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건 윤씨 그룹 때문이었다.윤씨 그룹이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이유도 윤씨 부부가 회사돈을 횡령했기 때문이다.새 CEO가 선출되면 짭짤한 돈주머니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라도 하게 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나…… 내가 이서에게 사과할게요!”성지영은 당황하여 일어섰다.같은 시각, 디자인 부서 사무실 내.일이 원만히 해결되었고, 이서가 동영상 파문이후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지영 부부와 자연스럽게 관계 정리가 되었다. 이서는 기분이 날아 날 듯 좋았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에 함께 쇼핑하자.”[와, 이서야, 우리 텔레파시가 통했다. 나도 방금 네가 보낸 동영상을 봤거든. 마침 너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한 발 앞섰네.]전화선을 사이에 둔 게 아니라면 임하나는 이서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우리 이서 멋지게 한 방 먹였네!’“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네?” 이서가 웃었다.[좋아, 좋아, 퇴근하고 너한테 갈게.]“응, 있다 봐.”퇴근 후 30분이 지나자, 임하나는 이서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만나서 임현태의 차에 올랐다.“출퇴근 전용차량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오늘에야 드디어 시승해 보는구만. 서우의 직원 복지 너무 좋은데……?”이서는 내색하지 않고 임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말했다.“신성로 쪽에 백화점이 새로 하나 오픈했다는데 우리 거기 가보자.”“좋아.” 임하나는 말을 마치고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그녀의 쳐다보는 눈빛에 이서도 따라 웃었다.“왜 이렇게 나를 쳐다봐?”“이서야, 우리 이서 정말 너무 대단해. 장해. 영상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관계를 끊어내다니 정말 너무 장해.”“너 벌써 두 번이나 칭찬했다.”“100번도 부족해. 내가 어제 섣불리 나서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너의 이 완벽한 계획에 내가 초 칠 뻔 했잖아.”“에이 뭐 그 정도까지야.”“그나저나 어떻게 골드 킹을 섭외한 거야? 내가 듣기로는 배시영이 이번
차가 다시 출발했다. 짧은 침묵 뒤, 임하나는 방금 하던 얘기가 생각나 물어보려고 하던 참에 갑자기 흥분하여 차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서야, 저기 저 프랑스 레스토랑 봐봐. 우리 지난번에 여기서 너 프러포즈 준비 했었거든.”이서는 앞줄의 임현태가, 임하나 입에서 지환 얘기 나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프러포즈란 얘기에 정신이 팔린 이서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어디? 어디?”“바로 저기.”임하나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내려가 볼까? 우리 그날 꾸밈장식은 이미 철거되었겠지만…….”“괜찮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아냐, 같이 가보자.”“그래, 그럼.”이서는 임현태에게 차를 프랑스 레스토랑 옆에 세우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뒤에야 레스토랑이 잠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정말 아쉽다.”이서는 웃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유리문이여서 내부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가까이 가서 내부 장식을 본 이서는 깜짝 놀랐다.산뜻한 풍선이 천장에 떠있었고 장미는 시들었지만 또 다른 정적미가 물씬 풍겼다.작은 카트 위에 있는 케이크 모형의 한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반지가 빠졌지만 언 발런스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 반지는 이미 주인의 손가락에 끼어있기 때문이다.쇼윈도 안의 모습은 한 장의 아름답고 로맨틱한 스틸컷 같았다. “너무 아름답다.”임하나는 멍해졌다.“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니…… 먼지도 하나 없어. 가게 오픈 안하나? 영업은 안 하는 거야?”“전화해서 물어봐.” 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간판에 적힌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다.임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재빨리 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전화는 세 번째 시도 만에 연결되었다.전화기 저편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여사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레스토랑 내부에 프러포즈 이벤트가 아직 철거하지 않았나요?”[아, 네, 그거야. 어떤 남자 손님이 아내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서프라이즈였어요. 우리 사장님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뒤돌아보지도 않았다.이서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연예계는 정말 천하에서 가장 현실적인 곳이다.그날 식사 이후 그녀는 지환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사석에서 많은 사람들이 변죽을 울리며 탐문해 왔지만,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자, 일부 사람들은 그녀와 하은철 삼촌의 결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따라서 그녀에게도 더욱 냉담해졌다.매니저는 이서정 옆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그 하 대표님, 계속 연락 안 되죠?”이서정은 본래 기분이 안 좋은 데다, 이 말을 듣고는 물컵을 쥐고 크게 화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밖에서 우왕좌왕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이, 이서정 씨, 민씨 그룹의 민호일 회장님이 당신을 만나 뵙고자 합니다!”이서정은 멍해지더니 며칠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한 민호일이 생각났다.그녀는 기뻐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디 있어요?”“바로, 바로 문 앞에요!” 직원이 숨을 헐떡였다.다른 사람들도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민씨 가문은 북성시 4대 가문 중 하나로서 수장인 민호일은 연예계 사람들조차도 큰손으로 꼽는 존재였다.