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씨 가문의 고택.하은철은 물론이며 소희도 나타나지 않았다.홀 안의 많은 사람은 이미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5분이 훨씬 지났는데, 소희는 왜 아직이야?” 하나가 초조하게 말했다.“설마 사고가 난 건 아니겠지?” 이서의 눈빛이 심씨 가문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소희가 질질 끌면서 나타나지 않자, 어떤 사람은 초조한 표정을, 또 어떤 사람은 고소한 표정을, 나머지는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 심씨 가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심유인과 강경숙이 메인 테이블로 걸어갔다. 심근영의 곁으로 다가간 심유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삼촌, 소희는 왜 아직이에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이서의 시선이 단번에 심유인에게 떨어졌다.그녀가 화장실에서 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심유인이었다!이지숙이 2층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올라가 볼까요?”“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강경숙이 이지숙을 진정시켰다.“형님, 형님은 소희의 엄마잖아요. 그런데 왜 직접 찾으러 간다는 거예요?” “소희 말이에요... 우리가 실수로 자기를 잃어버린 걸 원망해서, 일부러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리 심씨 가문을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요?” “우리 소희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이지숙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딸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강경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런 게 아니라면, 왜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거죠? 그리고, 아직도 형님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계속 ‘아주머니’라고 부르던걸요...” 하나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풉, 사모님은 상대가 누구든 쉽게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신가 봐요.” 강경숙의 시선이 이서와 하나에게 향했다.오늘 같은 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서의 사람에게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누군가 했는데, 소희의 친구였군요?!”강경숙은 일부러 ‘친구’라는 두 글자를 강조했는데, 다른 사람이 소희와 이서의 관계를 모를까 봐 걱정
강경숙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들었으면 어떠니? 증거가 없는걸. 흥, 그리고 윤이서가 심소희의 드레스가 되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2층을 힐끗 바라본 심유인은 소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엄마 말씀이 맞아요. 윤이서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드레스를 마련할 수 없었을 거예요. 윤이서가 처음부터 모든 걸 계산하지 않았다면요.” 두 사람이 득의양양할 즈음, 2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2층으로 향했다.곧이어 천천히 걸어 나오는 소희의 모습이 보이자, 심유인의 얼굴에도 득의양양한 기색이 만연해졌다. 하지만 곧이어 표정이 굳어졌다.그 이유는...소희가 입은 드레스가 이전에 가게에서 고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어떻게...”심유인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강경숙은 그녀가 겪은 일보다 더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곧 침착함을 되찾고 심유인의 손을 잡았다.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니, 좀 진정하는 게 좋겠구나. 심소희가 아니라, 네가 망신당하는 수가 있어.” 심유인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서둘러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감추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소희를 보자 하니, 눈동자에 어쩔 수 없는 질투가 번지기 시작했다. 소희는 이서의 곁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덕에 자신의 기질에 아주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랐다. 그녀는 아주 우아하고 대범한 모습, 그 자체였다. 비록 심씨 가문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부유한 집안의 품위와 기품이 느껴졌다. 또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편안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오래 보면 볼수록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현장에는 소희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기에, 모두가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심씨 가문의 아가씨가 이런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뭇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그리고 다른 부유한 사모님들도 소희의 세련된 몸짓과 행동에 상당히
모두가 존중하는 심근영이 나섰으니, 사람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광경을 본 심유인과 강경숙은 화를 내는 걸로도 모자라 피를 토할 뻔했다.연회가 중반을 지나고, 소희가 나가는 모습을 본 심유인과 강경숙은 눈빛을 교환한 뒤,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소희는 정원에 선 채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심유인은 주먹을 꽉 쥔 채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소희야, 너 정말 감상적이구나? 여기서 달을 감상하고 있다니.” 소희는 잔을 든 채 천천히 몸을 돌렸고, 미소를 지은 채 심유인을 바라보았다.“누가 달을 감상했다고 그래요? 저는 여기서 언니를 기다린 거예요.” 심유인의 안색이 변했다.“나를 기다렸다고?”“그래요, 제 드레스가 왜 망가지지 않은 건지 궁금해 죽을 것 같지 않아요?” “소희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소희는 잔에 든 주스를 심유인의 얼굴에 흩뿌렸다. 심유인이-은 곧바로 펄쩍 뛰며 말했다.“심소희,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정신 나간 짓이요?”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모든 사람이 다 나올 때까지 소리쳐 보세요. 그때가 되면 언니가 저를 곤란하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낱낱이 이야기할 테니까요!” 심유인이 얼굴에 묻은 주스를 한 번 닦고 매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너, 증거 없잖아. 증가가 있었으면 진작에 삼촌한테 고자질했겠지? 그리고, 사람들이 너랑 나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줄까? 한때 윤이서의 유능한 조수였던 너일까, 아니면 어릴 때부터 심씨 가문에서 자란 나일까?”소희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해요? 증거가 없었으면 미리 똑같은 드레스 두 벌을 준비할 수 있었겠어요?” 드레스에 관해 말하자, 심유인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네 드레스, 대체 어떻게 된 거야?”소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인정하시네요!” 심유인은 당황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무슨 헛소리야?
