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지환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단지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심이 서려 있었다. “이 번역가님, 윤 대표님을 처음 뵙는 건 아니죠?”같은 테이블에 있던 한 사람이 계속해서 이서의 방향을 보는 이유찬을 조롱하기 시작했다.“윤 대표님이 확실히 타고난 미인이긴 하죠. 그런 게 아니라면, 윤 대표님께 거절당한 하 사장님이 그렇게 미친 듯이 행동하진 않았을 테니까요.”“저는 윤 대표님이 아니라, 윤 대표님의 곁에 있는 남자를 보는 겁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졌다.고개를 돌려 그 사람들을 마주한 이유찬은 그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단지 저 남자분이 좀 낯익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한 사람이 꽤 독실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 윤 대표님의 남편분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었겠어요.” 이유찬이 말했다.“저 남자분이 윤 대표님의 남편이라는 거군요...” “맞아요, 돈이 없긴 하지만, 얼굴은 아주 잘생겼죠. 요즘 부잣집 아가씨들은 다 그런 걸 좋아하잖아요?”같은 테이블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저 기질을 좀 보세요. 저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을 아무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허허, 남자 꽃뱀을 본 적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여자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남자 꽃뱀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두 사람이 곧 싸우려 할 때, 이유찬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생각났습니다, 저 사람을 어디서 만났는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유찬에게 떨어졌다.“민 대표님을 따라 해외 출장을 갔던 그해, M국에서 열린 우수 청년 대회에서 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아직도 기억하신다는 겁니까? 사람들은 의심을 표하기 시작했는데, 이유찬이 그와
소희는 아직 심씨 가문의 가족이 아니었음에도 감격스러워하며 말했다.“형부, 정말 감사합니다.” 심씨 가문이 이서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환은 YS그룹까지 매각하면서 모든 정력을 화영에 집중시켰다. 그런 그가 심씨 가문을 무너뜨리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심씨 가문은 살길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심씨 가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번 일로 심씨 가문을 겨냥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서의 체면을 위한 것이었다. 소희는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심씨 가문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심근영 부부는 결국 그녀의 친부모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같은 시각.화장실을 나서던 이서는 긴장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직접 하지는 않았다. 이서가 두 걸음 정도 내디디며 그 남자의 곁을 지나려던 찰나, 그가 갑자기 대담하게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누구세요?”이서는 보고 또 보았으나,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유찬의 땀방울은 하염없이 흘러 땅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내가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났었다니!’이유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맴도는 충격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남자가... YS그룹의 대표였다니!’‘이럴 수가!’ ‘외부에서는 윤 대표님의 남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량배라는 소문이 도는데, 어떻게 YS그룹의 대표님일 수 있는 거지?’ 이 사실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이유찬은 어떻게든 이서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윤 대표님, 저는 번역팀의 직원입니다. 대표님께서 저를 모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전에 민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하지만 MH그룹이 이서의 손에 넘어간 후, 배척을 당해 일개 직원이 되었고, 회사에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저한테 무슨
“궁금한 게 있다면 저한테 직접 물어보시죠.”이유찬은 지환의 얼굴을 보면서 무서운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별거 아닌 질문이라면, 우리 두 사람은 이만 가보겠습니다.”이 말을 마친 지환은 이서를 끌고 파티장으로 갔다. 이유찬은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벌벌 떨었다. 왠지 더는 윤씨 그룹에 머물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찬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하지만 막 아래층에 다다른 찰나, 한 사람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이유찬 씨, 맞으십니까?” “무슨 일이시죠?”이유찬이 불안에 떨며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단지 하 대표님의 신분을 알아봤을 뿐이야. 설마 나를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할 작정이겠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이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단지 저희 대표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을 뿐이니까요.”이천은 이유찬의 멱살을 잡고 차로 데리고 갔다. 그가 울부짖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위층.상언이 잔을 들고 지환의 곁으로 가서 물었다.“우울해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방금 누군가가 나를 알아봤어.”지환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긴장한 상언이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이서도 알아?” 그는 곧장 이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조하며 웃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네. 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지환이 고개를 돌려 이서의 방향을 바라보았다.“이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그게 무슨 말이야?”“방금 그 사람은 내 과거를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후에도 내 과거를 추궁하지 않았지. 오히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눈치였어. 그 이유가 뭐였을 것 같아?” 상언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자신이 기억을 잃은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는 거야?” 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환이 고개를 들어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달이 이서
