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동그랗게 뜬 이상언은, 지환이 메시지 저장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얼른 그의 휴대전화를 낚아챘다.“너 미쳤어?!”이 메시지를 내보내면 소유권을 ‘선언’할 수 있겠지만, 아마 평생 소파에서 쪽 잠 자야 할 수도 있다.휴, 형제의 행복을 위해 이상언은 자신이 감당할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9시가 좀 넘어 이상언은 지환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그가 술이 떡이 된 지환을 고이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었던 건, 이서의 양호한 ‘가정교육’ 덕분이었다.지환의 체내에는 정확한 생체시계가 있는 것 같았다.8시가 넘자, 그는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늦게 돌아가면 안된다고, 한사코 집에 가겠다고 난리 쳤다.이상언의 말을 전해들은 이서는 어처구니없었다.그녀는 지환을 소파로 부축했다.“상언 씨, 수고 많았어요, 고맙습니다.”이상언은 손을 흔들었다.“그런데…… 지환 씨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이상언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이서 씨 때문에요.”“네? 저 때문에요?”“네!” 이상언은 미간을 비비며 멋대로 지어내기 시작했다.“지환은 이서 씨와 소지엽과의 스캔들 기사를 보고, 열등감이 들어서 술을 마셨어요.”이상언도 본인이 말도 안 돼는 얘기를 지어낸다고 생각했다. 지환처럼 똑똑한 사람이 언제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었겠는가?그러나 이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이 일 때문에 지환 씨가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이서는 순간 지난 번에 하은철 삼촌을 언급했을 때, 지환이 왜 화냈는지 깨닫게 되었다.이는 지환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었으니.이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연민을 보고 이상언은 갑자기 깊은 죄악을 느꼈다.그러나 형제를 위해 그는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암튼…… 지환이 잘 부탁해요.”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난 지환 씨를 자신감 있는 남자로 만들 거예요.”이상언은 마음속으로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몸을 돌려 떠났다.방으로 돌아온 이서는 이미 소파에 누
지환은 식탁 가득한 진수성찬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다 그가 만든 것이었다.하지만 식재료는 이천이 보내왔다.어젯밤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술이 거의 다 깼다.나중에 이서가 어렴풋이 자기를 ‘여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 정신이 말짱해졌다.‘여보’라는 말과 ‘당신이 최고’라는 말에 지환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차피 잠도 못 잘 거 아예 일어나서 이서에게 밥해 주기로 했다.세수를 하고 나온 이서는 옆쪽 의자가 이미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어서 먹어.”이서가 물었다.“머리 안 아파요? 괜찮아요?”“숙취가 좀 있긴 한데, 그래도 우리 마누라가 맛있게 먹을 걸 생각하니 행복하기만 한데?”“잉, 입만 살았어.” 이서가 몸을 돌려 지환에게 약을 갖다 주었다.지환은 손으로 받지 않고, 이서의 손을 잡고, 알약을 물었다.차가운 그의 입술이 손바닥에 닿자 간질간질했다.이서는 황급히 창밖을 보며 주의력을 분산시켰다.하지만 지환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한 알을 먹고, 또 천천히 이서의 손바닥에 대고 쪽쪽 뽀뽀를 해댔다.“아, 그만…… 그만해요.”손을 떼려고 하자, 지환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여보.” 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코끝으로 문질렀다.이서는 뭔가 예감한 듯 지환에게 경고했다.“나 출근해야 돼요.” “내가 자기 대신 오전 반차를 냈어.”“…….”오전 반차를 썼음에도 이서는 오후 출근시간을 간신히 맞춰 사무실에 도착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심소희가 바짝 다가왔다.“언니, 언니 그 목에…… 소지엽 씨 작품이죠?”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거울을 꺼내 보았다. 그제야 목에 뚜렷한 빨간색 마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스카프를 두르고는 정색하며 말했다.“앞으로 더 이상 나와 소지엽 씨의 농담은 안 했으면 좋겠어. 우리 남편이 싫어해.”심소희는 멍해졌다. 이서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그날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얼른 사과했다.“미안해요, 언니. 난 두 분이 대중에게 알
