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내.이서가 프러포즈 장소르를 다녀온 걸 지환은 이미 임현태를 통해 알았다.“밥은?”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서를 덥석 껴안았다.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나 배 안 고파 내가 오늘 뭐 봤는지 맞춰 봐요.”지환은 생각하는 척하며 이서의 기분을 맞춰줬다.“음…… 잘 모르겠는데.”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말했다.“나 오늘 당신이 날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장소를 보았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지환은 눈동자도 보기 좋게 반달모양으로 되면서 이서의 눈꺼풀에 키스했다.“어땠어? 맘에 들었어?”“응, 예뻤어요. 근데…….” 이서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만약 그 장미들이 시들어서 좀 아쉬웠어요. 여전히 피었다면 훨씬 더 예뻤을 텐데.”“자기가 좋아한다면 난……”지환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사장님에게 얘기해서 생화로 바꿀 게.”“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자기를 안고 소파에 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주동적으로 지환의 목을 껴안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침에 외출하기 전에 당신이 제게 선물 주겠다고 한 거 기억하죠?”지환은 이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물론이지, 자기한테 한 약속은 평생 지킬 거야.”이서는 지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웨딩 사진 찍으러 가요!”말을 마치자 이서 얼굴의 홍조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산이었다.시선은 꼼짝 않고 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지환이 갑자기 CPU가 정지된 컴퓨터가 된 것 같았다.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지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당신이 싫다면…….”“자기야, 싫기는…….” 지환의 입가에 웃음기가 퍼졌다. 그는 자기 코로 이서의 콧날을 비비며 한 손은 옷 속으로 들어가 이서의 등을 쓰다듬었다.“내가 바라던 바입니다.”그는 말하면서 코를 이서의 볼에서 붉게 물든 귓불로 옮겨 가며 가볍게 물었다.“자기야, 어떡하지, 난 자기 갖고 싶은데?”이서는 손가락으로 지환의 가슴을 받쳤다. 얼굴이 이글이글 달아올랐다.“장난 그만 해요. 지금 진지한 얘기하고
윤재하는 콧방귀를 뀌었다.“우리를 도와줘?! 우리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작은아빠, 엄마, 지금 두 분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윤씨 그룹에서 돈을 적잖게 횡령했잖아요. 새로 부임한 CEO가 이 일을 까발릴까 봐 걱정되는 거죠? 일단 이사회의 다른 주주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두 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성지영과 윤재하는 안색이 변했다.“너…….”윤수정은 가볍게 웃었다.“작은아빠, 엄마, 안심하세요. 나도 아무 말하지 않을 거예요. 난 두분 편이에요.”“네가 우리 편이면 뭐해?” 윤재하가 냉소했다.“당연히 방법 있죠. 왜냐하면 곧 선출된 새 CEO가 제가 될 테니까요!”성지영과 윤재하는 눈을 마주쳤다.“작은아빠, 작은엄마, 다른 사람이 선출되면 분명히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폭로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죠. 왜냐하면, 저도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죠.”“우리 도움?”“네, 맞아요! 나와 은철오빠의 상황은 두 분도 익히 알고 있을 테고. 지금 오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도,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힘들 거예요. 그래서 우리 비밀리에 진행 중에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주주들에게 하면 분명 안 믿을 거예요. 하지만 두 분이 나서서 얘기하면 저랑은 신분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주주들도 틀림없이 믿을 겁니다. 그때 가서 제가 회사 CEO 자리에 앉기만 하면 두 분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성지영과 윤재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윤수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러니까 두 분은 저를 반드시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 윈윈하는 거죠.”두 사람은 1초 간 생각한 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에게는 있어서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윤수정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이때.1층에 도착하자마자, 이서는 구수한 밥 냄새를 맡았다.“다 됐어요?”“응.” 지환은 음식을 차려 놓았다.“얼른 먹어.”이서는
이서는 지환 주변의 기압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지환이, 하씨 집안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게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할아버지께서 지금까지 나를 많이 예뻐하시고 잘해주셨어요. 어쨌던 할아버지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지환은 웃으며 손끝으로 이서의 머리카락을 넘겼다.“나 화난 거 아닌데? 다만 자기가 이미 나랑 결혼했음에도 어르신이 여전히 너를 이렇게 아끼는 거,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나도 궁금하긴 해요. 나에 대한 할아버지 사랑은 무조건적인 총애였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혈연을 초월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건, 혹시 내가 그의 어느 일찍 돌아가신 후배와 닮아서일까요?”‘그래서 할아버지가 그 사랑을 자기한테 전가한 건가?’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성세대의 지난 일에 대해 탐구할 의욕도 없었다.‘하지만, 너무 심하면…….’“글쎄……. 내일 저녁에 한 번 잘 물어봐.”“응.”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임현태의 일이 생각났지만 굳이 지환에게 말하지 않았다.지환은 평소에 매우 바쁜 사람이다. 게다가 임현태의 일은 그가 도와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방법을 강구하여 알아보려고 마음먹었다.이튿날 퇴근 후, 이서는 하경철이 말한 그 온천 리조트에 도착했다.주경모는 이서를 전통 일본식 룸으로 데려갔다.“할아버지, 먼저 오셨네요. 많이 기다리셨죠?”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룸 안에 하경철 외에 하은철도 함께 있었다.하은철을 본 이서의 얼굴이 부자연스러웠다.하은철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하경철은 상황을 살피고는 두 사람의 표정을 무시한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서, 왔어? 자, 잠깐 쉬면서 차 한 잔 마시고, 있다가 온천에 들어가자.”“네.” 이서는 하은철
