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줄의 두 운전자는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본인의 보스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모두 소박한 바람을 품고, 자신의 차가 먼저 정상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아주 평온해 보였고, 지환은 특히 그러했다. 끊임없이 뒤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어서 돌아가 이서를 만나는 것. 바로 이때, 앞으로 나아 차가 무언가에 세게 부딪혔다.지환이 창밖을 바라보자, 하은철의 차가 보였다.그의 차를 들이받은 하은철의 차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잽싸게 나아갔다. 앞줄에서 이민재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괘씸합니다, 하 사장님! 어서 쫓아가겠습니다!” “그래요.”지환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사람은 극도로 긴장한 상황에서는 한눈을 팔 수 없는 법이었다. 이민재는 뒷좌석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속페달을 더욱 거세게 밟으며 미친 듯이 앞차를 쫓았다. 이민재의 운전 솜씨는 꽤 훌륭했으나, 아쉽게도 그의 상대는 치타였다.치타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 중 운전 기술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안목이 뛰어난 하은철이 단번에 최강을 고른 것이었다. 순간, 지환의 시선이 눈앞의 가림막으로 향했는데, 그 가림막을 통해 앞좌석의 운전자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가 선택한 이민재의 실력도 상당했다. 이미 치타에게 한 번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쫓을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뒤처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민재에게 내기를 완전히 맡기면 패배할 것이었다.“핸들을 넘겨요!”지환은 가림막을 내리고 날렵하게 앞줄로 들어갔다.이민재는 놀라 손이 미끄러졌고, 차량이 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곧 가드레일에 부딪힐 듯하자, 지환이 핸들을 덥석 잡았다.“죽기 싫으면 뒤로 꺼져!” 겁에 질린 이민재는 벌벌 떨다가 1분이 지나서야 허둥지둥 뒷좌석으로 기어갔다.그는 뒷좌석에 앉아서도 혼비백산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민재를 가장 놀라게 한 것
지환은 정신을 집중하여 뒤차가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도록 죽어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하지만...”이민재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부하도 대단한 사람이잖아? 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죽일지 궁금하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차가 지환의 차를 들이받았다.죽을힘을 다한 매서운 일격. 지환의 차가 몇 미터나 튕겨 나갔다. 만약 지환이 핸들을 힘껏 움켜쥐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가드레일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었다.뒷좌석에 앉은 이민재가 이 광경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하하, 정말 빠르구나!” 지환은 그를 흘겨보았지만, 어떠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이민재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당신, 왜 나를 해치지 않지?”“하은철이 어떻게 죽는지 너한테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서.” 이민재는 다시 조수석을 끌어안았다.“당신은 앞에 있고, 하 사장님은 뒤에 있어. 행동할 공간으로 따지면, 하 사장님이 당신보다 많지 않나?” 지환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잠시 후, 그는 가속페달을 밟아 단번에 두 차의 거리를 떨어뜨렸고 멋진 곡선을 그리며 뒤로 후진하기 시작했다.고개를 돌린 이민재는 점점 가까워지는 뒤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놀란 그는 잽싸게 눈을 감았으나, 귓가에 ‘펑’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차 안에는 짧은 흔들림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이민재가 황급히 뒤차를 살폈다. 그 차는 충격을 받았는지 몇 미터 떨어져 나가서 멈춘 상황이었다.이민재는 얼른 주위의 상황을 살폈는데, 그제야 지환의 차도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차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 것이었다. 조용히 대치하는 두 대의 차는 두 마리의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절반이나 남은 산길을 본 이민재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잠시 후, 뒤차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이민재는 또 한 번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이
심씨 가문 고택.“조급해 죽겠어. 파티가 곧 끝날 텐데, 형부랑 이 선생님은 왜 아직인 거지?”하나가 입구 방향을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윤 대표님!”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서와 하나가 뒤돌아보니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흥분한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 인사하려 했지만, 이서가 저지하고 나섰다. “심소희 씨가 심씨 가문으로 되돌아가신 걸 축하드립니다.” 술잔을 든 이서가 소희와 멀리 떨어져 경축했다. 하나도 이곳이 공공장소라는 것을 의식했는데, 무수한 눈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소희의 관계는 이제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오늘 저녁 일에 대해 윤 대표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만약 윤 대표님께서 똑같은 드레스를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면, 심유인 언니가 아닌 제가 크나큰 추태를 부릴 뻔했으니까요.” 그녀에게 주스를 맞은 심유인은 소희가 똑같은 드레스를 한 벌 더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고용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홀연히 자리를 떠났고, 더 이상 그녀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윤 대표님,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셨나 보군요.” “이런 일을 예상했다기보다는...