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 여기는 회사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세요.”“윤이서, 시치미 떼지 마, 너나 나나 우리 다 알고 있잖아.”“하 대표님, 똑바로 얘기하시죠, 대체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이서 앞에 다가간 하은철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더 이상 이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조진명이 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을까? 네가 뒤에서 수작 부린 거 다 알 거든.”이서는 맑은 눈동자를 들어 하은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증거 있어?”하은철은 이서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한참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증거는 없지만, 조진명 부자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건 수상하잖아. 틀림없이 네가 뭔 짓을 했겠지, 윤이서, 난 널 너무 잘 알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이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그러고 보니, 우리 하은철 대표께서는 목적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을 아주 혐오하나 봐요.”“그래!” 하은철은 눈을 붉히며 호통을 쳤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너처럼 목적을 위해 남을 무시하고 뭉개는 사람이야!”‘오랜 기간 네가 수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윤수정이 좋아하는 거라면 네가 기어코 뺏었잖아.’‘나도 그렇고!’‘그리고 오늘 CEO 자리까지!’‘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어?!’이서는 입술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그래요, 하은철 대표 부디 지금 한 얘기를 잘 기억해 두길 바랍니다.”말이 끝나자 그녀는 또 조용환을 쳐다보았다.“조 대표님, 하 대표에게 얘기 좀 해주시죠. 당신 부자께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게 저와 관계가 있는지……?”조용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입술이 움찔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하 대표님, 이번 결정은 이서 양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오로지…… 진명의 결정입니다!”조용환이 부인할수록 하은철은 이서가 한 짓이라고 확신했다.따라서 그녀에 대한 감정
“맞아!” 하은철은 윤수정을 두둔하고 나섰다.“수정이 싫다는 걸 내가 겨우 설득한 거라고.”윤수정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도 모르고 편들고 있는 답답이 하은철을 보며, 이서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왜 웃어?” 하은철은 골이 상투 끝까지 났다.“네가 이리 쉽게 속는 게 웃겨서.”“뭐라고?” 하은철은 반감으로 눈살을 찌푸렸다.“넌 매일 윤수정의 곁에 붙어있으면서도, 꾀병인지도 몰랐니?”‘꾀병’이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 윤수정은 몸이 휘청거렸다.그러나 그녀는 곧 책상을 받치고 똑바로 섰다.“언니, 어떻게 이렇게 나를 모함할 수 있어?”하은철도 화가 나서 이서한테 노발대발했다.“윤이서, 너 대체 밑바닥이 어디야?!”이서는 하은철에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녀는 문어귀를 보며 이상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이서가 더 이상 별말 없자, 윤수정은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더욱 당당하게 나섰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언니,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언니가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내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는데……, 최소한…… 나한테…… 사과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윤수정의 눈물을 본 하은철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보았다.“윤이서, 너 당장 수정에게 사과해.”이서는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눈에는 ‘네가 뭔데’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었다.하은철은 화가 나서 이서의 고개를 눌러서라도 윤수정에게 사과시키고자 했다.하은철의 손이 자신에게 닿으려는 것을 본 이서는 혐오스럽다는 듯 옆으로 피했다.“건드리기만 해 봐.”하은철에 대한 혐오감은 이서의 온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다들 놀라서 멍하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하은철이 이서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서가 하은철을 기겁하도록 싫어하는 것 같은데?’바로 이때 자료 한 묶음을 안고 이상언이 들어왔다.그는 이서를 향해 인사했다.“늦지 않았죠?”“딱 마침 오셨
의사 세 명은 일제히 이상언을 쳐다보았다.이들 셋,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상처는 모두 옷으로 가린 부분에 숨겨져 있었다. 특히 이상언은 의사다 보니 급소를 피하되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이상언한테서 모진 고생을 다 한 세 사람은, 앞다투어 진실을 털어놓았다.“윤수정 님은 건강상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저 또한 그녀의 협박에 못 이겨 가짜 병력과 검사지를 작성했습니다. 하 대표님,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협박당했을 뿐입니다…….”하은철은 세 의사의 변명을 전혀 듣지 않았다.그는 누구한테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띵했다.텅 빈 머릿속에는 한 마디만 맴돌고 있다.‘윤수정은 건강상 전혀 이상이 없다…….’‘병이 없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멍하니 윤수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저 사람들 말이 사실이야? 왜? 왜? 나한테 왜 그런 거야?”윤수정은 하은철이 진실을 알게 되는 그 날을 상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래서 수감 중일 때 외부에서 구치소 내 상황을 전혀 확인할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자기 병이 완치되었다고 사기 행각을 버린 것이었다.