“하지만 하은철을 죽이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야. 일단, 하은철은 하씨 가문의 권력자잖아. 그런 사람의 죽음은 분명히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야. 혹시라도 네가 한 짓인 게 알려지면...” “설령 네가 한 짓인 걸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은철은 얼마 전까지 이서와 미친 듯이 대립했잖아. 이런 상황에서 하은철이 죽으면, 모두가 이서를 의심할 거야.” 지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상언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리고, 하도훈이 네 손에 소중한 아들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만 볼까?” “그 사람은 하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을 동원해서라도 하은철은 보호하려 할 거야.” “그리고 네가 이미 모든 어둠의 세력 조직원을 H국으로 파견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즉, 단기간에 하은철을 죽이려는 건 헛된 꿈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지.”“그렇긴 하지.”지환도 이 점을 똑똑히 생각할 수 있었다.“하지만 첫 번째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진짜 큰 문제는 두 번째 문제인데, 하은철을 죽이려면 확실히 모든 정력을 쏟아야 할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기회가 부족해.” “기회만 된다면, 반드시 죽여버릴 텐데!” “네가 이미 마음을 굳힌 거라면, 나도 함부로 말할 수 없겠네. 그냥... 하루빨리 네 계획이 성공하기를 바랄게.”“고맙다, 상언아.” 파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지환은 마침내 이서의 곁으로 돌아왔다. 부하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축하의 말을 하던 그녀는 그제야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이 사람들, 말을 정말 잘해요. 왜 이전에 회의할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요?” 이서가 지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원래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돌아오자마자 회사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미 소희 씨가 잡힌 것 같으니까, 우리는 이만 가보자.” 지환이 이서에게 기대며 낮게 속삭였다. “기분이 좋은 것 같네요?”이서가 지환을 보며 궁금해했다.‘왜 기분이 좋은 거지?’ 본래 잘생긴 얼
지환은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이서는 두 걸음 정도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왜요,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요?”“이서야.”지환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자,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지환 씨의 의견에 따를 테니까요.” “나는 지환 씨의 신분이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 게 아니었다면, 방금 그 직원을 붙잡고 물어봤겠죠, 도대체 어디서 지환 씨를 만난 거냐고요.” 지환의 팽팽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지환 씨는 지금이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환 씨의 신분을 모르기만 하면, 우리가 영원히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내가 지환 씨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이런 행복은 깨질지도 모르죠.”“그래서 이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비록, 속이 상하긴 하지만요.” 지환은 이서의 말을 듣고서야 완전히 안심했다. “이서야...”“자, 어서 가요.”이서가 여전히 회사 직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저 노련한 여우들은 소희 씨한테 흥미를 잃으면, 다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 “빨리 이 틈을 타서 도망가야 해요.”지환이 이서의 손을 잡았다.“그래, 어서 가자.” 두 사람은 붐비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갔고, 이내 파티장을 빠져나와 도롯가로 내려왔다. 마침내 접대에서 벗어난 이서가 기쁘게 웃었다. 바로 이때, 하나와 상언은 호텔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소희는?”이서의 뒤에 소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하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소희 씨는 아직도 회사 사람들한테 잡혀 있어.”하나는 더욱 궁금해졌다.“왜 회사 사람들한테 잡혀 있는데?” “심씨 가문이 더 이상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소희 씨거든. 그 노련한 여우들은 소희 씨가 어떤 방법으로 심씨 가문 사람들을 설득했는지 궁금해했어.” “소희 씨는 그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어서 자신이 심동의 여동생이고, 심
