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잠깐 넋을 잃고 지환의 가슴에 기대어 허리를 꼭 껴안았으며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지환 씨…….”긴장하게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이서의 행동으로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환은 이를 악물었다.“자기, 지금 나를 죽일 셈이야?”차는 30분 후에 별장에 도착했고, 이서는 1분 뒤에 침대에 눕혀졌다.그의 키스가 그녀의 입술을 사정없이 뭉갰다. 이서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화산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그의 사랑처럼 뜨겁고 강렬했다.그녀는 주동적으로 두 손을 뻗어 지환의 목을 껴안았다.다음 날은 마침 휴일이어서, 이서는 잠을 푹 잘 수 있었다.지환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 출근했다.오후까지 잠을 자고 일어난 이서는 그제야 움직일 힘이 좀 생긴 것 같았다. 그는 구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박도양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빅토리아 병원 입구에서 병원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구태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오늘 오후 3시에 병원장이 특강이 있거든요.]“감사합니다.”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곧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상언 씨, 혹시 빅토리아 병원장 알아요?”[알죠.]이상언은 맞은편의 지환을 흘겨보며, 한가로이 다리를 꼬고 물었다.[왜요, 이서 씨?]그는 고의로 ‘이서’ 두 글자를 강조해서 말했다.역시나! 맞은 편에서 컴퓨터에 집중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이상언을 바라보았다.“내 친구가 그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을 받고 싶어하는데, 그 집 사정이 그렇게 넉넉치 못해요. 혹시 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 병원에서 치료받게 할 수 있을까요?”[물론이죠.]이상언 일가도 빅토리아 병원의 투자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가 한마디만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친구가 언제쯤 간대요? 나도 그 때 같이 갈게요.]“급하지 않아요, 친구와 이야기 나눠보고 다시 전화할 게요.”[그래요.]이상언은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아있는 지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치 극악무도한 악인을 쳐다보는 눈
그는 차에 앉아 수시로 고개를 들어 병원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병원장이 오는지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이서는 하이힐을 밟으며 차 옆으로 걸어갔다.박도양은 한눈에 이서를 알아보았다.“큰아가씨.”이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저 지금 누구 좀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알고 있어요.”이서는 자료를 꺼내 박도양에게 던졌다.“매년 이 고액의 치료비는 어디서 왔는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박도양은 서류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당황했다. 그래도 감방에 한 번 다녀온 사람이라 곧 침착함을 되찾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세게 나왔다.“내 친척이 빌려준 건데, 뭔 문제라도 있나요?”“윤재하가 당신 친척이던가요? 난 왜 몰랐을까?”이서는 말하면서 그에게 두 번째 서류인 계좌 이체 기록을 던졌다.매번 이체할 때마다 다른 계좌 번호를 사용하지만, 이 계좌들은 결국 모두 다 윤재하를 가리켰다.박도양의 안색이 보기 흉해졌다. 그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큰아가씨, 당신은 제 상사가 아닙니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어요!”이서는 입꼬리를 올렸다.“제게 진상을 알려주면 제가 진 받을 수 있게 해 드릴 게요.”말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빅토리아 병원을 쳐다보았다.이서의 말을 들은 박도양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뭘 믿고? 큰 아가씨, 설마 아직도 자기가 그 옛날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기 이 빅토리아 병원, 최소 1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만 출입가능한 자격이 주어진다고요. 빅토리아 앞에서 아가씨나 나나 출입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요.”이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난 내 입으로 뱉은 건 지키는 사람입니다.”박도양은 허허 냉소를 지었다.“만약 하은철과 결혼했더라면, 이 말을 믿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당신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니, 남편이 흙수저라며? 돈 없고 백도 없는
그제야 사람들은 주차장에 그들 외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김 원장은 이서를 쳐다보고는, 두 사람이 한통속인 줄 알고 경호원에게 호령했다.“저 여자도 같이 치워버려!”“잠깐만요, 김 원장님…….” 이서가 김 원장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원장님께서 저는 몰라도 이상언 의사 선생님을 알고 계시죠?”김 원장은 금테 안경을 잡고는 무시하듯 말했다.“당연히 알죠. 왜요? 이 선생 친구라고 하려고요?”.“저 이상언 씨 친구 맞습니다.”김 원장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가씨, 내가 매일 이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상언 선생 친구라고 사칭하면서 나한테 접근하는지 알아요? 사기꾼들 같으니라고, 이상언 선생이 이 병원의 최대 주주라는 소식은 어디서 알아가지고? 다들 친구래? 뭐, 이상언 선생을 알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이상언 씨가 아가씨 알아요?”이 병원의 최대 주주가 이상언이라니, 이서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지금까지 이상언이 비교적 유명한 외교의사인 줄로만 알았다.“이상언 씨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김원장이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네요.”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이상언의 전화번호로 입력하고 전화를 걸어 김 원장에게 건네주었다.반신반의하며 휴대전화를 넘겨받은 김 원장은 전화번호를 한 번 보고, 긴장한 나머지 땀을 뻘뻘 흘렸다. 전화기 너머로 이상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색이 급변하면서,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는 눈빛도 순식간에 공손해졌다.“네, 네, 반드시 그 친구를 잘 치료하겠습니다!”통화를 마친 김 원장은 공손하게 휴대전화를 이서에게 돌려주었다.“윤이서 씨,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당신이 이상언 의사 친구라는 것도 못 알아보고……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이서는 휴대전화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뭐 그럴 수도 있죠. 상언 씨 친구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저 오늘 원장님 특강을 들으러 왔어요. 가능하죠?”“그럼, 당연히 가능하죠.”옆에 있던 박도양은 멍해서 두 사람