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는데…….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각한 통증에 그녀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물을 흘렸다.“오빠, 내 얘기 좀 들어봐…….”말하면서 그녀는 하은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하은철은 무자비하게 뿌리쳤다.“그래서…… 어쨌던 날 정말 속인 거네. 그런 거네?”하은철은 고개를 숙이고 윤수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윤수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를 끝없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확실한 증거 앞에서 계속되는 그녀의 거짓말은 그녀에 대한 실망감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었다.윤수정은 하은철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었다.“그건…….”하은철의 입근육이 경련했다. 그는 꽉 쥔 주먹을
조용환도 조용히 자리를 떴다. 들어올 때의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십년은 늙은 것 같았다.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이서가 신임 CEO로 선출되길 바라는 사람은 우기광 뿐이었다.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축하합니다, 이서 씨!”이서는 미간을 펴고 눈썹을 치켜 뜨며 말했다.“저도 축하드립니다.”우기광은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장부가 생각나 웃으며 말했다.“윤재하 사장의 횡령 건을 해결하겠다는 말씀이군요?”고개를 젓는 이서의 눈빛에 강한 자신감이 내비쳤다.“그 뿐만 아닙니다. 앞으로 윤씨 그룹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현명한 선택하신 걸 축하드립니다.”우기광은 살짝 멍해졌다.상인으로서,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이서처럼 자신만만한 사람은 처음 보는 듯했다.“이서 씨, 아니……, 대표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우기광은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물었다.“실례될 지 모르겠지만,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그이 진지한 눈빛에서 이서는 그가 그녀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나온 질문인 게 느껴졌다.이서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남편이요.”우기광과 우기동은 모두 멍해졌다.이서는 가방을 챙기면서 말했다.“자, 두 분도 바쁘신데,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그녀는 지금 이 좋은 소식을 얼른 지환에게 알리고 싶었다.얼굴 보고!직접!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우기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기광에게 물었다.“형, 윤이서가 골치덩어리 윤씨 그룹을 윤씨라는 난장판을 잘 수습할 수 있을까?”“전에는 못 미더웠는데, 오늘 보니…… 아마 가능할 거 같기도…….”“하지만 방금 그 얘기 들었지? 아니 자신감의 원천이 남편이래? 이성적이고 성숙한 회사 대표라면 이런 감성적인 말을 하지 않을 텐데.”우기광과 우기동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너도 오늘 상황 다 지켜봤잖아. 정말 아무 능력이 없었다면 조진명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겠어?”우기동
지하 주차장.차에 타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야 이서는 비로소 자신이 심하게 떨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버튼을 여러 번 눌러서야 마침내 지환과의 전화에 성공했다.전화는 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바로 받았다.[여보.]이서는 본래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났다.“지환 씨, 우리가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다고요!”우리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지환도 가슴이 쿵쾅 뛰었다.[자기야, 우리 자기 정말 장하다!]그의 눈가에 웃음이 가득했다.옆에 서 있던 이천이 몰래 지환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어찌 조 단위 프로젝트를 따냈을 때도 더 좋아하시지.’“혹시 점심 때 시간 있어요?” 이서는 코를 들이마셨다.“우리 같이 밖에서 축하해요. 하나랑 그리고……상언 씨도 같이 불러서……, 이번에 정말 상언 씨 아니라면 힘들었을 거예요. 제대로 감사해야죠.”[그래.]“그럼 내가 하나에게 전화할 게요.” 이서는 백미러로 눈시울을 붉힌 자신을 쳐다보며 신기했다.밖에서 그녀는 완전 무장한 여전사였다.그러나 지환 앞에서 그녀는 무장해제한 아이처럼 유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응.] 지환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데리러 갈까?]“아니요, 제가 임현태 씨한테 하나 픽업해 오라고 할게요.”임현태를 언급하자, 지환의 표정이 멈칫했다.하지만 곧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그래.]지환과 통화를 마친 이서는 곧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아까 지환과 통화할 때의 흥분된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전화기 너머의 임하나가 오히려 그녀보다 더 흥분했다.[아아아아, 이서야, 너무 대견하다, 내가 월차 내고 그 자리에 갔어야 하는 건데…… 정말 아쉽네! 이서야, 넌 나의 워너비야!]임하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서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남의 백 마디 아첨보다 가까운 사람의 한 마디 칭찬이 훨씬 더 감동적인 법이다.“아이구,