“아무것도 아니야.”지환이 빙그레 웃었다.‘내가 움직일 때가 왔구나.’ 이서가 잠시 지환을 바라보다가 상언과 하나에게 말했다.“그럼 우린 가볼게요, 내일 봐요.” “내일 만나요.”네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다음날.어제 마지막으로 귀가한 소희는 회사에 도착했을 때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서 언니, 어제는 너무 했어요, 저를 버리고 갔잖아요.” 이른 아침, 소희는 이서의 사무실에서 물을 마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소희 씨가 심 대표님의 딸이라는 걸 안 이상, 어떻게 그냥 보내줄 수 있겠어?” 심씨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소희의 얼굴색이 약간 어두워졌다.“왜 그래? 심 대표님이 찾아오기라도 하신 거야?”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애초에 제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건,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심 대표님 내외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약속을 지키라고 말씀하러 오신 거였죠.” 사실,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상대하기를 포기한 이유는 지환 때문이었다.하지만 심근영 부부는 소희가 여전히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심씨 가문이 윤씨 그룹을 향한 압박을 멈추고, 대립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그 이유였다. 소희는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었으나, 심씨 가문이 자신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 어린 태도에는 계산적인 면모도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명문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서가 소희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소희 씨는 어떻게 생각해?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혹시라도 소희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소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서 언니,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아요. 심씨 가문과의 협상을 마친 이상, 저는 약속한 대로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해요.”“앞으로는 언니와 함께 일할 수 없을지라도요.” 이서가 소희를 아련하게 바라보
“...”“할 일 그렇게 없어요?”갑자기 나타난 이서가 하릴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나무랐다.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서의 시선이 아주 잠시 소희의 사무실로 향했지만,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같은 시각. 사무실 안의 심근영은 유리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누구를 상대해도 청산유수인 그는 늘 소희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20여 년 동안 실종된 딸에게는 진 빚이 많지 않겠는가. “소희야, 어제...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니?”소희가 침착하게 심근영을 바라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인 후, 그녀는 마음을 많이 내려 놓았다.“네, 충분히 생각해 봤어요. 약속대로 심씨 가문에서 지낼 생각이에요.” ‘약속대로’라는 말을 들은 심근영의 얼굴에 웃음이 굳어졌다.‘하긴,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난 아이니까 정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자신을 위로한 심근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돌아오겠다니 파티를 열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 할 테니까.” 소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파티는 하지 않았으면 해요.”“뭐?”심근영이 납득하지 못하고 물었다. “너무 떠벌리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저는... 아직 호칭도 바꾸지 못했는걸요.” 그녀는 차마 심근영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심근영이 속눈썹을 늘어뜨렸다.“소희야, 쉽게 네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한다. 너한테는 심히 당황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심씨 가문에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파티는 열어야 해.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떡하니.” 심근영을 바라보던 소희는 어젯밤 파티에서 만난 고위층들을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거절할 뻔했다. “물 한 잔 드시겠어요? 준비해 드릴게요.” 심근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희는 그제야 일어나 떠났다. 그가 떠나자, 심근영은 소희의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그렇지 않다면, 왜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겠는가![소희 씨, 듣고 있어요?]다시금 지환의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그제야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형부가 현태 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신 거구나!’ “하... 아니, 형부, 웬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심 대표님이 소희 씨를 찾아갔다던데, 정말 심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지환이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네, 형부가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다니, 제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소희가 단번에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자, 지환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심씨 가문이 소희 씨를 위한 파티를 열겠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거까지 예측하다니!’소희는 지환의 예리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시겠대요. 하지만 저는 파티를 열고 싶지 않아요.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윤씨 그룹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파티까지 연다면, 심씨 가문 내에서도 저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까 파티를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소희가 말했다. [아니요, 파티는 꼭 열어야 해요.]지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왜요?”소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파티를 열든 안 열든, 형부랑 무슨 상관이지?’ ‘형부와 심씨 가문의 원한은 심씨 가문이 이서 언니를 향한 압박을 풀면서 끝났던 거 아닌가?’ [분명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거까지 알 필요는 없어요. 소희 씨, 하나만 물을게요. 이서를 믿어요?]소희가 무의식중에 이서를 한번 보았다. “그럼요, 당연히 이서 언니를 믿죠.” [그 말인 즉슨, 이서의 결정이라면 뭐든 따르겠다는 거네요, 그렇죠?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