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저희는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세요?”“제가 아니라 마이클 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에요.”“마이클 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다니...”하나가 자리에 앉았다.“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바로 이때, 혼비백산하여 걸어오는 소희가 보였다.하나가 즉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소희야, 너 왜 그래?” 소희가 어렴풋이 고개를 들어 하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 아까 왔을 때는 다 같이 있는 줄 몰랐는데?”“이서를 데리고 검사하러 다녀왔어.’하나가 문어귀로 걸어가 소희의 손을 잡았다.“소희야,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이야.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야.”소희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동자로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나는 조급해졌다.“소희야, 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돼 죽겠단 말이야!” 소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언니, 나... 이제 어떡해? 어떻게 하냐고, 엉엉.” 하나는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소희의 감정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소희야, 대체 무슨 일이야?” 소희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아내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내가... 심근영 회장님의 딸이래.” 순간, 하나의 안색이 변했다.“누가 그래?” “최미영 팀장님이 주신 자료에 쓰여 있었어.”그 자료는 이서가 최미영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회사의 모든 자료가 소희의 손을 거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소희는 자신이 심근영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 자료, 진짜야? 확실한 거냐고!” “이미 최미영 팀장님께 여쭤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사실이라고 하셨어. 어쩐지 요즘 심근영 회장님 부부가 빈번히 내 앞에 나타나고, 장희령이 나를 겨냥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부 다...
잠시 후, 소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하나를 스쳐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이서 언니는 어떻게 됐어?” “계속 혼수상태지, 뭐.”하나의 시선이 이서에게 떨어졌다.“지금으로서는 이서가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 “이게 다 장희령 때문이야!”소희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맞아, 그 여자가 이서 앞에서 결혼 이야기만 꺼내지만 않았더라면, 이서가 자극받아서 기절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장희령,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지난번에 이서를 만났을 때도 일부러 형부의 가면을 벗기려 했다고 들었거든.” “물론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야.” “나도 안 믿을 거야!”소희의 눈동자에 서린 증오가 더욱 깊어졌다.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지 않아? 이서는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행복에 겨운 장희령은 심동과 결혼한다잖아!” 하나가 모든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하나 언니.”소희가 코를 훌쩍였다.“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우리가 정의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나가 불안하다는 듯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소희야, 절대 바보 같은 짓은 하면 안 돼.”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하나 언니, 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회사로 돌아가 볼게.” “그래.하나가 그녀를 문어귀까지 바래다주었고, 불안하다는 듯 재차 일깨워주었다.“소희야,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면 안 돼, 알겠지?”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아래층에 다다른 그녀는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바로 심근영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번 뵙고 싶습니다.” 그녀는 심근영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으며, 주소와 시간을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30분 후, 그녀는 찻집에 나타났다.그러나 심근영 부부는 그녀보다 더 일찍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이 그녀를 보자마자 빙그레 웃으며 무엇을 먹을지 물었다. 소희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룸에는 조용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에야 심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소희야, 네가 먼저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그런 거 아니에요!”소희는 생각하지도 않고 부인했다.심근영 부부의 얼굴에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괜찮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있어. 단번에 우리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겠지.”“하지만 소희야, 우리에게도 기회를 다오. 네가 지난 20년간 겪은 고통을 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다오...”“그래도 싫습니다.”소희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장희령 씨가 알면 얼마나 기분 나빠 하겠어요?” 심근영이 이지숙과 눈을 마주쳤다.“희령이가 왜...?” 두 사람이 확실히 모른다고 생각한 소희가 일부러 말했다.“두 분, 모르셨어요?” “뭐를?”“저희 엄마가... 제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동생마저 학대했다며 고소했던 일, 알고 계시죠?”“알다마다.”두 사람이 마늘을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장희령 씨가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었어요. 제 예상이 맞다면, 제가 두 분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저를 겨냥한 걸 거예요.” “구체적인 목적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소희가 조롱하며 말했다.“아직 심씨 가문에 돌아가지도 않은 저를 그렇게 겨냥했다고요!” “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간다면, 그 여자가 저의 새언니가 되는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저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할 수 없네요!” 심근영 부부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네 양어머니에 관한 일이... 희령이가 조종한 일이라고? 그게 정말이니?”“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시면 되겠네요.” “저희 엄마가 묵는 곳이 보안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심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었어요.” “장희령 씨라는 배후가 없었다면, 저희 엄마가 그렇게 고급스러운 호텔에 묵을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저희 엄마가 받은 돈이 장희령 씨의 매니저의 계좌에서 입금된 거더라고요.”“그러니까...”소희는 더 이상 말을