‘임하나 앞에서도 농담을 하는 거 보니, 오늘 우리 친구 기분이 엄청 좋은가 보네.’이상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나야 그러고 싶지, 근데 모 여사께서 협조를 안 해주네. 당신들 앞에서 자꾸 조크나 주고…….”이서도 빙그레 웃었다.“하나야, 들었지? 누군 지금 신문고 울릴 판이다. 얼른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겹경사 파티 하자고.”“그만 해, 오늘은 너의 좋은 날이잖아, 주객전도가 되서는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큰 맘 먹고 이서와 지환 앞에서 자발적으로 이상언의 손을 잡았다.이상언은 고개를 숙이고 겹친 손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임하나의 경고가 들려왔다.“적당히 하시죠.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를 수도…….”이상언은 곧 입을 다물고, 순순히 임하나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이서와 지환은 눈을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뭐 먹을까? 빨리 주문하자, 배고파 죽겠어.” 임하나는 이서가 놀리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그들은 얼른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이상언은, 하은철이 윤수정에 속은 모습을 얘기하면서 배 끌어안고 웃었다.“하하하, 하은철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어!”임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샘통이다. 전에 이서 보고 가식덩어리라고 하더니, 진짜 꽃뱀은 윤수정이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봐. 어떻게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이제 잘 됐네. 드디어 윤수정의 정체를 똑똑히 봤을 테니. 후회해도 소용없어!”지환은 고개를 돌려 이서를 보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지환의 시선을 느낀 이서도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눈빛으로 지환에게 ‘왜’냐고 물었다.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상언의 생생한 주총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임하나도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나중에는?”“윤수정이 하은철의 차에 오르는 것까지는 봤는데……
이서는 지환에게 숨기거나 감추거나 하지 않고 구태우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네, 그럼 지금 보내주세요.]잠시 뒤, 구태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컴퓨터 바이러스로 관련 자료 복구는 불가합니다. 다행이 조사 자료를 프린트해 놓은 게 있어서……. 혹시 오후에 시간 있으세요?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생각해 보니 오후에 별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답장했다.[네. 시간 있어요, 수고 좀 해주세요. 감사합니다.]구태우는 괜찮다는 간단한 답장을 하고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점심식사는 이서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가 계산했다.임하나와 이상언은 먼저 갔다.지환은 가만히 서 있었다.“오후에 출근 안 해도 돼요?”“해야지.” 지환은 손가락으로 이서의 여린 붉은 입술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 이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자기 몸에 찰싹 밀착시켜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그런데 출근하기 싫어.”이서는 웃었다.“그럼 뭐 하고 싶은데요?”“너.” 지환이는 한 글자만 내뱉었다.이서는 지환이 얘기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리고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아우, 참…….”지환은 이서의 귓불을 깨물었다.“자기야, 자기 또 나 꼬시는 거지?”이서는 수줍어하며 지환의 가슴을 팔로 받치며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얼른 출근해요.”지환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대신 오늘 저녁에 일찍 집에 오겠다고 약속해.”“어서 가요.”“약속한 거다? 알았지?”“…….”정확히 물러날 때를 잘 아는 지환은 이서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럼 난 집에서 자기 기다릴게.”그는 말을 마치고 차에 올라 떠났다.“…….”얼굴의 홍조가 좀 사라지자 이서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서우로 걸어갔다.지환은 백미러로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은 뒷좌석을 훔쳐보던 임현태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지환의 시선을 받은 임현태는 놀라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오 마이 갓!’그는 연애 중
임현태는 지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왜 이별을 고하는 말 같지?’‘설마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라는 건가?’이렇게 생각하니, 임현태의 온몸의 피가 또 들끓기 시작했다.……김청용 사무실.충격을 받은 김청용은 제자리에 서서 무려 수십 초 동안 멍해 있었다.이서는 미소를 지었다.“네, 내일 정식으로 취임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장님께 정식으로 사직하러 왔습니다.”김청용은 박수를 쳤다.“정말 쾌거네요. 내가 듣기론 이번 경선을 위해 윤수정이 하은철 대표를 앞세워 여기저기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설쳤다는데…… 그러고 보면, 이서 씨가 제친 건 윤수정이 아니라 하은철인 거네요!”김청용은 정말 너무 궁금했다. 이서는 도대체 어떻게 주주들을 설득했을까?“사장님 과찬이십니다. 그냥 윤씨 그룹 내부 문제입니다. 음……. 오늘 사직서 정식 제출하고, 사장님께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들렸습니다.”“이렇게 급하게? 오늘 가려고요?”“네, 아시다시피 윤씨 그룹은 현재 난장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부임해서 뒷수습해야죠.”김청용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의 사직서에 서명한 후 이서에게 말했다.“앞으로 우리 다시 사업 파트너로 협력할 일이 있을 겁니다.”“물론입니다.”이서도 웃으며 말했다.“윤씨 그룹은 의류 패션사업을 위수로 하는 기업으로, 앞으로 여성 소비자를 겨냥해서 사업을 펼칠 예정입니다. 따라서 곧 머지않아 서우와 함께 협력하는 비즈니스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두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김청용은 사인한 사직서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이서 씨, 미안한데,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따가 가기 전에 다시 인사해요.”“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아니, 해야죠.” 김청용은 이서와 악수를 하고 이서가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그는 이서가 처음 입사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빠르게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서를 보며, 그는 이서가 조만간 재계의 전설로 자리매김할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