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방 안.외출 준비하고 있던 하나와 상언은 약을 들고 찾아온 지환을 보고 긴장해서 물었다. “이서 아파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병을 상언에게 건네주었다. “봐봐, 혹시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이상언은 쭉 한 번 살펴보고 말했다.“부작용이 없으니 안심하고 복용해도 되.”말을 마치고, 그는 또 물었다.“왜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야?”“나도 잘 모르겠어.”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여기 의사 말로는 물갈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던데…….”“내가 한 번 가 볼게.”세 사람은 지환의 방으로 갔다.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서는 미처 눈을 감을 겨를도 없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던 이서의 시선은 곧 임하나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지환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이서야…….”임하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어디가 아픈 거야?”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심적 고통에 비하면, 육체적 고통은 새 다리 피였다.이상언은 진맥도 하고 이서의 설태와 눈도 살폈다.“별 문제없어. 열 나면 복용 지시대로 약을 복용하면 돼.”지환은 곧 물을 뜨러 갔다.임하나는 이서의 손을 잡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열이 좀 나는 것뿐이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그녀는 완전 무장한 임하나와 이상언을 힐끗 보았다. “나가려고?” ““안 갈 거야.”임하나는 황급히 말했다.이서는 웃었다.“증거 찾으러 가는 거야?”이서가 그녀의 심중을 알아맞히자, 임하나도 굳이 숨기지 않고, ‘응’하고 답했다.“그럼 빨리 가. 스키장 쪽 CCTV는 없지만, 목격자는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기침을 했다.“시간이 지체될수록 너에게 더 불리해.”“하지만…….”임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빨리 가, 네가 여기 있으면 나 오히려 못 쉬어.”“하나 씨, 이서 씨 말이 맞아요, 여기 지환이 있으니까 우리 그만 가요.”임하나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따뜻한 물
지환은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았다.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신분이 들통났다는 거였다.하지만 곧 냉정을 찾은 지환은 최근 이서와 접촉한 사람들을 자세히 회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마각을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서는 줄곧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참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이서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나 너무 피곤해요. 좀 자고 싶어요.”이서는 진실의 답을 들을 엄두가 안 났다.지금까지 지환이 그녀를 속이지 않았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이는 그녀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신념이 깨졌다.지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우습게 만들었다.“자기야…….”“내일 돌아가요, 우리.”이서는 몸을 돌려 지환을 등지고 누웠다.지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리가 몇 초 동안 다운된 거 같았다.그는 이서가 자신의 신분, 즉 하씨 집안 사람인 걸 알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그러나 이서의 이런 반응은 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그러나 곧 긴장했던 등 근육이 다소 릴렉스해졌다.‘적어도 당장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다행이야…….’‘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도 없네.’“그래, 그럼 푹 쉬어.” 지환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작 또한 조심스러웠다.이서는 눈을 꼭 감았다.정신이 몽롱해서인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이서의 눈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보았다.“이서야, 깼어?”임하나도 다소 긴장해 보였다. “좀 어때? 괜찮아?”이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도 아까처럼 그렇게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응.”“물 좀 따라 줄게.” 임하나는 말을 하고 물을 따르러 갔다.이서는 그제야 방안을 제대로 살폈다. 방 안에는 하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방금 잠이 덜 깬 상태여서 헛것이 보였나 보다. “상언 씨랑 지…… 지환 씨는?”“몰라.”임하나는
“뭔데? 말해 봐, 나 화 안 낼 거야.”“사실 말이야, 만약 네가 윤씨 그룹 CEO에 경선에 출마할 거라는 걸 내가 일찍 알았더라면, 난 포기하라고 말했을지도 몰라. 왜냐면 너도 알다시피 윤수정 뒤에는 하은철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잖아. 하은철이라는 뒷배만으로도 주주들은 그녀에게 넘어가기 충분했지. 그러나 지환 씨는 달랐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믿었어. 지환 씨의 통찰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돈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건 바로 진정한 부부라면, 너희들처럼 서로 응원하고 힘을 줘야 하는 거로 생각해. 우리 부모처럼 매일 싸우고 헐뜯는 게 아니라…….”“미안해.” 이서가 웅얼거렸다.“괜찮아.”임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이서는 임하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목격자는 찾았어?”이 일을 언급하자 임하나는 고민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쉽지는 않네. 호텔 매니저한테 호텔 투숙 명단을 받았어. 저쪽 스키장은 호텔 투숙 고객만 이용 가능하니 일일이 조사하면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참, 너 아직 내 질문에 답 안 했다.”이서는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만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친구에게 그녀의 걱정거리까지 얹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몸이 아프니까 엉뚱한 생각하나 봐.”같은 시각, 옆 방.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상언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SY 그룹 회장이라는 걸 이서 씨가 안 거 맞아? 확실해?”눈살을 찌푸리자 지환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확실하지 않지만, 이서가 자길 속였는지 물었다고. 그럼 이 일 말고 또 뭐가 있겠어?”이상언은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지환은 손을 뻗어 술잔을 받지 않고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몸을 소파에 우겨 넣었다.“내가 아니라 이서가 어떻게 할 건지 지켜 봐야지.