하은철은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었지, 그 답을 믿고 싶지 않았다.“이서 때문이에요?”“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서를 위해서라면, 결과 따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하은철은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허! 하지환, 이서가 처음부터 좋아한 사람이 나였다면, 지금쯤 미친X은 네가 됐을 거야!” “글쎄,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해, 네가 평생 이서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거!” 하은철은 깊은숨을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그는 매섭게 두 눈을 감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뜨고 말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내가 제안한 내기야. 즉, 이 내기에서 죽게 되더라도 원망이나 후회는 없을 거란 뜻이지. 하씨 가문도 널 탓하지 않을 거야.” 지환이 말했다.“그럼 생사 계약을 맺자.”“네 부하를 시켜.”하은철이 대답했다.몇 분 후, 생사 계약서가 도착했다.계약서를 한 번 훑어본 하은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서명했다.본인이 주동적으로 제안한 내기에 서명하지 않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다만, 패배한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내기에 목숨을 걸었어. 모든 걸... 하늘에 뜻에 맡겨야겠군.’서명을 마친 지환이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골라.” 이번 내기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바로 레이싱.먼저 산꼭대기에 도달한 사람이 이서의 천생연분임을 증명하는 셈이었다.하은철은 두 대의 차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지환과 약속한 바 있었다.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가 결승선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와 지환의 생사가 걸린 내기인 것이었다. “하지환.”하은철이 이미 부서진 팔을 휘저었다.“난 너랑 비등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지금은 오른손마저 움직일 수 없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자극적으로 놀아보는 건 어때?”지환은 하은철을 쳐다보았으나, 그
앞줄의 두 운전자는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본인의 보스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모두 소박한 바람을 품고, 자신의 차가 먼저 정상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아주 평온해 보였고, 지환은 특히 그러했다. 끊임없이 뒤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어서 돌아가 이서를 만나는 것. 바로 이때, 앞으로 나아 차가 무언가에 세게 부딪혔다.지환이 창밖을 바라보자, 하은철의 차가 보였다.그의 차를 들이받은 하은철의 차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잽싸게 나아갔다. 앞줄에서 이민재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괘씸합니다, 하 사장님! 어서 쫓아가겠습니다!” “그래요.”지환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사람은 극도로 긴장한 상황에서는 한눈을 팔 수 없는 법이었다. 이민재는 뒷좌석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속페달을 더욱 거세게 밟으며 미친 듯이 앞차를 쫓았다. 이민재의 운전 솜씨는 꽤 훌륭했으나, 아쉽게도 그의 상대는 치타였다.치타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 중 운전 기술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안목이 뛰어난 하은철이 단번에 최강을 고른 것이었다. 순간, 지환의 시선이 눈앞의 가림막으로 향했는데, 그 가림막을 통해 앞좌석의 운전자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가 선택한 이민재의 실력도 상당했다. 이미 치타에게 한 번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쫓을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뒤처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민재에게 내기를 완전히 맡기면 패배할 것이었다.“핸들을 넘겨요!”지환은 가림막을 내리고 날렵하게 앞줄로 들어갔다.이민재는 놀라 손이 미끄러졌고, 차량이 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곧 가드레일에 부딪힐 듯하자, 지환이 핸들을 덥석 잡았다.“죽기 싫으면 뒤로 꺼져!” 겁에 질린 이민재는 벌벌 떨다가 1분이 지나서야 허둥지둥 뒷좌석으로 기어갔다.그는 뒷좌석에 앉아서도 혼비백산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민재를 가장 놀라게 한 것
지환은 정신을 집중하여 뒤차가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도록 죽어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하지만...”이민재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부하도 대단한 사람이잖아? 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죽일지 궁금하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차가 지환의 차를 들이받았다.죽을힘을 다한 매서운 일격. 지환의 차가 몇 미터나 튕겨 나갔다. 만약 지환이 핸들을 힘껏 움켜쥐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가드레일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었다.뒷좌석에 앉은 이민재가 이 광경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하하, 정말 빠르구나!” 지환은 그를 흘겨보았지만, 어떠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이민재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당신, 왜 나를 해치지 않지?”“하은철이 어떻게 죽는지 너한테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서.” 이민재는 다시 조수석을 끌어안았다.“당신은 앞에 있고, 하 사장님은 뒤에 있어. 행동할 공간으로 따지면, 하 사장님이 당신보다 많지 않나?” 지환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잠시 후, 그는 가속페달을 밟아 단번에 두 차의 거리를 떨어뜨렸고 멋진 곡선을 그리며 뒤로 후진하기 시작했다.