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에는 조용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에야 심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소희야, 네가 먼저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그런 거 아니에요!”소희는 생각하지도 않고 부인했다.심근영 부부의 얼굴에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괜찮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있어. 단번에 우리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겠지.”“하지만 소희야, 우리에게도 기회를 다오. 네가 지난 20년간 겪은 고통을 보상할 수 있는 기회를 다오...”“그래도 싫습니다.”소희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장희령 씨가 알면 얼마나 기분 나빠 하겠어요?” 심근영이 이지숙과 눈을 마주쳤다.“희령이가 왜...?” 두 사람이 확실히 모른다고 생각한 소희가 일부러 말했다.“두 분, 모르셨어요?” “뭐를?”“저희 엄마가... 제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동생마저 학대했다며 고소했던 일, 알고 계시죠?”“알다마다.”두 사람이 마늘을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장희령 씨가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었어요. 제 예상이 맞다면, 제가 두 분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저를 겨냥한 걸 거예요.” “구체적인 목적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소희가 조롱하며 말했다.“아직 심씨 가문에 돌아가지도 않은 저를 그렇게 겨냥했다고요!” “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간다면, 그 여자가 저의 새언니가 되는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저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할 수 없네요!” 심근영 부부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네 양어머니에 관한 일이... 희령이가 조종한 일이라고? 그게 정말이니?”“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조사해 보시면 되겠네요.” “저희 엄마가 묵는 곳이 보안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심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었어요.” “장희령 씨라는 배후가 없었다면, 저희 엄마가 그렇게 고급스러운 호텔에 묵을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저희 엄마가 받은 돈이 장희령 씨의 매니저의 계좌에서 입금된 거더라고요.”“그러니까...”소희는 더 이상 말을
소희는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을 찾았다.하지만 심동을 기다리는 동안, 심근영 부부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색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2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친부모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색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소희가 무료하게 호텔 입구를 지키던 그때, 심동과 장희령이 나타났다. 소희를 본 장희령은 조금 놀랐다.“소희 씨가 왜 여기 있지?” 심동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그에게 전화를 건 심근영은 함께 식사하자고 했을 뿐, 소희가 밥을 사는 것이라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장희령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소희 씨가 어머님 아버님께 식사를 대접하면서 심동 씨를 불러내려고 한 게 틀림없어.” “물론 화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윤이서 말이야,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대. 그래서 그 화물들은 아직 H시의 고속도로에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나 봐.” 장희령이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소희 씨가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든, 절대 들어주지 마.” “걱정하지 마.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딸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 말을 들은 장희령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심씨 가문 며느리로서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모르고 있구나?’소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표정을 알아차린 장희령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어느 순간부터 소희의 얼굴에서 이서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윤이서!’ 이서를 생각한 장희령이 또 이를 갈았다.‘혼수상태에 빠진 주제에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니!’ 그녀가 심동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자기야, 먼저 들어가. 소희 씨랑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심동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응.” 그는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룸의 문이 서서히 닫히자, 장희령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소희의 앞으로 걸어