김 원장은 이서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했다.“이서 씨 친구이니, 당연히 가능하죠. 지금 바로 산아내과에 전화해서 등록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이서는 김원장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박도양을 쳐다보았다.“부디 다른 수작 안 부리길 바랍니다.”박도양은 쓴웃음을 지었다.“윤 회장을 도와 분식회계 한 것도 아이 때문이었어요. 장부, 옥살이…… 이런 건 나한테 결코 중요하지 않아요.”이서는 일순 박도영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오직 아이를 갖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내하는…… 이는 미친 짓이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30분 뒤 박도양의 아내는 비밀 장부를 들고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병원에서 진료 가능하다는 얘기에 두 사람은 기뻐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나중에야 비밀 장부를 이서에게 넘기는 조건사항이 있다는 걸 알고, 그녀는 망설였다.“여보, 이서 씨에게 줍시다. 이서 씨 도움 없이 우리 여기서 진료 못 받아요.”“그런데…….”박도양 아내는 뭔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괜찮아요, 줘요.”박도양 아내는 잠깐 망설이다가, 큰 맘 먹은 듯 입술을 꽉 물고 장부를 이서에게 건넸다.이서는 건네받은 장부를 펼쳐 보았다.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진짜 장부가 맞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김 원장에게 말했다.“원장님, 가시죠.”두 사람이 몇 걸음 못 갔는데 박도양 아내가 뒤에서 쫓아왔다.“아가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뭔데요? 얘기하세요.”“이 장부를 경찰이나 검찰에 넘기지 말아 주세요.”박도양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이 모든 건 윤재하 회장이 시킨 일입니다. 우리 남편은 아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하게 되었고요…….”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이서는 이상하게도 전혀 안쓰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황 봐서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김 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원에 들어갔다.박도양과 아내도 곧 산아내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집에 돌아온 지환은 오늘 따라 집안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는 걸 직감했다.그는 웃으며 요리하고 있는 이서를 뒤에서 안았다.“누가 우리 애기, 기분 나쁘게 했을까?”이서가 박도양을 찾아간 걸, 지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환을 밀며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근데 왜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는 듯한 얼굴이지?” 지환은 이서의 손에 든 오이를 빼앗아 칼질하기 시작했다.“아니에요.” 이서는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주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지환은 이미 오이를 다 썰었다.“또 날 놀렸죠?”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잠깐만 기다려, 밥 다 되면 부를 게.”이서는 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주방에서 음식 하느라 바쁜 지환을 보며 입을 뗐다.“지환 씨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한 적 있어요?”지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되물었다.“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전에 지환 씨가 아이 갖고 싶댔잖아요. 내가 싫다고 한 이후로, 한 번도 얘기를 안 꺼낸 거 같아서요…….”이서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계속 말했다.“만약 내가 계속 아이 가질 마음이 없다면, ……지환 씨 괜찮겠어요?”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난 자기와 결혼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아이는…….”그는 시선을 음식 조리에 집중하며 말했다.“그 때도 아이 얘기 꺼낸 건…… 아이를 좋아해서 원했던 건 아니였어.”“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이서가 눈을 깜박였다.“내가 그때 자기와 아이를 갖자고 했던 건…….”지금 생각하니 그때 자신은 참으로 바보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싫어서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아이가 있으면, 자기가 하은철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로 생각했거든.”이서는 지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지환은 이서의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얼른 말을 이었다.“자기야, 나 그때 정말 정신 나갔었나 봐. 화내지 마. 앞으로 다시 아이 얘기는 안 꺼낼 게. 자기가 원하면 낳고, 싫으면 안 낳는 거야