고개를 돌린 이민재는 점점 가까워지는 뒤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놀란 그는 잽싸게 눈을 감았으나, 귓가에 ‘펑’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차 안에는 짧은 흔들림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이민재가 황급히 뒤차를 살폈다. 그 차는 충격을 받았는지 몇 미터 떨어져 나가서 멈춘 상황이었다.이민재는 얼른 주위의 상황을 살폈는데, 그제야 지환의 차도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차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 것이었다. 조용히 대치하는 두 대의 차는 두 마리의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절반이나 남은 산길을 본 이민재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잠시 후, 뒤차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이민재는 또 한 번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이
심씨 가문 고택.“조급해 죽겠어. 파티가 곧 끝날 텐데, 형부랑 이 선생님은 왜 아직인 거지?”하나가 입구 방향을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윤 대표님!”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서와 하나가 뒤돌아보니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흥분한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 인사하려 했지만, 이서가 저지하고 나섰다. “심소희 씨가 심씨 가문으로 되돌아가신 걸 축하드립니다.” 술잔을 든 이서가 소희와 멀리 떨어져 경축했다. 하나도 이곳이 공공장소라는 것을 의식했는데, 무수한 눈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소희의 관계는 이제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오늘 저녁 일에 대해 윤 대표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만약 윤 대표님께서 똑같은 드레스를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면, 심유인 언니가 아닌 제가 크나큰 추태를 부릴 뻔했으니까요.” 그녀에게 주스를 맞은 심유인은 소희가 똑같은 드레스를 한 벌 더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고용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홀연히 자리를 떠났고, 더 이상 그녀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윤 대표님,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셨나 보군요.” “이런 일을 예상했다기보다는... 지난번에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그분들이 고의로 소희 씨를 난처하게 하는 걸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소희 씨랑 같은 드레스를 구매한 거고요.” 그들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서 겉으로는 예의상 사교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좋은 친구였음은 추호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희는 두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눌렀다.“심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윤 대표님을 걱정시키다니요.” “이제 막 심씨 가문으로 돌아갔으니 대응하기 벅찬 건 당연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오늘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다만, 심유인 씨와 강 여사님은 반드시 조심해야 해요.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거든요.” 이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
소희는 이내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 나갔다.하나가 이서에게 물었다.“우리도 가볼까?” “당연하지, 왜 안 가?”이서가 대답했다.그녀는 강경숙이 늘 나쁜 속셈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이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야.’“그럼 가자!”하나는 이서를 끌고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입구에 도착한 하나는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똑똑히 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저 사람이라고?” 입구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하나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바로... 소희에게 죽어라 돈을 구걸하던 정인화였다!“아, 이제는 소희를 키워준 엄마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정인화의 곁에는 스무 살 정도의 젊은이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소희의 동생인 심태윤일 것이었다. “누구세요?”강경숙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눈동자에 서렸던 흥분을 거두었다. ‘일부러 늦은 하은철일 줄 알았는데, 평범해 보이는 두 사람이라니.’ 태윤이 소희를 향해 다가갔다.“누나.” 이 목소리는 이전에 소희가 윤씨 그룹에 있을 때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정인화 모자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오, 이분들이 네 양어머니와 동생이구나.”심근영이 가장 빠르게 반응했고, 웃으며 말했다.“오신 김에 들어와서 함께 식사하시죠.” “잠시만요, 우리는 밥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고요.”심근영의 앞으로 다가간 정인화가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었다.“그쪽이 소희의 친아버지?” “예.”심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단한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거죠? 딸을 인정하는 큰 행사에 우리를 부르지 않다니요. 물론 내가 소희를 낳은 건 아니지만, 내가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 가족이 오늘 다 함께 모일 수 있었을까요?” 소희가 말했다.“또 돈을 원하시는 거예요?”민낯이 낱낱이 밝혀진 정인화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미소를 지었다.“내가 딸을 파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소희야, 이렇게 큰 경사를 알리지 않다니... 내가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