큰손이 직접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하나같이 부러운 눈빛으로 이서정을 바라보았다.이서정은 고개를 쳐들고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갔다.촬영장 입구에 고급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이미 손을 썼는지 주위에는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이서정이 나오는 것을 보고 경호원은 즉시 앞으로 나가 차문을 열었다.차 안에 타고 있던 민호일은 친절하게 이서정에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타세요.”사모님이란 한마디에 이서정의 신분을 정하는 것 같았다.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서정은 이미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었다.그녀는 바로 차에 오르지 않았다. 차문을 잡고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민 회장님.”“얼마 전에 제가 사모님께 식사 대접을 한 번 하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오늘
별장 내.이서가 프러포즈 장소르를 다녀온 걸 지환은 이미 임현태를 통해 알았다.“밥은?”그는 앞으로 다가가 이서를 덥석 껴안았다.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나 배 안 고파 내가 오늘 뭐 봤는지 맞춰 봐요.”지환은 생각하는 척하며 이서의 기분을 맞춰줬다.“음…… 잘 모르겠는데.”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말했다.“나 오늘 당신이 날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장소를 보았어요. 너무 예쁘더라고요!”지환은 눈동자도 보기 좋게 반달모양으로 되면서 이서의 눈꺼풀에 키스했다.“어땠어? 맘에 들었어?”“응, 예뻤어요. 근데…….” 이서는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만약 그 장미들이 시들어서 좀 아쉬웠어요. 여전히 피었다면 훨씬 더 예뻤을 텐데.”“자기가 좋아한다면 난……”지환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사장님에게 얘기해서 생화로 바꿀 게.”“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자기를 안고 소파에 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주동적으로 지환의 목을 껴안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침에 외출하기 전에 당신이 제게 선물 주겠다고 한 거 기억하죠?”지환은 이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물론이지, 자기한테 한 약속은 평생 지킬 거야.”이서는 지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웨딩 사진 찍으러 가요!”말을 마치자 이서 얼굴의 홍조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산이었다.시선은 꼼짝 않고 지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지환이 갑자기 CPU가 정지된 컴퓨터가 된 것 같았다.이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지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당신이 싫다면…….”“자기야, 싫기는…….” 지환의 입가에 웃음기가 퍼졌다. 그는 자기 코로 이서의 콧날을 비비며 한 손은 옷 속으로 들어가 이서의 등을 쓰다듬었다.“내가 바라던 바입니다.”그는 말하면서 코를 이서의 볼에서 붉게 물든 귓불로 옮겨 가며 가볍게 물었다.“자기야, 어떡하지, 난 자기 갖고 싶은데?”이서는 손가락으로 지환의 가슴을 받쳤다. 얼굴이 이글이글 달아올랐다.“장난 그만 해요. 지금 진지한 얘기하고
윤재하는 콧방귀를 뀌었다.“우리를 도와줘?! 우리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작은아빠, 엄마, 지금 두 분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윤씨 그룹에서 돈을 적잖게 횡령했잖아요. 새로 부임한 CEO가 이 일을 까발릴까 봐 걱정되는 거죠? 일단 이사회의 다른 주주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두 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성지영과 윤재하는 안색이 변했다.“너…….”윤수정은 가볍게 웃었다.“작은아빠, 엄마, 안심하세요. 나도 아무 말하지 않을 거예요. 난 두분 편이에요.”“네가 우리 편이면 뭐해?” 윤재하가 냉소했다.“당연히 방법 있죠. 왜냐하면 곧 선출된 새 CEO가 제가 될 테니까요!”성지영과 윤재하는 눈을 마주쳤다.“작은아빠, 작은엄마, 다른 사람이 선출되면 분명히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폭로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죠. 왜냐하면, 저도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죠.”“우리 도움?”“네, 맞아요! 나와 은철오빠의 상황은 두 분도 익히 알고 있을 테고. 지금 오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도,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힘들 거예요. 그래서 우리 비밀리에 진행 중에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주주들에게 하면 분명 안 믿을 거예요. 하지만 두 분이 나서서 얘기하면 저랑은 신분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주주들도 틀림없이 믿을 겁니다. 그때 가서 제가 회사 CEO 자리에 앉기만 하면 두 분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성지영과 윤재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윤수정을 바라보았다.윤수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러니까 두 분은 저를 반드시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 윈윈하는 거죠.”두 사람은 1초 간 생각한 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에게는 있어서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윤수정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이때.1층에 도착하자마자, 이서는 구수한 밥 냄새를 맡았다.“다 됐어요?”“응.” 지환은 음식을 차려 놓았다.“얼른 먹어.”이서는
