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사람들은 주차장에 그들 외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김 원장은 이서를 쳐다보고는, 두 사람이 한통속인 줄 알고 경호원에게 호령했다.“저 여자도 같이 치워버려!”“잠깐만요, 김 원장님…….” 이서가 김 원장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원장님께서 저는 몰라도 이상언 의사 선생님을 알고 계시죠?”김 원장은 금테 안경을 잡고는 무시하듯 말했다.“당연히 알죠. 왜요? 이 선생 친구라고 하려고요?”.“저 이상언 씨 친구 맞습니다.”김 원장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가씨, 내가 매일 이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상언 선생 친구라고 사칭하면서 나한테 접근하는지 알아요? 사기꾼들 같으니라고, 이상언 선생이 이 병원의 최대 주주라는 소식은 어디서 알아가지고? 다들 친구래? 뭐, 이상언 선생을 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이상언 씨가 아가씨 알아요?”이 병원의 최대 주주가 이상언이라니, 이서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지금까지 이상언이 비교적 유명한 외교의사인 줄로만 알았다.“이상언 씨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김원장이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네요.”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이상언의 전화번호로 입력하고 전화를 걸어 김 원장에게 건네주었다.반신반의하며 휴대전화를 넘겨받은 김 원장은 전화번호를 한 번 보고, 긴장한 나머지 땀을 뻘뻘 흘렸다. 전화기 너머로 이상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색이 급변하면서,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는 눈빛도 순식간에 공손해졌다.“네, 네, 반드시 그 친구를 잘 치료하겠습니다!”통화를 마친 김 원장은 공손하게 휴대전화를 이서에게 돌려주었다.“윤이서 씨,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당신이 이상언 의사 친구라는 것도 못 알아보고……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이서는 휴대전화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뭐 그럴 수도 있죠. 상언 씨 친구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저 오늘 원장님 특강을 들으러 왔어요. 가능하죠?”“그럼, 당연히 가능하죠.”옆에 있던 박도양은 멍해서 두 사람
김 원장은 이서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했다.“이서 씨 친구이니, 당연히 가능하죠. 지금 바로 산아내과에 전화해서 등록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이서는 김원장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박도양을 쳐다보았다.“부디 다른 수작 안 부리길 바랍니다.”박도양은 쓴웃음을 지었다.“윤 회장을 도와 분식회계 한 것도 아이 때문이었어요. 장부, 옥살이…… 이런 건 나한테 결코 중요하지 않아요.”이서는 일순 박도영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오직 아이를 갖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내하는…… 이는 미친 짓이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30분 뒤 박도양의 아내는 비밀 장부를 들고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병원에서 진료 가능하다는 얘기에 두 사람은 기뻐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나중에야 비밀 장부를 이서에게 넘기는 조건사항이 있다는 걸 알고, 그녀는 망설였다.“여보, 이서 씨에게 줍시다. 이서 씨 도움 없이 우리 여기서 진료 못 받아요.”“그런데…….”박도양 아내는 뭔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괜찮아요, 줘요.”박도양 아내는 잠깐 망설이다가, 큰 맘 먹은 듯 입술을 꽉 물고 장부를 이서에게 건넸다.이서는 건네받은 장부를 펼쳐 보았다.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진짜 장부가 맞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김 원장에게 말했다.“원장님, 가시죠.”두 사람이 몇 걸음 못 갔는데 박도양 아내가 뒤에서 쫓아왔다.“아가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뭔데요? 얘기하세요.”“이 장부를 경찰이나 검찰에 넘기지 말아 주세요.”박도양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이 모든 건 윤재하 회장이 시킨 일입니다. 우리 남편은 아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하게 되었고요…….”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이서는 이상하게도 전혀 안쓰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황 봐서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김 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원에 들어갔다.박도양과 아내도 곧 산아내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집에 돌아온 지환은 오늘 따라 집안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는 걸 직감했다.그는 웃으며 요리하고 있는 이서를 뒤에서 안았다.“누가 우리 애기, 기분 나쁘게 했을까?”이서가 박도양을 찾아간 걸, 지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환을 밀며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근데 왜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는 듯한 얼굴이지?” 지환은 이서의 손에 든 오이를 빼앗아 칼질하기 시작했다.“아니에요.” 이서는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주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지환은 이미 오이를 다 썰었다.“또 날 놀렸죠?”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밥 다 되면 부를 게.”이서는 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주방에서 음식 하느라 바쁜 지환을 보며 입을 뗐다.“지환 씨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한 적 있어요?”지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전에 지환 씨가 아이 갖고 싶댔잖아요. 내가 싫다고 한 이후로, 한 번도 얘기를 안 꺼낸 거 같아서요…….”이서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계속 말했다.“만약 내가 계속 아이 가질 마음이 없다면, ……지환 씨 괜찮겠어요?”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난 자기와 결혼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아이는…….”그는 시선을 음식 조리에 집중하며 말했다.“그 때도 아이 얘기 꺼낸 건…… 아이를 좋아해서 원했던 건 아니였어.”“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이서가 눈을 깜박였다.“내가 그때 자기와 아이를 갖자고 했던 건…….”지금 생각하니 그때 자신은 참으로 바보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싫어서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아이가 있으면, 자기가 하은철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로 생각했거든.”이서는 지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지환은 이서의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얼른 말을 이었다.“자기야, 나 그때 정말 정신 나갔었나 봐. 화내지 마. 앞으로 다시 아이 얘기는 안 꺼낼 게. 자기가 원하면 낳고, 싫으면 안 낳는 거야