“아니요, 틀렸어요.”소희가 검지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제가 밥을 사는 이유는 장희령 씨를 위한 거였어요.” “날 위한 거라고요?”장희령은 이해하지 못했다.“왜죠?” “장희령 씨한테 식사를 대접하지 않으면, 장희령 씨의 실망한 표정을 감상할 기회가 없잖아요?” “내가 왜 실망한다는 거예요?”장희령은 갈수록 영문을 몰랐다. “왜냐하면 곧 장희령 씨의 결혼이 없던 일이 됐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요!” 그 순간, 장희령의 온몸이 흠칫 떨렸다.“뭐라고요?”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허, 말도 안 돼. 바로 내일이 나와 심동 씨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에요. 심소희 씨, 내가 그깟 농담을 믿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심소희 씨가 뭔데 내 결혼식을 좌지우지한다는 거예요?!” “심씨 가문의 친딸이라는 건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는 거예요?”소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장희령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소희가 몸을 돌려 룸 쪽으로 걸어갔다.“식사가 끝나면, 두 분께서 이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해주실 거예요.” 장희령은 온몸이 떨렸고,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 그녀가 소희의 머리채를 잡았다.뒤통수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느낀 소희가 즉시 몸을 돌려 장희령과 맞붙었다.이서를 떠올리자, 온몸에 힘이 가득 차는 듯했고, 이내 장희령을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바로 이때, 룸에 있던 세 사람이 인기척을 듣고 뛰어나왔다. 그들을 발견한 장희령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희망이 스쳤다. 마치 생명의 지푸라기를 본 것처럼 말이다.“자기야, 나 좀 살려줘... 소희 씨는 미쳤어, 완전히 미쳤다고!” 심동이 아픈 마음으로 소희를 밀쳐냈다.남자의 힘은 매우 강력한 법이다. 게다가 힘을 조절하지 않은 탓에 소희는 휘청거리다가 난간에 부딪힐 뻔했다.다행히 심근영이 재빠르게 소희를 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겪은 심근영도 밥 먹을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 우리는 다음에도 밥 먹을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네 얼굴의 상처는...”심근영이 걱정하며 말했다.“우리랑 같이 병원부터 가자꾸나.” “정말 괜찮아요. 저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대접해 드릴게요.” 소희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장희령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장희령이 이서 언니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했어. 그러니까 나도 장희령이 가장 아끼는 걸 망가뜨린 거야!’ 이 사건으로 인해, 장희령은 신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심씨 가문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아무래도 심근영 부부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소희의 모습을 원치 않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이렇게 생각한 장희령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내가 한평생 꿈꿔온 순간이 심소희 때문에 다 망가졌어!’ 소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던 심근영이 심동에게 소리쳤다.“너, 당장 따라와!” 그가 장희령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심근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라도 따라오고 싶지 않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너 말고도 심씨 그룹을 짊어질 아들은 많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 심동이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장희령을 놓아주었다.“희령아, 나 먼저 가볼게.”그는 곧장 심근영 부부의 뒤를 따라갔다. 장희령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녀는 심씨 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심동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다. ‘내일이면 심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어!’ ‘그래, 하은철!’‘하은철이 나를 도와줄 거야!’ 하은철을 떠올린 장희령이 마지막 희망을 불태우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온몸에 남겨진 상처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가 있는 하씨 그룹으로 달려갔다. 같은 시각.하씨 그룹에도 음산한 구름이 드리워졌다. “그 주주들의 자
“예.”비서가 나가자, 하은철이 주경모에게 말했다.“가서 제대로 수색하세요. 살아 있다면 사람을, 죽었다면 시체라도 인양해야 합니다.” “작은 아빠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에요. 절대 도망가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지시를 받은 주경모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문을 열고 나온 주경모는 마침 마주 오는 장희령을 보았다.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얼떨결에 길을 비켜주며 그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무실 문이 닫히자, 하은철의 허벅지를 껴안은 장희령이 애절하게 말했다.“하 사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하 사장님의 도움이 없으면, 저는 끝장이에요!” 고개를 숙인 하은철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흉악한 두 눈동자를 마주한 장희령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사장님...”그녀는 한 순간에 할 말을 잊었다.“일부러 이서 앞에서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 윤이서를 언급할 줄이야.’장희령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는 그저 조만간 심동 씨와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야.’‘며칠 만에 결혼식이 파투 날 줄은 몰랐다고!’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다는 겁니까?” 장희령은 자신의 턱을 쥐고 있는 힘이 더욱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하, 하 사장님... 이 손부터 놓고 말씀하세요!” “허!”하은철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이서가 아직도 혼수상태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한사코 고개를 젓던 장희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렇게 된 이상, 이서의 곁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은철의 손은 이미 턱에서 목덜미로 옮겨졌다.겁에 질려 눈을 부릅뜬 장희령이 두 손을 흔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왜, 왜...” 머릿속을 메우는 공기는 희박해졌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애초에 그 남자의 가면을 벗기라고 한 것도 윤이서를 자극하기 위한 거였잖아요!”
