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러한 모습에 이서와 임하나를 약속이나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임하나는 이서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큰 스케일이라니, 설마 Y국의 여왕이 온 건 아니겠지?”인기척을 듣고 나온 점장은 경호원들을 보며, 곧 업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신가요?”“우리는 이서정 씨 경호원입니다. 있다가 이서정 씨가 여기로 드레스 피팅 올 겁니다. 혹시 당신이 여기 점장인가요?”경호원은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아래로 점장을 보았다.“직원 외 기타 사람들은 내보내기 바랍니다. 만약 이서정 씨 개인 사진 등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이 샵도 문 닫게 될 겁니다.”“이서정 씨요, 혹시 배우 이서정 씨 말하는 겁니까?”“네.”이서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점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직원에게 손님을 내보내라고 했다.점심 시간인지라 드레스 샵에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서와 임하나 외에 한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그 손님은 이서정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쓱 나가버렸다.샵 측의 요구에 임하나는 갑자기 욱했다.“이서정이 뭔데? 여기 사장이에요? 뭔데 우릴 가라 마라야?!”직원이 난처한 듯 말했다.“이서정 씨는 하 회장의 아내입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양해 부탁드립니다.”이서도 굳이 이 샵에서 웨딩드레스를 살 생각이 없었던 지라, 임하나에게 말했다.“직원한테 그러지 마. 우리처럼 월급쟁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는 거지. 참으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하나야, 이분들 난처하게 하지 말고 우리 가자.”임하나는 마음속으로 불쾌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이서랑 샵에서 나오려던 참이었다.“이서정 너무한 거 아냐?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내가 보기에 그녀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주 오는 이서정과 이하영이랑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이서를 본 이하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서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다행히 눈치 빠른 임하나
그러나 지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이서정도 함께 있다는 생각에 일을 크게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언어적 공격 모드를 취했다.이서정은 왠지 이서가 눈에 익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곧 이하영에게 물었다.“사모님, 이 여자 누구예요?”“서정 씨, 아직 모르는구나.”이하영이 이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윤이서라고, 하씨 그룹 후계자인 하은철에게 시집가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는데, 괜히 고고한 척 건방 떨며, 평범한 직장인에게 시집가서 개고생하며 사는 여자…….”눈앞의 사람이 윤이서라는 얘기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이서 본인조차도 직접 나서서 소지엽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며, 남편이 일반인이라고 해명했던 게 기억났다.그 얘기인즉 이 샵의 드레스를 구매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지금의 이서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이서한테도 잘 보이려고 아부했을 텐데 지금은…….“아, 그 여자였구나.”이서정은 무시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세상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네요.”“여보세요, 당신들 정도껏 해!”참다 못한 임하나가 나서서 한 소리 했다.“그까짓 거 웨딩드레스, 내가 사줄게, 이서야 맘에 드는 걸로 골라!”몇 백만 원 정도는 그녀도 살 수 있다.안 되면 할부하면 되니까.이서는 임하나가 그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나선 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서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삶은 자신이 살아가는 거지, 남의 시선에 의해 바뀌는 게 아니다.한순간의 화풀이를 위해 몇 백만 원을 주고, 한 번 입는 웨딩드레스를 사는 건 너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우리 가자!”“왜? 살 능력이 안 되니까 이제 꼬리 빼는 거야?” 이하영은 냉소하며 비꼬았다.“자기 분수나 알고 오지, 여기가 어디라고, 거지 년이…….”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하영을 바라보았다.“난 왜 민씨 가문이 지금까지 다른 3대 가문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 궁금했는데,
이상언은 금테 안경을 밀었다.“이씨입니다만?”이하영은 머릿속으로 상류층 가문 중 이씨인 집안이 있는 지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4대 가문 중 4위인 민씨 집안이지만, 그들은 3대 가문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여겨보거나 신경 쓰는 집안도 가문도 없었다.이하영은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은 듯 비웃으며 말했다.“허허, 점잖게 생긴 걸 보니 글공부는 좀 한 거 같은데……, 공부 많이 하면 뭐하나? 결국은 우리 대가문들의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살아갈 텐데…….”이상언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도 명문세가의 자제였다.대대로 의사 집안이라 교양과 품위가 넘쳤다.그도 이하영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상언 씨!”임하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민씨 집안처럼 근본 없는 졸부들과 무슨 얘길해요? 저 사람들 눈에는 돈밖에 안 보이는데.”“그렇구나, 어쩐지 입만 열면 다 돈이더라니.”맞장구를 치는 두 사람을 보고 이서는 입을 오므렸다.비록 이상언이 뭘 하려는 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호흡이 아주 척척 잘 맞았다. 그가 3개월 뒤 당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건 따놓은 당상 같았다.