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지만 손을 놓았다.이서를 곁에 두려면,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비슷한 결의 사랑만이 오래 갈 수 있다.지환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이 일이 끝나면 자기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다 들어 줄게.”이서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뭘 갖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생각나면 알려 줄게요.”“그래.”이서는 웃으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스크를 꺼내 쓰고 어두운 얼굴을 하며 힘들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환은 창문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이서는 차 옆에 도착해서야 임현태의 차 뒤에, 차량 두 대가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경계하며 차에 탄 그녀는 임현태에게 물었다.“임현태 씨, 뒤에 있는 저 차들은?”임현태의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동영상 사건 이후 회사에서 아가씨 신변에 해를 끼칠까 봐 보호차원에서 차량 두 대를 더 보냈습니다.”이서가 좀 감동했다.‘서우의 직원 복지가 이렇게 빈틈없다니…….’그러나 이서는 여전히 수시로 주위를 살펴보면서 이상이 없는지 신중을 기했다.듣는 말에 의하면 실력 있는 파파라치들은 창문만 찍힌 사진 한 장으로, 그 장소와 인물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이서는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것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파파라치들이 별장까지 찾아올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지환의 안정된 생활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 듯 임현태가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신중할 필요 없어요. 아무도 여기를 찾아오지 못할 거예요.”“왜요?”민호일의 사람들이 반달동안 뒤를 밟아도 이곳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지환이 여러차례 말조심하라는 경고했던 게 생각이 나 잠시 멈칫 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긴 보안시스템이 아주 완벽하게 잘 되어 있어서 이쪽을 찾아낸다고 해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이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다.그래서 차에 누워서 눈을 감고 정신을
[윤이서 씨, 그날 당신을 습격한 사람은 이미 잡았습니다.]“어, 벌써요?” 이서는 다소 의외였다. 그녀는 적어도 3일은 걸려야 사건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네.]전화기 너머의 경찰이 웃었다. 위에서 이번 일이 중요한 사안이니 가능한 한 빨리 용의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뭐가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네, 감사합니다.”이서는 전화를 끊고 또 배시영에게 문자를 보내고서야 고개를 들어 윤수정을 보았다.“여기는 사무실이니 직원 외 무관한 사람은 가능한 한 빨리 나가주길 바랍니다.”장지완은 윤수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윤 총괄님, 참 무정도 하시지, 수정 씨는 어쨌든 당신 동생이고, 또 이렇게 아침부터 걱정되어서 달려온 사람을 꼭 이런 식으로 쫓아내야겠어?”이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라앉았다.“이 일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한 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런 식으로 주제 넘는 행동하는 걸 보니 제대로 주의를 줘야겠네요.”“주의?” 장지완은 냉소했다. “무슨 주의?”“소희 씨, 회사 규정에 업무와 무관한 외부 사람을 데리고 회사에 장시간 머물 경우 벌금이 얼마였더라?”심소희는 장지완을 한번 보고 침을 삼켰다.“10만원이요.”“응, 재무팀에 연락해서 이번 달에 부총괄 월급에서 10만원 공제하라고 해.”장지완의 얼굴이 파래졌다.10만원, 그녀의 월급으로 치면 새 발의 피였다.그녀가 정말 난감 한 건 이서가 사무실 전체 사람들 앞에서 이 일을 선포했다는 것이다.이는 곧 모든 사람에게 디자인팀의 수장은 윤이서이지 장지완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윤이서!”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지완은 앞으로 나아가서 이서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윤수정이 그녀를 붙잡았다.윤수정은 그녀를 한 번 보았다. 눈에 경고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장지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혀 화나지 않은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았.“까요, 까! 마음대로 까! 어차피 서우에 오래 붙어 있지도 못할 텐데…….”“왜 다들
[어쩐지 윤이서가 그들을 차단하더라니, 나 같으면 이미 여기를 떴다!][윤이서 정말 안쓰럽네. 지금에야 왜 윤이서가 일반인에게 시집갔는 줄 알 거 같아. 이런 미친 부모를 만났으니 결혼해서 그 불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거지…….][그래, 평범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거 아니야!]“…….”사무실 안의 사람들도 이서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들도 일이 이렇게 진전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사무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한 장지완은 급히 강수지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보았다. 마지막까지 영상을 다 확인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윤수정도 골드 킹이 올린 영상을 확인하였다. 그녀의 안색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언니 정말 대단하다. 골드 킹 대행사에 의뢰하다니. 역시 골드 킹이야. 진실에 상관없이 이미지 쇄신 작업하는 데는 최고니까!”이서는 웃으며 말했다.“이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마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 같은데.”윤수정은 안색이 사색이 되어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서가 마치 무엇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나는 언니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작은아빠와 엄마는 모두 언니 부모님이잖아. 