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의 주주뿐만 아니라 윤씨 그룹의 고위층 관리자들도 속속 회의실로 들어왔다.쭉 훑어보니,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모두 윤씨 집안의 친인척들이었다.현재의 윤씨 그룹은 회사라기보다는 가족 공동 작업장 같았다.모두 연줄로 회사에 들어왔으니 회사에 관심도 없고, 성지영과 윤재하의 배임 횡령을 적발한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아직 정식 선출이 시작되기 전이라 회의실 안은 시끌벅적했다.모두 이서와 윤수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리 크지 않은 회의실이라,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다.“윤이서 왜 온 거야? 굴욕을 자초하려고?”“흥, 윤 사장 넘어뜨리면 지가 사장 올라갈 줄 아나 봐? 회사가 정말 윤이서 손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진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내가 뭐랬어? 윤씨 집안의 많은 후배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게 윤수정이야.”“그래, 그리고 하은철 대표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수정이가 회사를 맡아야 우리 그룹도 해 뜰 날이 있을 텐데.”“…….”이서는 그들의 말을 들고서도 시종 무표정했다.맞은편의 윤수정은 의기양양하여 입꼬리가 이마까지 올라갔다.그녀는 입을 오므리고는 말했다.“언니, 언니가 이번 경선에 참가하는 건 여러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언니 용기는 가상해. 웃음거리가 될 줄 알면서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거,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내 경쟁상대인 언니에게 엄지척을 내밀겠어.”말하면서 그녀는 손에 든 물잔으로 이서의 잔을 부딪치려 했다.이서는 귀찮은 듯 눈꺼풀을 젖히며 말했다.“고맙지만, 너는 내 경쟁상대가 될 자격이 없어.”윤수정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바로 이때 그녀 책상 위에 놓은 핸드폰이 화면이 켜졌다.핸드폰을 확인한 윤수정의 입가에 찬란한 웃음이 어렸다.“원철이 오빠 왔네. 마중 나가야겠다.”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부러운 눈빛으로 윤수정을 쳐다보았다.마음속으로도 이 CEO의 자리는 무조건 윤수정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많은 얘기들 속에
하은철의 확답을 받자, 뒷걱정이 없어진 윤수정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하은철의 얼굴에 키스했다.“오빠 고마워.”말을 마친 윤수정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는 그녀의 이런 수법에 대해 이미 무감각해졌다.마음속에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윤수정의 이러한 행동거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모두의 시선이 하은철에게 떨어졌다.윤수정에게 기습 키스를 당한 하은철은 정신이 멍했다.그리고 잠시 뒤 곧 짜증이 밀려왔다.그렇다, 짜증이 났다.윤수정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오랜 기간 동안 재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하은철도 자기 기분을 티 내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그는 짜증났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눈살만 찌푸렸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는 윤수정의 과감한 표현에 대한 묵인으로 보였다.묵인했다는 건 즉 그와 윤수정의 관계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이는 이번 경선에서 윤수정에게 배팅한 사람들을 더욱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두 사람은 함께 이서 맞은편으로 걸어갔다.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수중의 자료를 보았다.이서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하은철의 마음은 다시 짜증이 났다.그는 이서가 예전처럼 한 번만이라도 정겹고 살갑게 웃어 준다면, 맹세코 모든 것을 버리고 윤씨 그룹의 CEO자리를 이서에게 넘겨줄 것이다.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녀는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자료만 보았다.하은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직원이 옮겨온 의자에 앉았다.이서 쪽에 앉은 주주들은, 하은철이 직접 주총에 온 걸 보고 마음이 뒤숭숭했다.이서가 장부를 보여 줬을 때, 그들은 이서의 능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했다.하지만 지금은…….하은철조차도 윤수정 편에 섰다.“심적 부담 갖지 마세요.”이서는 고개를 숙여 얘기했다. 목소리가 작았지만, 왠지 모르게 힘이 느껴졌다.“윤씨 그룹 주총이지, 하씨 그룹 주총이 아니잖아요, 하은철이 왔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윤이서가 경선에 참가하는 건, 우리에게 재밋거리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설령 주주를 두 명 구슬려 삶았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딱 보면 몰라, 대세가 이미 윤수정 쪽으로 기울었잖아.”“그러게,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맞나 봐. 윤이서는 정말 자기편에 설 사람이 있는 줄 알았나 봐. 주주들이 바보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는 무조건 윤수정이지.”“윤수정 뒤에는 하은철 대표가 떡하니 버티고 있잖아. 윤이서는 뭐가 있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남편……?”“…….”하은철이 있는 자리인지라 너무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서는 듣지 못했다. 심지어 회의실에서 정적이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계속 자신 앞에 놓인 서류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그녀는 경선과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이서의 곁에 앉은 두 주주는 우기광과 우기동으로, 두 사람은 사촌 형제지간이었다.그들이 애초에 윤씨 그룹에 투자했던 것도, 하씨 그룹 때문이었다.그러나 양전호, 구양태와는 또 달랐다.이들 두 형제는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투자했다.한때 윤씨 측의 적자 상황으로 두 가정은 하마터면 파탄 날 뻔했다.결국 그들이 투자한 신에너지 쪽이 대박을 터뜨리며 겨우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지금은 돈이 생겼지만, 그동안 온 가족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우기광은 이서를 보고 마침내 큰 결심을 한 듯 말했다.“나는 윤이서 씨를 지지하겠습니다.”그는 가타부타 언급없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장내에 킥킥거리는 비웃는 소리가 퍼졌다.우기동은 원래 윤수정을 선택하려 했지만 사촌형이 이미 이서를 선택한 이상 그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나도, 윤이서 씨한테 한 표 걸겠습니다.”이번에는 주위의 웃음소리가 확연히 더 커졌다.수군대는 소리도 더욱 거세졌다.이때 이서는 고개를 들어 조용환을 바라보았다.“조 대표님, 기타 4명의 주주들은 이미 표결을 마쳤는데, 대표님은……?”그녀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지켜보던 고위층들이 더