반면, 이하영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너희들…….”옆에 있던 이서정은 상황을 보고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사모님, 이런 거지들과 뭐 하러 화를 내요? 싸워 봤자 입만 아프지, 저 사람들 때문에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잖아요. 점장님……!”이서정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 사람들 내보내 주세요.”“잠깐!” 이상언은 눈썹을 비꼬았다.“고객을 이런 식으로 내쫓는 건 처음이네요?”“사러 왔어야 고객이지, 무슨…….” 이하영은 이상언의 말을 듣고 비웃었다.“살 돈은 있고?”그녀의 말에 이상언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에게 돈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이하영이 처음이었다.그는 더 이상 이하영과 이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이서에게 말했다.“이서 씨, 쿡이 준 목록 꺼내 봐요.”이서가 리스트를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따가 결제해 보면 알 수 있겠죠.” 이상언은 이서를 돌아보며 말했다.“이서 씨, 골라봐요.”‘어차피 결국은 지환이 계산할 테니까.’이서도 천재 의사인 이상언의 몸값이 비싼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일반 친구일 뿐인데, 고액의 드레스를 사는 건 이서도 마음속으로 편하지 않을 거다.돈으로 돌려주고 싶어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밖의 금액이었다.“상언 씨, 우리 그냥 가요. 나 출근시간 다 됐어요.”이서가 몸을 돌려 나가고자 하자, 이하영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내가 뭐랬어? 가짜라고 했잖아. 허허, 부부가 아주 호흡이 척척 잘 맞는구다.”이서가 화를 내기도 전에 임하나가 참지 못하고 이서의 옷자락을 잡고는 이를 악물며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야, 걱정 말고 사. 내가 너에게 선물한 셈 치자. 내가 나중에 상언 씨에게 갚을 게.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 여자 정말 너무 개매너야.”이서은 가볍게 웃었다.“뭐 하러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함부로 돈을 써? 게다가 웨딩드레스는 굳이 살 필요 없잖아. 대여해서 입어도 되고…….”이서의 말을 들은 이상언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남편의 재력이면 평상복으로 매일 드레스를 입고 다녀도 된다고…….’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이서를 보면서 이상언은 다소 미안한 감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의 행복을 위해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자 하는 충동을 억누르고 이서 곁으로 가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돈은 나한테 껌 값이에요.”잠시 멈추었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나 이렇게라도 분풀이 해야겠어요. 이서 씨가 안 사면, 나 울화병이 날 거 같아요. 아, 열 받아.”임하나도 옆에서 부추겼다:“그래, 이서야, 걱정 말고 마음껏 골라 봐. 이 정도 금액대는 상언 씨한테 아무것도 아니야.”두 사람은 이서를 가게 안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점원에게 말했다.“먼저 드레
지환은 국내외에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천재 의사인 이상언은 아니었다.늘 다양한 의학 세미나와 학술회의에 참가해야 하는데다, 본인도 또한 지환과 친구라는 관계를 숨기지 않아 자연스레 더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이하영과 이서정은 모두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민씨 집안이 4대 가문의 대열에 오른 후 이하영은 자연스레 자신들보다 높은 가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그리고 이서정은…… 지환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이상언이 그의 친구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이 이름에 대해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저요.” 이상언은 몸을 돌려 달려온 남자에게 말했다.그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이상언 앞에 가서 몸을 굽혀 말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샵의 총괄 매니저입니다. 제 수하의 불찰로 불쾌감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보상하고 싶은데…… 말씀만 해주세요!”그 남자는 진정성을 표시하기 위해 말투를 가중시켰다.이상언은 손가락을 들어 이하영과 이서정을 가리켰다.“저 사람들,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평생 이 샵에 발 못 들여놓게 하세요.”남자는 상대 쪽이 이하영과 이서정이라는 것을 보고 난처했다.“이건…….”“왜요, 뭐라도 된다며?” 이상언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부드럽게…… 웃었다. 부드러움 속 깊은 곳에 쉽게 알아채지 못할 한기가 숨어 있다.“그런데…….”남자는 이상언의 곁으로 다가가 이서정을 한 번 슬쩍 보았다.“이서정 씨는 대표님의 숙모이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이서정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다니, 죽고 싶은 거지…….’‘하은철 대표도 삼촌인 하 회장을 어려워하는데…….’‘월급쟁이인 내가 어찌 감히…….’웨딩드레스 샵 안이 갑자기 조용했다. 이서정도 그 말을 들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 백이 되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당신이 상언 씨군요. 남편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서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상언 씨