기뻐하는 쪽은 당연히 하지환이었다.오늘 지환은 따스한 봄날의 햇살처럼 친근했다.어제의 음침함과 무서움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휴대전화를 돌려주러 온 이상언은 면전에서 그를 놀려댔다.“어제 대체 누구가 술집에서 술에 취해서 개인 인스타 계정에 자기 와이프라는 성명글을 올리려고 했는 지 모르겠네. 하하하…….”오늘 기분이 좋은 지환은 서둘러 이상언의 입을 막지 않았다.이상언도 이 점을 노리고 거리낌 없이 말을 뱉었다.“질투때문에 와이프랑 냉전하고 싶지 않다고……? 어, 친구야, 너 큰일 났어. 너 몸속에 낙인 같은 게 찍혀 있어. 와이프 말은 다 진리야…….”지환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오늘 좀 한가한가 봐?” 이상언은 경계하듯 물었다.“왜?”“저기 스베리아 쪽에 괜찮은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너를 그쪽으로 추천할까 싶어서?”“아니야, 아니야. 나 얼른 가서 네 와이프가 부탁한 일 해야 해. 윤수정의 병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했거든.”이서를 도와 일 처리한다고 해야 지환이 아무 말없이 보내줄 것 같아 이상언이 일부러 이서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근심 어린 쪽의 분위기는 그렇게 밝지 못했다.“너도 봤지?” 하경철은 책상 위의 태블릿을 가리키며 물었다.“내가 뭐랬니? 진작에 얘기했었지, 무릇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서를 다 좋아할 거라고. 아직 남편이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소지엽이 왜 튀어나와? 넌, 아직도 매일 윤수정 일만 신경 쓰고 있지? 이래서 이서를 데려올 수 있겠어? 내가 보기에 노루잠에 개꿈이야!”하은철은 입을 삐죽거리며 하경철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이제 어떡할 거냐?”“뭐 어쩌겠어요? 이서, 나 안 좋아해요.”얼마 전까지 하은철은, 이서가 결혼한 건 고의로 그를 화나게 하려고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아무리 자신만만한 그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넌 시간적인 우세가 있잖니. 여자는 본디 정에 약하느니라. 네가 이서한테 잘
퇴근해서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서는 구태우의 전화를 받았다. 재무팀 관련 정보를 이미 알아냈다며 그녀의 메일함으로 보냈다고 했다.생각지도 못한 스피드였다. 그녀는 앞좌석의 임현태를 슬쩍 보고는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현태 씨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상대방은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반드시 낱낱이 조사하겠습니다.]이서는 소지엽이 소개한 이 사람을 매우 신임했다.[그럼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요?]이번에는 답장이 매우 빨리 왔다.[말씀하세요.]그녀는 장지완의 이름과 회사 직급을 보냈다.“이 사람은 얼마 전에 자기 작품을 가지고 나를 사칭하여 핑크 리본 디자인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수상작품을 보러 갔는데, 대부분 작품들이 이 사람 작품보다 훨씬 좋았거든요……. 암튼, 난 이 사람의 작품이 어떻게 수상가능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이서는 잠간 머뭇거리다가 ‘바람솔솔’이라는 ID를 구태우에게 보냈다.[이 ID가 얘기하는 스타일이 장지완과 비슷합니다. 혹시 동일 인물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네. 그럼요.]구태우는 흔쾌히 임무를 맡았다.이서는 고맙다고 답장하고, 곧 이메일을 열어 구태우가 방금 보낸 서류를 확인하였다.구태우는 허풍을 떨지 않았다. 아주 꼼꼼하게 자세하게 조사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이렇게 많은 정보를 수집하다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차가 아주 평온하게 달리고 있어 이서는 전혀 불편함 없이 차 안에서 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윤씨 그룹의 재무 담당은 박도양이라는 사람이었다. 윤씨 그룹이 몰락하기 전까지 그는 재무부의 일반직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씨 그룹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윤씨 그룹 내에서도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이 때 윤재하는 그를 재무부 부장자리에 앉혔다.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심지어 윤재하가 ‘삼고초려’했다.그 전에 박도양은 분식회계를 해서 이미 1년 동안 옥살이한 전력도 있는데 말이다.‘분식회계를 했던