윤씨 그룹은 소기업으로, 주주가 6명에 불과했다. 윤씨 가문이 최대 주주이지만, 윤수정이 윤씨 가문의 후보자가 경선에 나오는 지라, 선임 CEO인 윤재하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즉 다른 다섯 명만이 차기 CEO가 될 사람을 결정하게 된다.그런데, 이 다섯 명 중, 두 명은 하은철의 사람이다. 즉, 틀림없이 윤수정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이서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세 사람을 그녀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것이다.이 또한 그녀가 반드시 진짜 장부를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이 장부만 있으면 윤씨 부부가 빼돌린 돈을 회수할 수 있으니.머릿속으로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임하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이서야, 오늘 점심에 너 드레스 보러 가자.]“너 출근 안 해?”[점심 시간에 두시간 정도 시간 낼 수 있어.]“그러자.” 이서는 쿡이 소개한 그 드레스 샵에 대해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워낙 고가의 드레스 샵으로 유명한 곳이라.[그럼 있다가 전화할게.]“OK.”곧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이서와 임하나는 메리 컬러에서 합류했다.이상언도 같이 온 것을 보고, 이서는 깜짝 놀랐다.“상언 씨도 어떻게……?”임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기어코 오시겠답니다.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미리 보고, 지환 씨 앞에서 자랑한대나 뭐래나…….”말을 마치고 이서 앞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남자들은 정말 유치해.”이서는 웃으며 반박하지 않았다.가끔 보면, 정말 유치한 거 같긴 했다.세 사람은 함께 웨딩드레스 샵에 들어갔다. 곧 직원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어느 분 드레스를 고르실 건가요?”“저요.”직원은 위아래로 이서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신부님 같은 몸매는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어도 예뻐요.”이서는 웃으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샵 안쪽으로 들어갔다.상류층 인사들에게 인기가 많은 드레스 샵답게 드레스의 원단이나 재단이 세련되고 고급지며 단조롭지 않은 것이,
그들의 이러한 모습에 이서와 임하나를 약속이나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임하나는 이서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큰 스케일이라니, 설마 Y국의 여왕이 온 건 아니겠지?”인기척을 듣고 나온 점장은 경호원들을 보며, 곧 업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신가요?”“우리는 이서정 씨 경호원입니다. 있다가 이서정 씨가 여기로 드레스 피팅 올 겁니다. 혹시 당신이 여기 점장인가요?”경호원은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아래로 점장을 보았다.“직원 외 기타 사람들은 내보내기 바랍니다. 만약 이서정 씨 개인 사진 등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이 샵도 문 닫게 될 겁니다.”“이서정 씨요, 혹시 배우 이서정 씨 말하는 겁니까?”“네.”이서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점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직원에게 손님을 내보내라고 했다.점심 시간인지라 드레스 샵에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서와 임하나 외에 한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그 손님은 이서정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쓱 나가버렸다.샵 측의 요구에 임하나는 갑자기 욱했다.“이서정이 뭔데? 여기 사장이에요? 뭔데 우릴 가라 마라야?!”직원이 난처한 듯 말했다.“이서정 씨는 하 회장의 아내입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양해 부탁드립니다.”이서도 굳이 이 샵에서 웨딩드레스를 살 생각이 없었던 지라, 임하나에게 말했다.“직원한테 그러지 마. 우리처럼 월급쟁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는 거지. 참으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하나야, 이분들 난처하게 하지 말고 우리 가자.”임하나는 마음속으로 불쾌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이서랑 샵에서 나오려던 참이었다.“이서정 너무한 거 아냐?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내가 보기에 그녀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주 오는 이서정과 이하영이랑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이서를 본 이하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서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다행히 눈치 빠른 임하나
그러나 지금은 냉정을 되찾았다. 이서정도 함께 있다는 생각에 일을 크게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언어적 공격 모드를 취했다.이서정은 왠지 이서가 눈에 익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곧 이하영에게 물었다.“사모님, 이 여자 누구예요?”“서정 씨, 아직 모르는구나.”이하영이 이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윤이서라고, 하씨 그룹 후계자인 하은철에게 시집가서 사모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는데, 괜히 고고한 척 건방 떨며, 평범한 직장인에게 시집가서 개고생하며 사는 여자…….”눈앞의 사람이 윤이서라는 얘기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이서 본인조차도 직접 나서서 소지엽과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며, 남편이 일반인이라고 해명했던 게 기억났다.그 얘기인즉 이 샵의 드레스를 구매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지금의 이서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이서한테도 잘 보이려고 아부했을 텐데 지금은…….“아, 그 여자였구나.”이서정은 무시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세상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네요.”“여보세요, 당신들 정도껏 해!”참다 못한 임하나가 나서서 한 소리 했다.“그까짓 거 웨딩드레스, 내가 사줄게, 이서야 맘에 드는 걸로 골라!”몇 백만 원 정도는 그녀도 살 수 있다.안 되면 할부하면 되니까.이서는 임하나가 그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나선 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서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삶은 자신이 살아가는 거지, 남의 시선에 의해 바뀌는 게 아니다.한순간의 화풀이를 위해 몇 백만 원을 주고, 한 번 입는 웨딩드레스를 사는 건 너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우리 가자!”“왜? 살 능력이 안 되니까 이제 꼬리 빼는 거야?” 이하영은 냉소하며 비꼬았다.“자기 분수나 알고 오지, 여기가 어디라고, 거지 년이…….”이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하영을 바라보았다.“난 왜 민씨 가문이 지금까지 다른 3대 가문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 궁금했는데,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