하경철이 하은철에게 눈길을 보냈다. 오늘은 웬 일인지 거부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경철은 그제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주경모에게 시선을 돌렸다.주경모는 시그널을 받고 하경철의 귓가에 몸을 숙여 몇 마디 했다. 곧 하경철은 웃으며 말했다.“이서야, 온천 리조트 사장이 내 오래된 벗이다. 나랑 잠깐 보자고 하는 구나. 잠깐 다녀올 테니 은철이랑 여기서 나를 기다려라.”이서는 한눈에 하경철이 또 그녀와 하은철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걸 눈치챘다.예전에는 하경철의 이러한 ‘배려’에 감사했는데, 지금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싫다는 거 억지로 강요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하물며 그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하경철은 말을 마치고, 이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경모의 부축을 받으며 룸을 나갔다.그가 떠나자, 룸 안에는 이서와 하은철 두 사람만 남았다.이서는 하은철과 이야기를 할 의욕이 없어 일어나서 잠깐 있다가 문 열고 밖으로 나갔다.룸 밖에 인공산이 하나 있는데 물이 졸졸 흐르고 대나무 숲이 무성한 게 꽤 아늑해 보였다.이서가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을 때, 뒤에서 하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너 이번에, 꽤 멋있더라……. 잘 했어.”이 말을 듣고 이서는 멍해져서 고개를 돌려 하은철을 보았다.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왜 그렇게 쳐다봐, 난 있는 그대로 얘기한 거야, 잘하면 잘한 거고, 못하면 못한 거고.” 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아쉬움 같은 게 넘쳤다.‘이서가 예전에도 지금처럼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서는 입술꼬리를 올렸다:“고마워.”하은철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네가 진작에 이렇게 사리에 밝았더라면 우리도 지금처럼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안되었을 텐데……. 사실, 애당초에 네가 수정에게 조금만 잘해줬어도 내가 널 받아들였을 거야.”이서는 고개를 돌려 마치 무슨 괴물을 보는 눈빛으로 하은철을 쳐다보았다.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하은철이 따라오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북서 제1가문의 하은철을 보고도, 소지엽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은철아.”“언제 들어왔어?”'하은철은 손을 내밀어 이서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이서는 그의 손을 무자비하게 뿌리쳤다.그리고 소지엽 뒤에 섰다.분명히 하은철과 함께 서고 싶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이 자그마한 행동으로 하은철은 화가 났다. 그는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경고의 눈빛으로 이서를 째려보았다.소지엽은 무언가 눈치챈 듯 무의식중에 몸을 약간 움직여 이서를 가렸다.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에서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시간 날 때 한 번 모이자.”“그래.” 하은철은 주먹을 꽉 쥐고, 소지엽 뒤에 있는 이서에게 말했다.“이리 와.”이서는 소지엽을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소지엽 뒤에서 나왔다.“하은철, 너 또 깜빡한 거 같은데…… 우리 이미 파혼했거든.”그녀는 소지엽의 옆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다.하은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는 소지엽을 보면서 말했다.“미안……. 둘이 좀 싸웠거든. 나중에 시간 날 때 또 연락하자.”얘기 즉슨 소지엽은 자리를 떠도 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소지엽은 갈 생각 없이 이서를 그의 몸 뒤로 숨겼다. 한 눈에 봐도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었다.하은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지엽,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둘이 좀 다퉜다며?”소지엽은 밝고 해맑게 웃었다.“듣자니 이서 결혼했다 던데? 물론 남편은 네가 아니고…….”하은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하지만 딱 봐도 이서가 너랑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하은철의 이마에 핏줄이 펄쩍 뛰었다.“소지엽, 하씨와 소시 가문의 우애가 좋다고 내가 널 한 대 못 칠거란 생각 하지 마!”소지엽은 여전히 침했다. 웃음기가 눈가에서 미간까지 조금씩 퍼졌다.“은철아, 그
이서는 감기약과 해열제를 사서 집으로 달려갔다.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즉시 위층으로 올라가 지환을 살펴보았다.“체온 재 봤어요?”침대에 누워있는 지환을 보니 안색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그제야 이서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내밀어 지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으잉? 열 안 나는데?”“그래?” 지환은 그 틈을 이용해 이서를 품에 껴안았다.“방금 체온을 측정했을 때는 분명 38도였는데. 약 먹고 열이 내렸나 봐.”이서는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체온계를 갖고 올 테니 다시 한번 측정해봐요.”“아니야…….”지환은 이서 목덜미에 머리를 틀어박았다.“자기가 나의 약이야. 자기 돌아오니까 아픈 데가 다 나은 거 같아.”“정말 열이 났나 봐요.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거 보니…….”이서는 화난 척하며 그를 밀었다.“급하게 돌아오느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도 깜빡 했단 말이예요. 