소희는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을 찾았다.하지만 심동을 기다리는 동안, 심근영 부부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색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2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친부모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색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소희가 무료하게 호텔 입구를 지키던 그때, 심동과 장희령이 나타났다. 소희를 본 장희령은 조금 놀랐다.“소희 씨가 왜 여기 있지?” 심동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에게 전화를 건 심근영은 함께 식사하자고 했을 뿐, 소희가 밥을 사는 것이라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장희령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소희 씨가 어머님 아버님께 식사를 대접하면서 심동 씨를 불러내려고 한 게 틀림없어.” “물론 화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윤이서 말이야,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대. 그래서 그 화물들은 아직 H시의 고속도로에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나 봐.” 장희령이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소희 씨가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든, 절대 들어주지 마.” “걱정하지 마.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딸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 말을 들은 장희령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심씨 가문 며느리로서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르고 있구나?’소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표정을 알아차린 장희령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어느 순간부터 소희의 얼굴에서 이서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윤이서!’ 이서를 생각한 장희령이 또 이를 갈았다.‘혼수상태에 빠진 주제에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니!’ 그녀가 심동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자기야, 먼저 들어가. 소희 씨랑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심동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응.” 그는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룸의 문이 서서히 닫히자, 장희령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소희의 앞으로 걸어
“아니요, 틀렸어요.”소희가 검지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제가 밥을 사는 이유는 장희령 씨를 위한 거였어요.” “날 위한 거라고요?”장희령은 이해하지 못했다.“왜죠?” “장희령 씨한테 식사를 대접하지 않으면, 장희령 씨의 실망한 표정을 감상할 기회가 없잖아요?” “내가 왜 실망한다는 거예요?”장희령은 갈수록 영문을 몰랐다. “왜냐하면 곧 장희령 씨의 결혼이 없던 일이 됐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요!” 그 순간, 장희령의 온몸이 흠칫 떨렸다.“뭐라고요?”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허, 말도 안 돼. 바로 내일이 나와 심동 씨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에요. 심소희 씨, 내가 그깟 농담을 믿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심소희 씨가 뭔데 내 결혼식을 좌지우지한다는 거예요?!” “심씨 가문의 친딸이라는 건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는 거예요?”소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장희령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소희가 몸을 돌려 룸 쪽으로 걸어갔다.“식사가 끝나면, 두 분께서 이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해주실 거예요.” 장희령은 온몸이 떨렸고,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 그녀가 소희의 머리채를 잡았다.뒤통수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느낀 소희가 즉시 몸을 돌려 장희령과 맞붙었다.이서를 떠올리자, 온몸에 힘이 가득 차는 듯했고, 이내 장희령을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바로 이때, 룸에 있던 세 사람이 인기척을 듣고 뛰어나왔다. 그들을 발견한 장희령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희망이 스쳤다. 마치 생명의 지푸라기를 본 것처럼 말이다.“자기야, 나 좀 살려줘... 소희 씨는 미쳤어, 완전히 미쳤다고!” 심동이 아픈 마음으로 소희를 밀쳐냈다.남자의 힘은 매우 강력한 법이다. 게다가 힘을 조절하지 않은 탓에 소희는 휘청거리다가 난간에 부딪힐 뻔했다.다행히 심근영이 재빠르게 소희를 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겪은 심근영도 밥 먹을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 우리는 다음에도 밥 먹을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네 얼굴의 상처는...”심근영이 걱정하며 말했다.“우리랑 같이 병원부터 가자꾸나.” “정말 괜찮아요. 저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대접해 드릴게요.” 소희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장희령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장희령이 이서 언니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했어. 그러니까 나도 장희령이 가장 아끼는 걸 망가뜨린 거야!’ 