병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하나가 애가 타서 상언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은 다 돌아왔는데, 어떻게 형부만 행방불명된 거냐고요!” “그럼 이제 이서는 어떡해요?”상언이 가볍게 하나를 껴안았다.“하나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미 어둠의 세력한테 수색작업을 시작하라고 했어요. 지환이는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하나는 그의 눈동자에 서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그 걱정은 도무지 설득력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꾹 참으며 말했다.“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형부를 데려와야 해요. 나중에라도 깨어난 이서가 형부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자극받을까 봐 걱정된단 말이에요.” “이서는 이제 어떤 자극도 받으면 안 돼요.”“그래요, 이서 씨는 하나 씨한테 맡길게요.”이 말을 마친 상언은 이천과 함께 지환을 찾으러 갔다.두 사람은 지환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이서의 속눈썹이 여러 번 떨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사실 혼수상태에 빠진 줄 알았던 이서는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는데, 되려 뇌는 고속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입을 벌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테이프로 눈과 입을 붙여버린 것만 같았다. 이서는 지환이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자신을 돌봐줬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힘을 내어 눈을 뜨려고 했다.이것은 물론 그가 잘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그 힘은 마치 산과 같아서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뇌는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머릿속에서는 지환과의 깜짝 결혼과 연애의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하지만 하경철이 지환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모든 기억이 끊겼으며, 그와의 만남에서부터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하경철이 지환을 만나려 할 때마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처음의 기억으로 튕겨 나갔다. 영원히
간호사가 말했다.“임 선생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네요.”임현서는 이서의 주치의였다. 그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하나가 곧바로 말했다.“네, 바로 나갈게요.” 하나는 곧 간호사의 뒤를 따라 임현서의 사무실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나자마자, 병실 입구에는 우뚝 솟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문을 열고 병실 안의 이서에게 향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이서를 본 그가 마스크를 벗었다.만약 이서가 지금 눈을 뜰 수 있다면, 눈앞의 사람이 하은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은철이 이미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이서야, 내가 왔어.”그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밀려오는 역겨움을 느꼈다. 혼신을 다하여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말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들을 수 있으니까 당장 꺼져!’“내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거든.” “아, 물론 너한테는 나쁜 소식일 거야.”여기까지 말한 하은철이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화가 난 이서는 그에게 주먹을 두 번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역시나 하은철이 입을 열었다.“네 남자, 즉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던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겠다고 했지? 그런데 어쩌나? 그 사람,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하하하, 이 말이 들린다면, 화가 나서 나를 때리고 싶겠지? 하하하!”이서는 확실히 이렇게 생각했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하은철은 이서의 눈꺼풀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이서야, 차라리 일어나서 나를 때려. 지금처럼 혼수상태인 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예전에는 네가 내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혼수상태여도 좋겠다고 생각했어.”“하지만 하지환이 죽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어. 혼수상태인 네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아.” “차라
이때, 문을 밀고 들어온 하나가 이서의 몸에 엎드린 하은철을 보았다. 그녀는 화가 나서 병실 입구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들고 그를 내려쳤다.“하은철, 이 변태 새X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하은철은 방금 이서에게 주먹을 맞아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에게 등을 얻어맞자,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하나가 들고 있는 빗자루를 빼앗아 그녀를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분노가 극에 달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은철, 뭐 하는 짓이야?!” 이서가 허약한 몸을 이끌고 하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녀의 냉랭한 눈빛은 하은철을 응시하고 있었다.“왜, 전에는 내 신장을 가져가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내 친구를 괴롭히려는 거야?” 하은철은 멍해졌다. 하나는 모든 주의력을 이서가 깨어났다는 것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이서야, 깨어났구나! 정말 잘 됐어. 넌 모르겠지만...” 하은철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쁨의 기색이 흘렀다.“벌써 전부 생각난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 외에도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동안 그가 벌인 수많은 짓은 이서와 지환을 갈라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서가 모든 걸 기억하다니!’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웃음거리가 된 셈이잖아?’ “내가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이서는 하은철이 자신의 볼에 남긴 입맞춤을 생각하자, 피부를 갈기갈기 벗겨 버리고 싶었다.“분명히 경고하는데,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여기서 나가!!” 이 말을 들은 하은철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너... 다 생각났어? 전부 다 생각난 거야?” 그의 눈동자에 스친 끈질긴 집착을 본 이서가 하나를 감싸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인상을 찌푸렸다.“하은철, 제발 적당히 좀 해. 여기는 병원이야! 네가 아무리 하씨 가문의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죽인다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