먼저 할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내야겠어요.”지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그럼 여기서 보내. 나 자기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야.”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한 척하자, 이서의 마음은 단번에 사르르 녹았다.그녀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는 하경철에게 문자를 보냈다.지환은 턱의 무게로 이서의 어깨에 눌렀다. 그녀의 둥글고 예쁜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을 보자 또 한 번 심쿵했다. 그는 얇은 입술로 이서의 귓불을 가볍게 물며 어물쩍 얘기했다.“어르신이 왜 자기를 불렀대? 무슨 일이야?”“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만 했어요.”이서는 지환의 이상한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문자를 적었다.“할아버지에게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도중에 온천 리조트 사장이랑 얘기 나누러 가셨어요.”지환의 손가락은 이서의 짤록한 허리를 매만지며 못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이서의 휴대전화 스크린을 슬쩍 쳐다보면서 한 손
이서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직원들이 평소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모든 것은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모두 변했다.이서는 손에 든 펜을 가지고 놀면서 머릿속에서 임현태의 일을 생각했다.‘임현태는 정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것이 전혀 나쁜 사람 같지 않은데…….’‘그는 분명히 회사에서 파견한 사람이 아닌데 왜 거짓말을 했을까?’아침 출근 길에 이서는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임현태가 이렇게 오래 속인 이상, 그녀에게 쉽게 털어 놓지 않을 테니까.괜히 얘기 꺼냈다가 상대방이 경계심을 갖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나중에 소지엽 쪽에서 소개한 사설 탐정업체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이서가 물을 마시는 있는 사이, 소지엽이 문자를 보내왔다.[사설탐정은 찾았어. 내일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을까?][응. 시간 돼.][내일 봐.]이서는 답장을 계속하지 않고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그리고 핸드폰 너머 이쪽. 소지엽은 핸드폰을 여러 번 꺼내 확인했다.측근이 웃으며 물었다.“쉐프님, 여자친구 문자 기다리고 있죠?”소지엽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해맑고 잘생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넌 아는 게 많아서 참 좋겠다.”“정말 여자 친구네? 누구에요? 나 아는 사람이에요? 어때요, 예뻐요……?”소지엽은 문을 ‘쾅’ 닫고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더듬어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또 한번 휴대전화를 꺼냈다.여전히 답장이 없었다.……이서가 한창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들어온 사람은 김청용이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었다. “윤 총괄님, 축하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하여튼 사람 놀래 키는 재간이 있다니까!”이서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김청용을 바라보았다.“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이쯤 됐는데 나한테 모르는 척할 거야? 심소희, 들어와.”트로피를 들고 들어오는 심소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장지완은 턱을 약간 들며 떨떠름하게 한 마디 했다.“축하해요, 윤 총괄님.”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장지완이 한 말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다들 그녀가 평소에 이서를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는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이서도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장지완을 바라보았다.장지완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는 확실히 윤 총괄한테 불복했어요. 그러나 이제 핑크리본 디자인 대상까지 휩쓸었으니 업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죠. 만약 지금도 윤 총괄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 업계와 등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그녀는 나름 진정성 있게 말했지만, 이서는 믿지 않았다. 왜냐면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가장 이상한 점은 핑크 리본 공모전에 작품을 낸 적이 없는데 어떻게 1위를 했느냐는 것이다.“감사합니다만……”“오늘은 참으로 기분 좋은 날이네요.”장지완은 이서의 말을 끊었다.“윤 총괄님 이번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는데,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장지완이 옆에서 바람을 잡자 이서는 해명할 기회가 놓쳐버렸다. 이서는 그들의 말에 따라 밥을 사겠다고 했다.사람들이 흩어진 후에야 이서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서 핑크 리본 디자인 공모전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인터넷에는 투고 메일만 있고 전화번호는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핑크 리본 공모전 주최측에 메일을 보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다.그러나 메일함을 열자마자 오른쪽 표시줄의 보낸 메일함에 낯익은 메일주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재차 확인해보니 핑크 리본의 메일 주소였다.안색이 어두워진 이서는 보낸 메일함을 클릭하였다.글쎄 며칠 전, 그녀의 이메일에서 보낸 투고 기록이 남아있었다.같은 시각, 옆 사무실.강수지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장지완에게 말했다.“언니, 언니 방법이 정말 죽여주네요. 윤이서의 이메일로 언니 디자인 시안 핑크 리본 주최측에게 보내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