이서는 임현태의 차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보며 몸을 돌리려다 멈칫했다.사실 진작에 임현태를 의심했어야 했다.임현태가 정말 회사에서 파견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아가씨’가 아닌 ‘윤 총괄’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그녀는 미간을 누르며, 왜 이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책했다.‘나중에 구태우의 조사 결과가 나오면, 설마 반대편인 적진에 서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오늘은 웨딩 촬영팀을 만나러 왔다.지환은 그녀보다 일찍 도착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촬영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뒤에는 이천이 서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기업집단을 거느리는 지주회사 대표 같았다.유일한 옥에 티는 지환이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였다.문득 지환이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이서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나댔다.볼도 덩달아 빨갛게 상기되었다.“이분이 신부님이시죠?” 일어나서 말하는 사람은 웨딩 촬영팀 직원이었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동여 묶은 꽁지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예쁜 파란 눈을 가진 꽤 멋진 외국인이었다.이서가 걸어 들어갔다.“안녕하세요.”지환도 덩달아 일어나 이서의 허리를 휘어잡고 소유권을 주장했다.“우리 와이프.”“쿡입니다.”긴 머리의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며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이서는 눈앞의 남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안나 가볍게 인사치레 했다.“윤이서입니다.”쿡은 이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웨딩 촬영 컨셉 샘플을 꺼내 이서에게 보여주었다.“우리 팀이 요 몇 년 동안 작업한 웨딩사진입니다. 신부님 먼저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계속 다음 단계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서는 깊이 매료되었다.컨셉에 따라 촬영기법이나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보통 웨딩 사진 촬영과 달리 개인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조
지환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쿡을 째려보며, 다른 한 손은 이서의 뒷목을 쓰다듬었다.“응. 맞아.”“당신…… 쿡 씨랑 아는 사이예요?”“음,” 지환은 몸을 곧게 펴고 쿡을 쳐다보았다.“어느 해인가 여름방학에 D국으로 여행 갔는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불량배에게 날치기당하는 쿡을 보았지…….”여기까지 얘기한 지환은 곧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내 기억으로는 그 때 키가 160정도 밖에 안 되는 10대 남자애였거든. 그런데 우리 쿡 선생께서 꼼짝 못하더라고.”쿡은 어색하게 자신을 위해 해명했다.“난 그쪽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다고!”그것 또한 사실이었다.그 도둑은 딱 봐도 기차역을 배회하면서 여행객을 노리는 전문 소매치기였다.자기 집 드나들 듯 골목골목을 다 꿰고 있었다.지환은 말하는 톤을 살짝 올리면서 잘난 척해댔다.“나도 그 때 처음 D국에 간 거거든. 그리고 네가 나보다 더 앞에 있었거든. 근데 난 어떻게 그 소매치기를 잡았을까?”“…….”그래.그는 진작 알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 놀리는 건 가능할 지 몰라도 지환 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먼저 보고 있어요, 다과 좀 내올게.” 쿡은 다과를 핑계로, 이 화제를 끝냈다.이서는 쿡이 자리를 비우자 바로 물었다.“방금 한 얘기 사실이에요?”둘이 서로 맞장구를 치는 걸 보면 진짜인 것 같긴 했다.근데 이서는 궁금했다.쿡처럼 대단한 인물이 왜 기차역에 나타났을까?이서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지환은 그녀의 손을 잡아 거의 입술로 가져가 가볍게 키스했다.“당시 파나마 왕자와 다이나 왕비의 웨딩 사진으로 쿡은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지.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사진 주인공 덕분이라고 생각했어.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기차역으로 가서 형형색색의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거야. 말하자면 우리의 만남도 우연이었던 거지.”이서는 태연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