설령 일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이서는 몸을 숙여 윤수정의 귓가에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곧 아니거든!”윤수정의 몸은 다시 한번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며, 자신이 마치 이서가 정성껏 준비한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곧장 일어나 김청용에게 말했다.“사장님, 디자인 팀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김청용은 윤수정을 힐끗 보고는 이서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별일은 아니구요. 핑크리본 국제 디자인 공모전이 있는데 혹시 알고 있었어요?”이서는 고개를 저으며 김청용과 어깨 나란히 사무실로 들어갔다.장지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이번에는 이서가 어리둥절 해졌다.“임현태 씨가 회사에서 파견했다고 하던데요?”“임현태? 그게 누군데요?”“저한테 차량이랑 기사 보내주셨잖아요?”“…….”“사장님이 보낸 거 아니에요?” 이서는 눈썹을 찌푸렸다.김청용은 지금 얼떨떨했다. 그는 이서가 하지환의 조카며느리라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은 전혀 몰랐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이 일은 분명 지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이서는 막후 배후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상황인 듯했다.아마 하지환이 의도적으로 조카며느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사건 맥락은 명확한데 어떻게 상황을 넘겨야 할지 몰라서 뻔뻔하게 말했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기사는 회사에서 파견한 거 맞아요. 임현태라고 해서, 갑자기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이름이 임현태였구나.”김청용의 변명은 나름 그럴싸했다.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나 먼저 갑니다?” 김청용은 조심스럽게 이서를 쳐다보았다.이서가 미소를 지었다.“네, 가세요.”그녀가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김청용은 그제야 떠났다.그러나 그가 떠나자, 이서는 생각에 잠긴 듯 의자에 앉았다.바로 이때 전화가 울렸다. 배시영이 걸어왔다.[이서 씨, 그 괴롭힘 당하는 동영상 내보내도 될까요?]“네.”[알겠습니다.]배시영은 핸드폰으로 부하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전화를 끊고, 그녀는 갑자기 이서야말로 그녀의 상사라는 느낌이 들었다.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었다.이서의 집이 페인트와 오물을 뿌리는 동영상이 올라오자, 네티즌들이 이서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했다. 부모에게 납치되고 된 통으로 당한 것도 모자라 영상을 찍어 비난까지 하다니…… 정말 불쌍했다.경찰이 이서의 집 앞에서 이서를 해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발표함에 따라 성지영과 윤재하에 대한 비난 여론이 최고조에 달했다![한 명의 엄마로서 이 장면을 보고 정말 열불이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윤씨 부부가 동영상 유포할 때는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겠지?][난 그들
이 동영상이 업로드 되자 이서의 예상처럼 그녀를 비난하던 무리들은 사라지고 모두 그녀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윤이서 너무 착한 거 아냐? 아직까지도 부모 편의를 봐주려고 하는 거 보면……. 여간해서는 집과 인연 끊고 살 사람이 아닐 거 같은데?”“얘기 들으니 갑자기 더 무서워졌어. 딸 납치하고, 또 동영상 파문으로 딸 얼굴에 먹칠하고, 사이버 폭력 당하게 하고……, 무슨 양파야? 까도 까도 계속 나와. 도무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게야?”“그러니까 이서가 부모 곁을 떠난 건 옳은 결정이야. 빨리 부모와 인연 끊어라. 윤씨 부부처럼 무서운 부모는 처음 보는 듯!”“맞아, 부모 자식 연을 끊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윤이서를 꼭 안아주고 싶다. 너무 불쌍하다!”“…….”인터넷에 올라온 댓글을 보며, 지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이천도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은 정말 출근하기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아침 댓바람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을 줄 알았는데 보스의 안색이 어두울 뿐 별 말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얘기 두 마디 했다가 방안 분위기가 또 험악해졌다.이제야 지환의 얼굴에 화색이 조금 도는 것 같았다.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회장님, 사모님 일은 해결되었습니까?”지환은 ‘응’ 하고 대답하면서 다시 이천을 흘겨보았다.“이천, 왜 이렇게 땀투성이야? 옷도 젖었어?”‘글쎄요. 왜 그럴까요?’하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더워서요, 하, 너무 덥다.”지환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윤씨 그룹 자료 가져왔어?”“이미 준비하라고 했으니 조금 있으면 보내올 것입니다.”이천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왜 갑자기 윤씨 그룹 자료가 필요합니까?”만약 이전의 윤씨 그룹이라면 그래도 희망이 보이지만, 현재의 윤씨 그룹은 하씨 그룹이 장악하고 있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천은 이해가 안 됐다.지환은 느긋하게 그를 째려보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갖고 와.”“네.” 이천은 대답하기 바쁘게 재촉하러 갔다