윤씨 그룹은 소기업으로, 주주가 6명에 불과했다. 윤씨 가문이 최대 주주이지만, 윤수정이 윤씨 가문의 후보자가 경선에 나오는 지라, 선임 CEO인 윤재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즉 다른 다섯 명만이 차기 CEO가 될 사람을 결정하게 된다.그런데, 이 다섯 명 중, 두 명은 하은철의 사람이다. 즉, 틀림없이 윤수정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이서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세 사람을 그녀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것이다.이 또한 그녀가 반드시 진짜 장부를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이 장부만 있으면 윤씨 부부가 빼돌린 돈을 회수할 수 있으니.머릿속으로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이서야, 오늘 점심에 너 드레스 보러 가자.]“너 출근 안 해?”[점심 시간에 두시간 정도 시간 낼 수 있어.]“그러자.” 이서는 쿡이 소개한 그 드레스 샵에 대해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워낙 고가의 드레스 샵으로 유명한 곳이라.[그럼 있다가 전화할게.]“OK.”곧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이서와 임하나는 메리 컬러에서 합류했다.이상언도 같이 온 것을 보고, 이서는 깜짝 놀랐다.“상언 씨도 어떻게……?”임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기어코 오시겠답니다.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미리 보고, 지환 씨 앞에서 자랑한대나 뭐래나…….”말을 마치고 이서 앞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남자들은 정말 유치해.”이서는 웃으며 반박하지 않았다.가끔 보면, 정말 유치한 거 같긴 했다.세 사람은 함께 웨딩드레스 샵에 들어갔다. 곧 직원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어느 분 드레스를 고르실 건가요?”“저요.”직원은 위아래로 이서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신부님 같은 몸매는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어도 예뻐요.”이서는 웃으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샵 안쪽으로 들어갔다.상류층 인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드레스 샵답게 드레스의 원단이나 재단이 세련되고 고급지며 단조롭지 않은 것이,
그들의 이러한 모습에 이서와 임하나를 약속이나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임하나는 이서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큰 스케일이라니, 설마 Y국의 여왕이 온 건 아니겠지?”인기척을 듣고 나온 점장은 경호원들을 보며, 곧 업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신가요?”“우리는 이서정 씨 경호원입니다. 있다가 이서정 씨가 여기로 드레스 피팅 올 겁니다. 혹시 당신이 여기 점장인가요?”경호원은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아래로 점장을 보았다.“직원 외 기타 사람들은 내보내기 바랍니다. 만약 이서정 씨 개인 사진 등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이 샵도 문 닫게 될 겁니다.”“이서정 씨요, 혹시 배우 이서정 씨 말하는 겁니까?”“네.”이서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점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직원에게 손님을 내보내라고 했다.점심 시간인지라 드레스 샵에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서와 임하나 외에 한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그 손님은 이서정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쓱 나가버렸다.샵 측의 요구에 임하나는 갑자기 욱했다.“이서정이 뭔데? 여기 사장이에요? 뭔데 우릴 가라 마라야?!”직원이 난처한 듯 말했다.“이서정 씨는 하 회장의 아내입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양해 부탁드립니다.”이서도 굳이 이 샵에서 웨딩드레스를 살 생각이 없었던 지라, 임하나에게 말했다.“직원한테 그러지 마. 우리처럼 월급쟁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는 거지. 참으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하나야, 이분들 난처하게 하지 말고 우리 가자.”임하나는 마음속으로 불쾌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이서랑 샵에서 나오려던 참이었다.“이서정 너무한 거 아냐?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내가 보기에 그녀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주 오는 이서정과 이하영이랑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이서를 본 이하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서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다행히 눈치 빠른 임하나