이서는 지환 주변의 기압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지환이, 하씨 집안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게 싫어서 그런 줄 알고, 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할아버지께서 지금까지 나를 많이 예뻐하시고 잘해주셨어요. 어쨌던 할아버지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지환은 웃으며 손끝으로 이서의 머리카락을 넘겼다.“나 화난 거 아닌데? 다만 자기가 이미 나랑 결혼했음에도 어르신이 여전히 너를 이렇게 아끼는 거,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나도 궁금하긴 해요. 나에 대한 할아버지 사랑은 무조건적인 총애였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혈연을 초월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건, 혹시 내가 그의 어느 일찍 돌아가신 후배와 닮아서일까요?”‘그래서 할아버지가 그 사랑을 자기한테 전가한 건가?’지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성세대의 지난 일에 대해 탐구할 의욕도 없었다.‘하지만, 너무 심하면…….’“글쎄……. 내일 저녁에 한 번 잘 물어봐.”“응.”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임현태의 일이 생각났지만 굳이 지환에게 말하지 않았다.지환은 평소에 매우 바쁜 사람이다. 게다가 임현태의 일은 그가 도와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방법을 강구하여 알아보려고 마음먹었다.이튿날 퇴근 후, 이서는 하경철이 말한 그 온천 리조트에 도착했다.주경모는 이서를 전통 일본식 룸으로 데려갔다.“할아버지, 먼저 오셨네요. 많이 기다리셨죠?”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룸 안에 하경철 외에 하은철도 함께 있었다.하은철을 본 이서의 얼굴이 부자연스러웠다.하은철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하경철은 상황을 살피고는 두 사람의 표정을 무시한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서, 왔어? 자, 잠깐 쉬면서 차 한 잔 마시고, 있다가 온천에 들어가자.”“네.” 이서는 하은철
하경철이 하은철에게 눈길을 보냈다. 오늘은 웬 일인지 거부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경철은 그제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주경모에게 시선을 돌렸다.주경모는 시그널을 받고 하경철의 귓가에 몸을 숙여 몇 마디 했다. 곧 하경철은 웃으며 말했다.“이서야, 온천 리조트 사장이 내 오래된 벗이다. 나랑 잠깐 보자고 하는 구나. 잠깐 다녀올 테니 은철이랑 여기서 나를 기다려라.”이서는 한눈에 하경철이 또 그녀와 하은철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걸 눈치챘다.예전에는 하경철의 이러한 ‘배려’에 감사했는데, 지금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싫다는 거 억지로 강요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하물며 그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하경철은 말을 마치고, 이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경모의 부축을 받으며 룸을 나갔다.그가 떠나자, 룸 안에는 이서와 하은철 두 사람만 남았다.이서는 하은철과 이야기를 할 의욕이 없어 일어나서 잠깐 있다가 문 열고 밖으로 나갔다.룸 밖에 인공산이 하나 있는데 물이 졸졸 흐르고 대나무 숲이 무성한 게 꽤 아늑해 보였다.이서가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을 때, 뒤에서 하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너 이번에, 꽤 멋있더라……. 잘 했어.”이 말을 듣고 이서는 멍해져서 고개를 돌려 하은철을 보았다.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왜 그렇게 쳐다봐, 난 있는 그대로 얘기한 거야, 잘하면 잘한 거고, 못하면 못한 거고.” 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아쉬움 같은 게 넘쳤다.‘이서가 예전에도 지금처럼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서는 입술꼬리를 올렸다:“고마워.”하은철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네가 진작에 이렇게 사리에 밝았더라면 우리도 지금처럼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안되었을 텐데……. 사실, 애당초에 네가 수정에게 조금만 잘해줬어도 내가 널 받아들였을 거야.”이서는 고개를 돌려 마치 무슨 괴물을 보는 눈빛으로 하은철을 쳐다보았다.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하은철이 따라오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북서 제1가문의 하은철을 보고도, 소지엽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은철아.”“언제 들어왔어?”'하은철은 손을 내밀어 이서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이서는 그의 손을 무자비하게 뿌리쳤다.그리고 소지엽 뒤에 섰다.분명히 하은철과 함께 서고 싶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이 자그마한 행동으로 하은철은 화가 났다. 그는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경고의 눈빛으로 이서를 째려보았다.소지엽은 무언가 눈치챈 듯 무의식중에 몸을 약간 움직여 이서를 가렸다.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에서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시간 날 때 한 번 모이자.”“그래.” 하은철은 주먹을 꽉 쥐고, 소지엽 뒤에 있는 이서에게 말했다.“이리 와.”이서는 소지엽을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소지엽 뒤에서 나왔다.“하은철, 너 또 깜빡한 거 같은데…… 우리 이미 파혼했거든.”그녀는 소지엽의 옆에 서서 꿈쩍하지 않았다.하은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는 소지엽을 보면서 말했다.“미안……. 둘이 좀 싸웠거든. 나중에 시간 날 때 또 연락하자.”얘기 즉슨 소지엽은 자리를 떠도 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소지엽은 갈 생각 없이 이서를 그의 몸 뒤로 숨겼다. 한 눈에 봐도 일부러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었다.하은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지엽,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둘이 좀 다퉜다며?”소지엽은 밝고 해맑게 웃었다.“듣자니 이서 결혼했다 던데? 물론 남편은 네가 아니고…….”하은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하지만 딱 봐도 이서가 너랑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하은철의 이마에 핏줄이 펄쩍 뛰었다.“소지엽, 하씨와 소시 가문의 우애가 좋다고 내가 널 한 대 못 칠거란 생각 하지 마!”소지엽은 여전히 침했다. 웃음기가 눈가에서 미간까지 조금씩 퍼졌다.“은철아, 그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