경비원 네 명이 들어와서 이하영과 이서정을 밖으로 내보냈다.이서정이 데려온 경호원은 전혀 힘을 못 쓰고 의기소침하게 이서정과 이하영의 뒤를 따라 드레스 샵을 나갔다.이상언의 요구대로 일처리를 끝낸 총괄 매니저는 또 이상언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혔다.“상언 도련님, 이건 하 대표님께서 드리라고 했습니다.”이상언은 슬쩍 봤다. 카드였다.“안에 20억이 있다고 합니다. 하씨 그룹 산하의 어떤 샵에서든 마음대로 사용 가능하답니다. 대표님이 사과의 뜻으로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임하나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차며 팔로 이서를 툭 쳤다.하은철 곁에서 8년간 있었던 이서지만. 한 번도 그가 이렇게 통 크게 누군가한테 돈을 쓴 걸 본적이 없었다.‘절대적인 권세 앞에서 하은철도 고개를 숙이는구나.’ 20억 원은 이상언에게 구우일모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환을 생각하며 웃으며 받았다.“그래, 하은철이 그래도 눈치가 있네. 오늘 일은 여기서 그만 두겠지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쉽게 안 끝날 거예요.”책임자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반드시 선생님 뜻을 대표님께 꼭 잘 전달하겠습니다.”“그래, 가봐요.”“네.”총괄 매니저는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한 바탕 야단법석을 떨고 난 뒤, 점원들도 이상언 등 일행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다는 걸 줄 알고 다들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사장님, 사모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우리 샵의 신상 웨딩드레스입니다. 너무 예뻐죠?”“사모님, 여기 전통 한복도 있습니다. 원하시면…….”“…….”재잘거리는 점원을 앞에 두고, 이서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오자.”임하나도 핸드폰을 보았다.“그러네, 점심시간 끝났다.”이상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와 임하나를 데리고 샵을 나섰다.차에 오르자, 이상언은 카드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이서 씨, 이 카드 받아요.”하은철이 준 카드였다.이서는 손을 저
이상언은 먼저 이서를 서우로 데려다주고, 임하나의 회사로 갔다.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임하나가 안전벨트를 풀려고 할 때, 이상언의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았다.임하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일부러 침착한 척했다.“왜요?”“할 말없어요?” 이상언은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보았다.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임하나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괜히 딴소리를 했다.“무슨 말이요?”이상언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갔다.“내가 오늘 자기 친구를 도와준 셈인데…….”보상을 원하는 눈빛이었다.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임하나는 이상언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볼에 뿌려진 따뜻한 숨결이 그녀를 간질였다. 임하나는 손을 들어 볼을 만지려 했다.그런데 이상언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하나 씨, 난 당신이 우리 관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는 걸 알고 있어요. 나도 서두르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가끔은 달콤한 보상을 주어야, 나도 이 기약 없는 시간 속에서 희망을 안고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요?”그는 독실한 신차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임하나는 살짝 떨렸다.“뭘 원하세요?”“아무거나 괜찮아, 그냥…… 내 머리라도 살짝 만져줘도 돼요.”임하나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손 먼저 놔줘요.”이상언은 손을 풀어줬다.임하나는 흰 손으로 이상언의 뺨을 가볍게 들어올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이러면 될까요?”그녀는 애써 쿨한 척, 용감한 척했지만 눈동자는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이상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응, 아주 달콤해요. 아마 한동안은 잘 버틸 수 있을 거 같네요.”“…….”그녀의 얼굴은 반 박자 늦게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저 먼저 회사 들어갑니다.”이상언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입을 열었다.“하나 씨, 혹시 내가 자기 친구 도와주면 늘 이런 대우받
한눈에 자기 속셈이 들통났음에도 이상언은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하하 웃었다.“우리 사이에 니 것 내 것 어딨어? 안 그래, 친구야?”그는 운전대를 돌리면서 진지하게 몇 마디 더 했다.“정말이지, 이서 씨가 널 생각해서 돈을 절약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좀 그렇더라…….”지환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말했다. [알았어.]안다는 것은 곧 해결하겠다는 걸 의미한다.이상언도 더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지환은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민호일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를 보였다.“오늘은 먼저 돌아가세요.”민호일의 얼굴에 미소가 굳어졌다.“하지만 회장님, 오늘 보고드릴 게 있어서…….”지환은 그를 흘겨보았다.민호일은 말을 하지 못하고 순순히 사무실을 나갔다.민호일이 떠난 후 지환은 이천을 불렀다.“이서정에게 배역 몇 개 더 넣어줘.”이천은 다소 난처했지만 대답했다.“예!”“잠깐!”지환의 눈빛이 차가웠다.“주인공이 아니라 조연급으로……. 수중 신이나 격투 신이 있는 역할로……. 고된 배역일수록 좋아.”이천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네?”몇 초를 기다렸는데도 반응이 없자, 이천은 바로 일처리 하러 나갔다.민호일은 지환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곧바로 집으로 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정부가 내온 물컵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오만방자한 것! 시건방져! 돈만 아니면, 애송이 같은 널 상대하지도 않았어?”이하영도 뒤따라 집에 들어왔다.남편에게 오늘 당한 일을 하소연하려던 그녀는 민호일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즉시 물었다.“여보,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심기를 건드렸어요?!”“누구겠어?!” 민호일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하 회장이란 그 놈 말이야, 자기가 돈 좀 잘 번다고 완전 잘난 척하더라고…….프로젝트 기획안 다 짜 놓고 이제 사인만 하면 되는데, 글쎄 전화를 받고 나오더니 갑자기 나보고 가라네? 이런 경우가 어딨어?”이하영은 민호일 입에서 또 하씨 집안 사람이 언급되자, 방금 사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