는 수정이 거짓말하는 줄 몰랐어. 알면 절대 그녀가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았을 거야!”이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하은철과 거리를 두었다.
점장은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처리해.”점장은 그제야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쪽으로 뛰어갔다.모든 것이 제대로 처리되자, 이서는 차 키를 들고 하은철 옆으로 걸어갔다. “고마워. 하 대표.”하은철은 이서의 손목을 잡았다. “이서야, 네가 원하면 어떤 보상도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수정을…… 제외하고는, 수정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 나…… 못해.”이서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건 네 사정이고.”말을 마치고, 그녀는 하은철을 뿌리치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고 소탈하게 떠났다.이서가 떠나는 것을 본 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마침내 이서의 눈 밑에 서려 있는 것이 우울함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윤수정을 처벌하지 않아 그녀를 실망시켰을까?’그러나 그는 정말로 윤수정을 처벌할 수 없었다.비록 지금은 예전처럼 수정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맞다. 설령 어느 날 그녀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녀를 돌볼 중책을 짊어질 것이다.“이서와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면, 수정이와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하은철이 지환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상담했다.“둘째 삼촌, 나 어떻게 해야 돼요? 정말 너무 괴로워요. 카드는 내 손에 쥐어져 있어요. 더 이상 수정이와 얽히지 않으면 이서가 내 곁으로 돌아올 거 같은데……. 그런데 난 수정이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요……. 삼촌, 사랑이 너무 어려워요.”지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눈빛이 침침해졌다. [뭐라고?]“내가 이서와 다시 잘해보고 싶으면 반드시…….”[그 말이 아니라, 네가 이서에게 911을 선물했다고?]“참.” 차를 언급하자, 하은철이 득의만만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서가 싫다고 했는데, 결국에는 받았어요. 이는 이서 마음속에 여전히 내가 있다는 얘기죠. 그쵸? 둘째 삼촌, 저에게 조언 좀 해주세요.”지환은 음침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세웠다. [……내가 보기
지환은 책상 위의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 묻힌 얼굴은,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평소 이서가 옆에 있을 때 그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첫째는, 이서가 간접흡연 하는 게 싫었고, 둘째는 비싼 시가가 그의 신분을 드러낼까 봐 우려했던 거였다.그렇다고 값싼 담배를 피우는 건 또 적응되지 않았다.앞으로 더 이상 마음 졸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자, 지환은 더욱 음울했다. 지환의 어두운 표정에 이천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이천은 애처롭게 자신을 위해 변명했다. “회장님, 저는 정말 아닙니다. 전 매일 회장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모님과 개별적으로 접촉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회장님의 신분을 폭로할 수 있겠습니까?”지환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네가 아니라면, 누굴까?” 이천은 말을 듣자마자, 지환이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몰래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이천의 눈동자가 밝았다. “사모님과 그동안 접촉한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지환이 아무 얘기가 없자, 이천은 바삐 사무실을 떠나 기술팀을 찾아갔다.천천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지환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몸을 소파에 맡겼다.그는 복기를 시작했다. 기억은 다시 ML 국에 있을 때로 돌아갔다.처음에는 모든 게 좋았다. 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후, 이서가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날부터, 모든 게 변했다.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지환은 미간을 꾹꾹 강하게 눌렀다.이쪽 일은 이미 거의 다 처리되었다.예전이었다면, 그는 벌써 이서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서 곁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지금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조사하기 전까지는.그는 이서와의 결혼 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지환은 핸드폰을 들고 이서의 사진을 보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