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그분들이 고의로 소희 씨를 난처하게 하는 걸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소희 씨랑 같은 드레스를 구매한 거고요.” 그들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서 겉으로는 예의상 사교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좋은 친구였음은 추호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희는 두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눌렀다.“심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윤 대표님을 걱정시키다니요.” “이제 막 심씨 가문으로 돌아갔으니 대응하기 벅찬 건 당연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오늘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다만, 심유인 씨와 강 여사님은 반드시 조심해야 해요.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거든요.” 이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
소희는 이내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 나갔다.하나가 이서에게 물었다.“우리도 가볼까?” “당연하지, 왜 안 가?”이서가 대답했다.그녀는 강경숙이 늘 나쁜 속셈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이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야.’“그럼 가자!”하나는 이서를 끌고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입구에 도착한 하나는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똑똑히 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저 사람이라고?” 입구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하나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바로... 소희에게 죽어라 돈을 구걸하던 정인화였다!“아, 이제는 소희를 키워준 엄마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정인화의 곁에는 스무 살 정도의 젊은이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소희의 동생인 심태윤일 것이었다. “누구세요?”강경숙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눈동자에 서렸던 흥분을 거두었다. ‘일부러 늦은 하은철일 줄 알았는데, 평범해 보이는 두 사람이라니.’ 태윤이 소희를 향해 다가갔다.“누나.” 이 목소리는 이전에 소희가 윤씨 그룹에 있을 때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정인화 모자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오, 이분들이 네 양어머니와 동생이구나.”심근영이 가장 빠르게 반응했고, 웃으며 말했다.“오신 김에 들어와서 함께 식사하시죠.” “잠시만요, 우리는 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고요.”심근영의 앞으로 다가간 정인화가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그쪽이 소희의 친아버지?” “예.”심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단한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거죠? 딸을 인정하는 큰 행사에 우리를 부르지 않다니요. 물론 내가 소희를 낳은 건 아니지만, 내가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 가족이 오늘 다 함께 모일 수 있었을까요?” 소희가 말했다.“또 돈을 원하시는 거예요?”민낯이 낱낱이 밝혀진 정인화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미소를 지었다.“내가 딸을 파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소희야, 이렇게 큰 경사를 알리지 않다니... 내가
이지숙은 이 말을 듣고 얼른 소희의 팔을 잡아당겼다.“소희야, 그러지 마. 그래도 널 20년 넘게 키워주신 분이잖니...”“키워줘요? 허, 그렇죠. 20년 넘게 키웠지만, 지난달에는 좋은 가격에 저를 팔아넘기려 했어요. 윤 대표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명성은 엉망이 되었을 거라고요!”“좋아요, 지난번 2억은 다 쓴 모양인데, 이번에는 또 얼마를 뜯어내시려고요?” 소희는 더 이상 그들과 어떠한 정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정과 같은 것은 아끼는 사람에게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정인화처럼 돈에 눈이 먼 사람에게 정과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정인화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2억을 가져갔다고 그래? 소희야, 지난번 일 때문에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나도 너무 혼란스럽구나. 후에 내가 직접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니?” “왜 직접 해명했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겠죠.”“어쨌든, 절대로 못 들어가요!” 정인화는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줄곧 입을 열지 않던 심태윤이 말했다. “누나.”그는 대학생이기 때문에 정인화처럼 거칠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기적이라는 점은 대를 이은 듯했다.“엄마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엄마도 이제 50세가 넘어서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단 말이야. 하지만 모든 건 다 누나의 행복을 위한 거였어.” “누나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누나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만 하신 분이야. 그래서 아빠와 나의 만류에도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고.” “아빠도 그러시더라.” “몸이 아파서 직접 갈 수 없으니, 나더러 학교가 아닌 여기로 가야 한다고!” “우리 가족이 이러는 게 누나를 위한 게 아니면 뭔데?” 소희가 콧방귀를 뀌었다.‘조금이라도 늦으면 돈을 못 받을까 봐 걱정된 거겠지.’ “날 그 정도로 생각해 줬다니 고맙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두 사람은 절대 심씨 가문 고택으로 들어올 수 없어! 심씨 가문이 나를 내치지 않는다면 말이야!