하경수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심지어 갈라졌다.지환은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이서는 당연히 윤씨 집안 사람이죠.”[하지만 한번도 나에게 이서가 채선의 손녀라고 말한 적이 없잖아!]“채선?” 지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로 물었다.“이서 할머니랑 아는 사이에요?”하경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이서는 네 작은아빠가 손자 며느리로 점 찍어 놓은 사람일 게야. 그런데 너랑 결혼…….]지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하경수의 말을 끊었다.“이서와 하씨 집안은 아무런 관계없어요. 난 누구의 약혼녀가 아닌 이서랑 결혼했어요.”[네 작은아빠가 절대로 너와 이서의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 거야!]“어떻게 아세요?”하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왜냐하면 이서는 그에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지.]“이서는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해요.”지환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누구도 나에게서 이서를 빼앗아 갈 수 없어요. 나 목숨 걸고라도 지켜낼 겁니다.”아들이 정말 이서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린 하경수는 더 이상 아무 얘기하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그는 탄식하며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악연이야, 정말 악연이야!”다만 아들 세대에서는 그들처럼 형제가 반목하여 고향에도 못 돌아가는 상황이 안되길 바랄 뿐이었다.……윤씨 그룹 회의실에는 먹구름이 감돌았다.윤재하의 우측에는 윤씨 그룹의 주주들이 앉아 있었다.성지영의 동영상 파문으로 인해 회사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일찍이 윤재하의 적자 경영에 불만을 품었던 주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윤 사장님, 이 일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이사회의 공격적인 태도에 윤재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그럼 집에서 좀 쉬세요. 어차피 다음 달에 새 CEO를 선출할 테니, 새로 취임한 CEO더러 처리하라고 합시다!”윤재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지금 나를 해임시키는 겐가?”“윤 사장님, 지금까지 사장 자리
그들이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건 윤씨 그룹 때문이었다.윤씨 그룹이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이유도 윤씨 부부가 회사돈을 횡령했기 때문이다.새 CEO가 선출되면 짭짤한 돈주머니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라도 하게 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나…… 내가 이서에게 사과할게요!”성지영은 당황하여 일어섰다.같은 시각, 디자인 부서 사무실 내.일이 원만히 해결되었고, 이서가 동영상 파문이후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지영 부부와 자연스럽게 관계 정리가 되었다. 이서는 기분이 날아 날 듯 좋았다.그녀는 임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에 함께 쇼핑하자.”[와, 이서야, 우리 텔레파시가 통했다. 나도 방금 네가 보낸 동영상을 봤거든. 마침 너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한 발 앞섰네.]전화선을 사이에 둔 게 아니라면 임하나는 이서를 꼭 안아 주고 싶었다.‘우리 이서 멋지게 한 방 먹였네!’“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네?” 이서가 웃었다.[좋아, 좋아, 퇴근하고 너한테 갈게.]“응, 있다 봐.”퇴근 후 30분이 지나자, 임하나는 이서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만나서 임현태의 차에 올랐다.“출퇴근 전용차량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오늘에야 드디어 시승해 보는구만. 서우의 직원 복지 너무 좋은데……?”이서는 내색하지 않고 임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말했다.“신성로 쪽에 백화점이 새로 하나 오픈했다는데 우리 거기 가보자.”“좋아.” 임하나는 말을 마치고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그녀의 쳐다보는 눈빛에 이서도 따라 웃었다.“왜 이렇게 나를 쳐다봐?”“이서야, 우리 이서 정말 너무 대단해. 장해. 영상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관계를 끊어내다니 정말 너무 장해.”“너 벌써 두 번이나 칭찬했다.”“100번도 부족해. 내가 어제 섣불리 나서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너의 이 완벽한 계획에 내가 초 칠 뻔 했잖아.”“에이 뭐 그 정도까지야.”“그나저나 어떻게 골드 킹을 섭외한 거야? 내가 듣기로는 배시영이 이번
차가 다시 출발했다. 짧은 침묵 뒤, 임하나는 방금 하던 얘기가 생각나 물어보려고 하던 참에 갑자기 흥분하여 차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서야, 저기 저 프랑스 레스토랑 봐봐. 우리 지난번에 여기서 너 프러포즈 준비 했었거든.”이서는 앞줄의 임현태가, 임하나 입에서 지환 얘기 나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프러포즈란 얘기에 정신이 팔린 이서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어디? 어디?”“바로 저기.”임하나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내려가 볼까? 우리 그날 꾸밈장식은 이미 철거되었겠지만…….”“괜찮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아냐, 같이 가보자.”“그래, 그럼.”이서는 임현태에게 차를 프랑스 레스토랑 옆에 세우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뒤에야 레스토랑이 잠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정말 아쉽다.”이서는 웃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유리문이여서 내부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가까이 가서 내부 장식을 본 이서는 깜짝 놀랐다.산뜻한 풍선이 천장에 떠있었고 장미는 시들었지만 또 다른 정적미가 물씬 풍겼다.작은 카트 위에 있는 케이크 모형의 한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반지가 빠졌지만 언 발런스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 반지는 이미 주인의 손가락에 끼어있기 때문이다.쇼윈도 안의 모습은 한 장의 아름답고 로맨틱한 스틸컷 같았다. “너무 아름답다.”임하나는 멍해졌다.“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니…… 먼지도 하나 없어. 가게 오픈 안하나? 영업은 안 하는 거야?”“전화해서 물어봐.” 이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간판에 적힌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다.임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재빨리 지환에게 문자를 보냈다.전화는 세 번째 시도 만에 연결되었다.전화기 저편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여사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레스토랑 내부에 프러포즈 이벤트가 아직 철거하지 않았나요?”[아, 네, 그거야. 어떤 남자 손님이 아내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서프라이즈였어요. 우리 사장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