그러나 지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이서정도 함께 있다는 생각에 일을 크게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언어적 공격 모드를 취했다.이서정은 왠지 이서가 눈에 익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곧 이하영에게 물었다.“사모님, 이 여자 누구예요?”“서정 씨, 아직 모르는구나.”이하영이 이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윤이서라고, 하씨 그룹 후계자인 하은철에게 시집가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는데, 괜히 고고한 척 건방 떨며, 평범한 직장인에게 시집가서 개고생하며 사는 여자…….”눈앞의 사람이 윤이서라는 얘기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이서 본인조차도 직접 나서서 소지엽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며, 남편이 일반인이라고 해명했던 게 기억났다.그 얘기인즉 이 샵의 드레스를 구매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지금의 이서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이서한테도 잘 보이려고 아부했을 텐데 지금은…….“아, 그 여자였구나.”이서정은 무시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세상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네요.”“여보세요, 당신들 정도껏 해!”참다 못한 임하나가 나서서 한 소리 했다.“그까짓 거 웨딩드레스, 내가 사줄게, 이서야 맘에 드는 걸로 골라!”몇 백만 원 정도는 그녀도 살 수 있다.안 되면 할부하면 되니까.이서는 임하나가 그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나선 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서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삶은 자신이 살아가는 거지, 남의 시선에 의해 바뀌는 게 아니다.한순간의 화풀이를 위해 몇 백만 원을 주고, 한 번 입는 웨딩드레스를 사는 건 너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우리 가자!”“왜? 살 능력이 안 되니까 이제 꼬리 빼는 거야?” 이하영은 냉소하며 비꼬았다.“자기 분수나 알고 오지, 여기가 어디라고, 거지 년이…….”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하영을 바라보았다.“난 왜 민씨 가문이 지금까지 다른 3대 가문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 궁금했는데,
이상언은 금테 안경을 밀었다.“이씨입니다만?”이하영은 머릿속으로 상류층 가문 중 이씨인 집안이 있는 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4대 가문 중 4위인 민씨 집안이지만, 그들은 3대 가문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여겨보거나 신경 쓰는 집안도 가문도 없었다.이하영은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은 듯 비웃으며 말했다.“허허, 점잖게 생긴 걸 보니 글공부는 좀 한 거 같은데……, 공부 많이 하면 뭐하나? 결국은 우리 대가문들의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살아갈 텐데…….”이상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도 명문세가의 자제였다.대대로 의사 집안이라 교양과 품위가 넘쳤다.그도 이하영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상언 씨!”임하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민씨 집안처럼 근본 없는 졸부들과 무슨 얘길해요? 저 사람들 눈에는 돈밖에 안 보이는데.”“그렇구나, 어쩐지 입만 열면 다 돈이더라니.”맞장구를 치는 두 사람을 보고 이서는 입을 오므렸다.비록 이상언이 뭘 하려는 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호흡이 아주 척척 잘 맞았다. 그가 3개월 뒤 당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건 따놓은 당상 같았다.반면, 이하영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너희들…….”옆에 있던 이서정은 상황을 보고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이런 거지들과 뭐 하러 화를 내요? 싸워 봤자 입만 아프지, 저 사람들 때문에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잖아요. 점장님……!”이서정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 사람들 내보내 주세요.”“잠깐!” 이상언은 눈썹을 비꼬았다.“고객을 이런 식으로 내쫓는 건 처음이네요?”“사러 왔어야 고객이지, 무슨…….” 이하영은 이상언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살 돈은 있고?”그녀의 말에 이상언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에게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이하영이 처음이었다.그는 더 이상 이하영과 이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이서에게 말했다.“이서 씨, 쿡이 준 목록 꺼내 봐요.”이서가 리스트를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따가 결제해 보면 알 수 있겠죠.” 이상언은 이서를 돌아보며 말했다.“이서 씨, 골라봐요.”‘어차피 결국은 지환이 계산할 테니까.’이서도 천재 의사인 이상언의 몸값이 비싼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일반 친구일 뿐인데, 고액의 드레스를 사는 건 이서도 마음속으로 편하지 않을 거다.돈으로 돌려주고 싶어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밖의 금액이었다.“상언 씨, 우리 그냥 가요. 나 출근시간 다 됐어요.”이서가 몸을 돌려 나가고자 하자, 이하영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내가 뭐랬어? 가짜라고 했잖아. 허허, 부부가 아주 호흡이 척척 잘 맞는구다.”이서가 화를 내기도 전에 임하나가 참지 못하고 이서의 옷자락을 잡고는 이를 악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걱정 말고 사. 내가 너에게 선물한 셈 치자. 내가 나중에 상언 씨에게 갚을 게.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 여자 정말 너무 개매너야.”이서은 가볍게 웃었다.“뭐 하러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함부로 돈을 써?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굳이 살 필요 없잖아. 대여해서 입어도 되고…….”이서의 말을 들은 이상언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남편의 재력이면 평상복으로 매일 드레스를 입고 다녀도 된다고…….’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이서를 보면서 이상언은 다소 미안한 감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의 행복을 위해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자 하는 충동을 억누르고 이서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돈은 나한테 껌 값이에요.”잠시 멈추었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나 이렇게라도 분풀이 해야겠어요. 이서 씨가 안 사면, 나 울화병이 날 거 같아요. 아, 열 받아.”임하나도 옆에서 부추겼다:“그래, 이서야, 걱정 말고 마음껏 골라 봐. 이 정도 금액대는 상언 씨한테 아무것도 아니야.”두 사람은 이서를 가게 안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점원에게 말했다.“먼저 드레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