긴장한 탓에 온 몸이 경직되어 있던 이서는 이불 속에서 자기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지환의 부드러운 말투에 넘어가지 않고, 통증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해서 말할 힘도 없어요, 그나저나 내일 귀국 항공편은 예약했어요?”지환은 이서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털을 뒤로 넘기려고 손을 뻗었는데, 이서가 다시 피했다. 그는 허공에 뻗은 자신의 손을 보며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여전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 “항공권 예약할 필요 없어. 우리 전용기 타고 돌아갈 거야.”지환에게 궁금한 게 한 트럭은 되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죄책감이 들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지환의 목소리만 들으면,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이 뚫고 나올까 봐, 그녀는 혼신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머릿속으로 다시 꽁꽁 가둬 두고 있었다.“응, 나 먼저 자요.”“그래.” 지환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이번에 이서는 피하지 않았다.같은 시각, H 국, 공항.구태우가 캐리어를 건네면서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정말 ML 국에 갈 거야? 윤이서 거기 없으면?”소지엽은 씩씩하게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있든 없든 난 갈 거야.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그날, 집에 돌아온 구태우는, 소지엽에게 임현태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해주었다.말을 마치고, 그는 소지엽을 바라보았다. “난 왜 너나 임현태나 같은 처지인 거 같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 결국은 포기로 끝날 거 같은데…….”포기라는 말이 소지엽의 신경을 자극했다.그는 이전에도 포기했다.어린 시절, 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더러 포기하라고 했다. 하은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하은철은 하씨 집안의 도련님이고 직계 후계자였다.그는 소씨 집안의 사생아에 불과했다.그때는 자신이 이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물러났다.자기도 하은철 못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집에는 별일 없었고?” 지환은 어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이서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였다. 설령 본인이 아닌 임현태와 얘기하더라도. 그는 꽤 오랫동안 이서의 말을 듣지 못했다.기본적으로 그가 옆에 있으면, 그녀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별, 별일 없었습니다.” 임현태는 이서를 보았다. 이서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 올랐다.이전의 지환이 하던 모습 그대로 재연하고 있었다.임현태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웬 일이야? 둘이 몸이 바뀐 거야, 뭐야?!’“회사는?” 지환은 차에 타면서 물었다.“윤씨 그룹 말이야, 어때?”임현태는 이제 100%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바뀐 게 분명해.’‘그렇지 않으면 지환이 윤씨 그룹 상황에 대해 물어볼 이유가 없을 테니.’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 아구가 딱딱 들어맞았다.“윤씨 그룹은 별일 없었습니다. 비록 아가씨가 회사에 안 계셨지만, 아가씨에게 불복하던 사람들이 모두 회사를 나간지라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모두 회사 업무에 열중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가씨의 디자인 시안과 광고 모델을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이서의 눈썹이 움찔했다.디자인 시안을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숨을 들이쉬었다.“아, 맞다, 아가씨.”임현태가 지환을 보고 말했다.“며칠 전에 부모님이 회사에 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제가 쫓아냈는데, 괜…… 괜찮은 거죠?”“잘하셨어요.”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이서였다.임현태는 깜짝 놀랐다. 지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이서가 한 얘기란 걸 깨닫고, 그는 백미러로 어색하게 이서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는 별장에 도착했다.지환은 바로 내려서 이서 쪽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이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의 눈 밑에 어린 미소를 보며 잠깐 생각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임현태는 이서 뒤에서 눈치를 살피며 따라오는
잠시 뒤, 그는 1 층 베란다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내 동생 지환아, 드디어 전화를 받는구나.] 전화기 너머에서 귀신이 곡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여자 치맛폭에 푹 빠져 있나?]눈살을 찌푸린 지환의 입꼬리에 조롱 섞인 비웃음이 더해졌다. “기억력이 안 좋은 건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린 아무 혈연관계도 없다고…….”[하하, 그렇지, 혈연관계가 없는 건 맞지만, 나도 아버지 아들인 것 또한 사실이거든. M 국 정부가 인정한 거라고.]지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뭔 일이야?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시간 없거든. 너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아우, 내 동생, 역시 날 잘 안다니까. 그래, 동생이 H 국에서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갈 때, 내가 네 북미 시장 점유율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었거든. 네가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주려고 전화했지. 곧 북미 쪽에서 연락이 오겠네. 행운을 빌게, 사랑하는 좋은 동생.]말을 마치고, 양쪽은 모두 전화를 끊었다.지환의 안색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아니라 다를까, 바로 전화가 울렸다.