이 광경을 보던 하나가 참지 못하고 이서에게 말했다.“한 우물만 잘 파면 성공한다는 말이 딱 맞구나. 끈질기게 매달리는 걸로도 모자라, 도덕적 압박까지 서슴지 않잖아!”이서가 말했다.“구경하는 재미는 있네.”“그럼 어쩌자는 거야? 저렇게 굴도록 내버려두자는 거야?” 이서는 손님들을 붙잡은 채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떠들어대는 정인화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한참이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서가 낮게 웃었다.정인화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이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서의 얼굴을 본 정인화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당신은...?”이서가 미소를 지었다.“저를 기억하시나 보네요. 새까맣게 잊으신 줄 알았는데요.” “물론 기억하죠. 우리 소희의 대표되는 사람이잖아요. 소희가 오늘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다 당신 덕분이죠.”이서가 말했다.“별말씀을요.”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화제를 돌렸다.“방금 여사님께서 소희 씨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말씀하시는 걸 듣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번에 뵈었을 때도 분명히 느꼈죠, 여사님께서 소희 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늘 배려해 주신다는 걸요.” 이 말을 정인화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흥분하며 이서의 손을 잡았다.“아이고, 정말 쑥스럽네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어떤 엄마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여사님만 같았으면 좋겠네요. 자식 자식이 아닌 사람을 친딸처럼 대하시고,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마을에서 대학까지 보내려 하셨으니까요.” “아이고, 아이고,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정인화의 손을 꽉 잡은 이서는 그녀가 도망갈까 봐 두려운 듯했다.“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니, 소희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을 때도 진심으로 기쁘셨겠어요.” “그럼요, 물론이죠! 소희가 친부모를 찾다니, 아마 소희보다 우리가 더 기뻐했을걸요?” “그런데... 소희 씨의 친부모님이 심씨 가
“오, 이제야 알겠네요. 다 소희 때문인 거죠?”“내가 그랬잖니, 네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우리 가족이 가난해진 거라고!” “저기...”정인화가 이지숙에게 다가갔다.“제 말이 맞죠? 재수 없는 소희 때문에 심씨 가문이 망하게 된 거죠? 당장이라도 소희를 쫓아내고 제 아들을 수양아들로 인정하세요. 그러면 틀림없이 심씨 가문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예요. 이 정인화가 장담한다니까요?!” 정인화가 본 모습을 드러내자, 이지숙이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말끝마다 소희를 아끼신다는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제 보니까 소희가 아닌 심씨 가문의 돈을 사랑하셨던 거네요.” 그제야 자신이 속은 것을 깨달은 정인화가 이서를 쳐다보았다.“방금 그렇게 말한 이유가...”“엄마!”심태윤은 자기 엄마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정인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만 가요, 더 이상 여기서 창피하게 굴지 마시라고요!” “후...”소희는 두 사람이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 대표님, 정말 감사해요.”소희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서 언니가 저 두 사람의 압박을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저 뻔뻔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했을 거야.’ 이서가 소희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뭘.” 이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들,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소희가 대답했다.“네.” 볼거리가 사라지자, 강경숙이 실망스럽다는 듯 소희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나저나 정말 이상하네요. 하은철 사장님은 왜 아직이죠? 설마...” 그녀가 갑자기 심근영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예전에는 심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잘 협력했었죠. 하지만, 심씨 가문이 갑자기 협력을 깨뜨리는 바람에 하은철 사장님의 원한을 산 거 아닐까요?” 사실, 그녀의 말은 소희
사람 중에는 오직 이서와 하나만이 자신들이 온 길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환과 하은철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하나는 이것이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야, 형부는 아직도 답장이 없어?” 이서는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없어.”“아니면, 내가 이 선생님한테 전화해 볼까?” 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응.”하나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어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들릴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는 걱정스럽게 핸드폰을 잡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꼭이요!’ 그녀가 몇 번이고 되뇌던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선생님...”[그래요, 나예요.]상언의 말투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왜 전화했어요?] 하나가 이서를 힐끗 보고는 기침하며 말했다.“오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곧 파티가 끝날 텐데, 왜 두 사람은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상언이 낮게 웃었다.[하나 씨, 지금 날 걱정하는 거예요?] 하나의 안색이 붉어졌다.“말도 안 돼요, 저는 그냥...” 그녀는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이서를 한 번 바라보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 말했다.“이서가 형부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대체 언제 오실 거예요?” 상언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곧 갈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그녀는 몇 초간의 침묵을 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상언은 밝은 미소를 띠며 지환에게 말했다.“하나 씨가 나한테 전화를 걸었어.”“하나 씨가 뭐랬는데?” “당연히 날 걱정했지...” 지환이 흘겨보자, 상언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물론 이서가 널 걱정해서 하나 씨한테 전화해 보라고 했겠지. 참, 이젠 우리도 심씨 가문에 가야 하지 않을까?”그는 아직도 하은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은 무방비 상태로 산에서 떨어졌어. 이 정도 높이라면... 분명 죽었을 거야. 치타도 혼수상태에 빠졌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