이서의 입가에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조용환을 바라보았다.“조 대표님, 만약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조대표님이 윤수정을 지지한다고 말씀하신 거 맞죠?”그녀는 일부러 ‘조 대표’를 강조해서 말했다.조용환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윤씨 그룹 주주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 조진명인 걸로 압니다만……, 당신은 조진명 사장 대신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습니다.”조용환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부자는 일심동체요, 우리는 같은 생각입니다.”“어, 그래요? 전화해서 물어볼까요?”“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윤수정은 비웃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가엾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언니, 정말 그렇게 윤씨 그룹 CEO, 대표이사가 되고 싶으면, 내가 양보할게.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그럴 필요 없잖아. 언니 지금 되게……억지 부리는 거 같아.”조용환한테 시선이 고정된 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조용환은 괜히 찔리는 듯 핸드폰을 꺼냈다.“그러죠, 이서 양이 원한다면,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죠. 아들도 같은 생각이면 깔끔하게 승복하는 거죠?”말이 끝나자, 조진명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조진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아빠? 나 좀 살려줘…….]조용환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며, 스피커폰을 끄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진명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의 조진명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용환의 음흉한 눈빛이 순식간에 이서에게 쏠렸다.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회의 테이블 옆으로 돌아왔다.이서는 두 손으로 팔짱을 꼈다.“어때요, 조진명 사장은 뭐라고 하던 가요?”조용환은 이를 꽉 깨물었다.“아들이 윤이서 양을 지지한답니다.”이 말이 나오자, 장내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조진명도 하 대표가 수정이 밀어
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여기는 회사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세요.”“윤이서, 시치미 떼지 마, 너나 나나 우리 다 알고 있잖아.”“하 대표님, 똑바로 얘기하시죠, 대체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이서 앞에 다가간 하은철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더 이상 이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조진명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네가 뒤에서 수작 부린 거 다 알 거든.”이서는 맑은 눈동자를 들어 하은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증거 있어?”하은철은 이서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한참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증거는 없지만, 조진명 부자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건 수상하잖아. 틀림없이 네가 뭔 짓을 했겠지, 윤이서, 난 널 너무 잘 알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이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그러고 보니, 우리 하은철 대표께서는 목적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을 아주 혐오하나 봐요.”“그래!” 하은철은 눈을 붉히며 호통을 쳤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너처럼 목적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뭉개는 사람이야!”‘오랜 기간 네가 수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윤수정이 좋아하는 거라면 네가 기어코 뺏었잖아.’‘나도 그렇고!’‘그리고 오늘 CEO 자리까지!’‘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어?!’이서는 입술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래요, 하은철 대표 부디 지금 한 얘기를 잘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말이 끝나자 그녀는 또 조용환을 쳐다보았다.“조 대표님, 하 대표에게 얘기 좀 해주시죠. 당신 부자께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게 저와 관계가 있는지……?”조용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입술이 움찔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하 대표님, 이번 결정은 이서 양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오로지…… 진명의 결정입니다!”조용환이 부인할수록 하은철은 이서가 한 짓이라고 확신했다.따라서 그녀에 대한 감정