이 사건으로 인해, 장희령은 신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심씨 가문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아무래도 심근영 부부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소희의 모습을 원치 않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이렇게 생각한 장희령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내가 한평생 꿈꿔온 순간이 심소희 때문에 다 망가졌어!’ 소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심근영이 심동에게 소리쳤다.“너, 당장 따라와!” 그가 장희령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심근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라도 따라오고 싶지 않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너 말고도 심씨 그룹을 짊어질 아들은 많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 심동이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장희령을 놓아주었다.“희령아, 나 먼저 가볼게.”그는 곧장 심근영 부부의 뒤를 따라갔다. 장희령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녀는 심씨 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심동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다. ‘내일이면 심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어!’ ‘그래, 하은철!’‘하은철이 나를 도와줄 거야!’ 하은철을 떠올린 장희령이 마지막 희망을 불태우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온몸에 남겨진 상처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가 있는 하씨 그룹으로 달려갔다. 같은 시각.하씨 그룹에도 음산한 구름이 드리워졌다. “그 주주들의 자
“예.”비서가 나가자, 하은철이 주경모에게 말했다.“가서 제대로 수색하세요. 살아 있다면 사람을, 죽었다면 시체라도 인양해야 합니다.” “작은 아빠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에요. 절대 도망가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지시를 받은 주경모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문을 열고 나온 주경모는 마침 마주 오는 장희령을 보았다.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얼떨결에 길을 비켜주며 그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무실 문이 닫히자, 하은철의 허벅지를 껴안은 장희령이 애절하게 말했다.“하 사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하 사장님의 도움이 없으면, 저는 끝장이에요!” 고개를 숙인 하은철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흉악한 두 눈동자를 마주한 장희령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사장님...”그녀는 한 순간에 할 말을 잊었다.“일부러 이서 앞에서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 윤이서를 언급할 줄이야.’장희령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는 그저 조만간 심동 씨와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야.’‘며칠 만에 결혼식이 파투 날 줄은 몰랐다고!’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다는 겁니까?” 장희령은 자신의 턱을 쥐고 있는 힘이 더욱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하, 하 사장님... 이 손부터 놓고 말씀하세요!” “허!”하은철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이서가 아직도 혼수상태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한사코 고개를 젓던 장희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렇게 된 이상, 이서의 곁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은철의 손은 이미 턱에서 목덜미로 옮겨졌다.겁에 질려 눈을 부릅뜬 장희령이 두 손을 흔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왜, 왜...” 머릿속을 메우는 공기는 희박해졌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애초에 그 남자의 가면을 벗기라고 한 것도 윤이서를 자극하기 위한 거였잖아요!”
병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하나가 애가 타서 상언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은 다 돌아왔는데, 어떻게 형부만 행방불명된 거냐고요!” “그럼 이제 이서는 어떡해요?”상언이 가볍게 하나를 껴안았다.“하나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미 어둠의 세력한테 수색작업을 시작하라고 했어요. 지환이는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하나는 그의 눈동자에 서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그 걱정은 도무지 설득력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꾹 참으며 말했다.“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형부를 데려와야 해요. 나중에라도 깨어난 이서가 형부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자극받을까 봐 걱정된단 말이에요.” “이서는 이제 어떤 자극도 받으면 안 돼요.”“그래요, 이서 씨는 하나 씨한테 맡길게요.”이 말을 마친 상언은 이천과 함께 지환을 찾으러 갔다.두 사람은 지환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이서의 속눈썹이 여러 번 떨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사실 혼수상태에 빠진 줄 알았던 이서는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는데, 되려 뇌는 고속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입을 벌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테이프로 눈과 입을 붙여버린 것만 같았다. 이서는 지환이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자신을 돌봐줬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힘을 내어 눈을 뜨려고 했다.이것은 물론 그가 잘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그 힘은 마치 산과 같아서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뇌는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머릿속에서는 지환과의 깜짝 결혼과 연애의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하지만 하경철이 지환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모든 기억이 끊겼으며, 그와의 만남에서부터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하경철이 지환을 만나려 할 때마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처음의 기억으로 튕겨 나갔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