이천이었다.[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가 M 국 정부와 체결한 대량의 주문이 다른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기술부에서도 아직 누구 소행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천은 급한 마음에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본사 쪽에서 지금 바로 귀국하실 건지 물어봐 달라고 합니다.]지환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2 층을 바라보았다.“내가 없으면 처리 안 돼는 거야?”이천은 땀을 훔쳤다. [힘들 것 같습니다. 이렇게 큰 계약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다 보니 지금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제가 보기에 들어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멍청한 것들!” 지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말했다.“상언에게 전화해서, 내가 M 국에 돌아가야 하니, 빨리 H 국에 들어오라고 해.” [네.]전화를 끊고 2층으로 올라간 지환은 노크하려다가, 이서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잠
구태우는 웃으며 말했다. [별 말씀을요……, 그나저나 지금 어디세요?]“집이에요.”저쪽에서 ‘푸우’소리와 함께 물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서가 바로 물었다.“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구태우는 입가의 물을 닦았다. [아니, 아니에요…….]‘내 불쌍한 친구는 또 헛걸음을 하셨구나.’어찌 보면 이게 신이 그에게 주는 힌트일지도 모른다. 둘은 운명이 아니니 빨리 포기하라고…….구태우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동안 소지엽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말지 고민했다.……다음날.지환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을 때, 이서는 ‘OK’라고 답장을 보냈다.이 답장으로 이서와 지환 둘 다 마음이 편해졌다.지환 입장에서는, 이서가 삐쳐있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한 게 아니란 걸 알아서 마음이 편하고,이서 입장에서는, 지환이 급하게 출장간 뒤 계속 걱정했는데 그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아서 마음이 편해졌다.지환에게 답장을 보낸 것도, 그가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였다.이런 모순된 마음은 그녀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회사에 도착해 질서 정연한 사무실 환경을 보니 이서도 자연스럽게 바로 회사 일에 투입할 수 있었다. “언니…….” 심소희는 이서에게 신입 사원을 소개했다. “여기 이분들은 각자의 직무에서 다년간 경험을 쌓은 경력직 사원들입니다. 이력서를 확인해보세요.”이서는 대충 한 번 훑어보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35 세 이상에, 전직 대기업 직원이었으며,모두 지연, 학연 등이 없는 일반 사람들이었다.따라서 10 여 년 직장생활을 했지만 부서의 1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이서가 그들을 훑어보았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우리 함께 잘 해봅시다. 자, 다들 가서 일 보세요.”그럴싸한 말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 같은 걸 잔뜩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이서의 화끈함에 깜짝 놀랐다.사무실을 나올 때까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심소
디자인팀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자, 이서는 또 다른 부서의 고위층 관리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샘플 원고에 대해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제가 보기에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새로 부임한 마케팅팀 팀장이 말했다.“저희 회사 제품의 포지셔닝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분기별 출시 상품을 보면 고급, 중급, 저급 상품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소비자군을 겨냥한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럴 경우…… 최종 결과는 어떤 지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이 문제에 대해 저도 고민해해 보았습니다.” 이서가 수중에 있는 자료를 펼쳤다. “현재 저희 회사 사정으로 보면, 고급화 전략은 회사의 자금과 실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중저가 시장을 공략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내놓을 ‘십이지’ 테마는 중저가시장을 타겟으로 하여 우리 회사의 인지도를 향상시킬 겁니다.” 홍보님 팀장도 말을 이었다.“중저가 시장을 공략하는 거라면, 홍보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명도가 있는 유명스타는 중저가 제품의 홍보모델을 하지 않을 거고, 삼류스타는 지명도가 낮아 회사의 인지도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이서는 홍보팀 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홍보모델 선정에 있어서 잘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톱스타는 힘들 겁니다. 현재 우리는 고액의 홍보비를 지급할 능력이 안 됩니다.” “…….”“또 다른 안건 있습니까?” 이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모두 침묵을 지켰다.“네, 그럼 별문제 없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이서의 말투가 가라앉았다.“그럼 새로운 전략으로 시작해 봅시다. 윤씨 그룹이 새롭게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런 만큼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사 발전의 발목을 잡는 행위는 우리 팀에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말을 끝내고 이서는 자료를 들고 성큼성큼 회의실을 나섰다.이서가 떠나자 회의실 안의 몇몇 고위층 관리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이 전략이 먹힐까요?”“거물급 스타를 홍보모델로 쓰지 않으면 어떻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