“맞아!” 하은철은 윤수정을 두둔하고 나섰다.“수정이 싫다는 걸 내가 겨우 설득한 거라고.”윤수정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도 모르고 편들고 있는 답답이 하은철을 보며, 이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왜 웃어?” 하은철은 골이 상투 끝까지 났다.“네가 이리 쉽게 속는 게 웃겨서.”“뭐라고?” 하은철은 반감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넌 매일 윤수정의 곁에 붙어있으면서도, 꾀병인지도 몰랐니?”‘꾀병’이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 윤수정은 몸이 휘청거렸다.그러나 그녀는 곧 책상을 받치고 똑바로 섰다.“언니, 어떻게 이렇게 나를 모함할 수 있어?”하은철도 화가 나서 이서한테 노발대발했다.“윤이서, 너 대체 밑바닥이 어디야?!”이서는 하은철에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녀는 문어귀를 보며 이상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이서가 더 이상 별말 없자, 윤수정은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더욱 당당하게 나섰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언니,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언니가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내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는데……, 최소한…… 나한테…… 사과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윤수정의 눈물을 본 하은철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보았다.“윤이서, 너 당장 수정에게 사과해.”이서는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눈에는 ‘네가 뭔데’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었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이서의 고개를 눌러서라도 윤수정에게 사과시키고자 했다.하은철의 손이 자신에게 닿으려는 것을 본 이서는 혐오스럽다는 듯 옆으로 피했다.“건드리기만 해 봐.”하은철에 대한 혐오감은 이서의 온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다들 놀라서 멍하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하은철이 이서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서가 하은철을 기겁하도록 싫어하는 것 같은데?’바로 이때 자료 한 묶음을 안고 이상언이 들어왔다.그는 이서를 향해 인사했다.“늦지 않았죠?”“딱 마침 오셨
의사 세 명은 일제히 이상언을 쳐다보았다.이들 셋,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상처는 모두 옷으로 가린 부분에 숨겨져 있었다. 특히 이상언은 의사다 보니 급소를 피하되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이상언한테서 모진 고생을 다 한 세 사람은, 앞다투어 진실을 털어놓았다.“윤수정 님은 건강상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저 또한 그녀의 협박에 못 이겨 가짜 병력과 검사지를 작성했습니다. 하 대표님,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협박당했을 뿐입니다…….”하은철은 세 의사의 변명을 전혀 듣지 않았다.그는 누구한테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띵했다.텅 빈 머릿속에는 한 마디만 맴돌고 있다.‘윤수정은 건강상 전혀 이상이 없다…….’‘병이 없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멍하니 윤수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사람들 말이 사실이야? 왜? 왜? 나한테 왜 그런 거야?”윤수정은 하은철이 진실을 알게 되는 그 날을 상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래서 수감 중일 때 외부에서 구치소 내 상황을 전혀 확인할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자기 병이 완치되었다고 사기 행각을 버린 것이었다.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는데…….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각한 통증에 그녀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물을 흘렸다.“오빠, 내 얘기 좀 들어봐…….”말하면서 그녀는 하은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하은철은 무자비하게 뿌리쳤다.“그래서…… 어쨌던 날 정말 속인 거네. 그런 거네?”하은철은 고개를 숙이고 윤수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윤수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를 끝없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확실한 증거 앞에서 계속되는 그녀의 거짓말은 그녀에 대한 실망감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었다.윤수정은 하은철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었다.“그건…….”하은철의 입근육이 경련했다. 그는 꽉 쥔 주먹을
조용환도 조용히 자리를 떴다. 들어올 때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십년은 늙은 것 같았다.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이서가 신임 CEO로 선출되길 바라는 사람은 우기광 뿐이었다.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축하합니다, 이서 씨!”이서는 미간을 펴고 눈썹을 치켜 뜨며 말했다.“저도 축하드립니다.”우기광은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장부가 생각나 웃으며 말했다.“윤재하 사장의 횡령 건을 해결하겠다는 말씀이군요?”고개를 젓는 이서의 눈빛에 강한 자신감이 내비쳤다.“그 뿐만 아닙니다. 앞으로 윤씨 그룹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현명한 선택하신 걸 축하드립니다.”우기광은 살짝 멍해졌다.상인으로서,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이서처럼 자신만만한 사람은 처음 보는 듯했다.“이서 씨, 아니……, 대표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우기광은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물었다.“실례될 지 모르겠지만,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그이 진지한 눈빛에서 이서는 그가 그녀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나온 질문인 게 느껴졌다.이서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남편이요.”우기광과 우기동은 모두 멍해졌다.이서는 가방을 챙기면서 말했다.“자, 두 분도 바쁘신데,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그녀는 지금 이 좋은 소식을 얼른 지환에게 알리고 싶었다.얼굴 보고!직접!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우기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기광에게 물었다.“형, 윤이서가 골치덩어리 윤씨 그룹을 윤씨라는 난장판을 잘 수습할 수 있을까?”“전에는 못 미더웠는데, 오늘 보니…… 아마 가능할 거 같기도…….”“하지만 방금 그 얘기 들었지? 아니 자신감의 원천이 남편이래? 이성적이고 성숙한 회사 대표라면 이런 감성적인 말을 하지 않을 텐데.”우기광과 우기동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너도 오늘 상황 다 지켜봤잖아. 정말 아무 능력이 없었다면 조진명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겠어?”우기동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