먼저 좋은 것을 보고 나면, 다른 것들은 눈에 차지 않는 법이다.실눈을 뜨고 웃는 쿡은 지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지환, 네 와이프는 너보다 훨씬 사랑스러워.”지환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일언반구도 안 했다.세 사람은 또 앉아서 촬영지에 대해 토론했다.그들은 일반 신혼부부들이 하는 실내 배경을 이용한 웨딩 촬영이 아닌 현지 촬영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비용이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평생 한 번뿐인 촬영이니 이서도 잠자코 있었다.이서는 보는 곳마다 다 가고 싶었다.눈, 낙엽, 해변, 잔디…… 모든 배경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어디를 골라야 할지 결정장애가 발동된 것 같았다.“음……, ML국에 가서 촬영하는 건 어때요?!”이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경이 가득한 모로코에 손가락을 짚었다.쿡이 지환을 쳐다보았다.지환은 한 손은 이서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은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다른 곳은 별로야?”“다 너무 마음에 드는데…….” 고개를 돌리자 지환의 시선과 마주쳤다. 이서는 심히 고민되는 듯 말했다.“하나만 골라야 하니까 힘들어요.”“왜 하나만 골라야 돼?” 지환은 입술을 올리며 손을 들어 이서의 머리를 비볐다.“마음에 들면 다 고르면 되지.”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쿡의 방향을 한 번 보고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당신 미쳤어요. 다 고른다니? 여기에 적어도 30여 개 나라가 있는데, 항공료만 해도 수천만 원이 들겠어요. 쿡이 무료로 촬영해준다고 해도 웨딩드레스에, 해외 나가서 먹고 마시는 것도 다 돈이라고요.”지환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돈 문제가 아니라 이서에게 그의 정체를 들킬까 봐 걱정이었다.이서가 여기 있는 모든 곳을 다 가고 싶어하는 걸 알기에 남편으로서 당연히 그녀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려면 이서가 의심하지 않도록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다.이서를 속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그럼 먼저 ML국으로 하자.”지환은 이서를 끌어안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네. 우리
이서는 잠깐 넋을 잃고 지환의 가슴에 기대어 허리를 꼭 껴안았으며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지환 씨…….”긴장하게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이서의 행동으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환은 이를 악물었다.“자기, 지금 나를 죽일 셈이야?”차는 30분 후에 별장에 도착했고, 이서는 1분 뒤에 침대에 눕혀졌다.그의 키스가 그녀의 입술을 사정없이 뭉갰다. 이서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화산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그의 사랑처럼 뜨겁고 강렬했다.그녀는 주동적으로 두 손을 뻗어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다음 날은 마침 휴일이어서, 이서는 잠을 푹 잘 수 있었다.지환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 출근했다.오후까지 잠을 자고 일어난 이서는 그제야 움직일 힘이 좀 생긴 것 같았다. 그는 구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박도양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빅토리아 병원 입구에서 병원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구태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오늘 오후 3시에 병원장이 특강이 있거든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곧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상언 씨, 혹시 빅토리아 병원장 알아요?”[알죠.]이상언은 맞은편의 지환을 흘겨보며, 한가로이 다리를 꼬고 물었다.[왜요, 이서 씨?]그는 고의로 ‘이서’ 두 글자를 강조해서 말했다.역시나! 맞은 편에서 컴퓨터에 집중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이상언을 바라보았다.“내 친구가 그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을 받고 싶어하는데, 그 집 사정이 그렇게 넉넉치 못해요. 혹시 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 병원에서 치료받게 할 수 있을까요?”[물론이죠.]이상언 일가도 빅토리아 병원의 투자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가 한마디만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친구가 언제쯤 간대요? 나도 그 때 같이 갈게요.]“급하지 않아요, 친구와 이야기 나눠보고 다시 전화할 게요.”[그래요.]이상언은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치 극악무도한 악인을 쳐다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